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44화 (144/225)
  • < 144. 폭풍속에서 웃다 >

    빠른 속도로 공이 앞뒤를 오갔고, 그에 맞춰 선수들의 발걸음도 바빠졌다.

    공격을 진행하는 선수들은 언제 찾아올지 모를 기회를 노리기 위해 열심히 공간을 찾았고, 수비에 참여하는 선수들은 혹시라도 열릴지 모를 공간을 메우기 위해 쉬지 않고 주변을 맴돈 것이다.

    그 사이에 섞여 주변을 주시하고 있는 안토루 또한 페이스를 따라가기 위해 다리를 움직이다가 한 차례 호흡을 고르면서 생각했다.

    ‘이게 최고에 닿아있는 EPL의 수준···!’

    그리고 살며시 씨익, 미소를 떠올렸다.

    이 느낌.

    지금까지 그가 경험한 호주와 리그 원과는 분명 다른 느낌의 현장감에 자연히 미소가 떠오른 것이다.

    아마 다른 이가 그의 생각을 읽었다면 3부 리그 선수 주제에 건방지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그가 영국을 온 이유가 무엇이던가.

    재혁이라는 존재가 목표 의식의 기폭제가 되어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또한 그만의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모두가 꿈꾸는 세계 최고.

    바로 그 목표에 닿아 있는 숨결을 조금이라도 느낄 수 있었기에 안토루는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굵직한 땀방울을 끊임없이 흘리면서 뛸 수 있었다.

    그런 안토루를 상대하고 있는 케빈과 페르난지뉴는 인상을 구겼다.

    ‘이녀석, 초반부터 압박이 엄청나.’

    ‘벌써 몇 번째 공을 쫓아 달려온 거지? 세 번? 네 번? 전반에 모든 스태미너를 쏟아내고 후반엔 지쳐서 떨어져나갈 생각인 건가?’

    사람이 공보다 빠를 순 없지만, 그 패스의 맥을 끊기 위해서 선수는 달려야 한다.

    오늘 위건은 그 요소를 핵심으로 삼아 경기에 나온 것이고, 안토루는 그 중에서도 다른 어느 누구보다 열심히 뛰면서 주변에 자신의 영향력을 선보이고 있던 것이다.

    그리고 안토루가 달리는 만큼, 그의 뒤를 받쳐주는 다른 위건의 선수들도 지지 않을 만큼 뛰었고···.

    투웅!

    “맨체스터 시티, 패스 실수가 나왔습니다! 페르난지뉴에게 향하던 스톤스 선수의 패스가 중간에 잘렸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던 센터 서클을 중심으로 시도하는 전방 압박 이뤄낸 성과죠! 위건 선수들, 포웰 선수를 중심으로 재빨리 역습을 시도하는군요!”

    마침내 결과로 이어질 수 있는 줄기를 하나 뽑아냈다.

    상대의 후방과 중원으로 이어지는 연결 고리 사이에 침투하는데 성공한 안토루가 발을 쭉 뻗어 공의 궤도를 꺾었고, 공격권을 뺏어오는데 성공한 위건은 곧장 공을 포웰에게 밀어주며 역습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공격권을 빼앗기기 무섭게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이 공을 소유하고 있는 포웰을 향해 달려들었으나, 이미 속도를 붙인 포웰은 어렵지 않게 압박을 떨쳐낼 수 있었고, 중앙으로 달려오다가 그대로 라인을 바꿔 측면으로 빠지는 우측 윙 제이콥스를 향해 패스를 건네주는데 성공했다.

    제이콥스는 자신의 발 아래로 굴러오는 공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크로스로 올렸고,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는 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파앙!

    “워우!”

    골라인을 지키고 있던 에데르손이 궤도를 읽기 무섭게 재빨리 밖으로 빠져나와 펀칭하는데 성공하면서 위기를 모면하자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토해내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경기 초반 갑작스레 찾아온 위기에 바짝 올라왔던 긴장이 클리어링과 함께 한순간 풀어진 것이다.

    하지만 하마터면 실점으로 이어질 수 있었던 상황을 겪은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은 전과 달리 바짝 굳은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며 침을 삼켰다.

    오늘 경기는 다르다.

    지금 필드 위에 올라와 있는 위건은 그들이 여태까지 상대해온 팀들과는 분명 다르다는 것을 그 짧은 순간 느낀 것이다. 그리고 실제 경기 양상도 여태까지 맨체스터 시티가 보여준 것과 많이 다르게 진행되었다.

    그 점을 누구보다 확실히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페르난지뉴는 공을 가지고 이동하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패스를 줄 곳이 마땅치 않아!’

    공을 중심으로 짜임새 있는 진영을 구축한 위건.

