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5. 마음 가짐 >
당당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재혁이 제자리에서 몇 차례 뜀뛰기를 하자, 그런 재혁의 어깨에 손을 올리면서 등장한 강철우 코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준비 완료는 무슨. 아직이야. 발목은 회복된 것 같지만 2주 동안 체력 관리를 아예 못 했잖아? 이 상태론 30분, 아니. 10분도 제대로 못 버텨.”
“체력 관리를 하긴 했어요.”
“그래봐야 수중 훈련이었잖아. 그건 체력 관리가 아니라 회복 훈련이라고 하는 거지.”
“으음···.”
“너 오늘 붕대 풀었다. 그거 절대 잊지 마.”
강코치의 말에 딱히 반박할 말이 없어 뺨을 긁적인 재혁은 뚱한 얼굴로 입술을 비죽였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재차 물었으나···.
“그래도 이 상태면 내일 있을 스웨덴과의 경기에서···.”
“안 돼.”
“조커 역할로 10분 정도는···.”
“절대 안 돼.”
“그럼 3분···.”
“그냥 하루 더 붕대 감을래? 그래야 정신을 차리지?”
“···.”
이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자른 강코치는 팔짱을 단단히 낀 채로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는 진중한 눈빛으로 재혁을 바라보며 재차 말했다.
“이건 감독님도 확실히 마음을 정하신 부분이야. 네 몸이 정상 컨디션으로 회복될 때까진 절대로 출장시키지 않겠다고 말이지. 특히 네 성격에 얌전히 필드 위를 돌아다니지 않을 테니. 나았다고 생각했을 때 재발하면 정말 답도 없어. 그러니까 이번엔 얌전히 있자. 알겠지?”
“···네.”
예상은 했지만 강코치의 단호한 대답에 재혁은 풀이 죽었고, 알겠다고 답은 했으나 고개를 숙이고서 계속 툴툴거렸다. 그런 재혁을 빤히 내려보면서 강코치는 얕은 한숨을 뱉었다.
정말 저 성격은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는 구나, 라면서 말이다.
심하진 않았어도 몸을 쉬게 해줘야 할 부상을 겪었으면 본인을 위해서라도 잠시 동안은 축구장에서 멀어져도 괜찮을 것인데.
저렇게 뛰지 못 해 안달이라니.
‘그랬으니 지금의 실력을 키울 수 있었던 거겠지만.’
정말 여러 의미에서 독한 놈이라고 혀를 쯧쯧 차던 강코치는 큼큼, 목을 가다듬은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
“대신 네가 꼭 해줘야 할 일이 있으니까. 내일은 그 일을 똑바로 하도록 해.”
“제가 해야 할 일이요? 그게 뭔데요?”
“곧 알게 될 거야. 일단 늦기 전에 나가자. 그럼 김박사님, 다녀오겠습니다.”
방을 떠나기 전 김박사를 향해 고개를 꾸벅인 두 사람은 건물 밖으로 나왔고, 강코치가 택시를 찾는 것에 재혁의 고개가 크게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 목적지가 공항이라는 것에 또 한 번 고개를 갸웃인 재혁.
재혁은 갑자기 공항엔 왜 가냐고 코치에게 물었으나, 가보면 알거라는 말만 반복하면서 강코치는 눈을 감았고, 이해할 수 없는 대답에 뺨을 긁적이던 재혁도 코치를 따라 눈을 감았다.
그렇게 공항에 도착한 택시는 움직임을 멈췄고, 강코치의 뒤를 쫓아 내린 재혁은 연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얼굴에 떠오른 물음표를 지우지 못 했다.
‘곧 있으면 오후 훈련이 시작될 텐데. 오늘은 공을 가지고 훈련하나 했더니 뜬금없이 공항에···.’
“곧 나오시겠다. 준비해.”
“네? 누가요? 어···?”
게이트 문이 열리고 일단의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지기 시작했고, 그 무리를 강코치와 함께 지켜보던 재혁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설마···.
전혀 예상하지 못 한 사람들이 캐리어를 끌고서 천천히 통로를 따라 밖으로 빠져나왔기 때문에 입술을 끌던 재혁은 아직까지도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조심스레 발걸음을 옮기더니 목소리를 냈다.
“할머니! 재희야!”
“어, 오빠다!”
“으잉? 재혁이가 요까지 마중을 나왔어?”
상대인 할머니와 재희도 그런 재혁의 목소리를 기대하지 않고 있던 것인지 크게 놀란 얼굴로 재혁에게 다가왔고, 연신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와 재혁이가 요 있다냐! 아이구, 나랏일 때문에 디기 바쁠 건디···. 늙은 것이 괜히 와서 방해가 됐네.”
“아니에요. 전혀 아니에요 할머니. 어차피 저 당분간은 쉬어야 하는 걸요.”
