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70화 (170/225)
  • < 170. 건방지다 >

    뜨겁게 타올랐던 밤이 지나고 새로운 태양과 함께 또 다른 하루의 시작을 알리는 동이 텄다.

    하지만 이른 새벽 하늘 위에 남아 있는 달처럼, 아직까지 전날 밤의 여운을 잊지 못한 사람들이 많았고, 그들은 지난 경기의 하이라이트를 찾아 보는 것으로 가시지 않은 감정을 달래거나 위로했다.

    그 속에 패배한 팀들을 응원하던 팬들의 댓글이 많은 것도 그와 비슷한 이유 때문이리라.

    [하···, 리버풀 진짜 잘했는데. 챔스 8강까지 와서 그걸 의적하네요.]

    [샤흐타르가 상대적 약팀이긴 하지만 그래도 챔스 전력이 있잖아요. 도깨비 팀의 한 방에 리버풀이 무너진 거죠. 역사에 비해 아무래도 최근 성적을 분석하면 리버풀은 챔스하곤 인연이 멀었잖아요? 인정할 건 인정해야죠.]

    [챔스 무대에서 열린 엘클라시코에선 바르셀로나가 이겼고요. 마지막까지 치열했던 경기인지라 레알 마드리드는 속이 제법 쓰리겠는 걸요?]

    [아쉽지만 결과를 받아 들여야죠. 그리고 준비해야죠. 이제 슬슬 레알도 새로운 바람이 필요한 때가 왔다고요. 리그 성적이 그 반증이잖아요? 다음 시즌을 위해서라도 이번 여름은 좀 바쁘게 지내야 할 걸요.]

    [유벤투스와 세비야의 경기는 너무 압도적이라 따로 할 말이 없고요. 역시 명가는 명가에요. 그것도 이탈리아 쪽이라 색깔도 확실했어요.]

    [그런 식으로 수비 전술을 펼치면 한 골 차이가 한 골처럼 느껴지지가 않죠. 세비야로썬 제법 아쉽겠지만, 실력 차이가 났다고 밖에 따로 추가할 말이 없네요. 그렇기 때문에 이번 8강전들 중 가장 다이나믹했던 경기가 바로 맨시티와 뮌헨의 경기였던 것 같아요.]

    [그건 누구도 부정 못 하죠.]

    [세상에 그런 경기를 8강에서 보다니. 결승전이라고 해도 믿었을 걸요?]

    [저는 마지막에 심판이 휘슬을 불 때 소름이 돋았다니까요. 그리고 정말 끝난 건지 확인해볼 정도였어요. 제 친구는 숨까지 몰아쉬던 거 있죠? 아마 3분만 더 했어도 그 친구 병원에 실려갔을 듯. ㅋㅋ.]

    누군가 맨체스터 시티와 바이에른 뮌헨이 펼친 경기에 대해 언급했고, 그와 동시에 쓰레드에 추가되는 댓글들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마치 본 무대가 시작되길 기다리던 관객들처럼, 사람들은 뜨거운 감정을 담아 지켜보았던 경기에 대한 감상들을 하나둘 내놓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1차전의 2대0 패배를 2차전 전반전에서 만회하고, 경기가 끝나기 10분 전부터 모두가 연장전을 준비하고 있을 때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 마법같은 한 골을 성공시켰으니.

    그 강렬했던 임팩트와 스토리가 담고 있는 내용에 다들 한 편의 영화를 본 것과 같은 만족감을 느꼈고, 다가올 경기들에 대한 기대를 숨기지 않았다.

    [아마 4강 대진 추첨이 시작되면 다들 기피하고 싶은 팀으로 맨체스터 시티를 꼽을 거예요. 이번 시즌 맨시티가 보여주고 있는 퍼포먼스는 다른 때와 비교가 불가능한 역대급이거든요.]

    [실제로 프리 시즌에도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와 맞붙은 전적이 있잖아요? 전 이번 시즌 맨시티의 챔스 우승도 충분히 실현 가능하다고 봅니다. 지금 맨시티 같은 기세를 보여주는 팀이 없는데, 다른 누가 하겠어요?]

    [쉽진 않겠지만, 그건 맨시티를 상대하게 될 팀들도 마찬가지죠. 하, 그래서 4강 추첨은 언제죠? 이틀 뒤였나요?]

    [월드컵 때문에 모든 일정들이 앞당겨져서 아마 금방 할걸요?]

    [이건 진짜 꼭 봐야겠다. 벌써부터 떨리네. 대체 어떤 대진이 꾸려지려나. 그래도 다른 팀들이 모두 샤흐타르랑 붙고 싶다는 생각은 같을 듯. ㅋㅋ.]

    [ㅋㅋ. 그건 그렇죠. 하지만 그러다가 리버풀처럼 일격 맞고 떨어질 수도 있으니 조심, 또 조심 해야 합니다.]

