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7. 체이서 >
시상식이 진행됐다.
먼저 준우승을 기록한 토트넘 선수들이 차례로 시상대에 올랐고, 그 다음으로 맨시티의 선수들이 순서에 맞춰 메달과 악수를 교환하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그 후 주장인 콤파니를 시작으로 은빛으로 번쩍이는 트로피를 손에 쥐게 된 맨시티의 선수들은 카메라를 향해 손을 펼쳐 보이면서 기쁨에 찬 함성 소리를 내질렀고, 그 모습을 아래에서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신형민은 실망감이 컸는지 짧은 한숨 이후 고개를 땅에 쳐박곤 일어나질 못했다.
‘···정말 코앞이었는데.’
첫 메이저 대회 우승 타이틀.
아직까지 달성하지 못한 우승이란 타이틀이 이번에도 멀어진 것에 형민은 묵직한 좌절감에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아니, 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 고개를 들면 분명 눈에 보일 테니까.
승리에 기뻐하며 삼사오오 모여 있을 맨시티의 선수들이 말이다.
피식 쓴웃음을 흘리던 형민은 얼굴을 쓸어내렸다.
따지고 본다면 본인이 문제였지 않던가.
맨시티에게 동점골을 허용한 순간은 자신이 범한 실수가 시작이었고, 역전골 또한 막을 수 있었을 기회를 본인이 스스로 날려버렸다.
조금만 더 침착했더라면, 조금만 더 집중했더라면···, 그랬다면 아마 결과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후회로 점칠된 과거를 회상하던 형민은 이내 고개를 털었다.
‘큭큭. 아니지, 아니야. 어디까지나 자업자득이다, 자업자득.’
후회를 남길 정도로 자신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가, 라고 묻는다면 형민은 당연히 고개를 가로 저을 것이다.
그저 자신이 모자랐기에 진 것이리라.
그렇게 자신을 책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켜 경기장을 빠져나가려던 형민.
그런 형민의 발걸음이 우뚝 멈춰섰다.
“···여기서 뭐하냐?”
재혁.
출구로 향하는 길목을 가로 막고 선 재혁이 형민을 향해 손을 내밀고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멍하니 재혁의 얼굴과 그가 내민 손을 번갈아 바라보던 형민은 미간 사이를 긁적이더니 조심스레 입술을 뗐다.
“우승한 팀이면 너도 다른 선수들이랑 같이 세레머니에 참여하고 있어야지. 그러다가 왕따 당한다.”
“설마 저를 왕따시키겠어요? 제가 오늘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염치가 있지.”
“그럼 더더욱 저기에 있어야지. 주역이 자리에서 빠지면 모양도 빠지잖아?”
장난기가 살짝 섞인 재혁의 목소리 사이로 들린 승리라는 단어에 가슴이 찔리는 듯한 기분이 들어 괜히 짜증이 일어난 형민. 하지만 그 기분을 굳이 표현하지 않았다.
다만 미간이 구겨지는 것까지는 막을 수 없었기에 형민은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으며 말을 이었다.
“네 말처럼 네 활약이 커서 이긴 경기였어. 그러니까 너도 가서 사진이라도 한 장 더 찍어. 일 년에 딱 한 번 경험할 수 있는 우승이고 시상식이잖아. 아마 내가 너였다면 여기서 떠들 시간에···.”
“왜 굳이 가정을 해요?”
“뭐? 그거야 난···.”
“아직 우승을 해본 적이 없으니까?”
“···.”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에 형민의 입술이 움직임을 멈췄고, 그런 형민을 향해 재혁은 차분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 않아도 돼요. 형이 한 인터뷰들을 기사로 몇 번이고 봤거든요. 당장 어제만 해도 포털 사이트에 몇 개 올라왔었잖아요? 오히려 모른다고 하는 게 거짓말이겠죠. 스포츠 기사를 안 읽는 스포츠 선수는 없으니 말예요.”
“···.”
“그러니까 저도 정말 잘 알고 있어요. 형이 얼마나 우승을 바랬는지. 오늘 경험하신 결과가 실망스러우셨겠지만···.”
재혁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형민의 안색은 시간이 흐를수록 어둠이 짙어졌다.
아니, 단순히 어두워지기만 하는 게 아니었다.
형민은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에 입술까지 깨물었다.
