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 박스 안의 박스 >
리그 우승이 확정된 이후, 맨체스터 시티의 리그 출전 명단에 변화가 생겨났다.
그동안 우승이라는 목적을 최우선으로 두고 있던 탓에 여러 이유로 선발로 출장할 기회를 얻지 못 했던 선수들이 기용되는 횟수가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어린 유소년 선수들과 폼이 떨어져 회복이 필요한 선수들이 필드 위에서 뛰며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를 줌과 동시에 바쁜 일정으로 피로가 중첩 되었을 주축 선수들에겐 쉴 수 있는 휴식 시간을 부여해주었으니, 여러 의미에서 맨체스터 시티에겐 긍정적인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그런 변화 속에서도 맨체스터 시티는 페이스의 흐름을 잃지 않고 계속 이어갔다.
선발로 누가 나와도 지지 않는다는, ‘우승팀’의 분위기가 팀 전체에 스며든 것이다.
맨유 전 이후의 전적이 3승 1무인 것이 바로 그 증거이리라.
주축 선수들이 대거 빠진 스쿼드로도 지지 않는 경기들을 펼치다니.
이번 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1강’의 면모를 유감없이 펼쳐 보였고, 사람들은 그에 대해 떠들면서 서서히 기대감을 높이기 시작했다.
곧 찾아올 경기, FA컵 결승전.
바로 그 무대에 대한 기대감을 말이다.
“하아, 어떡하지? 누굴 응원해야 하지?”
그리고 그런 평범한 사람들 중 한 명인 한국인 청년은 긴장한 얼굴로 티켓을 내려보며 중얼거렸다.
자신이 이곳에 오기까지 얼마나 고생을 했던가.
5월 말까지 제출해야 할 과제들을 전부 미리 처리해 앞당겨 제출했고, 모자랄 출석 일수를 채워넣기 위해 조교들 일까지 도와가며 교수들에게 온갖 아양을 떨었다.
목적은 오직 하나.
맨체스터 시티와 토트넘, 두 팀이 만나는 FA컵 결승전을 현장에서 관람하기 위해서였다.
어려서부터 해외 축구를 봐왔고, 항상 현장에서 경기를 관람하는 걸 꿈처럼 키워왔던 청년.
그런 청년에게 두 명의 한국인이 올라가게 될 결승 무대는 마치 기적의 현장처럼 느껴졌던 것이고, 그는 그 꿈과 기적을 실현시키기 위해 런던으로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것이다.
하지만 그런 청년에게도 해결되지 않는 고민이 있었으니.
“대체 누굴 응원해야 돼?!”
바로 결승전에서 어느 팀을 응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청년은 짐가방에 담아온 옷가지들, 주로 축구 유니폼들을 호텔 침대 위에 늘어 놓으면서 연신 중얼거렸다.
“그동안 신형민 선수가 좋아서 국대 경기 때도 신형민 선수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을 찾아 다녔는데, 요즘은 최재혁 선수의 플레이 스타일도 마음에 든단 말야. 게다가 내가 축구할 때 뛰는 포지션이랑 같은 중앙 미드필더이기도 하고···. 하지만 맨체스터 시티만 응원하고 싶은 건 또 아니고···. 아악! 차라리 두 선수가 모두 한 팀에 있었다면 정하기 편했을 것을!”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도 또렷한 해결책이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에 혼란만 더 야기할 뿐이었으니.
결국 모든 것을 내려놓기로 결정한 청년은 씻고 나온 후 이불을 덮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은 자고, 내일 아침에 일어났을 때 머릿속에 처음 떠오르는 선수와 팀을 응원하리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고민은 일단 뒤로 미루고 잠을 청한 청년은 천천히 눈을 감았고, 시간이 흘러 마침내 결승전의 날이 밝았다.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결승전이 치러질 웸블리로 향하면서 이룬 인파는 맨시티의 푸른 물결과 함께 토트넘의 하얀 파도를 일으키고 있었는데, 그 사이를 떠다니는 붉은 잔가지를 발견한 현장 리포터는 신기한 얼굴로 청년을 불렀고, 마이크를 꺼내 물었다.
