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94화 (194/225)

< 194. 준비 완료 >

다만 사네의 기대와 달리 그를 향한 목소리는 한국인 기자가 아닌,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사네. 거기서 뭐하고 있어? 우리 곧 출발할 거야. 얼른 돌아와.”

“아, 잠깐만요! 한 마디만 듣고 갈게요!”

“한 마디라니···.”

떠나겠다는 말에도 바로 오지 않고 어떻게든 대답을 듣겠다며 자리를 지킨 사네.

그런 사네를 지켜보던 선수들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월드컵이 피크닉 장소도 아니고. 너무 긴장을 안 하는 거 아냐?”

“그러게. 아무리 어려도 그렇지.”

“지금 대화하고 있는 상대 기자지? 괜히 이상한 소리나 안 했으면 좋겠는데···.”

“그래도 한 마디 정도면 괜찮지 않겠어? 게다가 아직 짐도 다 안 실었고. 1, 2분 정도 여유는 충분하잖아?”

다만 다른 동료들과 달리 사네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지켜보던 선수, 귄도안은 아마 사네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지금 신나게 좌우로 흔들리고 있을 거라며 피식 실소를 흘렸고, 그런 귄도안을 향해 동료들은 재차 고개를 저었다.

“소속팀 동료면 이럴 때 감싸지 말고 오히려 따끔하게 혼을 내. 나중에 더 큰일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맞아요. 월드컵은 장난이 아니라고요. 다들 진지한데 말예요.”

“사네도 진지한 거야.”

“진지한 거라고요? 저게?”

되묻는 동료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귄도안은 잔뜩 집중한 얼굴로 기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사네를 지켜보며 말을 이었다.

“월드컵 최종 예선전들과 평가전들에서 사네가 보여준 플레이는 솔직히 기대 이하였어. 그 날 경기가 끝나고 맨체스터로 함께 돌아올 때, 사네는 대표 선발 탈락을 각오하고 있었지. 그런데 사네는 오늘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있어. 그 이유가 뭐 때문인 거 같아? 바로 최재혁 때문이야.”

“최재혁이요?”

“최재혁이라면 분명 그 한국인 꼬마를 말하는 거죠? 같은 맨체스터 시티에 속해 있는···.”

“아마 여기에 있는 몇몇은 절대 잊지 못 할 이름이지.”

큭큭, 웃음을 흘리며 유벤투스와 바이에른 뮌헨에 속해 있는 동료들을 슬쩍 훑은 귄도안.

그는 그 몇몇 선수들을 다 들린다며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자 얼른 목을 가다듬고 계속 말했다.

“맨체스터 시티에서 가장 어리면서 가장 용감했고, 가장 기술적인 선수야. 그리고 그 어린 친구가 바로 사네를 구원했어. 아마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사네는 지금 이 자리에 우리와 함께 있지 못 했을 테니까.”

“···.”

“그러니까 사네한테 잠깐만 시간을 줘. 재혁이의 소식을 듣고 나면 마음이 한결 편해질 거고, 그럼 우리에겐 더 없이 좋은 일이잖아? 그럼 난 먼저 올라간다.”

말을 끝내며 캐리어를 짐칸에 실은 귄도안은 얼른 버스에 올라 자리를 찾았다.

그렇게 몇 분이 좀 더 흐르자 허겁지겁 버스로 돌아온 사네가 연신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올라왔고, 비어있는 귄도안의 옆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자리에 앉기 무섭게 한숨을 길게 내쉰 사네는 물을 삼켰다. 그리고 옅지만 또렷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렸다.

그런 사네를 슬쩍 곁눈으로 확인한 귄도안이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만족스러운 대답은 들었어?”

“뭐, 대단한 소식은 없었어요. 아마 멕시코전을 기점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다는···, 모두가 알고 있는 대답이었죠.”

“그래? 그래서 실망했어?”

“설마요. 제 성격 잘 아시면서.”

귄도안의 물음에 미소를 떠올린 사네.

그는 자못 진지한 얼굴로 속삭이듯 조용히 답했다.

“그걸로 충분해요. 적어도···, 우리와 경기를 할 땐 확실히 돌아올 수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조별 예선 3차전, 다른 팀들과의 경기가 모두 끝나고 재혁이가 있는 한국과 마지막 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됐다는 건 분명 운명인 거에요. 축구의 신이 정해준 운명 말예요. 그러니까 전부 이길 겁니다. 상대가 어느 팀이 됐든, 재혁이를 만나기 전까지 절대 지지 않을 거예요.”

꾸욱, 말을 끝내며 주먹을 움켜쥔 사네는 단단히 각오를 다졌다.