    공이 이동하는 곳엔 항상 그들의 숫자가 한 명씩 더 많았고, 공을 안전하게 빼내야 할 공간도 꼭 누군가 머물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니.

    이래저래 맨체스터 시티의 입장에선 경기를 자기들이 원하는 대로 이끌고 나가기엔 껄끄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그 말인즉, 공이 위치해 있는 공간이 아니라면 분명 어딘가 틈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소리.

    포웰의 압박을 받으며 이동하던 페르난지뉴가 마음을 정한 듯, 공을 길게 뽑았고, 하늘을 높게 떠올랐던 공은 그대로 상대의 최후방에 위치해 있던 아구에로를 노리고 날아갔다.

    오늘 경기가 시작되고 공을 만질 기회가 없었던 아구에로는 떨어지는 공을 노려보면서 자리를 단단히 잡았다.

    익숙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이기기 위해서라면 결과를 만들어야 하는 게 프로였고, 그 해결사가 되어야 하는게 바로 자신이었으니까.

    그런 생각을 하면서 눈동자로 떨어지는 공을 노려보던 아구에로는···.

    “?!”

    등뒤에 바짝 달라붙어 있던 상대 수비수의 무게가 갑자기 감쪽같이 사라지자 당황한 듯, 고개를 위로 올렸고, 예상치 못 한 그림자가 얼굴 위에 드리워지자 당황해 눈을 떨었다.

    아니, 어느 누구라도 그와 같은 상황이라면 당황할 수밖에 없으리라.

    왜냐면 날고 있었으니까.

    상대 수비수는 떨어지는 공을 향해 높이, 마치 날듯이 떠올라 공을 걷어내기 위해 머리를 쭉 뻗고 있었고, 아구에로가 반응하기 전에 공을 건드리면서 맨체스터 시티의 롱 패스를 중간에 끊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렇게 클리어 이후 밸런스가 무너진 센터백은 잔디 위에 떨어지며 바닥을 굴렀지만 시선은 여전히 공을 쫓고 있을 정도로 열정적이었고, 해당 장면을 지켜보면서 존위 해설자는 침을 삼켰다.

    “각오가 대단한 위건 선수들입니다. 어떻게든 흐름을 내주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실히 돋보이는군요.”

    “하지만 저 클리어도 결국 맨체스터 시티 선수의 발에 떨어졌습니다. 공격권은 여전히 맨체스터 시티에 있는 상황이니, 위건 입장에선 불안한 상태가 아닌가요?”

    “평소의 맨체스터 시티라면 그렇겠지요.”

    “평소의 맨체스터 시티요···?”

    존위 해설의 말에 캐스터가 긴장한 얼굴로 되물었고, 존위 해설은 곧장 고개를 끄덕여주며 말을 이었다.

    “아마 맨체스터 시티는 이번 시즌 들어 처음일 겁니다. 위건처럼 투박하지만 강한 압박을 토대로 경기를 운영하는 팀을 상대로 만난 적이 말입니다. 사실 전반기 내내 압도적인 포스를 보여준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평범한 팀이라면 섣불리 시도할 수 없는 운영이지만, 그런 만큼 만약 위건의 시도가 제대로 통한다면···.”

    툭, 한 차례 말을 끊은 존위 해설은 떠오르는 기대를 숨기지 않은 얼굴로 경기장을 내려보며 말했다.

    “분명 폭풍이 몰아칠 겁니다. 배가 뒤집힐 정도로 매서운 폭풍이 말이죠.”

    그렇게 존위 해설은 사설을 끊으면서 이어지는 장면을 설명하기 시작했고···.

    ‘···왔다!’

    맨시티의 선수들이 공을 다시 한 번 후방으로 돌리는 순간을 포착한 안토루의 안광이 반짝였다.

    헤딩 클리어를 받아낸 사네가 공을 그의 뒤에 위치해 있던 진첸코에게 넘겨주는 상황에서 진체코와 오타멘디, 그리고 케빈 데 브루위너의 위치를 확인하기 무섭게 그의 머리 안으로 한 가지 상황이 그려진 것이다.

    그 후 진첸코가 소유하고 있던 공을 살며시 필드 안쪽으로 꺾는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안토루는 확신한 얼굴로 달리기 시작했고, 패스 동작을 이어가던 진첸코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안토루를 확인하고 당황해 발이 굳고 말았다.

    ‘패스 방향을 읽혔다···!’

    ‘그렇다고 거기서 발을 멈추면 되겠냐!’

    아주 짧은 망설임.

    그 망설임을 틈타 재빨리 진첸코와의 거리를 좁히는데 성공한 안토루는 계속해서 자신의 후방을 경계하는 것을 늦추지 않았다.

    왜냐면···.

    투웅, 턱!

    “!”

    결국 당황한 선수가 패스를 시도할 곳은 그가 처음에 보았던 장소였을테니까.

