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57화 (157/225)

< 157. 한 달간의 증명 >

“이제 겨우 20분이 흘렀는데, 그동안 맨체스터 시티가 유지한 점유율이 73%입니다. 평소에도 월등한 점유율로 경기를 지배하던 맨시티였지만, 오늘은 확실히 달라요. 축구공이 둥글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들 조차 모두 맨시티, 그리고 최재혁 선수의 발 밑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 말씀은 맨시티가 단순한 이유로 점유율을 높이고 있다는 게 아니란 건가요?”

“당연하죠. 그 증거로 양팀간의 점수 차이가 벌써 이렇게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각 팀들의 이름 아래 4와 0을 나타내고 있는 점수판을 해설자가 언급하자 캐스터는 짧은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고, 해설자는 그런 캐스터를 향해 더 큰 목소리로 말을 이으려다 스튜디오 바깥에서 진정하라는 수신호를 끊임없이 보내주고 있는 오디오 감독을 발견하곤 애써 목을 가다듬은 후 말했다.

“아무리 압도적인 공격력을 지니고 있는 팀이라고 할 지라도 상대 팀이 작정하고 수비에 나선다면 그걸 뚫어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물며 그 수비가 같은 리그에 속한 프로 선수들이 펼치는 수비라면 단순히 선수 개인 능력으로 뚫어내기엔 무리가 있죠.”

“전개되는 상황에 맞춘 수비 전술, 세트 수비 전략, 그리고 외에도 여러 요건들이 있기 때문이겠죠?”

“그렇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프로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막겠다는 마음 가짐. 그게 큽니다. 승부욕과 자존심이란 것은 한 번 작동하기 시작하면 쉽게 꺼지는 종류의 성질이 아니니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의 맨시티···, 아니. 최재혁 선수는 그 모든 것들을 뒤집었습니다. 단순하게 실력만으로 말이죠.”

단순한 이유, 실력.

해설자의 말이 끝나자 캐스터의 목젖이 꿀렁였고, 4번째 실점 이후 재개되고 있는 경기를 지켜보면서 해설자는 설명을 계속 이었다.

“아무리 강등권에 머물고 있는 웨스트 브로미치라고 할지라도 수비하는 법을 아예 모르진 않습니다. 일례로 그보다 하위 리그에 속한 위건이 맨시티를 궁지로 몰아넣은 전적이 있었으니, 그들도 어떤 식으로 경기를 운영해야 할지 머리론 이해했을 것이고, 또 준비해 왔겠죠. 그들에게 있어서 FA컵은 유일한 타이틀 위닝 가능성이 있는 토너먼트니까요. 하지만 최재혁 선수의 패스들. 저걸 해결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웨스트 브로미치는 맨시티에게 철저하게 농락당하고 있는 겁니다.”

“패스요?”

“얼핏 보기엔 대단할 것이 없는, 평범한 패스들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혹은 단순히 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패스로 볼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 패스들이 기본적으로 하프 스페이스에서 파이널 써드를 목표로 이루어지고 있다면 말이 달라지게 됩니다.”

하프 스페이스와 파이널 써드.

그 개념에 대해선 캐스터도 수 차례 들어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놀라워하긴 했지만 신기해하진 않았다.

실제로 이젠 제법 연구가 되어 패스를 통해 빌드업을 전개하려는 선수라면 하프 스페이스에 대한 이해력은 기본적으로 장착해야 할 수준이었으니까.

그래서 별로 특별할 것이 없다고 생각을 하고 있던 것인데···.

생각을 이어가던 캐스터는 눈에 들어오는 상황을 발견하곤 숨을 모았다.

지금까지 계속 떠들던 최재혁, 그의 발밑에 공이 또 한 차례 멈춰섰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분위기가 바뀌었어.’

중계석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캐스터였지만, 그런 변화가 바로 느껴질 정도로 공기가 차갑게 식었다.

과연 이게 어떤 의미를 나타내는 것일까.

그런 의문을 머릿속에 떠올렸던 캐스터는 전개되는 상황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입술을 움직였고···.

퉁!

재혁은 공을 찼다.

바로 옆에 있는 동료를 향하는 평범한 짧은 패스.

