< 201. 누굴까 >
그런 재혁의 말에 과르다도는 쓰게 웃었다.
경기 중에 흘린 그 짧은 한 마디를 기억하곤 대답해오는 모습이라니.
역시 이 녀석은 보통내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과르다도는 여전히 미소를 떠올린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다가 솔직한 감상을 풀었다.
“그러게. 정말 네 말대로 됐군. 마치 마술쇼라도 본 기분이야. 지금도 내 머리론 도저히 어떻게된 일인지 이해할 수가 없거든.”
“그런 말씀을 하셔도 안 알려드려요. 마술사에게 트릭은 밥줄이잖아요? 밥줄을 허무하게 털어놓을 순 없죠.”
“그것도 그렇겠어. 하지만 이건 괜찮겠지?”
손으로 입고 있는 유니폼을 가리키며 과르다도가 물었고, 그게 무슨 의미인지 바로 파악한 재혁은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인 후 입고 있던 유니폼을 벗어주었다.
그렇게 과르다도의 유니폼과 교환을 한 재혁이 몸을 일으켰고, 과르다도와 서로 고생했다며 가벼운 포옹을 나누었다.
“이걸로 한국은 1승 1패인가. 어떻게든 올라왔군.”
“멕시코는 1무 1패죠? 그래도 아직 희망이 남아있긴 하네요. 쉽진 않겠지만 말예요.”
“우리는 스웨덴, 너희는 독일이라. 같이 올라가려면 서로 다음 경기에서 좋은 결과를 기대해야겠어.”
“우린 이길 거에요. 그리고 올라갈 거죠.”
“상대가 독일인데도?”
“상대가 누구든 상관 없어요. 올라가려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거니까요. 설령 우리가 99% 질 거라고 말해도 1%의 가능성이 있으면 달려야죠. 멕시코는 아닌가요?”
“!”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재혁이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고, 그런 재혁의 대답에 과르다도의 눈이 커졌다.
사실이 그랬으니까.
올라가려면 이겨야 한다.
설령 그 가능성이 희박하더라도 말이다.
그 간단하지만 찾기 어려운 진리를 재혁이 너무도 쉽게 말한 것에 과르다도는 잠시 눈을 감았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우리도 이길 거다. 그럼 서로 힘내보자.”
“네. 고생하셨어요.”
툭, 그렇게 마지막으로 주먹을 교환한 둘이 멀어졌다.
***
찰칵, 찰칵, 찰칵!
카메라 셔터음이 벌써 수십 차례는 울렸으나, 그 소리는 그 뒤로도 끊어지지 않고 계속 울렸다.
분명 수십 장은 찍었을 것임에도 기자들은 그걸로도 부족했는지 아예 자동 셔터 모드를 켜놓고 사진을 찍어대고 있었고, 그런 기자들의 피사체인 임종철 감독은 뒷짐을 진 채로 목을 가다듬은 후 경기를 어떻게 지켜보았냐는 질문에 대답했다.
“어려운 경기였습니다. 전반전을 실점한 채로 끝낸 것도 문제였지만, 예상치 못 한 부상자가 발생하는 바람에 특히 곤란했었죠.”
“정영우 선수의 이탈이 분명 영향이 있었다는 말씀이시군요.”
“당연합니다. 정영우 선수도 우리와 함께 하는 23명의 선수들 중 하나니까요. 오늘 경기는 정영우 선수에게 있어서 그저 운이 없었다고 말해주고 싶군요.”
임종철 감독의 대답에 취재진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펜대를 움직였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후반전은 완벽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었어요. 전반전 내내 압도 되었던 것과 달리, 후반전은 분위기 반전에 성공했고, 중원에서의 플레이도 살아나기 시작했죠. 이 점을 감독님께선 어떻게 보셨나요?”
“선수들이 잘해줬습니다.”
“그걸로 끝인가요?”
“기자님께서 특별히 기대하신 대답이 있나요?”
“···예?”
“제가 이 이상 말을 하면 싫어하실 분들이 제법 계시거든요. 그래도 궁금하십니까?”
“그, 그게···.”
임종철 감독이 역으로 질문을 던지자 기자가 어색하게 말꼬리를 올렸다.
방금까지 나누던 대화와 너무도 다른 온도 차에 당황한 것이다.
그렇게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고, 이에 임종철 감독이 무언가 각오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전반전과 후반전의 가장 큰 차이가 뭐겠습니까? 경기를 지켜보신 모든 분들이 아실 겁니다. 바로 최재혁이죠. 정영우 선수가 부상으로 이탈한 중원을 최재혁 선수가 채워주면서 모든 게 바뀌었습니다. 이게 제가 구상하던 ‘하나’의 팀이었어요. 그런데 전 그 ‘하나’를 지금까지 만들 수 없었습니다. 아니, 어쩌면 이 ‘하나’는 이번 월드컵에서 존재하지 못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에 대해선 굳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이거까지 설명하기엔 말이 너무 복잡해질테니까요.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지금 이 자리에서 확실히 말하겠습니다.”
