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 간다 >
삐빅, 삐빅, 삐빅.
해가 뜨기 전부터 울기 시작한 알람 소리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커졌다.
대략 1분에 가까운 시간동안 외롭게 울던 휴대폰 알람은 침대에서 뻗어나온 손에 의해 작동을 멈췄고, 방은 새벽의 조용한 평화를 다시 되찾았다.
그렇게 얼마나 더 침대에 누워있었을까.
침대에서 손만 꺼내 놓았던 남성, 다비드 실바는 얼굴까지 덮고 있던 이불을 걷어낸 뒤 게슴츠레 뜬 눈을 비볐다.
그 후 시계를 찾았고, 천천히 고개를 털어낸 뒤 몸을 일으키고 씻기 위해 수건을 집어 들고 화장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이 머리에 닿자 서서히 정신이 깨기 시작한 실바는 자는 동안 굳어 있던 근육을 천천히 풀어내며 비누 거품을 내 몸을 씻었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내면서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돌려 그가 혼자 밤을 보냈던 침대를 내려보다가 옅은 숨을 토했고···.
“오늘이구나.”
달력을 찾아 오늘 날짜를 확인한 뒤 가볍게 뺨을 때렸다.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오늘은 두 번 오지 않을 날이며, 꼭 기억해야 하는 날이었으니까.
그렇게 옷을 갈아 입은 다비드 실바는 경기장을 향해 운전을 시작했다.
4월 7일.
맨체스터 시티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경기가 시작되기까지 앞으로 6시간.
사람들은 각자의 방법으로 ‘대관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
앞으로 리그가 끝나기까지 남은 경기는 다섯.
시즌 초반부터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맨체스터 시티는 굳건하게 1위 자리를 지켜내며 부동의 선두라는 타이틀을 시즌 내내 유지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모든 게 끝이 난 게 아니었다.
비록 현재 2위를 기록 중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승점 차이가 10점 이상 벌어져 있었지만, 순위가 뒤집어 질 수 있는 가능성은 여전히 남아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비록 그 가능성이 바늘 구멍처럼 작다고 할 지라도, 적어도 아직까진 ‘기적’이 일어날 가능성이 남아 있는 상황이었기에 사람들은 오늘 경기를 기다리면서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과연 오늘 경기가 어떻게 끝이 날까요? 맨체스터 시티가 이기면 남은 경기 상관없이 리그 우승 확정이고, 맨유가 이긴다면 어떻게든 따라갈 발판이 마련되는 상황인데. 정말 간만에 재미난 상황이 그려졌네요.]
[사실상 맨체스터 시티의 리그 우승은 확정된 거나 다름없죠. 하지만 맨유 입장에선 오늘 경기만큼은 절대 이기고 싶을 거예요. 다른 곳도 아니고 이웃집에 경사가 나는데 그 잔치 밥상에 반찬으로 자신들이 올라가는 꼴이니 말입니다. 오늘 경기는 제법 치열하겠어요.]
[하지만 맨유가 이긴다면 정말 실날같지만 기회가 없는 건 아니에요. 현재 10점 차인 승점 차가 한 자리수로 줄어들게 되니까요.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그리고 그렇게 역전한다면···! 말 그대로 영화 한 편 나오는 거죠.]
[하지만 그만큼 맨체스터 시티도 의욕 만만이지 않겠습니까? 이기면 우승인데. 어느 누가 지고 싶어 하겠어요?]
[그만큼 양 팀의 동기부여가 대단하다는 소리였죠. 각자 이겨야 할 이유가 뚜렷하니 말이죠.]
덕분에 오늘 경기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간의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고 계속 이어졌다.
단순히 양 팀의 팬뿐만이 아닌,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모두가 기다리고 있을 경기였으니 말이다.
그리고 그런 경기인 만큼, 제법 다양한 분석도 줄을 이었다.
무리뉴 감독이 준비할 전술이라던가, 과르디올라의 펩시티가 어떤 형식으로 운영을 할지에 관한 이야기들 같은 분석들이었다.
그 중에서 순간 모두의 시선을 끄는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맨체스터 시티는 어쩌면 오늘 경기를 다비드 실바 때문에 잃게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위험할 때마다 맨체스터 시티를 구원해준 게 실바의 패스였죠. 하지만 실전 감각을 유지한다는 것이 프로에게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지는 따로 언급하지 않아도 모두가 알고 계실 거라 믿습니다. 그 부분에 있어서 실바는 이번 시즌이 가장 위험했어요. 원치 않게 클럽을 떠나야 할 일들이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출장할 때마다 번득이는 패스를 보여주던 실바였지만, 최근 부쩍 그 기량이 하락한 느낌이 큽니다. 당장 지표로만 확인해도 바로 눈에 보일 정도죠. 그렇다보니 생각하고 싶진 않지만, 어쩌면···.]
