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43화 (143/225)

< 143. 인연의 선택지 >

“안토루. 적어도 목소리는 바꾸려고 노력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 들켰어?”

“그럼 설마 그거에 속을까요? 이미 관련 브리핑을 할 때 안토루의 이름을 코치님들께 들었다고요.”

재혁의 말에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한 안토루는 이내 손을 거두었고, 다시 빛을 찾은 재혁이 고개를 돌렸다.

과연 그의 예상대로 익숙한 얼굴의 안토루가 익숙한 표정을 지어보이면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얼굴이며, 표정이며, 그리고 행동이며, 모든 게 호주에 있을 때와 똑같았지만, 오직 하나. 서로 입고 있는 유니폼이 다르다는 사실 하나를 확인하면서 재혁은 빙그레 입술을 끌어올린 후 말했다.

“오랜만이에요. 설마 안토루도 영국으로 왔을 지는 몰랐어요.”

“흐흐, 모르는 게 당연하지. 남들처럼 이적료로 몇 천만 파운드를 받고 온 게 아니라 순전히 임대 계약, 그것도 입단 테스트까지 치르고 여기에 합류한 거거든. 오히려 이걸 알아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대단한 거지.”

“그래도 영국으로 올거면 연락 좀 해주시지 그랬어요? 그럼 인사라도 했을 텐데 말예요.”

“글쎄. 모든 게 확정된 게 아니었으니까. 사실 지금도 불안불안한 상태거든. 굳이 비교하자면 비정규직 상태라고 할까?”

어깨를 으쓱이며 대꾸한 안토루는 웃으면서 뺨을 긁적였고, 그 모습을 확인한 재혁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긍정적이고 유쾌한 성격의 안토루지만, 나름 불편한 이야기를 할 때면 나오는 습관적인 행동을 발견한 것이다.

그 습관을 바로 눈으로 읽은 재혁은 애써 더 이상 묻지 않았지만, 안토루가 미소를 띤 얼굴로 끊어진 대화를 이었다.

“입단한지 두 달이 지났는데 이제 겨우 출장을 시작했어. 이것도 경쟁 선수가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얻게 된 기회지. 아마 원래대로라면 시즌이 끝날 때까지도 제대로 된 출장을 보장받지 못했을 걸? 뭐, 나야 원래 출장을 놓고 경쟁하는 건 이미 익숙하니까 그런 걱정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지 말라구.”

“딱히 걱정 안 했는데요?”

“표정으로 다 보이는데 누굴 속이려고? 내가 케이튼줄 아냐? 너희 둘 다 나를 속이려면 아직 멀었어. 적어도 내 앞에선 솔직해져도 돼.”

안토루의 마지막 말에 재혁은 그저 미소를 보일 뿐이었고, 재혁의 미소를 확인하면서 안토루 또한 한 차례 크게 웃어보이더니 재혁의 어깨를 토닥인 후 천천히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경기장에서 다시 보자며, 후에 시간이 나면 또 이야기를 나누자는 대화를 마지막으로 말이다.

그렇게 쭉 멀어지려던 안토루는 무언가를 떠올리고 재혁을 불러 세운 뒤 말했다.

“아, 그런데 재혁아.”

“예?”

“미안하다. 내가 너 좀 팔았다.”

팔았다는 짧은 말에 잠시 발을 멈춰 세운 재혁.

의미가 모호했으나 그 말에 담겨 있는 진의를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던 재혁은 씨익 웃었다.

아마 호주에서 같은 팀에서 뛰던 시절 경험한 자신에 대한 정보를 현 소속팀 코치진들과 공유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런 안토루의 말에 재혁은 가뿐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안토루와 관련된 이야기를 코치님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으니, 서로 비긴 걸로 하죠?”

“그래?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할 게 있나?”

“그럼요. 어쩌면 제가 안토루에 대해 안토루 본인보다 더 잘 알고 있을 걸요?”

“어째 고마우면서도 좀 무서운데.”

“무서워 하셔야 할 건 그 부분이 아니에요.”

뒷머리를 긁적이며 대답하는 안토루를 향해 짧게 대꾸한 재혁.

그런 재혁의 목소리를 들은 안토루는 눈을 동그랗게 떴고, 안토루와 시선을 맞추게 된 재혁은 그를 향해 예의 자신에 찬 미소를 보이면서 말했다.

“아마 안토루가 코치분들과 이야기를 나눴던 건 반 년전에 같이 뛰면서 경험한 저에 대한 정보겠죠?”

“그렇지.”

“하지만 과연 반 년 사이에 제가 얼마나 더 성장했을까요?”

“···!”

