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49화 (149/225)
  • < 149. 마법의 1년 >

    “그러게 말야. 아무리 기자가 싫다고 해도 가끔은 얼굴 좀 비춰주는게 어때? 그래도 옛날엔 같이 밥도 먹고 다녔는데. 이러다가 서로 어떻게 생겼는지 까먹겠다고.”

    “설마요. 며칠 전에도 카메라 들고 저 찍고 계셨잖아요? 치매 오실 나이도 아니시면서. 그리고 기자라는 직업은 상대하기 싫지만 이상민 기자님은 제외라니까요? 또 이상하게 몰고 가시네. 아주 직업병이셔.”

    “얼씨구. 이게 진짜 직업병이 뭔지 모르고 있구만.”

    재혁의 친근한 인사에 이상민 기자는 가벼운 농담을 섞어 대답했고, 그런 상민의 말에 재혁은 웃으면서 장난스레 대꾸했다.

    이상민 기자와는 초등학생 때부터, 그리고 호주에 이어 영국으로 왔을 때도 꾸준히 연락하고 있는 몇 안되는 사람들 중 하나였기에 둘 사이는 제법 친했고, 오늘처럼 인터뷰가 있는 날에도 둘은 업무 때문이 아닌, 실제 친구를 만나는 듯한 기분으로 자리에 찾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다만 그런 두 사람을 곁에서 지켜보고 있어야 하는 최동호 인턴은 뻘쭘한 얼굴로 앉은 자리를 지키고 있었고, 재혁이 이상민 기자에게 누구냐고 묻고 나서야 간신히 자세를 풀 수 있었다.

    “이번에 본사에서 현장 실습하라고 보내준 최동호 인턴이야. 덕분에 팔자에도 없는 보모 일도 하고 있지.”

    “보, 보모라뇨. 설거지랑 청소는 모두 제가 하잖아요?”

    “그럼 그것도 안 하려고 했어? 쯧쯧. 이래서 요즘 젊은 애들이랑은 같이 살기 힘들다니까. 내가 호주에 있을 때는···.”

    “차편을 구하기 힘들어서 걸어서 경기장까지 왕복 2시간씩 다니셨죠. 그 이야기를 아직도 하고 다니세요?”

    “재혁, 네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하면 어떡해? 나랑 같이 고생해놓고.”

    “후후. 기자님처럼 저도 다 농담인 거죠. 그나저나 오늘 인터뷰의 목적이 서로 농담을 주고 받는 게 아닐텐데. 슬슬 본론으로 넘어가도 괜찮지 않을까요?”

    “흠. 그러는게 좋겠군. 마침 입도 이만하면 적당히 풀었고···,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볼까.”

    툭툭, 주변을 가볍게 정리하면서 가방을 털어낸 이상민 기자는 주머니 속에서 녹음기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고, 준비해온 자료들을 그의 앞에 늘어놓으면서 인터뷰를 준비했다.

    그러는 사이 최동호 인턴도 필기를 위해 펜과 종이를 앞에 놓았고, 재혁은 그런 두 사람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이상민 기자가 진지한 얼굴로 그에게 묻기 시작하자 신중한 얼굴로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사실 오늘 인터뷰를 진행하자고 신청한 이유는 이제 슬슬 때가 온 것 같았다는 느낌이 왔기 때문이었어. 내가 옛날에 한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나?”

    “단순히 반짝이고 사라질 흥미를 유발하기 위한 기사를 쓰기 위해서 자료를 수집하는 게 아니라고 제게 그러셨죠.”

    “제대로 기억하고 있어 줘서 다행이군. 그래서 지금까지도 간략한 분석 글은 올렸지만 재혁, 너에 관한 이야기는 기사로 쓴 적이 없었지. 하지만 오늘은 달라. 내가 이번에 준비한 칼럼은 스텟이 나타내는 네가 아니라, 너 스스로를 알려주는 너에 관한 칼럼이야.”

    “저에 대한 칼럼이요?”

    “그래.”

    되묻는 재혁을 향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이상민 기자는 펜대를 고쳐 쥐면서 말을 이었다.

    “배경 지식 없이 스텟이란 자료로만 선수에 대한 설명을 시작하는 건 어쩌면 선수에게도, 그리고 독자들에게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하거든. 내가 알고 있는 최재혁은 지금까지 보여준 것 이상을 보여줄 수 있는 선수니까. 그 가능성을 독자들이 단순히 숫자에 얽매여 읽게 하고 싶지 않아. 그러기 때문에 난 오늘을 위해 그동안 참아왔던 것일 지도 모르지. ‘인간’ 최재혁을 소개하는 것을 말야.”

    “···.”