“허유, 발목이 아직도 안 좋은가? 좀 보자, 보자···.”
“발목은 다 나았어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는 거죠.”
“진짜 다 나은 거 맞아? 오빠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진짜로 나은 거 맞아. 동생이란 게 믿진 못할망정 의심이나 하고 있네. 이래서 내가 마음 편히 다니겠냐?”
“어어, 때릴거야? 할머니, 오빠가 때리려 한대요!”
“하하, 남매가 만나자마자 싸우면 쓰나.”
“응? 차범수 아저씨도 계셨네요?”
“나는 덤 취급이냐?”
“농담이에요. 당연히 알아봤죠. 간만에 뵙네요. 잘 지내셨어요?”
“네가 다치지만 않았으면 더 좋을 뻔 했지. 기대가 컸는데 말이다. 참 아쉬워.”
“별 수 있나요. 프로 선수잖아요? 이정도로 끝났다는 게 전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그렇게 할머니, 재희에 이어 차범수까지 대화를 나눈 재혁은 코치를 찾았고, 강코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일은 그분들과 함께 특별석에서 경기를 지켜보도록 해. 감독님 명령이야.”
“일부러 배려해주시는 거예요?”
“뭐. 그렇기도 하고, 우리를 위한 배려이기도 하고. 벤치에 네가 앉아 있다간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그럴 바엔 아예 관중석으로 올려 보내자는 감독님의 생각이지.”
“벤치에 절 정말 앉히고 싶지 않으셨나보네요.”
“···.”
재혁의 한 마디에 딱히 반박하지 못 한 강철우.
그의 입술이 굳은 것은 실상이 그 반대였기 때문이리라.
그 누구보다 재혁이를 벤치에 앉히고 싶은 사람들이 바로 감독을 포함한 코칭 스태프들이었으니까.
재혁이라면 필요한 순간 무언가를 바꿔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팀을 위해, 선수를 위해, 그리고 ‘최고’의 선택을 내리기 위해서 그들은 스웨덴전에서 재혁의 존재를 아예 벤치에서 제외시킨 것이다.
월드컵 예선은 한 경기로 끝이 나는 게 아니니까.
그런 속마음은 애써 씹어 삼킨 강코치는 그럼 이동할 택시를 준비하겠다며 먼저 자리를 떠나려다가 함께 가자는 차범수의 말에 같이 움직이게 되었다.
그렇게 간만에 가족이 한 곳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고, 서로간의 안부를 주고 받던 세 사람.
다시 한 번 재혁에게 몸 상태는 멀쩡하다는 확답을 듣고나서야 안심할 수 있었던 할머니와 재희는 그제야 축구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길 수 있을 거 같아? 우리가 제일 약하다며?”
“언제는 강했나? 최선을 다해서 부딪쳐보는 거지.”
“흐음. 그렇구나. 그러면 오빠는 내일 경기 쉬는 거야?”
“아무래도 막 부상에서 회복한 참이니까. 난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감독님 선택이니 따라야지.”
“그래도 항상 조심해. 다치면 오빠만 손해야.”
“내 걱정은 말고, 네 걱정이나 해. 공부는 잘하고 있는 거지?”
“흐흐, 그거야 말로 쓸데 없는 걱정이지요. 지난 시험에서 무려 전교 5등을 하신 몸이야! 다음 목표는 4등이야.”
“기왕이면 1등을 목표로 하지 그래?”
“단계가 중요한 거야, 단계가.”
그렇게 자연스럽게 다시 가족 이야기로 돌아간 셋.
이후 한참을 떠들던 중 강코치가 택시를 잡았다며 그들을 불렀고, 택시에 세 사람을 태운 뒤 자신은 훈련장으로 갈테니, 재혁에게 푹 쉬고 천천히 돌아오라는 말을 전한 다음 자리를 떠났다.
이에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인 재혁은 할머니와 동생과 함께 호텔로 향했고, 체크인을 끝낸 후 근처 식당을 찾았다.
생소한 음식들이었지만 정말 맛있다며, 소스를 입가에 잔뜩 묻혀가며 먹고 있는 재희를 빤히 바라보던 재혁은 할머니가 가만히 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발견하고 혹시 입에 안 맞냐며 물었고, 이에 할머니는 흐뭇한 미소로 답했다.
“재혁이랑 이렇게 앉아서 밥을 먹는 게 얼마만이누···.”
“죄송해요. 제가 자주 찾아 뵈어야 했는데···.”
“아니다. 대장부가 해야 할 일이 있는데, 그라믄 못 써. 우리 신경쓰지 말고, 끝까지 집중해라. 알겄제? 나랏녹을 먹는 자리는 허투루 지내면 안되는 거여.”
