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89화 (189/225)
  • < 189. 그 때 그 순간 >

    처음 재혁이와 대화를 나누었던 건 고등학생이 되어서였지만, 재혁이를 처음 보았던 건 중학생 때였다.

    특이한 아이였다.

    단순히 동양인이기 때문이 아니었다.

    청바지를 입고 오는 날보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오는 날이 더 많았던 아이는 항상 어느 누구보다 학교에 제일 먼저 도착해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수업이 끝나면 항상 누구보다 먼저 사라졌다.

    이 모든 걸 어떻게 알고 있느냐면, 녀석과 짝이었으니까.

    물론 오랫동안 짝을 이룬 건 아니었다.

    기껏해야 한 학기 정도.

    하지만 그 한 학기동안 재혁은 항상 똑같은 패턴을 매일 반복했고, 그게 내 호기심을 끌었다.

    그래서 어느 날 밤, 마음을 먹었다.

    오늘만큼은 꼭 재혁이보다 먼저 학교에 가있겠다고.

    그리고 도착하면 대체 뭘 하길래 그렇게 일찍 도착하는지 알아보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새벽 4시에 알람을 맞추고 일어나 씻었고, 학교갈 준비를 끝마친 후 침대에 누워있는 안토루를 찾았다.

    “오빠 일어나! 새벽 훈련 가야하잖아?”

    “···그렇긴 한데, 이렇게 이른 시간에 나가진 않는다고. 흐아암, 대체 지금이 몇 시야? 아직 5시도 안 됐잖아? 잠 좀 자자, 잠 좀.”

    “그럴 시간 없어! 얼른 일어나서 씻고 나 좀 학교에 데려다 줘!”

    “학교에? 이 시간에?”

    놀라는 안토루는 대체 뭣 때문에 이렇게 일찍 학교를 가야 하냐고 물었지만 나는 안토루의 질문을 대충 얼버무렸다.

    짝을 이루고 있는 남자 아이가 신경 쓰여서 그러는 거라고는 도저히 답할 수 없었으니까.

    다행히도 안토루는 그런 대답에도 알겠다며 몸을 일으켰고, 대충 준비를 한 후 운전석에 앉았다.

    그렇게 도착한 학교는 마르지 않은 새벽 이슬로 축축했고, 달이 막 저문 터라 캄캄했다.

    주변을 둘러보면서 운전석에 내린 안토루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나를 보며 말했다.

    “케이트. 요즘 성적엔 등교 시간도 포함 되냐?”

    “적어도 늦게 오는 친구들보단 성적이 나쁠 순 없지.”

    “하여간 범생들이란 정말 이해할 수가 없다. 너랑 나랑 남매인게 신기하다니까.”

    “나도 그래.”

    그런 안토루의 말에 대충 대답한 나는 주변을 살핀 뒤 시간을 확인하며 미소지었다.

    ‘5시 23분. 후후, 설마 이것보다 일찍 와있으려고.’

    오늘은 내가 이겼다.

    물론 아무런 보상도 없는 승부였지만, 그래도 오늘은 내가 이겼다며 미소를 띤 얼굴로 학교 안으로 향하던 나는 이런저런 생각들로 머릿속을 채웠다.

    어디에 숨어서 기다릴까, 그보다 내가 먼저 도착해 있다는 걸 재혁이가 알면 얼마나 놀랄까, 같은 쓸데 없는 생각들로 말이다.

    그런 생각들이 끊어진 것은···.

    토옹!

    “···?”

    공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처음엔 잘못 들은 줄 알았으나, 축구 골대가 있는 운동장에서 분명 소리가 계속해서 들리고 있었다.

    공이 튕기는 소리가, 재혁이가 땀을 흘리며 공을 가지고 프리킥을 연습하던 바로 그 소리가···.

    “그 날 새벽에도 아마 저 자리였었지. 재혁이가 프리킥을 연습하던 위치가 말야.”

    “···응.”

    과거를 기억하는 회상에 잠겨 있던 케이트는 옆에 앉아 있는 안토루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고, 짧게 답한 후 경기장 위에 서있는 재혁에게 시선을 모았다.

    어째서인지, 그 날 새벽의 어린 재혁의 모습과 겹쳐 보이는 지금의 재혁에게 말이다.

    그때 그랬던 것처럼 호흡을 골랐던 재혁은 처음엔 천천히 공을 향해 발을 움직였고, 왼쪽 디딤발을 길게 뻗은 후 오른발로 공을 찼다.

    발 안쪽에 정확히 걸린 공은 빠른 속도로 떠올랐다가 수비벽을 넘기 무섭게 낙하를 시작했고, 그날 새벽에 보았던 것처럼 정확히 골대 왼쪽 구석을 갈랐다.

    다만 그 날과 오늘 다른 점이 있다면···.