최고의 무대에서 최고의 선수라 생각하는 재혁이를 상대로 만나게 되었으니, 최고의 상태로 그를 맞이하겠다면서 말이다.

그런 사네를 지긋이 지켜보던 귄도안 또한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소속팀에선 서로를 돕는 동료였지만, 여기선 아니야. 나도 최선을 다 할 거다, 최재혁. 그러니까 최고의 무대에서 다시 보자.’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각오를 속으로 다지고 있을 때, 마침내 멈췄던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

“하루종일 기다리고 있을 거면 그냥 먼저 연락을 하지?”

“누, 누가 하루종일 기다렸다고 그래? 그냥 사진 찍은 거 좀 본 거야.”

“아, 그러셔. 요즘 사진은 전화번호부에 있나 보네. 오빠가 기계치라 미안하다.”

“···.”

당당하게 대답했으나 안토루의 예리한 한 마디에 휴대폰 화면은 슥 숨기며 입을 닫은 케이트.

그런 케이트를 향해 쯧쯧 혀를 찬 안토루는 가방을 준비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분명 결승전이 끝났을 때까지만 해도 분위기 좋더만. 대체 무슨 일을 벌이고 온 건지···.”

“아무 일도 안 벌였거든! 오빠는 준비 다 했으면 얼른 훈련하러 가!”

“그래, 그래. 그런데 너도 슬슬 나갈 준비 해라. 부모님 오시면 같이 그 쪽 숙소로 넘어가.”

“말 안 해도 알고 있거든요.”

오늘까진 아직 베이스 캠프에 들어간 게 아니었기에 개인 숙소를 이용할 수 있어서 남매가 함께 할 수 있었지만, 내일부턴 대표팀 동료들과 함께 합동 숙소에서 지내게 된다.

이미 몇 번이고 들었던 내용에 케이트는 혀를 빼죽 내밀더니 미리 준비한 짐가방들을 확인하며 시계를 살폈다.

부모님께서 공항에 도착하기로 한 시간까지 대략 3시간 정도 남았으니, 슬슬 움직일 준비를 한 것이다.

가장 먼저 호텔에 택시를 부탁하고, 훈련장으로 떠나는 안토루에게 그래도 신세졌다며 고맙다는 말을 전한 케이트는 빠진 물건이 없는지 마지막으로 확인하다가···.

“···.”

또 한 번 휴대폰을 살피더니 양손으로 붉어진 뺨을 가렸다.

잊으려 해도 잊혀지지 않는 한 마디가 아직까지도 케이트의 머릿속에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던 것이다.

갑자기 결혼하자니.

너무 얼떨떨해서 무어라 답할지 생각도 못 했는데, 더 당황스러웠던 것은 재혁이 그 말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는 사실이었다.

물론 맨체스터로 돌아가야 하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대뜸 그런 말만하고 가버리면 난 어떡하냐!”

“···저, 손님?”

“네?!”

“부탁하신 택시가 도착해 있는데···, 조금 더 기다려 달라고 할까요?”

“아, 아녜요! 금방 나갈게요!”

호텔 직원이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말을 걸어온 것에 붉었던 얼굴이 더 빨갛게 달아오른 케이트.

그녀는 허둥거리며 얼른 케리어 손잡이를 끌고 호텔 밖으로 나왔고, 기다리고 있던 택시 기사에게 죄송하다는 말을 먼저 전했다.

이에 담배 필 시간을 벌었다며 도리어 괜찮다고 답을 한 택시 기사는 케이트를 대신해 트렁크에 짐을 실어주었고, 공항을 향해 운전을 시작하며 간단히 몇 마디를 건넸다.

“아가씨도 월드컵 보러 가는 건가?”

“네. 오빠가 선수여서 응원차요.”

“오빠가 국가대표 선수야?! 대단한데! 어느 팀?”

“호주에요. 그룹 C에 속해 있어요.”

“그룹 C면···, 프랑스랑 덴마크가 있는 조잖아? 힘들겠는 걸.”

“그러니까 더더욱 응원해야죠.”

“하하! 맞아! 그래도 응원할 수 있다는 게 좋은 거지. 우리나라는 이번에 예선 탈락했거든. 그놈의 세대 교체가 뭔지. 아주 시원하게 말아먹었어.”

“아쉽겠어요.”

“말해 뭐해. 한 달간의 즐거움이 그대로 날아가버렸다구.”

케이트의 말에 잠깐 한숨을 토했던 택시 기사는 어차피 지난 일이고, 그래도 좋은 경기들을 기대한다며 들뜬 목소리로 케이트와 더 다양한 이야기들을 나누기 시작했다.