언뜻 보기엔 아무런 의미도, 목적도 없어 보이는 짧은 패스였기에 캐스터는 대수롭지 않은, 고저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했으나, 그 패스를 보면서 해설자는 꿀꺽 침을 삼키면서 무겁게 말했다.

“웨스트 브로미치의 골문을 노리는 맨시티의 다섯 번째 공략이 지금 시작됐고···.”

뻐엉!

“저 패스로 조립이 완성되었군요.”

“···완성요?!”

단 두 번.

겨우 두 번의 패스가 뿌려졌거늘, 완성이 됐다니?

해설자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던 캐스터의 두눈엔 잠시간 물음표가 떠올랐으나, 곧 이어지기 시작한 장면을 눈에 담게 되자 그 물음표는 바로 느낌표로 바뀌었다.

리턴 패스.

재혁의 패스를 받은 실바가 리턴 패스로 공을 다시 재혁에게 돌려주었고, 리턴 패스를 받기 무섭게 재혁은 곧장 길게 뻗어 나가는 패스를 뿌린 것이다.

그리고 그 패스가 떨어지는 장소에 서있는 선수는···.

“아, 아구에로!”

“대체 어떻게 저게 연결 되는 거야?! 이건 도저히 말이 되질 않는다고!”

맨시티의 10번, 아구에로.

좁디 좁은 수비수들 사이에서 어떻게 된 것인지 아구에로는 자유롭게 재혁의 패스를 받아낸 뒤 골문을 향해 드리블을 치며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아구에로를 앞에 둔 웨스트 브로미치의 수비수들은 당황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분명 수비 라인은 확실히 좁혔고, 상대가 자유롭게 다닐 수 있는 빈 공간 또한 없었거늘.

그런데 저 패스가 아구에로에게 이어지다니?

‘이건 질나쁜 악몽이야···!’

굳은 얼굴의 웨스트 브로미치의 수비수, 에반스가 미간을 모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물샐 틈 없이 꽁꽁 묶은 수비 라인 사이에서 아구에로는 자유롭게 공을 잡았다.

그것도 이걸로 벌써 5번씩이나 말이다.

생각처럼 악몽이길, 뺨을 때리면 깨어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꿈이길 빌었으나···.

‘망할! 이게 꿈이겠냐!’

투웅, 투웅, 투웅!

빠른 속도로 거리를 좁혀 오는 아구에로의 존재가 거짓일리 없었기에 에반스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아구에로의 앞을 가로 막았다.

일단 저들이 원하는 템포대로 경기를 운영하게 둘 수 없었으니까.

4골이나 빼앗긴 건 분명 굴욕이었지만, 여기서 한 골을 더 빼앗긴다면 그건 치욕이었으니까.

후욱, 토해낸 숨을 다시금 삼키면서 스텝을 조절한 에반스는 아구에로가 그의 앞에서 멈춰서자 치켜뜬 눈으로 상대를 노려보았다.

무슨 짓을 해서든 막겠다.

분노를 포함한 다양한 감정이 깃든 눈빛으로 에반스는 아구에로를 노려보았고, 그런 에반스를 앞에 둔 아구에로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 웃음을 발견한 에반스의 얼굴은 다시금 뻣뻣하게 굳었다.

대체 왜 저기서 저런 미소를 입가에 띠는가?

그 이해할 수 없는 의아함에 굳은 얼굴로 아구에로를 바라보던 에반스는···.

투웅!

‘또 패스!’

아구에로가 백힐 패스로 공을 뒤로 돌리는 것을 발견하곤 공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아구에로의 백힐 패스를 받는 인물을 발견하곤 참고 있던 숨을 토해냈다.

최재혁.

놈은 이번에도 공을 잡더니 텅! 곧장 전방을 향해 스루 패스를 찔러 넣었고, 모두의 머리를 스칠듯한 높이로 날기 시작한 공은···.

“케빈!”

“이미 뛰고 있어!”

라인 밖에서 안으로 파고드는 움직임을 보이며 달리고 있는 케빈의 발등 위로 정확하게 떨어졌다.

그야말로 기가 막힌 타이밍.