    [그렇게 떨어진다면 우승 자격이 없는 팀인 거임.]

    [저는 아무리 그래도···.]

    흐름에 따라 바뀌는 주제에 맞춰 계속해서 늘어나는 댓글들.

    그리고 댓글들이 쌓이는 만큼 시간도 빠르게 흘렀고, 챔피언스 리그 준결승 추첨이 있는 날, 생중계를 지켜보았던 사람들은 모두 똑같은 한 마디를 반복했다.

    [맨체스터 시티, 결승 확정이네요.]

    도깨비 팀, 샤흐타르의 상대로 지정된 맨체스터 시티.

    아무리 운칠기삼이라지만 그 실력의 3할이 상대의 전력을 넘는다고 평가된다면 결국 다가올 결말이 정해졌다는 것에 모두들 이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맨체스터 시티는···.

    [골! 맨체스터 시티, 후반 15분 또 한 번 골망을 흔들면서 FA컵 결승전에 또 한 발자국 가까워집니다! 득점에 성공한 케빈 데 브루위너, 기쁨에 높이 뛰어 오르는 군요! 이 한 골은 제법 치명적이겠죠?]

    [예. 기세에서 완벽하게 우위를 점하는 한 골입니다. 레스터 시티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오늘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하기엔 너무도 부족한 부분들이 많군요. 상대가 안 좋았어요. 하필 기세가 잔뜩 오른 맨시티가 상대거든요? 레스터 시티가 아니라 다른 어느 팀이라도 힘들었겠지요.]

    [레스터 시티의 선수들이 답답함을 표현합니다만, 그런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죠. 상대인 맨시티의 선수들이 흐름을 풀어줄 생각이 아예 없으니 말입니다.]

    [앞으로 30분. 과연 이 30분동안 레스터 시티는 현 스코어를 지킬 수 있을 것인지. 역전보단 오히려 그 부분에 더 눈이 가네요.]

    [말씀하시는 순간 경기가 재개 됩니다만···, 바로 공을 빼앗기면서 레스터 시티는 또 다시 수비에 급급한 상황에 처하고 맙니다! 그리고 곧 바로 찾아온 위기!]

    [시간은 계속 흐르고···, 레스터 시티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교체 카드를 사용합니다만, 순간적인 흐름에만 영향을 주었을 뿐, 그 이상 무언가를 만들어내진 못하는 군요.]

    [그렇게 벌써 40분이 넘었고요···. 레스터 시티의 선수들은 지친 기색이 역력합니다만, 맨시티의 선수들은 여기서 한 번 더 템포를 끌어 올리면서 승부에 쐐기를 박습니다! 4대0! 이건 끝났군요!]

    [주심 수차례 초시계를 확인하다가···, 마침내 휘슬을 붑니다! 맨체스터 시티, 결승에 진출합니다!]

    챔피언스 리그에 이어 FA컵 대회에서도 자신들의 존재를 확실히 알리며 최종 무대인 결승 진출을 확정짓는데 성공한 맨체스터 시티.

    기뻐하는 팬들과 선수들, 그리고 그 사이에서 양손을 흔들며 소리치는 과르디올라 감독이 화면에 잡혔고, 해당 장면들을 카메라로 찍어 사진으로 남긴 기자들은 모두 한 가지 가능성에 대한 기사를 써올렸다.

    쿼드러플.

    역사의 한 페이지를 과연 맨시티가 작성할 수 있을지, 그에 관한 이야기들을 말이다.

    그리고 미디어존을 빠져나가는 재혁에게도 비슷한 질문을 한 기자가 던졌고, 재혁은 그런 기자의 질문에 뺨을 긁적이더니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적어도 어느 팀을 만나도 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안 드네요.”

    ***

    “적어도 어느 팀을 만나도 질 것 같지는 않으니까,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안 드네요, 라고? 지금 영국 가판대에 있는 신문들 중 아무거나 하날 집어 봐. 뭘 집어도 네 얼굴이 전면에 있다니까!”

    [알고 있어. 지금 나도 보고 있거든.]

    “아무리 솔직해도 정도가 있지. 제대로 팔려버렸잖아? 재혁이 네 이야기가 없는 곳이 없다고. 나참···.”

    휴대폰을 붙잡고 목소리를 높이던 케이트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침에 일어나서 신문들을 확인하고, 인터넷을 둘러보았을 때, 재혁이와 관련된 기사들이 많길래 처음엔 뮌헨을 이겼기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줄 알았다.

    하지만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니 기사들이 달고 있는 수식어들은 ‘건방진’이라던가 ‘겁을 모르는’ 같이 부정적인 요소들이 가득 담겨 있던 것이다. 그리고 재혁의 한 줄 인터뷰를 확인하자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던 케이트는 곧장 재혁에게 전화를 건 것이고···.

    [그래도 사진은 좀 잘 나온 걸로 써주지. 골 넣은 후 펼치는 세레머니 같은 거 있잖아? 버스에 올라가는 사진은 약간 추해보이는데.]

