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 맨체스터의 어린 마술사 >
안토루가 뻗은 손을 향해 시선을 올렸던 재혁은 안토루와 비슷한 미소를 떠올리면서 웃었고, 이내 땅을 짚고 있던 손을 뻗어 맞잡으면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고마워요. 그리고 죄송해요.”
“응? 죄송해? 뭐가 죄송해?”
“그냥 여러가지로요. 왠지 안토루한테는 이 말을 꼭 해야 할 것 같았거든요.”
되묻는 안토루의 말에 머리칼을 긁적이며 대답한 재혁은 어깨를 으쓱였고, 그런 재혁을 빤히 바라보던 안토루는 눈썹을 기묘하게 꺾더니 물었다.
“설마 오늘 경기 때문에? 아니면 먼저 이적한 거? 그것도 아니면···, 흠. 케이트 때문에 미안하다는 건가?”
“앞에 둘은 흐름상 대강 이해하겠지만, 마지막 부분은 왜 나왔는지 모르겠는데요.”
“오늘 케이트한테 경기장 티켓을 전달해준 게 재혁이 너 아니었어? 티켓 준다니까 이미 받은 게 있다던데. 흐름으로 따지면 앞에 둘보다 마지막이 가장 정확하지.”
“···.”
“아무튼 그건 그거고. 네가 나한테 미안해 하는 이유가 그것들 때문이라면 잘못 생각했어. 여기선 사과가 아니라 환영 인사를 해줘야지.”
“!”
“우리 둘 다 프로잖아? 나는 보다 높은 곳을 목표로 할 수 있는 곳으로 온 것에 대한 축하 인사를 기대했던 거지, 너한테 사과의 말을 듣고 싶었던 게 아니라고. 물론···, 그 대가가 저거였지만.”
넉살 좋은 웃음으로 애써 감정을 감추었지만 전광판을 확인할 때 다시금 떠오른 아쉬움.
그 눈빛을 안토루의 두눈에서 읽을 수 있었던 재혁은 그의 말에 곧 고개를 끄덕였고, 다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영국에 온 걸 진심으로 환영해요. 그런데 안토루한테 있어선 영국 첫 대회였을 텐데, 신고식이 너무 과했나요?”
“신고식? 자식이 반 년 일찍 왔다고 그걸로 선배 행세를 하려고 그러냐?”
“지금이 아니면 제가 언제 이걸 해보겠어요? 그리고···.”
웃으며 대화를 나누던 중 재혁이 자못 진지한 얼굴로 목소리를 한 차례 끌며 말했다.
“그 반 년의 경험이 주는 차이가 얼마나 큰지, 오늘 확실히 느꼈잖아요?”
“···!”
“아마 안토루가 저랑 같은 시기에 영국에 왔었다면 오늘 경기는 마지막까지 결과를 예측할 수 없었을 거에요. 어쩌면 위치가 뒤바뀌었을 수도 있겠죠. 그렇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거에요. 지지 않는게 아닌, 이기기 위해서.”
“그래. 그렇겠지. 덕분에 확실히 느꼈다.”
재혁의 말에 안토루의 입술이 굳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반 년의 시간.
그 시간의 차이로 인해 또 한 번 벌어진 재혁과의 거리를 오늘 경기를 통해 확실히 느낄 수 있었기에 섣불리 무어라 대답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후우.”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하던 안토루는 짧게 숨을 토해내며 호흡을 정리했고, 천천히 마음 속에 숨겨두고 있던 진심이 담긴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하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보였어. 그 패스. 아구에로 선수에게 찔러주었던 너의 그 패스가 담고 있던 길을 말야. 아마 나였다면 정확한 길을 쫓아 플레이 했을 거야.”
“!”
“이 말은 아직 그래도 어떻게든 따라갈 여지가 남아 있다는 소리겠지?”
“그건···, 차차 알게 되겠죠.”
“큭큭. 그래. 기왕 이긴 거 우승까지 해라. 가능하면 우승 팀한테 졌다고 생각하고 싶거든.”
“그냥 우승 팀한테 진 게 아니게 될 걸요?”
“···?”
슬슬 헤어질 준비를 하며 건넨 말에 재혁은 전에 보여준 적 없는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고,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안토루를 향해 검지를 곧게 펼쳐 보이면서 말했다.
“쿼드러플을 달성할 우승 팀. 이번 시즌 우리는 세계 최고의 팀이 될 거에요. 영국 뿐만이 아닌, 유럽을 정복할 최고 말이죠.”
“!”