다른 클럽도 아닌, 과르디올라 감독이 지도하는 맨체스터 시티의 다비드 실바에 대한 의심.
제목만 읽고 들어왔던 사람들은 대체 어떤 정신나간 사람이 이런 글을 썼냐고 혼잣말을 중얼거렸으나, 작성자를 확인하자 다들 어쩌면 그럴 지도···, 라는 생각을 하나둘 떠올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평소 쌓아온 통찰력과 분석력으로 다양한 경기들에 대한 예측을 자주 내놓으며 현직 스포츠 전문인으로 활동하고 있는 ‘웨이커’의 글이었기에 다들 그의 말이 꼭 무리한 억측은 아닐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실제로 한 시즌 동안 경기를 정규적으로 뛰어도 관리하기 힘든 것이 실전 감각과 컨디션인데, 실바는 그 부분에서 역대 최악의 한 해를 보내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이번엔 그 글에 동의하는 사람들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나타나면서 또 다른 설전이 이어지기 시작했고, ‘대관식’으로 알려진 오늘의 맨체스터 더비는 그 외의 지역에서도 뜨거운 열기로 사람들을 벌써부터 흥분시키고 있었다.
한국에 위치한 중앙시장도 그런 곳들 중 하나였다.
아직 하늘엔 휘엉청 밝은 달이 떠있는 새벽 하늘, 그 밑으로 모여든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면서 물었다.
“오늘 재혁이 나온데?”
“네! 선발로 나온다고 했어요! 경기도 곧 시작할 거에요!”
“어우, 내가 다 긴장되네. 할머니! 이제 그만하고 슬슬 앉아보세요! 재혁이 경기 곧 시작한대요!”
“으응, 갈거여. 요것만 마저 정리하구.”
다른 어느 곳보다 일찍 하루를 시작하는 중앙 시장의 상인들과 재희는 새벽에 시작되는 경기를 맞아 더욱 이른 시간에 일어나 이제는 할머니의 것이 된 분식집에 모여 앉으며 할머니를 찾았다.
다들 어릴 때부터 커가는 것을 지켜본 재혁의 리그 우승이 걸린 경기였기에 오늘 만큼은 모두가 한곳에 모여 앉아 경기를 지켜보기로 약속했던 것이다.
해가 뜨려면 한참이 남은 시간이었으나, 가게 안에 북적하게 모여 앉은 사람들은 저마다 오히려 자신들이 더 긴장된다며 웃고 떠들었고, 마침내 TV화면에 경기장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하자 손을 마주치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할머니 경기 시작하려고 해요! 얼른 오세요!”
“으응, 곧 가! 내가 이것들을 준비하느라구 좀 걸렸으야.”
“아이고, 이게 다 뭐래요? 대체 언제 이런 음식들을 다 준비하셨어요?”
“세상에 보쌈에 따로 닭까지···. 잠은 주무신 거에요?”
“노인네라 밤에 잠이 별루 없어서 다행이지. 손님들이 오는데 내놓을 거리도 없으면 부끄러워서 쓰것어? 차린 건 많이 없지만 재혁이 보면서 많이들 먹어야.”
“이게 많이 없다뇨. 완전 잔치상이구만!”
말 그대로 진수성찬.
할머니는 사람들이 오기 전부터 준비했던 음식들을 테이블 위에 깔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자르르한 윤기와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요리들을 내려보며 모두 군침을 뚝뚝 흘릴 수밖에 없던 것이다.
막 일어난 사람들이 많아서 입맛이 없을 법도 하건만 다들 요리를 보는 순간 꼬륵 거리는 배를 움켜잡았고, 그런 사람들을 향해 할머니는 얼른 먹으라며 웃었다.
그렇게 뜻밖의 밤참을 맞게 된 사람들은 행복한 얼굴로 수저와 젓가락을 들었고, 모두들 맛있게 먹는 것을 보면서 할머니는 대체 웬 거냐는 질문에 웃으며 대답해주었다.
“해도 안 떴는디 모여준 것이 다 우리 손자놈 때문에 그런 거 아녀? 게다가 저기 먼 곳에서 으뜸이 되기 위해 오늘 뛴다니, 그게 동네 잔치를 벌 일 일이지. 그렇다면 이 할망구가 당연히 손님들을 대접해야지. 안 그랗소?”
“어휴, 그래도 이렇게 많이 준비하실 필요는 없었는데 말예요.”
“그러니까요. 이거 우리끼리 다 먹으려고 해도 입이 부족해서···.”
“그렇다면 저희도 함께 자리해도 괜찮은 거겠지요?”
“으응?”
대화를 나누던 상인들은 갑자기 뒤에서 들린 낯선 목소리를 듣고 눈에 물음표를 담았다.