“···.”
“선수를 뽑는 건 전적으로 제 권한입니다. 혹시 실패한다면 그것 또한 제 책임입니다. 제 권한이 탐난다면, 직접 제 자리를 가져가십시오. 음흉하게 책임은 회피하면서 권한만 챙겨 사람을 허수아비로 부릴 생각을 하지 말고요. 늦은 시간까지 경기를 지켜보며 응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껜 감사드립니다. 이상입니다.”
“아, 잠깐만요! 가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나만 더 대답해주세요!”
말을 끝내며 자리를 떠나려는 임종철 감독을 한 기자가 붙잡았고, 그런 기자를 향해 슬쩍 고개를 돌린 임감독은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기자는 잔뜩 모여 있는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큰 목소리로 물었다.
“최재혁 선수를 뽑을 때 보여주신 감독님의 자신감은 최재혁 선수를 완벽히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말씀이신가요?”
“이해요?”
그런 기자의 질문에 잠시 생각에 잠겼던 임감독.
그는 곧 씨익 웃어보이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저는 재혁이를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신뢰하고 있는 거죠. 그 친구라면 반드시 해줄 거라고 믿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니까 이곳에 데려온 겁니다. 제 목을 걸고서.”
“그렇군요. 말씀 감사합니다. 그런데···, 최재혁 선수는 지금 어디 있나요? 최재혁 선수랑도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으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죠.”
“재혁이요?”
그런 기자의 말에 슬쩍 고개를 갸웃인 임감독.
그는 피식 실웃음을 흘린 후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간만에 가족 모임이라도 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
“재혁이 오빠다! 오빠, 여기야! 여기!”
“재혁이가 왔어? 어메. 고생했다, 고생했어!”
“하하. 고생은요. 국가대표로 올라갔으면 그정돈 뛰어야죠. 경기는 잘 보셨어요?”
“그랴. 잘 봤지.”
“자리가 좋아서 엄청 잘 보였어! 할머니도 재밌게 보셨고!”
“멀어서 잘 안보이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다행이네.”
샤워와 경기 후 미팅까지 끝내고 등장한 재혁을 재희와 할머니가 크게 반겼고, 재혁 또한 함박 웃음을 보이면서 둘에게 다가갔다.
그렇게 만나게 된 두 사람을 향해, 특히 할머니를 향해 재혁은 평소와 다르게 갖가지 질문들을 물었다.
불편하진 않으셨는지, 피곤하진 않으셨는지 같은 질문들을 말이다.
아무래도 직접 경기장에 모신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재혁 또한 걱정과 궁금한 점이 많았던 것이리라.
다만 그런 재혁의 질문들에 할머니는 연신 싱글벙글 웃어보이시면서 그저 손자가 대단했다고 말씀하셨다.
그게 원하던 대답들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할머니께 마침내 경기장에서 뛰는 모습을 보여드릴 수 있었다는 것에 만족한 재혁은 시계를 확인한 후 두 사람을 이끌었다.
감독님께서 가족들과 저녁까지 먹고 복귀하라고 허락해 주셨으니, 시간이 더 늦기 전에 둘을 데리고 식당으로 향하려던 것이다.
그렇게 택시를 잡아 탄 세 사람은 한적한 식당을 찾아 이동했고, 자리에 앉으면서 더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무래도 시즌 중엔 대부분의 시간을 영국에서 보내야 하는 재혁과의 자리였기에, 세 사람은 주어진 시간을 소중히하며 계속 이야기를 나눈 것이다.
그러던 중 재희가 무언가를 떠올리고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고 보니 우리 신기한 사람 봤다!”
“신기한 사람?”
“응. 오빠 뭐 잘못한 거 있어?”
“잘못한 거?”
신기한 사람과 잘못한 거라니.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가지에 대해 재희가 묻는 것에 재혁은 고개를 갸웃였고, 그런 재혁에게 재희가 좀 더 자세히 말을 풀었다.
“우리 옆자리에 백인 언니가 한 명 앉았었거든. 그런데 오빠를 알고 있더라고.”
“나를 아는 백인 여자가 경기장에 왔었어?”
“어. 그것도 엄청 미인! 살면서 그렇게 예쁜 사람 난 처음 봤어. 영화에 나오는 엘프인줄 알았다니까.”
짧지만 확실한 설명에 그게 누군지 바로 알아차린 재혁.
하지만 재혁은 애써 모른 척, 담담한 얼굴로 물을 삼켰고, 그런 재혁을 향해 재희는 계속해서 자신이 경험한 이야기를 신이 난 얼굴로 떠들었다.