    “···너무 태평한 거 아니니? 지금 이거 때문에 좋은 이야기가 나오는 곳이 없다구.”

    위기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재혁의 목소리에 이마를 부여잡고 중얼거렸다.

    물론 재혁의 자신감이 잘못 됐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제 영국에서 첫 해를 보내고 있는 신인의 겁없는 패기를 과연 사람들은 좋은 눈으로 바라봐줄 것인가, 라는 의문에 대한 답은 누가 고민해봐도 뻔했던 것이다.

    다른 나라도 아닌 영국인들이 느끼고 있는 축구에 대한 자부심은 어느 민족과도 비교가 불가능한 것이거늘.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눈에 보이는 기사들이었으니.

    케이트는 안타까움에 얕은 한숨을 토해냈다.

    “충분히 돌려 말할 수도 있었잖아? 무슨 이유가 있었어?”

    재혁이라면 분명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기에 케이트가 물었고, 그런 케이트의 질문에 재혁은 흐음, 잠시간 입술을 끌더니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솔직한 감정을 말하는 자리에서 굳이 돌려 말하고 싶지 않았거든.]

    “뭐?”

    [네 말처럼 둥글게 말했다면 ‘모두가 강하지만 그 중 최고가 우리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라던가, ‘흔치 않은 기회가 온만큼 최선을 다하겠다’라는 말도 가능했겠지.]

    “그래! 그렇게 이쁘게 말하면···.”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빙 돌려 말하는 거잖아? 내 솔직한 심정은 인터뷰에서 말했던 것처럼 ‘누굴 만나도 질 것 같지 않다’라고.]

    “하아, 꼭 그렇게까지 솔직해져야만 하는 이유가 있는 거야?”

    [응.]

    되묻는 케이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재혁은 통화상이라 케이트가 보진 못하겠지만 빙그레 미소를 떠올렸고, 곧장 말을 이어 붙이면서 말했다.

    [앞으로 나 자신한테 솔직해지기로 약속했거든. 나 자신을 위해서도, 그리고 내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도 말야.]

    “겨우 그런 이유로···.”

    [겨우가 아니야. 이건 나름 나에게 중요한 결정이었다고.]

    케이트의 말을 중간에 자르며 확고한 목소리로 답한 재혁.

    그런 재혁의 목소리에서 평소와 다른 무언가를 느낀 케이트는 눈을 동그랗게 키웠고, 잠시간 조용히, 턱끝을 긁적이며 생각에 잠겼던 재혁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케이트에게 물었다.

    [그래서···, 시험 때문에 FA컵 결승전엔 못 오지?]

    “응. 시간이 시간인지라. 아마 시험장을 빠져나오면 모든 게 다 끝나 있을 시간이지 않을까?”

    [그렇겠지. 그러면 역시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때 준비 해야겠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맨시티는 아직 준결승···.”

    [말했잖아. 안 진다니까. 결승전까지 갈거고, 티켓도 준비해 놓을게. 그리고···.]

    “그리고?”

    이어지는 재혁의 말이 늘어지자 케이트가 고개를 갸웃이며 물었고, 재혁은 그런 케이트에게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나머진 결승전에서 말해줄게. 슬슬 훈련갈 시간이라 끊어야겠다. 그럼 나중에 또 연락할게.]

    “어, 응. 나도 슬슬 공부해야 하니까. 다치지 말고 조심해.”

    몸조심하라는 작별 인사를 마지막으로 재혁과의 통화를 끝낸 케이트는 조심스레 휴대폰을 내려놓았고, 오늘 읽었던 신문 기사들을 향해 한 차례, 그리고 재혁과 통화를 나누었던 휴대폰을 향해 한 차례 시선을 준 후 중얼거렸다.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라. 그때면···, 다 결정이 나 있겠지?”

    대학, 우승, 그리고 미래로 이어질 커리어.

    그 외에도 아마 여러 가지들이 모두 결정이 날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케이트는 책상을 정리했고, 통화를 끝내고 훈련장으로 들어선 재혁을 기다리고 있던 케빈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띤 얼굴로 재혁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물었다.

    “우리 건방진 루키님께선 누구랑 그렇게 길게 통화를 하고 계셨어?”

    “엿듣고 계셨어요? 궁금하면 그냥 물어보시지.”

    “어, 그래도 되는 거야? 진즉에 알려주지. 그래서 누구였어?”

    “케빈이라면 뭐 어렵지 않죠. 아, 그 전에 제가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는데요.”

    재혁이 묻고 싶은 게 있다는 것에 케빈은 오히려 그 부분에 더 큰 호기심이 떠올랐고, 무엇이든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인 케빈에게 재혁은 진지한 목소리로 속삭여 물었다.

    “가능하다면 결혼은 빨리하는 게 좋겠죠?”

    < 170. 건방지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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