    “우와아아아아아!”

    “최재혁! 최재혁! 최재혁!”

    “진짜 멋있었다! 내가 여태까지 본 프리킥들 중 단연 최고야!”

    “이겼어! 우리 팀이 이겼다고!”

    “우승이다!”

    겨우 둘 밖에 없었던 관중들이 지금은 수십, 수백, 혹은 수천 만명이라는 것.

    그리고 그 무대가 중학교 운동장이 아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라는 것.

    다른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비명을 지르는 안토루였느나, 케이트는 의외로 침착했다.

    아니, 침착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귓가엔 재혁과 처음 나누었던 대화의 한 마디가 계속해서 맴돌고 있었으니까.

    [내가 뛰는 이상, 절대 질 생각은 없어.]

    ‘후후, 정말 그러네.’

    가벼운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인 케이트는 이제야 알 수 있었다.

    그 날 새벽, 밤잠을 포기한 대가로 얻게 된 보상이 무엇인 지를.

    ***

    공이 골망을 가르는 순간 양팀의 희비가 교차했다.

    재혁이 터트린 결승골을 만회할 수 있는 시간이 남아있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유벤투스의 선수들은 절망했고,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은 프리킥을 성공시킨 후 바닥에 쓰러져 있는 재혁을 향해 달리며 행복에 겨운 비명을 질렀다.

    마침내 우승.

    꿈이라 생각했던 쿼드러플을 달성했다는 사실에 선수들은 감정을 다스리지 못하고 날뛴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흥분한 것은 평소 냉정하게 선수들을 관리하던 주장 콤파니였다.

    콤파니는 누구보다 먼저 그라운드 위에 쓰려져 있는 재혁을 덮치면서 소리쳤다.

    “최재혁! 이 정신나간 자식! 그런 상황에서 그런 프리킥을 대체 어떻게 찰 수 있는 거냐? 넌 심장이 강철로 만들어졌냐?”

    “주장 나와봐요! 나도 그 녀석 좀 안아 보게! 최재혁! 얼른 이 형님 품에 안겨라! 그간의 노력을 내가 보상해주마!”

    “멘디, 헛소리 하지마. 보상을 해주긴 무슨. 재혁이한테 갚을 빚이 더 많은 녀석이.”

    “다들 비켜요! 재혁이는 내 베스트 프렌드란 말예요! 이런 건 베프랑 같이 세레모니를 해야 한다구요! 그치 재혁아? 얼른 그렇다고 말해줘!”

    그렇게 경기장에서 뛰고 있던 선수들만이 아닌, 벤치에서 달려나온 선수들까지 모두 재혁의 주변에 모여들었고, 그런 동료들의 행동이 썩 싫지 않았기에 재혁은 웃으면서도 자신의 상태를 침착하게 설명했다.

    “그런데···, 다들 좀 비켜주실래요?”

    “응? 왜?”

    “저 아무래도 다리를 좀 다친 거 같거든요. 가능하면 얼른 의료진을 만나고 싶은데.”

    “다, 다쳤다고? 어디를?”

    뜬금없는 부상 소식에 당황한 콤파니가 물었고, 재혁은 이에 쓴웃음을 머금으며 왼쪽 발목을 가리켰다.

    “왼쪽 발목이요. 아마 디발라한테 태클을 당했을 때 다친 거 같아요.”

    “태클을 당했을 때라니···. 그럼 그런 발목으로 프리킥을 찬 거야?”

    “그리고 골을 넣었죠.”

    “하지만 다쳤으면···.”

    “그래도 일단 골을 넣었죠. 그 부분이 중요하니까요.”

    “···너 정말 정신이 나간 녀석이었구나.”

    침착한 목소리로 자신이 한 행동을 설명한 재혁과 그런 재혁을 내려보면서 콤파니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솔직한 감상을 토했고,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인 뒤 벤치에서 과르디올라 감독과 우승을 기뻐하고 있는 팀닥터를 불렀다.

    갑작스런 호출에 놀란 팀닥터는 얼른 재혁에게 달려갔고, 한동안 발목 상태를 확인하더니 이마를 긁적였다.

    “다행히 골절은 아니야. 하지만 정밀 검사를 위해서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가야겠어.”

    “괜찮은 거죠?”

    그런 팀닥터의 말에 재혁보다 더 걱정스러운 얼굴로 사네가 물었고, 팀닥터는 안심하라며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장담할 순 없지만, 큰 부상은 아닐거야. 하지만 속단할 수도 없지. 다쳤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조심해야 하니까. 그리고 이런 발목으로 프리킥을 찼으니···. 쯧, 일단 차를 준비할테니 여기 좀 더 누워있어. 이번엔 절대로 움직이지 마. 절대로!”