그걸 그렇게 잘 알고 있으면서 굳이 나를 찾아오다니.
나를 놀리고 싶은 건가, 아니면 자랑을 하고 싶었던 건가.
그것도 아니라면···.
‘···서열을 정하고 싶은 거냐? 같은 한국인이지만 나랑은 ‘급’이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뒤죽박죽 섞인 감정들이 뒤엉킨 생각을 쭈욱 이어가던 형민은 양 손을 꾹 쥔 채로 부들부들 떨다가···.
“그래서 일부러 찾아온 거에요. 다음엔 꼭 함께 경험해보자는 말을 하고 싶어서 말예요.”
“···뭐?”
재혁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되묻고 말았다.
전혀 예상하지 못 한 대답을 들은 탓이었다.
그리고 그런 형민의 반응을 예상했는지, 재혁은 피식 옅은 미소를 띤 얼굴로 말을 계속 했다.
“오늘은 서로 소속된 클럽이 달라 적이었지만, 다시 만나게 될 거잖아요? 월드컵에서 말예요.”
“···!”
“그리고 그땐 적이 아니라 함께 뛰는 동료잖아요? 그러니까 인사하러 온 거예요. 적으로 만나는 건 올해 이걸로 끝이니까, 동료로 만나게 될 날을 기대하기 위해서 말이죠. 이상한가요?”
“···아니. 전혀.”
방금까지 그림자로 덮혀 있던 형민의 얼굴에 차츰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고, 서서히 입꼬리를 끌어올린 형민은 희미하지만 확실한 미소를 떠올리며 웃었다.
월드컵.
달성할 수 있는 목표가 모두 사라졌다는 상실감에 허무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던 형민에게 재혁은 잊고 있던 또 다른 동앗줄을 넘겨준 것이다.
새로운 목표가 떠오르자 빛을 되찾은 눈빛을 반짝이던 형민은 한 차례 뺨을 붉혔다가 크게 웃으면서 재혁을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최재혁은 동생이지만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그릇이 크고, 또 존중할만한 사람임을 완벽하게 인정한 것이다.
“그래, 맞아. 월드컵이 있었지. 하마터면 계속 잊고 있을 뻔했어. 아직 시즌이 끝나려면 한참 남았다는 사실을 말야.”
“한참은 아니지만, 그래도 월드컵을 잊을 정도라니. 대체 얼마나 침울해 계셨던 거에요?”
“아주 많이. 유일하게 우승 레이스가 가능한 게 FA컵뿐이었으니까. 거의 세상이 종말하는 기분이었지.”
“그래서 지금은 어떤데요?”
“구원을 받는다면 아마 지금 이 기분일 걸.”
“그럼 제가 구원자네요. 앞으로 저 볼 때마다 십일조 까먹지 마세요.”
큭큭 거리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웃음을 흘리던 두 사람.
그런 두 사람은 한동안 잡다한 내용의 대화를 주고 받다가 조용히 손을 맞잡은 후 포옹을 나눴다.
그동안의 여정을 축하하는 포옹이며, 앞으로 함께 하게 될 동행을 약속하는 포옹을 말이다.
그렇게 멀어지기 시작한 두 사람은 서로의 락커룸을 찾아 이동했고···.
“그럼 슬슬 그쪽도 끝이 났으려나?”
의자에 앉아 지친 몸을 쉬어주던 재혁은 시계를 확인한 뒤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여러 사람들이 보낸 문자라던가, 이메일들이 잔뜩 쌓여 있는 휴대폰.
그 대부분이 우승을 축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을 확인하면서 재혁은 엄지를 이용해 천천히 스크롤을 내렸다.
모두 고마운 메시지들이었지만, 지금 재혁이 찾고 있는 문자는 따로 있었기에.
[지면 연락할 생각 하지마.]
“어떤 의미에서 정말 단순한데, 그 단순한 게 가끔은 알기 쉬우면서도 무섭다니까.”
형민이 그런 것처럼 재혁에게 ‘기도’를 보냈을 케이트의 문자를 찾은 재혁은 눈으로 내용을 훑은 후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고,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답장을 찍어 ‘응답’을 보냈다.
[난 우승했거든. 너야말로 시험 망치면 다음에 통화할 때 잔소리 들을 줄 알아.]
먼저 목표에 도착했다는 여유와 너도 할 수 있을 거라는 축복의 의미를 답은 답장을 말이다.