“네. 알겠어요. 명심할게요.”
할머니와의 대화를 끝마치고 얼른 드시라며 할머니가 먹기 편하게 음식을 바른 재혁은 자기 접시에 포크질을 하면서 다짐했다.
할머니와 동생이 보러 온 이상, 결코 두 사람이 아쉬워할 모습을 보여주지 않겠다고.
그렇게 길었던 하루 해가 저물었고, 서늘한 아침 공기와 함께 새로운 날이 찾아왔다.
한국이 속해 있는 F조의 예선의 시작된 것이다.
***
“그냥 우리끼리 올 걸 그랬죠?”
“그러게 말이다. 재혁이 인기가 생각보다 대단한데? 허허, 나도 옛날엔 저랬는데 말야.”
특별 통로를 이용해 경기장 안으로 향하던 중 잠시 발을 멈춘 재희와 차범수는 멀찍이 서있는 재혁을 바라보며 웃었다.
처음엔 그를 알아본 팬들의 가벼운 사진과 사인 요청정도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외국인 기자가 한 명 붙었고, 한 명이었던 기자들의 숫자는 순식간에 대여 섯명으로 불어난 것이다.
재혁의 영어가 능숙하다는 이유 때문일까.
기자들의 질문과 재혁의 대답은 통로에서 만난 수준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심도가 깊었고, 그 탓에 간단한 인터뷰 자리였을 공간은 기자 회견장을 방불케 했다.
그렇게 몇 분이 더 지났고, 시간을 확인한 재혁이 이젠 가봐야겠다며 기자들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이에 고마웠다며 기자들도 자리를 정리했고, 다시 일행에 합류한 재혁이 머쓱하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죄송해요. 너무 오래 걸렸죠?”
“아니. 괜찮아. 그보다 이제 인터뷰에 능숙해진 걸 보니 마음이 놓이는 구나.”
“아무래도 그만큼 시달리다 보니 익숙해질 수 밖에 없더라고요.”
“하하, 그럴 수밖에 없지. 그러지 못하면 선수가 미쳐버리니 말야.”
선수 생활을 경험해본 사람들만 느낄 수 있는 공감에 둘은 웃었고, 이제 다시 출발하자는 말과 넷은 준비된 관중석으로 향했다.
그렇게 좌석에 도착하자 재혁은 바로 보이는 경기장을 내려보며 시선을 모았다.
필드 위엔 선수들과 함께 코칭 스태프들이 몸풀기에 한창이었다.
“경기장이 아닌 곳에 있으려니 어색하지?”
“조금은요. 역시 제가 지금 있을 자리는 여기가 아니라 저곳 같으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또 맞는 말도 아니지.”
재혁의 말에 진지한 어조로 대답하며 그의 옆을 차지한 차범수.
그는 재혁이 그런 것처럼 턱을 괴고 경기장을 내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자신이 어디에 있는 지에 대해 조급해 하면 안 돼. 오히려 냉정하게 판단할 줄 알아야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법이지. 하지만 선수로서의 마음 가짐과 승부욕 또한 잊어선 안되니까. 힘들겠지만 항상 그것들 사이에서 자신을 지킬 수 있도록 노력해. 오늘은 그걸 위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알고 있어요. 조언 감사해요.”
“그리고 오늘만큼은 선수가 아닌 관중으로 자리에 앉은 만큼, 되도록이면 마음 편히 경기를 지켜보자고.”
마지막 말을 미소와 함께 남기고 자리로 돌아간 차범수였고, 재혁 또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뒤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경기가 시작되었으나, 재혁은 차범수가 한 말처럼 마음 편히 경기를 지켜볼 수 없었다.
공이 잔디 위를 튕길 때마다 만약 자신이 저곳에 있었다면, 이라는 생각을 끊임없이 떠올렸고···.
철썩!
“아···!”
팀이 실점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보게 되었을 땐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탄식을 흘렸다.
재혁이 안타까워 했던 것처럼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팬들도 아쉬움에 진한 한숨을 토해냈으나, 그래도 아직 경기가 끝나려면 시간이 많이 남았다며 더욱 응원에 열을 올렸다.
허나 결국 점수를 뒤집는데 실패하고 경기는 그대로 끝이 나고 말았고, 첫 경기를 패배로 장식한 한국 선수들은 고개를 떨군 채로 경기장을 빠져나갔다.
재혁 또한 어두운 얼굴로 주심이 휘슬을 불기 무섭게 자리에서 일어나 락커룸이 위치한 1층으로 향했는데, 계단을 따라 이동하던 중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를 주워듣곤 침을 삼켰다.
“결국 최재혁은 벤치에도 못 앉았잖아? 본선에서 쓰지도 못 할 선수면 대체 왜 뽑은 거야?”
< 195. 마음 가짐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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