    “네. 알겠어요. 패널티 킥을 차야 할 상황이 아닌 이상 절대로 안 움직일게요.”

    거기서 또 농담이라니.

    쯧쯧, 혀를 차며 자리를 벗어난 팀닥터는 주변에 남아 있는 선수들에게 잘 감시하고 있으라며 신신당부했고, 이에 알겠다며 재혁의 주변에 둘러 앉은 선수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지 곤란해 했다.

    이겼지만 재혁이 다쳤으니, 그저 기뻐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에 재혁이 먼저 그들을 향해 크게 웃으며 말했다.

    “분명 경기에서 이겼는데 분위기는 진 팀이랑 비슷한데요? 좀 더 웃어요. 다들 이기고 싶어 했잖아요?”

    “하지만 네가···.”

    “아마 병원으로 바로 가야 하면 시상식에도 참여하지 못 하겠지만, 괜찮아요. 이겼으니까. 저는 모두와 함께 웃고 싶어서 프리킥을 찬 거라고요. 그러니까 웃어줘요.”

    “재혁아···.”

    “또, 또 그런 표정 지으시네. 이래서야 죽을 고생을 한 보람이 없잖아요. 물론 진짜 죽는 것도 아니지만. 기왕이면 웃으면서 보내주세요. 그리고 어차피···.”

    말끝을 흐리는 동료들을 향해 여전히 환한 미소로 대답하던 재혁.

    재혁은 잠시간 말꼬리를 늘리면서 슬쩍 고개를 들어 관중석 한구석, 케이트가 앉아 있는 자리를 바라보며 말을 끝맺었다.

    “제가 원하는 진짜 시상식은 이곳에서 열리지 않거든요.”

    ***

    “그래서 이번엔 전치 2주라고?”

    “사실상 전치 2주는 ‘별 이상 없습니다’라는 말을 에둘러 표현한 병원식 설명인 거지.”

    “아. 그러셔? 그럼 이 왼발도 별 이상 없이 멀쩡하시겠네요?”

    “자, 잠깐. 그래도 반깁스를 했는데, 건드리는 건 좀···.”

    “에휴. 어떻게 된 게 우리는 결승이 끝나면 만나는 곳이 항상 병원이니?”

    진료실 복도에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게 된 케이트는 한숨을 폭 내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경기가 끝났을 때 몸을 일으키지 못하길래 설마 부상일까 했는데, 그 설마가 귀신처럼 적중했던 것이다.

    케이트는 아직도 진정이 되지 않았는지 쿵쾅거리는 가슴을 애써 쓸어내리면서 중얼거렸고···.

    “시상식도 하지 않고 빠져나가길래 얼마나 걱정했다고.”

    “시상식은 괜찮아. 그런다고 우승 메달을 못 받는 것도 아니니까.”

    케이트의 혼잣말을 주워들은 재혁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런 재혁의 미소를 확인한 케이트는 눈썹을 켜며 퉁명스레 되물었다.

    “괜찮긴 무슨. 사진도 못 찍고, 트로피도 못 들어보잖아? 그래서야 우승한 기분이 나겠냐고요.”

    “물론 나지. 여기에 네가 있으니까.”

    “···!”

    “방금 네 입으로 말했잖아? 결승이 끝나면 항상 만난다고. 그리고 아직까진 그 결승전에서 모두 이겼잖아? 그러니까 난 괜찮아. 시상식에 올라가지 않아도, 트로피를 들어보지 않아도. 너랑 여기에 같이 있으니까.”

    “그, 그,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나참, 정말 기가 막혀서···!”

    “그러게 말이다. 누군 일을 하고 왔더니 담당 선수는 그 사이를 못 참고 연애질을 하고 있으니. 나도 참 기가 막히는군.”

    “코, 코치님!”

    재혁과 대화를 나누던 중 미켈 코치가 팔짱을 끼고 등장했고, 갑작스런 코치의 등장에 케이트는 자리에서 일어나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였다.

    미켈 코치는 케이트의 반응에 도리어 당황해하며 양손을 저었다.

    “아아, 케이트씨한테 한 말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당황하지 말아요. 전 오히려 저녀석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는데, 좀처럼 통하지가 않네.”

    “사람은 가끔 뻔뻔해져야 한다고 이번에 확실히 느꼈거든요.”

    “너는 가끔이 아니라 매일이잖아. 가끔은 좀 당황해 봐라. 그래야 나도 놀리는 보람이 있지.”

    툴툴거리는 미켈 코치의 말에 한 차례 크게 웃은 재혁은 자못 진지한 얼굴로 돌아와 조심스레 물었다.

    “그래서 의사 선생님께선 정확히 어떻데요?”

    “가벼운 발목 염좌라더군. 큰 부상은 아니라니 다행이지만, 그래도 2주간 조심해야 한다고 단단히 주의하셨다. 영국으로 돌아가면 마르코 박사님께서 담당해서 봐주실 거야.”