웨스트 브로미치의 수비수들은 오프사이드가 아니냐면서 손을 번쩍 들었으나 부심의 깃발은 흔들림 없이 바닥을 향하며 온사이드임을 알려주었고, 아구에로-재혁-케빈으로 이어지는 삼각 패스를 화면으로 지켜보던 중계진들은 잔뜩 흥분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이면서 소리쳤다.

“완벽합니다! 타이밍, 속도, 그리고 세기에 각도까지! 최재혁 선수의 패스를 이어 받은 케빈 선수, 자연스러운 터치로 순식간에 박스 안으로 침투했고···,, 달려드는 골키퍼를 앞에 두고서 침착하게 구석을 향해 공을 밀어 넣습니다!”

“고오오올! 맨체스터 시티, 여기서 또 한 점 추가하면서 차이를 5점으로 벌렸어요! 이건 확정적이군요. 맨체스터 시티의 다음 라운드 진출이 30분도 되지 않아 확정된 듯 보입니다!”

“아까도 말씀드렸듯, 오늘의 맨시티는 ‘완성’된 상태니까요.”

캐스터의 말에 설명을 덧붙이기 시작한 해설자.

그는 다시 한 번 완성이라는 단어에 힘을 주면서 득점에 기뻐하고 있는 맨시티 선수들을 바라보며 말했다.

“과르디올라 감독을 중심으로 뭉친 선수들하며, 진행 중인 대회들의 성적까지, 지금의 맨체스터 시티는 타이틀 우승이라는 목표에 다른 어느 팀들보다 더 없이 가까운 상태입니다. 미니 더블을 넘어 트레블, 그리고 쿼드러플이라는 업적에 말이죠. 그렇다면 이건 기대가 될 수밖에 없겠군요.”

“기대요?”

“당연히 계약과 앞으로의 거취에 대한 기대죠.”

“!”

짧고 강한 해설자의 한 마디에 캐스터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해설자는 푸른 유니폼을 입고 있는 선수들 사이에 섞여 재혁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시즌 초에는 비싸다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지만, 지금 다시 본다면 최재혁 선수의 몸값이며, 계약 수준은 분명 헐값이나 다름없는 상태입니다. 아마 눈독을 들이고 있는 팀들이 제법 많을 겁니다. 아마 잡음이 일어나기 전에 계약하고 싶어하지 않겠습니까? 다름 아닌 ‘미래’ 세대의 리더가 되어줄 선수니 말예요.”

***

“재계약이요?”

[오늘 구단에서 공식 문서가 도착했더군. 일단 협상 테이블에 앉기 전, 네 생각을 먼저 들어야 하니까 바로 연락한 거다. 혹시 따로 생각하던 계획이 있나?]

“흐음. 글쎄요.”

준결승 진출을 축하한다는 말을 시작으로 이어진 베르겐과의 대화에서 재혁이 슬쩍 콧등을 매만지며 흐음, 입술을 끌었다.

그러고 보니 봄이 지나면 여름이었고, 그 후에 기다리고 있을 것은 새 시즌이었으니.

‘예상은 했지만 그래도 벌써 재계약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될 줄은 몰랐네.’

[이적에 관한 이야기가 가장 활발해지는 시기는 시즌이 끝나기 한두달 전부터니까. 지금 이 시기는 늦지도, 빠르지도 않은 적당한 시기인 거야.]

“어, 제 생각을 읽으셨어요?”

[고민하고 있는게 눈에 선히 보일 정도니까. 머릿속에 무슨 생각이 떠돌고 있을 지도 뻔하지.]

“그런가요?”

베르겐의 말에 짧게 웃었던 재혁은 다시금 턱을 내밀곤 또 한 차례 생각에 잠겼고, 고민에 빠진 재혁의 결정을 도와주기 위한 목적으로 베르겐은 그가 알고 있는 내용들을 재혁에게 하나둘 흘리듯 읊조렸다.