“처음에 뛰는 11명을 발표하잖아? 그때 오빠가 없으니까 놀라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라고. 물론 나도 그랬고. 그래서 어색하게 눈이 맞아서 오빠에 대해 아냐고 물어봤지. 그런데 그 언니도 나한테 똑같은 걸 물어보더라?”
“그래? 그래서 뭐라고 했는데?”
“어? 음···, 그게···.”
이어지는 재혁의 질문에 골똘히 생각에 잠겼던 재희는 붉어진 뺨을 긁적이며 배시시 웃었다.
“아무래도 영어로 대화를 나누다보니 기억이 잘···, 에헤헤.”
“너 영어 성적 좋았잖아? 더 공부해야겠네.”
“회화랑 공부는 다르지! 에휴, 다를 건 알았지만 막상 경험해보니 조금 슬프더라고. 이번에 한국 돌아가면 회화도 따로 공부해보려고.”
“그래? 잘 생각했어. 외국어는 배울 수 있을 때 확실히 배워야지.”
“그러게. 가능하면 영어 말고도 다른 언어도 배우고 싶은데 이게 시간이···, 아니. 이게 아니지! 아무튼, 그 사람 오빠가 아는 사람이야?”
어쩌다 보니 공부 이야기로 빠질뻔 했던 것에 황급히 정신을 차린 재희가 재혁을 향해 다시 물었고, 재혁은 흐음, 입꼬리를 살며시 말아 올리면서 어깨를 으쓱였다.
“알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에이. 무슨 대답이 그래?”
“그런데 나한테 잘못 한 거 있냐고는 왜 물었어?”
“아, 그거. 오빠에 대해 아냐고 물어봤더니 갑자기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더라고. 그거 분명 화가 나서 그런 거잖아.”
“글쎄, 과연 그럴까?”
“뭔가 알고 있구나! 나도 알려줘!”
“너 하는 거 봐서.”
“이익, 할머니! 오빠가 궁금한 거 안 가르쳐주면서 괴롭혀요오!”
“여기서 갑자기 할머니를 끌어 들여? 이런 비겁한···.”
“오빠한테 보고 배운 게 이런 거 밖에 없거든?”
“허허, 남매가 싸우면 쓰나. 사이 좋게 지내야지.”
의도치 않게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된 저녁 식사.
하지만 그 분위기가 제법 마음에 들었기에 재혁과 재희, 그리고 할머니는 시종일관 미소를 떠올리며 음식을 먹었다.
그렇게 화기애애하게 식사를 끝낸 셋은 재희와 할머니가 묵고 있는 호텔로 향했고, 다음에 또 보자며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그 후 다시 택시에 몸을 실은 재혁.
그는 숙소로 향하다가 문득 미소를 떠올리며 휴대폰을 찾았다.
그렇게 케이트의 번호를 찾은 재혁은 짧은 문자를 작성해 그녀에게 보냈다.
다음엔 그냥 가지 말고, 같이 저녁을 먹자는 내용을 말이다.
재혁의 문자에 대한 케이트의 대답은 의외로 금방 왔다.
[···너 하는 거 봐서.]
“하는 거 봐서라···.”
케이트가 보낸 답장을 조용히 읊조린 재혁.
그는 몇 번이고 문자에 적힌 내용을 중얼거리더니 피식 실소를 흘리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어쩔 수 없이 또 이겨야겠네.”
***
[이변! 한국, 멕시코를 격파. 16강 진출에 청신호.]
[2대1, 각본 같았던 역전승! 위기를 기회로 만든 임종철 감독의 용병술이 빛을 발했다.]
[멕시코의 주장 과르다도, “마술사에게 당했다.”]
[최재혁의 마술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제 목표는 독일!]
한국과 멕시코의 경기가 끝이 난 다음 날, 인터넷은 온통 월드컵 이야기로 시끄러웠다.
전반전에 실점을 했을 때만 하더라도 패색이 짙다며 좌절하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의 기사들이 쉬지 않고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리고 기사에 달리는 댓글들도 간만에 좋은 경기 내용에 감동했다며 선수들을 향한 칭찬들이 줄을 이었다.
하룻밤 사이 제작된 여러 ‘짤방’들은 커뮤니티들을 나돌았고, 그 중에서도 재혁과 임감독에 관한 짤방들이 특히 인기가 많았다.
다름 아닌 역전승의 주역이 바로 그 둘이었으니.
사람들은 청소년 때부터 이어져 온 둘의 관계를 엮어 여러 이미지들을 제작한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축제를 즐기고 있던 건 아니었다.
[임종철 감독의 소신 발언, 과연 누구를 향한 화살이었는가?]
< 201. 누굴까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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