    “2주라. 애매하네요.”

    “그래, 애매하지. 대표팀 소집을 받은 너한텐 특히 말야.”

    “대표팀? 아···!”

    대표팀 소집이라는 말에 고개를 갸웃이던 케이트는 머지않아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바로 다음 달부터 시작되게 될 월드컵.

    아마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확실하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이어졌던 케이트의 안색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렇다면 오늘 부상을 당한 재혁이는···.

    케이트의 걱정을 마치 읽기라도 한 듯, 두 사람은 그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탈락할 수도 있어. 그만큼 2주는 애매한 시간이니까. 만약 네가 거기서 프리킥을 차지 않았더라면···.”

    “아뇨. 그래도 저는 찼을 거예요. 설령 다리가 부러졌어도 말이죠.”

    “그래, 당연히 그랬겠지. 아마 모두다 똑같았을 거다.”

    재혁의 말에 피식 실소를 흘린 미켈 코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비단 재혁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비슷한 상황이었다면 마지막까지 뛰었을 게 분명하니까.

    설사 그로 인해 미래의 미래가 어떻게 변하든, 현재에 충실하기 위해서 말이다.

    한동안 말없이 재혁과 시선을 교환하던 미켈 코치는 슬쩍 케이트의 안색을 살폈고···.

    “그럼 10분 뒤 밖으로 나와. 나는 택시를 준비해놓고 있을 테니.”

    택시를 구실로 삼아 자리를 떠났다.

    그런 미켈의 배려에 재혁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슬그머니 시선을 옮겼다.

    걱정, 근심, 그 외에 여러 복잡한 감정들이 가득 담겨 있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케이트를 향해서 말이다.

    재혁과 눈을 마주친 케이트는 물기가 어린 목소리로 재혁에게 물었다.

    “대표팀에 소집이 됐던 거야?”

    “응.”

    “그럼 월드컵에 나갈 수 있도록 준비를 해야 하잖아? 그런데···.”

    말을 차마 끝맺지 못 한 케이트의 시선은 재혁의 왼발을 향했다.

    하얀 붕대로 둘둘 말려 있는 왼발.

    오늘 다치지 않았더라면 멀쩡했을 왼발.

    그렇게 깁스로 감겨 있는 재혁의 왼발을 내려보던 케이트는···.

    “흑···.”

    갑자기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렸다.

    그리고 한 방울을 시작으로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발을 다친 당사자인 재혁보다 더욱 서럽게.

    그런 케이트의 행동에 당황한 재혁이 왜 그러냐고, 자기는 괜찮다는 말을 반복하며 그녀를 타일렀지만, 케이트는 계속해서 흐느껴 울며 웅얼거렸다.

    “그치만···, 월드컵은 모두의 꿈과 같은 거라고···, 축구 선수라면 모두 가고 싶어하는 곳이라고···, 오빠가 입버릇처럼 말했던 건데···. 그걸 재혁이 너는···, 부상 떄문에···.”

    “이런. 안토루가 범인이었구나.”

    “그럼 너는···, 어떻게 되는 거야? 이번에 안 뽑히면···.”

    “안 뽑히면 뭐, 다음 4년을 기다려야지. 아직 난 어리니까. 4년 정도는 더 기다릴 수 있어. 게다가 아직 탈락이 확정된 것도 아닌 걸.”

    울먹이는 케이트를 향해 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한 재혁은 손을 뻗어 붉게 물든 눈가에 남아 있는 눈물을 닦아주며 마음 놓으라는 듯, 편안한 미소를 떠올렸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그래봐야 이제 20살이다.

    수십 년의 세월을 돌아온 만큼, 4년 정도는 기꺼이 기다릴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재혁이 말했던 것처럼, 아직 모든 게 확정된 것도 아니었으니.

    하지만···.

    ‘이건 기다리기 힘들겠어.’

    “케이트.”

    “···응?”

    재혁의 위로에 애써 눈물을 닦으며 간신히 마음을 추스른 케이트는 이제야 진정이 되었는지 한결 편해진 얼굴로 재혁을 바라보다가···.

    “우리 결혼할까?”

    재혁의 짧은 한 마디에 또 한 번 뺨이 빨갛게 뒤집어졌다.

    ***

    쿠웅, 쿠웅, 쿠웅!

    건물 전체가 울릴 정도로 한 발, 한 발에 잔뜩 힘을 실어 이동하던 중년 남성.

    그는 그를 제지하려는 사람들을 양손으로 물리친 뒤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회의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뒤 소리쳤다.

    “나는 최재혁 뽑을 겁니다!”

    임종철 감독의 커다란 목소리에 모두의 이목이 그에게 집중됐다.

    < 189. 그 때 그 순간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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