    “그러니까 오늘은 제법 긴 인터뷰가 될 지도 몰라. 어때, 재혁. 오늘 다 이야기 해줄 수 있겠어?”

    “흐음.”

    이상민 기자의 말에 재혁은 잠시간 턱을 쓸어내며 눈을 감았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며 축구부에 소속되어 있었을 때 이상민 기자를 처음 만났고, 그때 그와 나누었던 대화가 얼핏 기억 속에 남아 있었기에, 그 내용을 떠올리기 위함이었다.

    아마 이상민 기자는 초등학생이던 자신에게···.

    “초등학생이었던 제게 단순히 선수가 아닌, 사람 최재혁을 기사로 쓰고 싶다고 하셨었죠. 그래서 그때부터 지금까지 쭉 기다리셨던 거고요.”

    “응? 그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나?”

    “말씀 드렸잖아요. 기자들을 상대하는 건 피곤하지만, 이상민 기자님은 제외라고.”

    “하하, 그런 말을 들으니 괜히 프로포즈를 받은 것 같군.”

    “그건 조금 과한 생각이시고요.”

    옛 이야기를 꺼내니 괜한 추억이 떠올랐던 이상민 기자는 애꿎은 머리를 벅벅 긁었고, 그런 기자를 향해 재혁은 웃으면서 말했다.

    “자, 그러면 뭐부터 이야기해드릴까요? 궁금하신게 있다면 편하게 물어보세요. 전부 대답해드릴테니까요.”

    “저, 저요! 저부터 질문해도 될까요?”

    “응? 최동호 인턴?”

    “저 정말로 궁금하던 게 있었거든요.”

    어째선지 둘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중 그 사이에 끼어든 최동호 인턴은 양손을 꾹 쥐고 호기심이 가득 차오른 얼굴로 말했고, 재혁은 슬쩍 이상민 기자의 눈치를 살피더니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동호 인턴은 재혁과 이상민 기자의 허락이 떨어지자 침을 꿀꺽 삼킨 뒤 진지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가연 선수랑 사귄다는 소문이 진짜에요?”

    “네?”

    “아니 그게, 같이 따로 특훈도 했다고 하고, 경기장에도 직접 찾아갈···.”

    “야, 최동호.”

    “네?”

    “밖으로 나와.”

    “왜···, 왜요?”

    “몰라서 물어? 우리가 연예부냐? 넌 진짜 오늘 제대로 까여봐야 돼.”

    질문 한 번으로 순식간에 차갑게 굳어버린 회의실의 분위기는 이상민 기자가 따로 최동호 인턴을 회의실 밖으로 불러낸 후에야 다시 풀어졌다.

    ***

    그렇게 몇 시간이 흐르고, 재혁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회의실을 빠져나온 이상민 기자와 최동호 인턴은 노을이 진 하늘을 바라보며 대화를 나누었다.

    “벌써 해가 졌네요. 시간 참 빠르네.”

    “그러게. 마치 네 커리어 같구나. 아직 시작도 안했는데 벌써 져버렸어. 내일은 과연 제대로 된 해가 뜰까? 그걸 알 수 없을 정도로 아주 눅눅하게 젖어드는 노을이야.”

    “기, 기자님. 제가 잘못했다니까요. 앞으로 정말 조심할게요.”

    “말이나 못하면. 재혁이니까 웃으면서 넘어간 거지, 다른 선수들이었으면 당장 인터뷰 접고 자리 떴을 거다.”

    “각골명심하겠습니다!”

    각까지 세워 손으로 경례를 보내는 최동호 인턴을 곁눈으로 살피며 쯧쯧 혀를 찬 이상민 기자는 운전석에 앉은 후 시동을 걸었고, 최동호 인턴은 조수석에 엉덩이를 붙이면서 정리한 자료를 펼쳐보곤 눈을 반짝였다.

    살면서 처음으로 취재, 그것도 프로 선수를 인터뷰 해봤다는 그 경험에 자연히 눈동자에 빛이 서린 것이다.

    최동호는 그 경험 중에서도 오늘 그의 가슴을 가장 떨리게 한 순간을 떠올리면서 탄성을 흘렸다.

    “그런데 정말 대단하네요. 어린 시절부터 마음 가짐이 달랐어요. 마치 프로가 되기 위해 꾸준히 준비해왔다는 느낌? 조급할만한 상황에서도 참고 기다릴 줄 알다니. 괜히 프로가 아닌 것 같아요.”

    “맞는 말이야. 거의 베테랑에 버금가는 멘탈이지. 하지만 더 대단한 점은 그런 멘탈을 지니고 있는 선수의 나이가 올해 겨우 20살 짜리란 점이야.”

    “···!”

    “나보다 반 밖에 살지 못 한 친구지만, 여러 부분에서 존경심이 생길 정도니. 눈이 갈 수밖에 없지.”

