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76화 (176/225)

< 176. 확정 >

축구 경기는 90분간 진행된다.

경기 시간을 90분 그 자체로만 본다면 더 없이 길어 보일 수 있는 90분이겠지만, 그 90분 동안 한 선수에게 온전히 주어질 시간이 얼마나 될 지를 생각해본다면 90분이란 시간은 그렇게 길지 않았다.

하물며 결정적인 찬스가 만들어지고, 그게 골로 연결되는 시간이 길어봐야 5초 정도라면 패스 한 번에 언제든 모든 게 끝이 날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점을 다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선수들이었기에···.

“저 꼬마를 막아!”

재혁에게 공이 향하는 것을 발견하기 무섭게 목소리를 높였고, 상황을 파악한 선수들이 하나둘 눈빛을 번득이기 시작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완야마.

재혁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던 그는 베르통언의 외침이 들리기 무섭게 곧장 다리를 움직여 재혁의 앞을 가로 막았고, 침착한 얼굴로 재혁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이곳에서 녀석이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은 결국 패스야. 슈팅 각은 이미 좁아졌고, 거리도 제법 멀어. 드리블로 뚫고 갈 구석은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선택지는 확실해. 하지만···.’

꿀꺽, 생각을 이어가던 완야마가 침을 삼켰다.

모든 가능성들은 이미 확실하게 축약된 상황이거늘.

어째서인지 그는 마음속에 떠오르는 희미한 의문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이다.

그 의문은 이렇게 묻고 있었다.

과연 최재혁에게 주어진 선택지가 정말 패스뿐일까, 라고 말이다.

그런 의문에 본능적으로 귀를 기울였던 완야마는 자신도 모르게 한 차례 움직임을 멈칫였고···.

투웅!

“!”

재혁은 그 틈을 노려 공을 가지고 움직였다.

발등으로 공을 밀고 움직이는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드리블로 말이다.

평소의 완야마라면 그런 드리블 쯤은 곧장 따라갈 수 있었겠으나, 이미 템포와 수를 완벽하게 빼앗긴 상황.

덕분에 재혁은 어렵지 않게 당황하고 있는 완야마를 제칠 수 있었고, 완야마가 너무도 쉽사리 벗겨지는 모습을 지켜보던 토트넘 선수들의 이마엔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했다.

무언가 온다.

그런 생각이 모두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면서 은근한 흔적을 남긴 것이다.

그리고 그 흔적은···.

통.

“···!”

재혁의 가벼운 패스가 남기고 간 꼬리를 통해 현실이 되었다.

패널티 아크 근처에서 왼쪽 구석을 향하며 날기 시작한 패스.

느리지만 정확하게 트리피어가 라인을 올리면서 생긴 좁은 구석을 예리하게 노리고서 패스는 짧은 여행을 시작했고, 그 패스를 향해 발을 뻗는 선수를 발견한 수비수들의 등골이 차갑게 식었다.

레로이 사네.

귀신 같이 재혁의 패스가 향할 곳의 냄새를 맡고 전력을 다해 달린 사네는 트리피어가 허용한 좁은 빈틈을 매섭게 파고 들었고, 유연한 터치로 공을 받기 무섭게 박스 안으로 침투를 시작한 것이다.

마치 처음부터 공이 그곳으로 올 줄 알았다는 듯이, 지체없는 움직임이었다.

그렇게 재혁의 패스로 시작되어 사네의 드리블로 연결된 상황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머릿속엔 똑같은 생각이 떠올랐다.

어쩌면 이 플레이로 모든 게 갈릴 지도 모른다.

아마 오늘의 승자는 지금 저 공을 골문에 집어 넣을 수 있는 팀이 될 것이다, 라는 생각이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생각처럼 맨시티의 공세를 막게 된 토트넘의 선수들도 불안한 기운이 그들을 엄습하는 듯한 불안한 느낌에 쫓겨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트리피어, 넌 이미 늦었어! 중앙으로 돌아서 다른 수비수들과 뭉쳐! 대신 토비가 사네를 막는다!”

“알고 있고, 이미 움직이고 있어!”

“아구에로를 놓치지 마! 절대로 놓치면 안 돼!”

“스털링도 들어온다! 박스 안으로 3명! 내려와서 같이 막아!”

“아니···, 3명이 끝이 아니야!”

끊임없이 상황을 브리핑하며 수비 진영을 다듬던 토트넘의 선수들.

그들은 맨시티의 선수들이 취하는 움직임을 놓치지 않기 위해 변화하는 상황을 계속해서 확인하며 목소리를 높이다가 또 한 차례 그들을 위협하는 요소를 발견하고 침을 삼킨 후 외쳤다.

“최재혁! 저 꼬마도 박스 안으로 들어온다!”

“저 망할 꼬마까지···!”

“언제 여기까지 온거야?!”

최재혁.