아직 손님이 올 시간은 아니었으니, 분명 이곳에 초대를 받은 사람일 터였을 텐데.
다만 어디선가 듣긴 했지만 바로 얼굴이 떠오르지 않는 목소리에 다들 아리송한 얼굴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고···.
“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등불 밑에 비춰진 낯선 이들의 얼굴을 확인하곤 놀라 숨을 삼켰다.
축구를 좋아한다면 모를 수가 없는 인물들이 갑자기 그들의 눈앞에 등장한 탓이었다.
다른 누구보다 축구를 좋아하는 야채 가게 정씨는 이게 현실인지 믿기 힘들다는 얼굴로 목소리를 떨며 소리쳐 물었다.
“차···, 차범수 선수! 차범수 선수님 맞지요? 그리고 옆에는 대표팀 감독을 맡고 계신 임종철 감독님 아니십니까?!”
“이쪽은 선수고 전 감독입니까? 이녀석이 은퇴한지가 벌써 몇 년인데.”
“그만큼 아직도 사람들 기억 속에 좋은 선수로 남아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냐? 누구랑 다르게 말이지. 그래도 넌 좋은 감독이 될 기회는 남았으니, 잘 해봐.”
“저, 저는 임종철 감독님도 정말 좋아합니다! 덕분에 대표님 분위기가 크게 바뀌었잖아요? 실제로 이제 전술다운 전술을 쓰는 것 같기도 하고···.”
“그건 어디까지나 선수들이 잘 따라가줘서 그런 겁니다. 이 친구 능력은 그렇게 크지 못해요.”
“그 선수를 잘 부려 먹는 것도 내 기량이다 인마. 그건 좀 인정해.”
차범수와 임종철.
현 대한민국 축구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을 두 명이 중앙 시장의 분식집에 추레한 모습으로 등장해 말다툼을 나누고 있던 것이다.
대체 이게 어떻게 가능한 일인지 이해할 수 없는 얼굴로 둘을 바라보던 사람들은 그들을 꾸짖는 할머니의 목소리를 듣고 바로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휴, 고만들 좀 떠들고 자실거면 식기 전에 얼른 앉으요. 꼭 오고 싶다고 연락했었다믄서 거기서 떠들고 있으면 쓰나?”
“예예, 할머니.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어우. 이거 제가 진짜 좋아하는 건데 말입니다. 할머니 덕분에 정말 간만에 맛난 걸 먹네요.”
“재혁이 경기도 경기지만, 배는 항상 든든하게 다녀야제.”
“그럼요, 그럼요.”
“저···, 두 분들도 재혁이 경기를 보려고 이곳에 오신 겁니까? 시장바닥이라 경기를 관람하기엔 그닥 좋은 곳이 아닌데···.”
“하하, 장소가 문제겠습니까?”
야채가게 정씨의 질문에 둘은 음식을 집어 먹으면서 호탕한 웃음을 보이며 대답해주었다.
“아마 오늘 재혁이 경기를 지켜보기에 대한민국에서 이곳만큼 현장 분위기가 뜨거울 곳은 아마 없을 겁니다. 물론 직접 경기장에서 본다면 더 없이 좋았겠지만, 한국에 남아 있으니 이곳에서 최고의 장소를 골라야지요.”
“그리고···, 또 기대 중이기도 하지요.”
“기대요?”
되묻는 것에 조용히 턱을 들어 안경을 쓰고 TV 화면을 지켜보고 계신 할머니를 가리킨 둘은 조그만 목소리로 말했다.
“어쩌면 재혁의 우승을 지켜보며 가장 기뻐하실 분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오지 않겠습니까? 그저 그 순간이 궁금했을 뿐입니다. 함께 월드컵으로 간다면, 그리고 그곳에서 무언가 이룬다면, 한국에서 어떤 모습으로 경기를 지켜보고 계실지 그 감정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을테니까요.”
“···!”
“그러니까 맛있게 먹고, 힘차게 응원해봅시다! 재혁의 첫 우승 커리어가 어떤 모습으로 완성될지 저도 굉장히 기대되네요.”
“그래야죠! 오오, 드디어 시작되려 하네요! 잘해라 재혁아!”
중계 화면엔 선발 명단과 함께 출전할 선수들의 프로필이 나왔고, 재혁의 사진이 등장하자 응원을 목적으로 박수를 치던 사람들은 비록 들리진 않겠지만 재혁의 이름을 연호하며 경기를 기다렸다.
그렇게 같은 시각, 에티하드 경기장 입장을 앞둔 재혁.
복도 안에서 통로 바깥에 준비되어 있는 축구공을 바라보면서 재혁이 숨을 토해낸 후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간다, 우승하러.”
< 150. 간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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