교통체증이라는 인력으로 해결하기 힘든 적을 눈 앞에 둔 만큼, 함께 떠들 수 있는 주제인 축구 이야기로 지루한 시간을 조금이나마 즐거이 보내려 한 것이다.

케이트도 간만에 떠드는 축구 이야기에 즐거운 듯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나라가 우승할 것 같냐는 택시 기사의 질문에 케이트는 고민에 빠졌고, 잠시간 고개를 갸웃이며 생각하더니 웃으며 대답했다.

“개인적으로 우승했으면 바라는 팀이 있긴 한데, 아마 힘들겠죠?”

“혹시 오빠가 있는 호주?”

“아뇨. 호주가 아니에요. 물론 호주도 좋은 성적을 거두었으면 좋겠지만···.”

또 한 번 뜸을 들인 케이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가능하다면 한국이 결승까지 올라갔으면 좋겠어요.”

“뭐? 한국이? 하하하! 아가씨, 농담하는 거지?”

그런 케이트의 말에 운전대를 치며 호탕하게 웃은 택시 기사.

그는 케이트에겐 아쉽겠지만 현실적인 조언을 해주었다.

“한국이 속한 곳엔 독일이 있다고. 이탈리아를 꺾고 올라간 스웨덴도 있고, 남미에서 온 멕시코까지, 아주 지옥이나 다름 없는 곳이 바로 F조인데. 그 소원은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도 힘들 거 같은데?”

“그건 모르는 일이죠! 축구공은 둥그니까요!”

“둥글어도 굴러갈 자리는 알아. 아무리 그래도 한국은 좀···. 아마 조별 예선도 뚫기 힘들 거야.”

“아뇨. 한국은 반드시 16강에 올라갈 거예요.”

“···.”

기사의 거듭된 설명에도 단호한 목소리로 대답한 케이트.

그런 케이트의 얼굴을 룸미러로 확인한 택시 기사는 수염을 긁적였다.

그러던 중 교통체증이 마침내 풀렸고, 공항까지 무사히 도착한 기사는 차를 세운 뒤 트렁크에서 케이트의 짐들을 꺼내주었다.

만나서 반가웠다는 말로 작별을 전한 두 사람은 그렇게 헤어졌고, 택시 기사는 운전석으로 돌아와 다시 엑셀을 밟았다.

그렇게 점심을 해결하기 위해 도착한 단골 식당 앞에 차를 세우고 안으로 들어간 택시 기사.

그는 인사를 건네는 주인에게 손인사로 답한 후 자리에 앉았고, 항상 시키는 메뉴를 고른 다음 TV로 시선을 돌렸다.

마침 월드컵에 관한 방송이 나오고 있었기에 한동안 멍하니 TV를 지켜보던 택시 기사는 그 밑에 걸려 있는 나무판을 하나 발견하곤 물었다.

“내기판이야?”

“응. 손님들이랑 가볍게 어느 팀이 16강에 올라갈지 뽑는 내기를 하고 있지.”

“흐음. 내기라.”

잠시 자리에서 일어나 각 조 별로 예상되는 2팀을 뽑는 내기판을 멍하니 지켜보던 택시 기사는 주인에게 자신도 참여해도 괜찮냐고 물었고, 볼펜으로 원하는 팀을 정한 후 이름을 적으라 답했다.

이에 알겠다며 얼른 펜을 손에 쥔 택시 기사는···.

“한국?!”

“어. 재밌는 손님을 만났거든.”

“그거랑 한국을 고른 게 무슨 상관이야? 게다가 100불을 걸었어? 이거 낙장불입이야.”

“알고 있어. 그럼 얼른 밥이나 가져와. 배고프다고.”

자신의 운을 한 번 시험해보겠다며 한국에 돈을 걸었다.

그런 택시 기사를 이해할 수 없다며 고개를 털던 가게 주인.

그렇게 모두의 월드컵은 한 걸음씩 뚜벅이며 개막전을 향해 걸었고···.

“좋아. 천천히 움직여 봐. 그렇지, 그러면 거기서 관절도 움직여 보고···.”

“그렇게 걱정스럽게 보지 마세요. 충분히 다 회복된 거 같으니까요.”

“항상 마지막을 제일 조심해야 된다니까. 그래서 통증은 어때?”

마침내 목발을 치우고 아무런 통증 없이 걸을 수 있게 된 재혁이 밝은 얼굴로 웃어보이며 말했다.

“완벽해요. 이걸로 준비 완료입니다.”

< 194. 준비 완료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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