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80화 (180/225)
  • < 180. 비밀 병기 >

    “누구랑 통화를 하고 있었길래 그렇게 표정이 좋아?”

    “누구겠어. 당연히 여자 친구겠지. 하, 나도 저럴 때가 있었는데 말야. 부럽네, 부러워.”

    “아, 그러고 보니 멘디는···.”

    “거기까지만 하자, 거기까지만. 굳이 잠들어 있는 기억을 억지로 끄집어 낼 이유는 없잖아.”

    재혁이 카페 테이블에 앉아 통화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며 등장한 두 사람.

    그 두 사람이 등장하며 건넨 말 몇 마디는 짧았으나 그 몇 마디를 주워들은 주변 사람들은 귀를 쫑긋이더니 눈을 반짝였고, 옅은 흥분감을 얼굴 전면에 띠며 손을 모았다.

    다른 누구도 아닌 맨체스터 시티에 소속되어 있는 두 선수, 레로이 사네와 벤자민 멘디, 그 두 사람을 눈앞에서 볼 기회가 찾아온 것에 다들 얼굴에 떠오르는 감정을 숨기지 못한 것이다.

    물론 도시의 다른 반분이었을 맨유 팬들이 둘을 보았다면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겠지만.

    그런 두 사람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넨 후 앉으라며 자리를 마련한 재혁은 읽고 있던 것들을 덮었고, 장난기가 다분했던 상대의 말에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이제는 이럴 때가 없으시면 조금이라도 더 일찍 나오시지 그랬어요? 혼자 계속 앉아 있으려니 얼마나 외로웠는데요.”

    “외롭긴 개뿔이. 분위기를 보니까 조금 더 늦었어도 괜찮았겠구만, 뭘. 그리고 네가 여기에 앉아 있는 걸 주변 사람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잖아? 이럴 때 팬 서비스도 해주고 그러라고.”

    “딱히 그럴 상황이 나오질 않았는 걸요.”

    “뒤에 계신 아가씨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와?”

    “···?”

    멘디의 말과 손짓을 따라 고개를 뒤로 돌리자 20대로 보이는 백인 여성이 뺨을 붉히며 백색 싸인지를 품에 안고 있는 것이 보였고, 그게 무엇을 의미했는 지를 바로 이해한 재혁은 애써 뺨을 긁적인 뒤 미소를 보인 후 손을 뻗었다.

    “괜찮다면 싸인 해드릴까요?”

    “네, 네! 꼭 해주세요!”

    “저, 저도 괜찮을까요?”

    “전 싸인지가 없어서 그런데 사진을 좀···.”

    “물론이죠. 한 분씩 순서대로 해드릴게요.”

    한 명에게 싸인을 해주자 다음 사람이 등장했고, 그 다음 사람과는 사진을 찍어주었고···, 그렇게 카페에 위치한 사람들이 모두 재혁과 악수를 나누게 되었을 때서야 비로소 다시 제자리에 앉게 된 재혁은 카페 매니저에게 서비스로 받은 생과일 쥬스에 빨대를 꽂으며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조용히 잘 있었는데···.”

    “가끔은 시끌벅적하게 있어도 괜찮아. 너무 조용하면 재미 없잖아? 굴곡이 있어야지, 굴곡이. 그나저나 너 싸인 몇 명 해줬냐?”

    “한 20명 쯤?”

    “···나보다 5명 더 많네.”

    “그게 중요해요?”

    “당연하지. 그렇지, 사네?”

    “물론이죠. 숫자는 중요한 거라고요. 팬들의 관심을 무시하면 안되는 거죠. 그럼, 그럼. 아, 참고로 제가 멘디보다 2명 더 많이 해줬네요. 이것 또한 매우 중요한 숫자지요. 얼핏 단순 2명이 될 수도 있지만, 그걸 백분율로 따지면···.”

    “뭐? 기다려 봐! 내가 분명 몇 명을 빼먹어서···.”