    부릉, 말을 끝내며 기어를 바꾼 후 엑셀을 밟기 시작한 이상민 기자는 운전에 집중하기 시작했고, 조용히 그의 옆자리를 지키고 있던 최동호 인턴은 넌지시 운을 뗐다.

    “그런데 기자님도 그런 부분에선 대단한 것 같아요.”

    “갑자기 또 무슨 헛소릴 하려고?”

    “헛소리가 아니라요. 진짜로요.”

    여전히 시선을 정면으로 고정시킨 채로 묻는 이상민 기자의 말에 최동호 인턴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계속 했다.

    “오늘 최재혁 선수를 취재하면서 확실히 느꼈어요. 기자님은 이미 기사로 써올릴 자료들이 수십 개가 있지만 계속해서 참고 기다리고 계신 거잖아요? 자칫 최재혁 선수에게 잘못된 관심이 쏠릴 수도 있으니까요. 그 점이 정말 대단하다고 느꼈어요. 자기가 쓰는 기사가 주인공이 아니라, 정말 대상을 주인공으로 기사를 쓰기 위해서 글을 쓰시는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

    “그렇기 때문에 정말 기대하고 있어요. 과연 기자님이 쓰신 기사가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줄지, 너무 궁금해서 참기가 힘들 거든요. 초안 완성하시면 저 좀 꼭 보여주세요. 꼭 읽고 공부할 자료로 삼고 싶어요.”

    “그걸 아는 놈이 재혁이한테 연예부 기자 같은 질문을 던졌냐?”

    “그, 그건 어디까지나 농담으로 분위기 좀 풀어보려고···.”

    “큭큭. 그래. 이제라도 느낀 게 있다니 다행이군.”

    “···장난이셨죠? 후우, 난 또 이번에도 진짜로 혼나는 줄 알았네.”

    이상민 기자가 웃음 소리를 흘리자 그제야 안도안 한 얼굴로 가슴을 쓸어내린 최동호 인턴은 진땀을 식히면서 이마를 쓸었고, 그런 최동호 인턴을 슬쩍 살핀 이상민 기자는 천천히 입술을 떼 말을 이었다.

    “사실 나도 수십, 수백 번 고민한 적이 많었어. 그냥 기사로 써서 올리면 편해질 것 같은 순간들이 몇 번이고 있었거든. 예를 들면 엊그제처럼 편집장님한테 언제까지 놀고 있을 거냐고 한 소리 들을 때 말이지.”

    “아, 그때요? 확실히 편집장님이 좀 무섭죠.”

    “하지만 난 어떻게든 편집장님을 설득했다. 왜냐면 확신이 있었으니까. 언제고 이 칼럼이 연재되기 시작하면 분명 내 진의를 사람들이 알아줄 거라는 확신이 말야. 그래, 재혁이 이번 시즌 쿼드러플에 대해 확신하던 것처럼 말이지.”

    “···그거 농담 아니었어요?”

    “농담? 넌 오늘 하루종일 재혁이를 봐놓고도 아직도 구분이 안 가? 재혁이는 진심이야. 이번 시즌 목표로 설정한 쿼드러플하고···.”

    사악, 핸들을 쥐고 있던 손으로 안경을 고쳐 쓴 이상민 기자는 재밌다는 듯, 웃어보이면서 말했다.

    “월드컵 최소 8강. 어느 것 하나 거짓이 아니었다고.”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이번 월드컵으로 8강은 좀 무리지 않아요? 대진도 그렇지만, 최재혁 선수도 자체도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인데.”

    “그건 지켜 보면 알 수 있는 거지. 일단은··· 더블. 리그 우승을 통해 더블이 확정되는 순간, 그 순간이 오는 그때부터 시작인거야. 재혁이의 ‘마법의 1년’이 말이지. 맨체스터 시티의 리그 우승 확정 경기가 대략 언제지?”

    “그게···, 아마 4월 초에 있을 맨유와의 경기 결과에 따라 정해질 것 같아요.”

    “리그 우승 확정전에서 맨유와의 경기라.”

    신호에 걸려 잠깐 멈춰선 차 안에서 이상민 기자는 생긋 웃어보이더니 슬쩍 고개를 돌려 에티하드 경기장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재혁의 마법의 1년이 시작될 장소이면서 약속의 증거가 될 장소.

    과연 어떤 마법과 같은 미래가 찾아올 것인지, 이상민 기자는 잔뜩 기대에 찬 눈빛을 살며시 거둔 후 천천히 엑셀을 밟았고, 마법의 향기를 담고 있는 꽃이 피게 될 4월은 금세 찾아왔다.

    < 149. 마법의 1년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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