“입고 계신 복장이 특이한데요,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왜 이런 옷을 입고 계신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도저히 한 명을 고를 수가 없었어요.”
“한 명이요? 그렇다면 혹시···.”
리포터가 동양 청년의 얼굴을 살피면서 말끝을 흐리자 청년은 그녀를 향해 얼른 고개를 끄덕여 주며 대답했다.
“네. 한국에서 왔습니다. 아무래도 양 팀에 한국 선수들이 한 명씩 있다보니···, 어느 한 곳을 응원할 수가 없어서 양쪽 어깨에 각 선수들의 유니폼을 두르고 온 거에요. 아마 한국인이라면 모두 저랑 같은 심정일 걸요.”
“호호. 재밌는 이유네요. 그래도 우승 컵을 들 수 있는 팀은 단 한 곳뿐인데요. 어느 팀이 이길 것 같나요?”
“으음, 그것도 아직 정하지 못 했는데···. 아무래도 결승전이잖아요? 평범히 누가 더 잘해서 이길 것 같진 않아요.”
리포터의 질문에 잠시간 입술을 끌며 생각에 잠겼던 청년은 어렵지만 제법 간결한 한 마디로 질문에 답했다.
“아마 결승이라는 무대에 어울리는 마법을 부리는 팀이 이기지 않을까요?”
***
“중아 스포츠에선 우리 토트넘이 근소하게 우위, 서울스포츠에선 맨체스터 시티가 당연히 우승할 거라던데. 그래서 재혁아, 너는 어느 쪽이 이길 것 같냐?”
“그걸 말이라고 물으세요? 당연히 우리 팀이 이겨야죠.”
“와, 잔인한 놈. 내 앞에서 망설임도 없이 그렇게 대답하다니···. 고민하는 척이라도 해주면 덧나냐?”
“덧은 안 나지만 그런 대답을 해주려면 저 자신을 속여야 하는데, 그건 좀 그렇잖아요?”
경기가 시작되기 전, 필드로 입장하기에 앞서 터널에 모여든 선수들 사이에서 재혁을 발견한 형민이 다가와 물었고, 그런 형민의 질문에 재혁은 간단히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형민의 말과 행동은 삐진 듯, 퉁명스러웠지만 저게 어디까지나 장난임을 알고 있었기에 재혁은 콧등을 긁적이며 말을 이었다.
“그래도 저희들 중 한 명은 우승할 게 확실하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 순수하게 기뻐하는 게 어때요?”
“그건 그렇지만, 난 우승을 하고 싶다고.”
“그건 저도 마찬가진데요.”
“아니. 너는 몰라.”
자뭇 진지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고개를 저은 형민. 그는 지금까지 보여준 적 없는 잔뜩 굳은 얼굴로 재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네가 프로 생활을 1년 약간 넘게 하면서 이룬 걸···, 난 아직까지 이루지 못하고 있다고. 그런 네가 내가 우승을 원하는 감정을 이해한다고? 큭큭, 그건 절대 같을 수가 없지.”
“···.”
“곧 있으면 프로에 데뷔한지 10년이야. 어린 나이에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도 개인 수상을 제외하면 클럽 커리어에서 제대로 완성한 게 없어. 그런데 네가 내 감정을···, 아. 미안. 내가 너무 진지해졌나?”
“아뇨. 전혀요.”
그리고 그런 형민의 얼굴을 마주보며 빙그레 미소를 떠올린 재혁.