“그러니까 세계 최고에게 졌다고 너무 기죽지 마세요. 세계 최고가 상대라 진 것일 뿐이니까 말예요.”
“···그래, 그래. 하지만 다음은 다를 거다. 최고의 자리를 지키는 것보다 올라가고 싶어하는 절박함이 더 처절할 거거든.”
“기대할게요.”
“응. 꼭 기대해. 그땐 내가 디너쇼를 확실하게 준비하마.”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며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눈 둘은 나중에 또 보자는 말을 끝으로 웃으며 헤어졌고, 락커룸으로 돌아온 재혁은 자신을 찾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안토루 선수와 대화를 나누고 온 거지?”
언제부터 기다리고 있었는지 과르디올라 감독은 그가 오기 무섭게 안토루에 대해 물은 것이다.
재혁은 땀을 닦아내던 수건을 내려놓으면서 신기하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감독님도 알고 계셨어요?”
“모를 수가 있나. 호주에서 네가 활약할 때 항상 곁에서 빛을 보태주던 선수였는데 말야. 한창 고민하기도 했지. 너를 영입할 때 저 선수도 함께 데려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몇 번이고 머릿속을 맴돌았는데···.”
“후회 중이시죠?”
재혁의 물음에 잠시간 고민에 빠졌던 과르디올라 감독은 복잡한 감정이 떠올랐던 얼굴을 쓸어내리면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함께 한다면 제법 재밌을 것 같았지만···, 상황이란게 있었으니까. 당시엔 어쩔 수 없었지. 그렇기 때문에 후회한다고 묻는다면 내 선택을 후회하진 않는다. 그 선택으로 지금 나는 너와 함께 할 수 있으니까.”
“그거 듣기에 따라 프로포즈 같이 느껴지는 말인데요.”
“프로포즈 맞아. 그만큼 너랑 오래 하고 싶거든. 그러니까 앞으로도 쭉 헤어지지 말자. 아직 해보고 싶은 게 많거든.”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힘든 말에 재혁은 잠시간 뻘쭘하게 웃다가 뒤늦게 잊고 있던 것에 대해 떠올리곤 닫혀 있는 락커를 열어 휴대폰을 찾았고, 얼른 잠금 화면을 풀었다. 그러자 도착해 있는 몇 통의 문자를 확인하곤 턱끝을 긁었다.
“오히려 이쪽이 도망치려 하네.”
경기가 끝내고 보낸 것으로 보이는 케이트의 문자 내용.
시합 재밌게 잘 봤으니 다음에 보자는 말로 벌써 공항으로 향했다는 문자를 읽으면서 재혁은 천천히 짐을 챙겼다.
***
“뭘 벌써 가? 재혁이 안 만나?”
“며칠 전에 봤는데 뭘 또 봐.”
“그래? 원래 그땐 봐도 봐도 또 보고 싶은 거 아닌가? 명문대에 오겠다고 굳이 영국에 있는 대학을 목표로 고른 것도···, 크흠. 여기까지만 할게.”
택시 창문 너머로 전해지는 케이트의 매서운 시선에 안토루는 애써 헛기침을 토해내더니 목을 가다듬었고, 그런 안토루를 바라보던 케이트는 시선을 돌린 후 툴툴거렸다.
경기에서 졌다고 기죽어 있을 까봐 걱정이 되어 왔더니만 놀리기만 한다고, 괜히 왔다면서 말이다.
그런 케이트의 혼잣말을 주워들은 안토루는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걱정하지 마라. 상대가 재혁이라서 오히려 괜찮은 거니까. 축구 역사에 남을 정도의 재능을 지니고 있는 선수랑 경쟁한 거니까, 오히려 내가 덕을 봤지. 그리고···, 다음에 어디서든 만난다면 그땐 이렇게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야.”
“그럼 다행이고···.”
“그나저나 오히려 걱정은 내가 더 드는데. 너 그런 식으로 수동적으로 반응하면 나중에 뺏긴다?”
“뭘 뺏겨?”
이제 떠나려던 케이트는 갑작스런 안토루의 말에 대충 대답하며 창문을 닫으려다가···.
“뭐긴 뭐야. 당연히 재혁이지.”
“···!”
“지금이야 아직 제대로 된 유명세를 안 탔으니까 조용한 거지. 리그 우승하고 막 이러고 다니면 과연 사람들이 가만 둘까? 아마 유명 속옷 모델들부터 시작해서···.”
“···.”
예상치 못한 이름을 들은 탓에 그대로 얼굴과 손이 굳었다.