[지금 되어 있는 계약 조건도 동년인 선수들에 나쁜 편은 아니야. 하지만 최초 이적료였던 몸값에 맞추기 위해 주급과 보너스가 조금씩 삭감된 조건이었지. 거기에 계약 기간도 3년짜리 조항에 묶여 있어. 나쁘진 않지만 최고는 아니었다. 하지만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보자면···, 그렇기 때문에 최고의 조항일 수도 있어. 만약 네가 맨체스터 시티를 떠나고 싶다면, 말이지.]

“!”

[기본적으로 현재 유지 중인 계약 조건에 따라 몸값이 책정되기 때문에 네가 원한다면 헐값에 클럽을 떠날 수 있다. 물론 아직 19살짜리 선수에게 지불하기엔 큰 금액이지만, 지금까지 네가 보인 활약을 본다면 그정도 금액은 우스운 세상이 됐지.]

“그렇군요.”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꿀꺽, 말을 이어가기 전 한 차례 침을 삼킨 베르겐은 진중한 목소리로 재혁에게 말했다.

[이번에 맨체스터 시티가 기본적으로 내건 주급이 8만 파운드(약 1억 2천만원)인 거다.]

“···네?”

가만히 베르겐의 말을 듣고 있던 재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되묻고 말았다.

혹시 자신이 잘못 들은게 아닌가, 아니면 전화 회선이 이상해 잘못 들린게 아닌가 싶어 되물은 것이었다.

그런 재혁을 향해 베르겐은 또렷한 목소리로 다시 한 번 말해주었다.

[맨체스터 시티에서 재계약 문서를 보낼 때 주급란에 8만 파운드를 적어 보냈어. 그리고 보너스를 포함한 나머지 조항들은 모두 공백으로 두었지. 원하는 금액이 얼마든, 원하는 대로 한 번 적어 보내보라는 의미로 말야.]

“···.”

[물론 상한선이라는 게 있긴 하겠지만, 현재 맨체스터 시티는 전적으로 너를···.]

“재밌는데요?”

[뭐?]

“그러니까 지난 1년간 제가 보여준 활약이 구단에게 있어서 주급으로 8만 파운드는 깔고 갈 정도였다는 거죠?”

[음, 직관적으로 해석하고 싶다면 그렇게 되겠지.]

재혁의 기묘한 물음에 베르겐은 깊게 생각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무엇을 바라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인지는 몰랐으나, 적어도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그만한 가치가 있기 때문에 맨체스터 시티에선 8만 파운드를 주급란에 적어 보냈을 것이고, 또 그만한 가치를 인정했기 때문에 다른 조항들을 자유롭게 조율할 수 있도록 열어둔 것이지 않겠는가?

단순하게 생각하며 대답한 베르겐은 재혁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고···.

“그렇다면 저는 오늘 받은 계약서에는 사인하지 않겠습니다. 아니, 앞으로도 비슷한 조건으로 오는 계약서들은 모두 폐기해주세요.”

[뭐?! 이건 제법 파격적인 조건이었다고. 혹시 재혁이 네가 특별히 원하는 조건이 따로 있는 거야?]

뜻밖의 대답을 듣게 된 것에 놀라 되물었다.

게다가 비슷한 조건들도 모두 폐기해달라니.

혹시라도 다른 구단으로 이적을 바라는 것인가 싶어, 긴장한 얼굴로 재혁의 대답을 기다리던 베르겐은 서서히 마르기 시작한 입술을 축이며 재혁의 대답을 기다렸고, 재혁은 그런 베르겐을 향해 차분한 어조로 답했다.

“네. 8만 파운드가 적혀 있는 기본 주급 조항이 두 배가 될 때. 그때 재계약에 사인할게요.”

[8···, 8만 파운드의 두 배? 그렇다면 16만 파운드인데···.]

“물론 그걸 지금 맞춰달라는 건 아니에요. 지금까지의 활약을 보고 구단이 8만 파운드정도의 가치라고 내정한 거잖아요? 그리고 아직 시즌이 끝나려면 한 달가량이 남았으니···.”

주욱, 늘어진 말꼬리처럼 빙그레 미소를 그리고 있는 입술을 매만지며 재혁이 끊었던 말을 이었다.

“한 달동안 전 16만 파운드의 가치를 증명할 겁니다.”

< 157. 한 달간의 증명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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