    “···.”

    전혀 흥분할 일이 아닌 것 같은데.

    사네의 도발아닌 도발에 넘어간 멘디와 그런 멘디를 바라보며 낄낄 거리고 있는 사네.

    이대로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는 것도 제법 재밌을 것 같았지만···.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가야 하니까, 둘 다 자리에 앉아 봐요.”

    슬쩍 시간을 확인한 재혁은 낮은 목소리로 둘을 제지하면서 손을 뻗었고, 재혁의 말에 두 사람은 고개를 갸웃였다.

    “본론이라니. 오늘 모이자고 한 거에 따로 이유가 있던 거야?”

    “당연하죠. 이유가 없었으면 제가 두 사람을 굳이 감독님께서 쉬라고 한 날 불렀겠어요?”

    나는 놀자고 부른 줄 알았지, 라는 사네의 목소리와 맛있는 거 먹으려고 모인 거 아니야? 라고 되묻는 멘디에게 혀를 몇 번 차준 재혁은 가방을 향해 손을 뻗었고, A4가 몇 장씩 엮여 있는 두 개의 종이 뭉치를 꺼내 둘의 앞에 내려 놓았다.

    그 뭉치들을 각자의 손에 쥐게 된 두 사람은 재혁에게 이게 뭐냐고 동시에 물었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둘에게 재혁은 빙그레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왜 감독님께선 결승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오늘 쉬라고 했을까요?”

    “그거야 그동안 쌓인 피로를 회복하고, 완벽한 컨디션으로 마지막 경기에 임할 수 있게 준비하라는 의미잖아?”

    “그래서 어제도 기술이나 체력보단 전술 위주로 훈련을 했고 말야. 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부상을 당할 수 없으니까 말이지.”

    “그러니까 오늘 우리는 푹 쉬면서 신나게···!”

    “공부를 해야 겠죠?”

    “그래! 신나게 공부를···, 뭐? 공부?”

    주먹을 불끈 쥐고 큰소리로 대화를 이어가던 멘디와 사네의 말문이 순간 턱하고 막혔다.

    갑자기 공부라니?

    “고등학생은 너잖아!”

    당황스러운 이야기에 눈썹이 꼬였던 멘디가 뒤늦게 소리쳤고, 재혁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후 말했다.

    “꼭 학생만 공부하라는 법이 있나요? 인생은 학습의 반복이라고요. 그리고 우리가 축구 선수라면 당연히 축구에 대한 공부를 계속 해야 하지 않겠어요?”

    “···틀린 말은 아닌데, 그걸 왜 굳이 ‘오늘’ 우리한테 이야기하는 거야?”

    “맞아. 오늘은 휴식일이라구. 어디까지나 우리는 이 휴식을 최대로 활용해야···.”

    “방금 누군가 이렇게 말했죠. 감독님께서 오늘 우리에게 휴식을 주신 이유는 ‘완벽한 컨디션으로 마지막 경기에 임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것 때문이라고 말예요.”

    “···그랬지?”

    “그렇다면 완벽한 컨디션으로 경기에 임할 수 있도록 준비한다는 게 꼭 신체적인 것에만 관련이 있을까요?”

    말을 중간에 한 번 끊은 후 재혁은 과일 쥬스를 한 모금 삼켰고, 그런 재혁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있는 멘디와 사네는 꿀꺽 침을 삼켰다.

    뭔가 묘하게 어려운 말이었지만 재혁의 말이 틀리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에 두 사람은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키며 자리를 지킨 것이다.

    게다가···.

    ‘왠지 이 녀석이 하는 말은···, 뭔가 가볍게 듣기 어렵단 말야.’

    어리지만 단순히 어리진 않은 선수이며 기묘한 아우라를 항상 풍기고 있는 선수.

    멘디가 재혁에 대해 생각을 떠올리며 입술을 끌고 있자 재혁은 생긋 미소를 떠올리더니 끊었던 말을 천천히 잇기 시작했다.