하지만 재혁 또한 형민과 비슷하게 진지한 목소리로 그의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프로 선수가 결승 무대를 앞두고 진지해지는 게 뭐가 미안할 일이에요? 오히려 그렇지 못 한다면 그게 더 프로답지 못하다고 전 생각해요. 하지만···, 커리어가 몇 년이 되었든, 우승을 몇 번이나 경험했든, 프로 선수라면 모두 똑같을 거 같아요. 항상 목표는 정상, 그리고 최고라는 자리를 노리는 게 말이죠. 지고 싶어서 경기를 뛰는 선수가 없듯이 말예요.”
“···!”
“그런 의미에서 약속이나 하나 해요. 누가 우승을 하든, 이기는 팀의 선수에게 서로 진심으로 축하해주기로요.”
“하하···, 가끔 널 보면 정말 신기하다니까.”
재혁의 말을 모두 들은 형민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쓴웃음을 흘렸다.
자신보다 어린 친구에게 마음 가짐에 관해 한 대 얻어 맞다니.
“너 정말 10대 맞지? 알고 봤더니 인생을 2회차로 산다던가, 그런 거 아니지?”
“만화 영화도 아니고. 정신 차려요, 형. 곧 경기 시작한다고요.”
“그래. 그래야지. 후우, 좋았어. 내게 좋은 말을 해준 걸 후회하게 해주마. 컨디션도 최고고, 오늘 경기에서 내가 어떤 활약을 하는지 한 번 지켜봐.”
“그냥 지켜보고만 있지 않을 거예요. 저도 몸상태는 최고거든요. 그리고···, 하필 오늘 안 왔는데 오늘 경기를 져버리면 그 친구를 볼 면목이 없을 거라. 어떻게든 이길 겁니다.”
“그 친구?”
“거, 있어요. 떠들기 좋아하면서 걱정은 누구보다 많은 친구. 둘 중의 하나만 하면 참 편할 텐데 말예요.”
“입장 3분 전! 선수들 모두 정렬하세요!”
“자, 그러면 경기가 다 끝나면 다시 이야기해요.”
“그래. 나중에 보자.”
자리로 돌아가기 전, 악수를 나누자는 의미로 재혁이 손을 뻗었고, 그런 재혁의 손을 미소와 함께 맞잡은 형민은 고개를 끄덕여 준 후 토트넘 선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그렇게 열을 맞춘 양 팀 선수들은 곧 심판의 뒤를 쫓으며 필드 위로 향했고···.
“마침내 등장했습니다! 맨체스터 시티의 최재혁 선수와 토트넘의 신형민 선수! 두 명의 한국인 선수들이 FA컵 결승전에서 만나게 된 역사적인 순간입니다!”
“크으, 위풍당당합니다! 두 선수 모두 팀의 핵심 선수라는게 바로 오늘 같은 경기에서 선발로 뽑혔다는게 증명해주고 있죠. 과연 어떤 경기력을 보여줄지, 기대됩니다!”
해당 장면을 중계 화면을 통해 확인한 한국인 캐스터와 해설자들은 감동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보며 말했다.
다른 곳도 아닌 세계 최고의 선수들이 모이는 리그들 중 하나인 영국 FA컵 결승전에 각기 다른 팀에 속해 한국 선수들이 만난다니.
살면서 언제 또 찾아올지 모를 이벤트를 지켜보며 사람들은 눈망울을 반짝였고···.
삐이익!
“와아아아!”
마침내 울린 주심의 휘슬과 함께 시작된 경기를 지켜보며 목청껏 함성을 내질렀다.
영국 리그의 시즌을 마무리할 피날레와 같은 경기가 드디어 시작된 것이다.
***
그동안 주전 선수들을 쉬게 해주었던 맨체스터 시티는 승리 외에 다른 선택지가 존재하지 않는 결승전인 만큼 전력을 다할 목적으로 최고의 선수들을 엄선해 베스트 11을 뽑았다.
이번 시즌 팀 최고의 주포 역할을 톡톡히 해준 아구에로를 최전방에 세웠고, 그 양옆에 사네와 스털링을 세우면서 측면 공격을 강화, 그 사이엔 재혁을 2선에 배치해 틈이 보인다면 언제든 중앙도 점거하겠다는 의지를 확실히 내보인 것이다.