대체 언제 또 거리를 좁혔는지 다른 선수들보단 느렸으나 착실하게 자리를 잡기 위해 박스 안으로 재혁이 침투를 시작하고 있었고, 그런 재혁의 움직임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토트넘 선수들은 옅게 떠오른 긴장감을 애써 피부 속으로 숨기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경기 초반 그들이 재혁을 압도했다는 사실은 기억 속에서 사라진지 오래였다.

아니, 실제로 그 기억은 잊어야만 했다.

더 이상 재혁은 그들의 그물에 묶여 있는 물고기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그 그물망을 찢고 자신들을 삼키려 드는 상어가 바로 재혁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런 상어에게···.

파앙!

피냄새가 흘러갔다.

라인을 깨부수고 안으로 침투하는데 성공한 사네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토비의 다리 사이로 공을 찔러 넣으면서 재혁의 발밑으로 공을 연결해준 것이다.

빠른 속도로 굴러오는 공을 부드러운 터치로 받아낸 재혁은 자신의 위치를 한 차례 확인했고, 직후···.

‘여기에 있는다면 역시···.’

사아악!

“···!”

‘당신의 태클이 들어올 줄 알았죠, 신형민.’

공을 가지고 한 바퀴 몸을 회전하는 턴 동작을 시전했다.

그러자 언제 다가왔는지 몸을 날리던 형민이 목표를 잃고 쓰러졌다.

분명 뒤에서 달려왔기에 자신이 오는 줄 몰랐을 것이거늘.

“넌 뒤에도 눈이 달린 거냐?!”

촤아악!

속에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표출함과 동시에 잔디 위를 굴러버린 형민.

아쉽지만 그런 형민의 분노는 형태로 남지 못하고 사그라들었고, 마침내 완벽한 찬스를 맞이하게 된 재혁의 두눈이 밝게 빛났다.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오른발 슈팅 코스가 열렸고, 요리스는 아직 사네 때문에 한쪽 측면으로 옮겨 놓았던 밸런스를 완벽하게 회수하지 못한 상태였다.

앞으로 이어질 장면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모두의 눈에 또렷히 각인 되었고, 그런 사람들의 기대를 모두 받게 된 재혁의 오른발이 호선을 그렸다.

곧 뻐엉, 축구공 가죽을 강하게 때리는 소리가 필드 위에 울렸고, 몇 초가 흐른 후에 이어서 들린 소리는 그 가죽이 그물망을 흔드는 소리였다.

그 직후 동시에 터진 사람들의 함성 소리, 그리고 중계진들의 목소리가 사방을 흔들었다.

“고오오올! 최재혁 선수! 기회가 찾아오자 지체없이 슈팅을 때렸고, 그 공이 토트넘의 골망을 가르는데 성공했습니다! 이 한 골은 제법 의미가 크겠는데요?”

“단순히 크다는 정도로 끝나지 않을 골이 될 수도 있어요. 이미 후반전도 서서히 종막이 다가오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최재혁 선수가 토트넘의 가슴에 비수를 꽂은 거나 다름이 없죠!”

“아. 토트넘 선수들, 많이 당황한 게 눈에 보이는데요. 그 중에서도···, 신형민 선수가 많이 안타깝네요. 잔디를 주먹으로 몇 번이고 내려치고 있군요. 확실히 아쉬울만 했습니다.”

“분명 좋은 태클이었거든요. 만약 그 자리에 공만 있었다면 말예요. 이건 최재혁 선수의 플레이가 더 뛰어났다고 밖에 말할 수가 없죠.”

“하지만···.”

“···경기는 아직 안 끝났어. 아직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린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잔디를 내려쳤을까.

흙으로 엉망이 된 손을 털고 일어난 형민이 입술을 앙다물고서 두눈을 번득였다.

그는 경기장에 들어서기 전 재혁에게 했던 말을 조그맣게 되뇌면서 다시금 자신을 다잡았다.

불리한 것은 사실이나 그가 했던 말처럼 경기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으니까.

그러니까 주어진 기회는 아직 0이 아니다.

그런 생각과 함께 몸을 일으킨 형민은 얼른 공을 센터 서클에 내려놓았고, 경기가 재개되기 무섭게 뛰기 시작했다.

방위를 가리지 않는 스위칭 플레이.

위기 상황이 찾아오자 토트넘 선수들은 마침내 자신들이 가장 잘하는 플레이를 다시금 선보일 수 있게 되었고, 그를 통해 기회를 창출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그 찬스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된 선수는 다른 누구도 아닌 토트넘의 스트라이커, 해리 케인.

모두의 눈동자가 기대라는 감정으로 물들기 시작했고, 해리 케인은 자신에게 온 공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슈팅으로 이었다.

그런 해리 케인의 슈팅은 빠른 속도로 허공을 가르며 날았으나···.

파앙!

“에데르손 골키퍼의 선방! 슈팅 궤적을 마지막까지 완벽하게 읽은 후 몸을 날려 해리 케인 선수의 슈팅을 펀칭하는데 성공했습니다!”