    “그럼 사네에 대해 이야기를 먼저 해볼까요?”

    “나, 나에 대해서? 대체 나에 대해 뭘···.”

    “이번 시즌 사네는 46경기에 출장하면서 14골을 넣었고, 18개의 어시스트를 올리고 있어요. 기록 자체로는 썩 훌륭한 편이죠.”

    “그냥 훌륭한 게 아니지. 지난 시즌하고 비교하면 이건 장족의 발전이라고.”

    “맞는 말이에요. 하지만 이 기록의 반 이상이 시즌 초반에 쌓인 걸 고려해본다면 어떨까요?”

    “···응?”

    재혁의 짧은 한 마디에 미소가 떠올라있던 사네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고, 재혁은 그런 사네를 향해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계속 했다.

    “단순 공격 포인트로만 생각해본다면 분명 대단한 시즌을 보내고 있는 건 사실이지만, 시즌 후반 페이스가 급격히 떨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죠. 거기 건네드린 종이 뭉치에 적혀 있는 경기별 기록을 확인하면 확실히 알 수 있는 부분이에요. 단순 공격 포인트뿐만이 아닌, 온필드 플레이 기록들의 전반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나타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죠. 혹시 거기에 잘못 된 게 있나요?”

    “으음···, 분명 다 맞는 거 같아.”

    “그렇다면 이번엔 멘디에 대한 이야기를 해야겠네요. 시즌 초반 악운이 겹쳐 부상을 당한 선수에게 그다지 쓴소리를 하고 싶진 않지만···.”

    “아니. 괜찮아.”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재혁의 목소리보다 더 낮은 목소리로 멘디가 답했고, 멘디의 변화에 재혁과 사네는 긴장한듯 마른 입술을 매만졌다.

    항상 즐거운 듯 웃으며 높은 목소리로 동료들과 대화를 나누고, 어떤 상황에서도 얼굴을 구긴 적이 없는 멘디의 변화가 낯설었기에 둘은 조용히 침을 삼켰던 것인데, 그런 둘을 향해 멘디는 다시 한 번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즐길 땐 즐기고, 진지할 땐 진지하게. 이걸 지키지 못 하는 관계는 오래가질 못하니까. 내 연애사처럼 말이지. 나는 너랑 진지하게 오래 가고 싶거든. 그러니까 계속 이야기 해줘.”

    “그럼, 좋아요.”

    그리고 그런 멘디의 진지함에 고개를 끄덕인 재혁 또한 진지한 얼굴로 끊었던 말을 이었다.

    “너무도 이른 시기에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멘디는 시즌의 대부분을 재활에 사용했어요. 좋은 활약을 보여주던 선수가 갑작스레 부상으로 이탈한 것이 아쉽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복귀했고, 최근 몇몇 경기들을 뛰면서 감각을 회복하고 있죠. 그렇지만 아직까지 완벽하지 못해요. 다른 선수들이 몇 달에 걸쳐 쌓은 경기력을 겨우 몇 경기만에 따라잡을 순 없으니 말예요.”

    재활과 훈련으로는 쌓을 수 없는 경기력과 꾸준한 실전 경험에 대한 이야기.

    분명 맞는 말이다.

    맞는 말이지만···.

    “하지만 그건 내 힘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 부상은 부상이고, 경기는 경기니까.”

    “맞아요. 그건 신의 영역이죠. 그렇기 때문에 전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역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는 거에요.”

    “그 영역이 공부인 거고?”

    되묻는 멘디에게 재혁은 씨익 떠올린 미소와 함께 고개를 위아래로 작게 끄덕였다.

    “멘디에겐 다른 선수들에게 없는 ‘이점’이 있어요. 그건 오직 이번 시즌을 통으로 쉴 수 있었기에 생긴 이점이죠. 바로 상대가 멘디에 대해 참고할만한 정보가 많지 않다는 거예요.”