그리고 그런 재혁이 보낸 답장에 대한 대답은 얼마 지나지않아 금방 돌아왔다.
[앞으로 시험으로 저한테 잔소리 하실 생각이시면 옥스퍼드 대학은 들어온 다음에 말해주세요, 최재혁 선수님.]
***
[맨체스터 시티 FA컵 우승을 확정지으면서 미니 트레블을 완성!]
[“90분 안에 끝낼 수 있었던 것은 운이었지만, 그 운을 만든 것은 선수들의 실력이었다.” 과르디올라 감독, 선수들을 극찬.]
[포체티노 감독, “기회를 살리지 못 한 건 아쉽지만 마지막까지 힘내준 선수들에게 고맙다.”]
[평소보다 길었던 런던의 밤을 빛낸 맨체스터 시티는 자신들이 영국 최강임을 다시 한 번 증명하면서 또 하나의 트로피를 수납장에 추가하는데 성공했다. 한 점 차이로 끝이 난 경기는 마지막까지도 치열한 공방이 이어졌고···.]
하룻밤 사이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해와 달이 저무면서 날이 바뀌었고, 변덕맞을 날씨는 계절이란 옷을 갈아 입으면서 모습을 바꿨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변화 따로 있었으니.
바로 맨체스터 시티의 시즌 타이틀.
일반적인 트레블보다는 분명 의미가 덜한 미니 트레블이었지만, 이것 또한 역사에 남을만한 기록임이 분명했기에 그에 관한 이야기를 떠드는 사람들은 모두 크게 흥분하며 새로이 등장한 강자에 대해 떠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만한 기록이 남겨진 밤이 지났기에 사람들이 떠드는 주제는 단순히 클럽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왜냐면 결과가 만들어지기까지 필요한 과정이란 것이 존재했으니까.
사람들은 이제 그 과정을 향해 시선을 옮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요소는 바로···.
[최재혁, 과르디올라 감독에게 필요했던 마지막 퍼즐 조각! 조각날 뻔한 타이틀을 끼워 맞췄다!]
[최재혁이란 존재가 있었기에 맨체스터 시티의 성공은 ‘예상’이 아닌, ‘예정’이었다!]
[만약 이번 시즌 맨체스터 시티에 최재혁이 없었다면 미니 트레블이란 결과 또한 없었을 것이다.]
호주에서 2천만 파운드라는 이적료로 영국으로 넘어온 재혁.
이제 막 프로 커리어를 시작한 어린 선수는 자신에게 책정된 2천만 파운드라는 금액표는 절대 비싼 값이 아니었다는 것을 아직 한 시즌이 채 끝나기도 전에 증명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군더더기 없는 플레이며, 기복없이 꾸준한 기량을 선보이는 어린 선수에 대해 사람들은 하나같이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몇몇은 이번 시즌 맨체스터 시티가 이만한 성공을 거두기까지 그의 존재가 그 어떤 선수보다 컸다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말에 동의한 것이 아니었기에 반발의 목소리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실질적으로 재혁은 작년 겨우 팀에 합류한 ‘이적생’이었고, 팀에서 제일 나이가 어린 선수였으니까.
과연 그런 선수가 팀 내에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했을지, 사람들은 의문을 지울 수 없었던 것이다.
허나 그 날 저녁에 게시된 하나의 칼럼.
세계에서 가장 큰 스포츠 미디어 브랜드인 EPN과 수십 년 이상을 함께 일하면서 자신의 스포츠 지식을 글로 담아 올리는 것으로 유명한 드웨인의 칼럼이 등장하자 그런 의문은 깔끔하게 불식되었다.
아니, 논란 자체가 성립이 될 수가 없었다.
칼럼의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사람들은 인정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이번 시즌 재혁이란 존재가 맨체스터 시티 내에서 얼마나 컸던 지를 말이다.
[최재혁의 진가는 맨체스터 시티가 이기고 있을 때 나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지고 있을 때 재혁은 필드 위의 그 어떤 선수들보다 매섭게 변한다. 맨시티가 상대에게 리드를 허용하고 있던 중 기록한 15골들 중 8할이 재혁의 발끝에서 만들어 졌다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체이서Chaser.’
재혁을 의미하는 새로운 수식어의 등장이었다.
< 177. 체이서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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