그런 재혁의 뒤엔 페르난지뉴와 케빈이 버티고 있었으니.
‘측면과 중원, 공수 밸런스에 흠이 없군.’
상대 진영을 탐색해본 포체티노 감독은 검지를 끌어 올려 주름진 미간을 지긋이 눌렀다.
참 무서운 팀이었다.
이번 시즌에만 벌써 몇 번이고 맞닥뜨렸지만, 만나는 족족 상대에게 패배를 했으니.
천적이란 게 존재한다면 아마 과르디올라 감독의 맨체스터 시티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찌푸린 미간을 긁적이던 포체티노 감독은 선 자리를 중심으로 두어 걸음씩 양옆으로 이동하길 반복했고, 피치 위에서 달리고 있는 한 선수를 유심히 살펴본 뒤 고개를 가볍게 주억였다.
“역시 저 꼬마가 거슬려.”
맨체스터 시티의 2선을 책임지고 있는 88번, 최재혁.
경기가 이제 막 시작한 참이었지만,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포체티노 감독은 바로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맨체스터 시티가 무적에 가까운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저 꼬마 선수가 있기 때문임을 말이다.
포체티노 감독은 속에서 우러나오는 진심을 조심스레 입술에 담으며 중얼거렸다.
“아마 동나이 대의 어느 선수보다도 뛰어나지 않을까? 정말 알 수 없는 일이야. 대체 어디서 저런 친구가 불쑥 튀어나왔는지···. 하지만···.”
사악, 양손을 모아 살며시 쓸어내며 툭툭 털어낸 포체티노 감독.
그는 그동안 쌓여 있던 고민을 덜어낸 듯, 깊은 안광을 서서히 뿜어 보이면서 팔짱을 끼고 필드를 똑바로 마주보았다.
이번 시즌에만 맨체스터 시티를 3번 만났다.
그리고 3번을 모두 패했다.
처참한 결과였다고, 두 팀 사이에 존재하는 벽의 두께를 확실히하는 결과였을 뿐이였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했지만, 포체티노 감독의 생각은 달랐다.
물론 좁혀지지 않는 거리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는 것은 맞았으나···.
“그 거리와 벽의 두께가 어느 정도인지를 알게 되었으니. 난 그걸 돌아가고 넘어갈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던 거지.”
포체티노 감독은 혼잣말이 끝나기 무섭게 재혁에게 공이 가자 살며시 미소를 떠올리며 기대에 찬 눈빛을 보내기 시작했고, 공을 소유한 재혁은 주변 공기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공을 발 안쪽으로 끌어 당겼다.
그와 동시에 몸을 맞부딪치는 토트넘 선수의 존재를 확인하며 얼른 공을 케빈에게 건네준 재혁.
그는 이후로도 자신을 둘러싼 묘한 압박감에 불쾌한 감정을 숨기지 않았는데, 해당 장면을 지켜보던 해설자는 잠시간 고개를 갸웃이더니···.
“이건···, 틈이 없는데요?”
“네? 틈이 없다뇨?”
무언가 이상하다는 투로 말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그런 해설자에게 되물은 캐스터.
아무래도 바로 이해가 되지 않는 한 마디였기에 따로 설명을 부탁한다는 한 마디였고, 그런 캐스터의 말에 해설자는 재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박스 안의 박스’를 살펴보며 말했다.
“최재혁 선수를 중심으로 마치 그를 가두려는 것처럼 토트넘 선수들이 오밀조밀하게 포진되어 있어요. 우연인 건지, 아니면 노린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한 가지는 확실합니다. 오늘 경기에서 최재혁 선수가 운신할 수 있는 폭이 그다지 넓어 보이지는 않다는 게 말이죠.”
< 171. 박스 안의 박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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