    “그게 이점이 될 수 있나? 그냥 부상 때문에 경기를 쉰 거 뿐이잖아.”

    “그 부분이 하기 나름인 거죠. 그걸 제대로 살릴 수 없다면 지금 멘디가 말한 것처럼 부상 때문에 단순히 경기를 쉰 게 되겠지만, 만약 그 이점을 제대로 살릴 수 있다면···.”

    떠들던 입을 한 번 멈추고 쥬스를 꿀꺽 삼킨 후 다시 멘디와 눈을 마주친 재혁.

    그는 끌었던 말꼬리와 함께 호흡을 토하며 말했다.

    “한 시즌을 숨겨서 준비한 우리들의 비밀 무기가 될 수도 있다는 말이죠.”

    “비밀 무기라고?”

    “네. 비밀 무기요.”

    그리고 그런 재혁의 말에 놀란듯 목소리가 높아진 멘디의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고, 멘디의 반응을 살피며 재혁이 머리를 긁적였다.

    “역시 비밀 무기라는 말은 유치하게 거창했죠? 좀 더 평범한 단어들을 빌리자면···.”

    “아니. 그게 딱 좋아.”

    그동안 그림자로 덮혀 있던 멘디의 얼굴이 서서히 위를 향하기 시작했고, 빛을 받기 시작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밝아진 얼굴로 멘디는 웃었다.

    그에게 있어서 올해는 고민이 많았던 1년이었다.

    큰 기대와 가능성을 품고서 맨체스터로 왔거늘, 그 희망들은 그의 무릎에 가해진 부상 때문에 산산히 부서졌다.

    그렇게 전력에서 완전히 제외 된 탓에 모두가 걱정했고, 그 또한 걱정으로 가득한 하루들을 보냈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걱정은 팀에 대한 걱정이었다.

    큰 이적료를 대가로 자신이 왔는데, 그에 대한 결과가 1년의 재활이었으니. 그런 걱정을 머릿속에 떠올린 것은 아마 자신뿐만이 아닐 것이리라.

    그렇게 쉽지 않은 시즌이 될 것이라 예상했으나, 팀은 예상과 달리 승승장구, 이제는 유럽 챔피언의 자리를 놓고 치르게 될 경기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멘디는 불안했다.

    사실 자신 따위는 어떻게 되든 상관이 없던 게 아닐까, 라는 불안감이 그의 가슴을 압박해온 것이다.

    그 압박감은 그를 재촉했고, 서서히 상실감이란 형태를 이뤄내 자신의 어깨를 누르기 시작했다.

    방금 재혁이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주기 전까지 말이다.

    “비밀 병기라.”

    바보 같다고, 유치하다고, 혹은 단순하다고 말해도 상관없다.

    멘디는 재혁에게서 가장 듣고 싶은 대답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그거면 이번 결승전, 이길 수 있는 거지?”

    “아마도. 멘디가 제대로만 해준다면 적어도 승률이 50% 정도는 되지 않겠어요? 이기던가, 지던가 말이죠.”

    “그렇게 떠들어 놓고 겨우 50%? 수지가 안 맞잖아.”

    “50%도 높게 쳐준 거에요. 사실 거기에 적혀 있는 걸 결승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모두 숙지할 거라곤 기대하지 않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그러면 여기에 적혀 있는 걸 모두 숙지한다면?”

    “!”

    “그 후의 승률은 어떻게 될 거 같아?”

    평소 위아래로 바삐 움직이던 멘디의 두꺼운 입술이 재혁의 대답을 기다리기 위해 움직임을 멈췄다.

    이어진 침묵은 주변을 꾹 움켜쥔 채로 둘 사이에 머물렀고, 그렇게 가늘고 길게 이어지던 침묵을 깨고서 재혁이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저는 지는 싸움을 계획할 정도로 한가하지 않아요. 100% 우리가 이길 겁니다.”

    < 180. 비밀 병기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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