“토트넘 팬들의 탄식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나오는 군요. 강력한 슈팅이었던 만큼, 기대도 컸었거든요.”

“하지만 아직 끝난게 아닙니다! 허공에 떠올랐던 공의 소유권은 아직 누구에게도 없는 상황! 공을 따내기 위해 선수들이 하나둘 모여들고 있는데, 과연 누가 저 공을 가져가게 될지···! 어?!”

“저건···, 신형민 선수! 신형민 선수가 공을 가슴으로 받는데 성공했습니다!”

“후욱!”

트래핑과 동시에 어깨를 타고 느껴지는 압박감에 형민의 호흡을 토해냈다.

위치가 위치였던 만큼, 맨시티의 선수들은 공을 소유하는데 성공한 형민을 가만두지 않고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수비수들을 상대로 형민은 물러서지 않았다.

아니, 물러설 수 없었다.

이곳에서 물러선다면 어디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까 어떻게든 만들어 낼거야···!’

토웅.

“···!”

가슴으로 받았던 공이 잔디로 떨어지기 전, 발등 위에 공을 올려놓은 형민.

그런 형민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던 오타멘디의 눈썹이 꼬였다.

대체 저기서 무슨 행동을 취하려고 공을 발등으로 받는 것일까?

의미를 알 수 없었던 동작에 신경을 곤두세웠던 오타멘디는 곧 이어지는 형민의 돌파에 놀라 숨을 삼키고 말았다.

발등에 올려놓았던 공.

형민은 그 공을 그대로 다시 떠올려 머리 위로 보냈고, 그와 동시에 공을 쫓아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공의 운동 에너지를 완벽하게 죽인 후 그걸 그대로 떠올리는 방식으로 돌파를 시도할 줄이야.

‘망할, 한 템포를 죽였다고 생각했을 때 허를 찔려서 오히려 흐름을 빼앗겼어!’

‘흐름은 내 거다! 완벽하게 뚫었어!’

오타멘디를 등뒤에 두고서 공을 쫓아 달리기 시작한 형민.

그의 입가에 희미하지만 미소가 떠올랐다.

자신의 앞을 막는 수비수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고, 골키퍼인 에데르손은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으나 골문을 지키기엔 제법 거리가 있는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단어 그대로 비어있는 골대에 공을 집어 넣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 온 것이다.

판단을 내리기 무섭게 형민은 그대로 공을 때렸고, 골문을 향해 구르기 시작한 공을 노려보면서 주먹을 꾹 움켜 쥐었다.

이걸로 이제 동점.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왔···?!’

생각을 이어가던 형민의 동공이 확장된 채로 굳었다.

구르고 있는 공을 향해 누군가 달려드는 그림자가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하늘색 유니폼에 달려있는 등번호 88번, 최재혁.

언제부터 달려온 것인지 재혁은 에데르손이 미처 돌아가지 못 한 자리를 향해 뛰고 있었고, 형민이 찬 공을 향해 다리를 뻗으며 슬라이딩 태클을 시도한 것이다.

곧 정강이를 시작으로 잔디를 훑기 시작한 재혁의 태클은 운동장 위에 흔적을 남기며 빠른 속도로 흘러갔고, 발끝으로 간신히 공을 건드리는데 성공했다.

아주 미세한 터치, 과연 얼마나 힘이 들어갔을까 의심이 가는 터치였지만, 그 터치는 형민이 시도한 슈팅의 각도를 바꾸는 데는 충분했고, 결국 공은 골문이 아닌 라인 밖으로 굴러가고 말았다.

동시에 희비가 엇갈린 선수들의 표정에 변화가 생겼다.

맨시티 선수들은 실점에서 코너킥으로 바뀐 상황을 만들어낸 재혁을 일으키곤 잘했다며 칭찬했고, 토트넘 선수들은 아쉬움에 고개가 바닥을 향하고 있었는데.

“아직 안 끝났다고!”

형민이 다시금 큰 목소리를 내 소리를 치며 골라인 밖으로 빠져나간 공을 주워들곤 외쳤다.

아직 끝난 게 아니라고, 코너킥이니까 계속해서 공격을 진행해야 한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형민의 외침은 이어진 코너킥이 끝난 후 산산히 부서졌다.

높게 올라왔던 공은 에데르손 골키퍼의 장갑에 붙잡혔고, 센터 서클을 넘어가면서 마침내 주어진 시간이 모두 끝났음을 주심이 휘슬을 통해 알린 것이다.

동시에 마지막 순간까지 좌석에 앉아 있지도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모으고 있던 팬들의 환호성이 곧 웸블리 경기장을 가득 채웠고, 그런 팬들의 함성 소리에 파묻혀 선수들 또한 행복한 비명을 내질렀다.

2대1로 맨시티의 승리.

컵 대회 우승을 확정 지음과 동시에 미니 트레블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 176. 확정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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