케이트는 당황한 표정을 숨기지 못한 채로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냐고 대답했다가 이어지는 안토루의 말에는 그저 얼굴만 붉힌 채로 가만히 자리를 지키게 되었다.
“그 누구냐, 어떤 선수는 최근 가수랑 결혼했잖아? 재혁이라고 그러지 말란 법은 없지. 솔직히 실력만 좋은 게 아니라 재혁이 정도면 생긴 것도 제법이고···. 아무튼 사람이 너무 빼면 나중에 뺄 것도 안 남는 거다. 오라버니의 조언을 명심하도록. 그럼 런던에 도착하면 연락해.”
“안 해!”
“그래? 싫음 말고. 아, 그래도 재혁이한텐 해라. 그러다가 또 인연 끊어지면···.”
“시끄러! 아저씨, 얼른 출발해주세요!”
“어어, 아직 오빠 말이 다 안 끝났는데!”
택시 문에 기대어 서있던 안토루는 케이트가 갑자기 창문을 닫은 탓에 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그렇게 멀어지는 택시 뒤꽁무니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생긋 미소를 흘린 후 바닥에 내려두었던 가방을 챙겨 들고 구단 버스가 주차되어 있는 주차장을 향해 걸었다.
택시 안에 앉아 있던 케이트는 멀어지는 안토루를 빤히 바라보다가 입술을 쌜죽히 내밀곤 조그만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그걸 내가 모르나? 너무 잘 아니까 그런 거라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멀어진다는 느낌.
그 기묘한 느낌에 복잡하게 뒤엉키는 감정을 숨길 수 없었던 케이트는 얕은 한숨을 입술 사이로 흘려내다가 머리칼이 흩날릴 정도로 세차게 고개를 좌우로 털었다.
‘바보야. 영국까지 그런 생각을 하려고 힘들게 온거니? 정신차려! 너도 그만큼 노력을 하면 되는 거잖아.’
일단 목표는 학과 수석.
자신이 현재 이룰 수 있는 것들 중 가장 높은 곳을 목표로 삼은 케이트는 떨어진 자존감과 열의를 불태우면서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다.
최고의 선수가 목표라면 자신 또한 그에 어울릴 정도로 성장해주면 되는 거니까.
그렇게 FA컵 8강 진출에 성공한 맨체스터의 자축의 밤이 저물었고, 다음 날 아침이 찾아왔을 때.
[기적이 필요했던 밤, 마술사의 기적이 맨체스터를 홀렸다!]
재혁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안토루가 생각했던 것처럼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
[2점 차이로 지고 있던 경기를 뒤집은 건 순전히 운이 아니었죠. 이번 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정말 지는 법을 모르고 있다니까요. 지난 시즌들 하고 너무 비교되는데요?]
[그러게 말예요. 전반기에 잘나가면 항상 후반기에 힘이 빠지던 맨체스터 시티였는데. 이번 시즌은 너무 압도적이군요.]
[아무래도 지난 2년간 준비해온 과르디올라 감독의 선수단 구성이 이번 시즌 비로소 완성된 결과겠죠. 그리고 그 최후의 퍼즐 조각을 여름에 끼워 맞춘 게 크게 유효했다고 전 봅니다.]
[여름에 찾은 퍼즐 조각이라면···, 최재혁 선수의 이야기겠군요.]
해외 축구 팬들이 자주 모이는 커뮤니티는 경기가 막 끝난 만큼 그에 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고, 당연하게도 오늘 롤러코스터 같은 경기력을 선보인 맨체스터 시티의 관한 이야기가 한창 뜨겁게 오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고 있는 선수는 오늘 경기에서 4골에 모두 직간접적으로 관여한 재혁이었다.
평소 재혁에 관한 평가는 아직 어리지만 재능 있는 선수, 과르디올라 감독이 짜놓은 전술에 맞춰 활약할 줄 아는 머리 좋은 선수였는데, 오늘 경기를 통해 사람들은 그동안 감춰져 있던 재혁의 진면목을 확인하곤 하나가 되어 말했다.
[오늘 경기를 보니 인정할 수밖에 없겠더라고요. 최재혁 선수는 미래를 보고 뽑아온 선수가 아니었어요. 그냥 즉시 전력으로 사용하기 위해 사온 선수였죠. 그리고 저런 선수를 겨우 2천만 파운드를 주고 샀다고요? 우승을 위해 치른 값으론 그냥 거저죠.]
< 147. 맨체스터의 어린 마술사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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