    사네에게서 공을 받으면서 케빈과 오타멘디, 두 가지 선택지를 고민했던 진첸코가 범한 실수는 바로 그 두 선택지 모두 공의 진행 방향이 같다는 것.

    아직 레프트 백이 익숙하지 않은 어린 선수가 범한 실수를 재빨리 캐치한 안토루의 재치가 번득인 움직임이었고, 그 움직임을 통해 공을 빼앗는데 성공한 안토루는 곧장 속공에 들어갔다.

    진첸코가 뒤늦게 그의 뒤를 쫓아 달려오고 있었지만 달리기에 자신이 있었던 안토루는 오히려 속도를 붙여 그를 따돌렸고, 슬쩍 반대 쪽을 살폈다.

    그의 눈에 수비를 하기 위해 달려오고 있는 오타멘디와 스톤스, 그리고 반대편에서 함께 쇄도 중인 그의 팀 메이드 마세이가 보였다.

    공격과 수비가 숫자를 맞춘 2대2 상황.

    거기에 골키퍼인 에데르손이 각도를 좁히기 위해 달려오고 있는 것도 눈에 보였다.

    그 상황에서 여전히 공을 발등으로 밀며 드리블을 치고 달리던 안토루는···.

    뻐엉!

    그대로 오른발을 휘둘러 기습 슈팅을 시도했고, 안토루의 슈팅을 확인한 선수들의 얼굴이 제각기 변화했다.

    먼저 그의 뒤를 쫓던 오타멘디와 스톤스는 당황을, 반대편에서 패스를 기대하고 있던 마세이는 놀란 얼굴로 공기를 타고 날고 있는 공의 꼬리를 쫓아 시선을 옮겼고, 공을 막아야 하는 입장에 서있던 에데르손은···.

    사악!

    골키퍼라면 경험하고 싶지 않아하는 최악의 느낌을 얼굴로 그대로 표현하면서 잔디 위로 쓰러졌다.

    자신의 손을 넘어 그대로 골망에 걸리는 슈팅을 막지 못했다는 죄책감과 좌절감이 주는 최악을 말이다.

    순간 정적이 찾아온 경기장은 위건 선수들과 그 팬들이 내지르는 함성 소리로 시끄러워졌고, 점수를 가리키는 전광판의 숫자가 변했다.

    1대0.

    위건의 리드.

    에티하드 경기장에 몰아친 폭풍에 결국 배가 뒤집히고 말았다.

    하지만 배를 침몰 시킨 폭풍은 거기서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삐이이익!

    다시 시작된 경기에서 선언된 패널티 킥.

    박스 안에서 공을 잡은 안토루의 돌파를 막아서던 중, 스톤스의 반칙이 선언되면서 맨체스터 시티라는 배는 난파 위기를 맞았다.

    ***

    “흐아···. 이건 좀 크겠는데···?”

    관중석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던 케이트가 짧게 신음을 흘리며 중얼거렸다.

    시합이 시작된지 이제 겨우 10분 정도가 흘렀을 뿐인데 벌써 2대0이라니.

    게다가 이곳은 다른 곳도 아닌 맨체스터 시티의 홈구장인 에티하드 경기장이 아니던가?

    침을 꿀꺽 삼킨 케이트는 슬쩍 시선을 돌려 주변을 살폈고, 경기 전과 다르게 지독한 침묵이 감도는 관중석을 둘러본 후 다시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만약 저 사람들이 본인이 지금 두 골을 넣는데 성공한 안토루의 여동생이라는 걸 알게 된다면 과연 어떤 말을 할까?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생각에 대해 떠올렸던 케이트는 얼른 고개를 털어낸 뒤 물을 삼키면서 조그만 목소리로 혼잣말을 속삭였다.

    “···최대한 조용히 있다 가야겠다.”

    괜한 위험을 스스로 무릅쓸 이유가 없었으니.

    오늘은 경기만 지켜보고 떠날 생각을 하던 케이트는 슬쩍 고개를 들어 경기장 분위기를 살폈다.

    패널티 킥을 성공 시킨 안토루를 중심으로 모여 있던 위건 선수들은 서로 기합을 다지면서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고, 2점을 실점한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은 애써 박수를 치면서 늘어지는 분위기를 되살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섞여 있는 재혁은···.

    “···?”

    케이트는 자신이 지금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물음표가 떠오른 두눈을 비볐다.

    그렇게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떠보았지만, 여전히 그대로인 것을 확인하곤 케이트는 벙찐 얼굴로 허탈하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지금 상황에서 넌 웃음이 나오니?”

    선수들 사이에 섞여 있는 재혁은 그 상황에서 웃고 있던 것이다.

    < 144. 폭풍속에서 웃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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