재혁의 물음에 쉽사리 답을 할 수 없었던 안토루는 굳은 얼굴로 조용히 재혁을 바라보고만 있었고, 그런 안토루를 향해 재혁은 계속해서 말했다.

“설마 지금 그때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제 모습을 예상하고 경기를 뛰게 된다면···, 오늘 위건은 완벽하게 질 겁니다. 반항할 기회도 없이 말예요. 그러니까···.”

척, 안토루를 향해 엄지를 들어보인 재혁은 그대로 천천히 멀어지면서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남기고 등을 돌렸다.

“봐주지 말고 서로 최선을 다해요.”

***

“많이 친했나봐? 대화를 제법 오래 나누던데.”

“호주에서 함께 뛸 때 저랑 제일 친한 선수였어요. 그리고 지금도 친해요.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그건 나중에 경기 끝나고 나눠야죠.”

자리로 돌아오자 케빈이 재혁에게 물었고, 재혁은 그에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시드니 FC에서 오랫동안 뛴 것은 아니었으나, 안토루와는 시간과 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특별한 유대로 엮여 있었기에 재혁은 바로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재혁의 말을 들은 케빈은 티를 내진 않았지만 자뭇 놀란 얼굴이었다.

지금까지 재혁과 함께 대화를 나눈 적이 적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확신에 찬 대답을 들은 적이 손에 꼽았기 때문이었다.

놀람은 곧 호기심으로 변했고, 케빈은 자리를 찾기 위해 걷는 재혁의 곁을 따라 걸으면서 또 한 번 물었다.

“저 친구가 그렇게 특별한 친구야? 브리핑 때 확인한 모습은 오히려 평범함에 가까웠던 것 같은데.”

“맞아요. 제대로 보셨어요. 안토루는 평범하죠.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거에요. 안토루는 그 평범함을 이용할 줄 아는 선수거든요.”

“평범하기 때문에 특별한 점을 이용할 줄 아는 선수라고···?”

“케빈, 솔직하게 말할까요?”

되묻는 케빈을 향해 재혁이 발을 멈추면서 슬쩍 시선을 옮겼고, 필드 반대편에 서서 경기를 준비하고 있는 안토루를 눈에 담으면서 말했다.

“저는 지금까지 공을 차면서 안토루처럼 제 생각을 ‘바로 읽어주는’ 선수를 만난 적이 없어요. 호주에서도, 한국에서도, 그리고 이곳 맨체스터 시티에서도 말예요.”

“!”

“아마 위건을 상대할 때 안토루라는 선수를 개별적으로 구분해서 본다면 크게 문제될 게 없겠지만, 만약 저곳에 안토루를 제대로 사용할 줄 아는 선수가 있다면···.”

짧게 콧등을 긁적인 재혁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케빈을 바라보며 웃었다.

“아마 지금까지 상대한 어떤 팀들보다 가장 까다로운 적을 만나게 된 걸 거예요.”

“···그런 말을 하면서 넌 왜 웃고 있는 거냐?”

“글쎄요.”

살짝 낮아진 목소리로 묻는 케빈의 말에 재혁은 어깨를 으쓱인 뒤 답했다.

“걱정도 들지만 반 년동안 서로 쉬지 않고 달려온 만큼,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은근히 기대 중이거든요.”

***

“안토루, 준비 됐어?”

“준비는 오늘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끝났습니다.”

“그래? 자신만만한데? 지난 주 미팅을 할 때랑은 너무 다른 모습인 거 아냐?”

위건의 주장, 몰세이의 말에 안토루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현재 2부 리그도 아닌 3부 리그인 리그 원에 속해 있는 위건 FC.

상황이 상황인 만큼, FA컵은 그들에게 있어서 여러 기회를 노릴 수 있는 유일한 무대였고, 그 점은 안토루에게도 마찬가지였기에 지난 주 미팅에서 코치진들과 대화를 나눌 때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모두 꺼내놓았다.

재혁에 관한 이야기를 말이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늘어놓을 때, 안토루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던 몰세이는 안토루의 어깨를 툭툭 털어주며 말했다.

“그 친구에 대해 이야기를 할 땐 그렇게 자신 없어 하더니.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분거야? 어떻게 상대해야 이길 수 있을 지 모르겠다며? 그 사이 생각이 바뀐 거야?”

“아뇨. 재혁에 대한 제 평가는 여전히 그대롭니다. 오히려 더 무서워졌어요. 영국에서 뛰면서 제가 알던 것보다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간 것 같아서 말예요. 하지만···, 이제 경기장에서 만나게 된 이상, 없는 자신감도 끌어 써야죠. 90분이 지났을 때 제가 보고 싶은 건 경기에서 이긴 제 모습이니까요.”

“호오. 좋아, 좋아. 그런 자신에 찬 모습을 기대했던 거라고. 그 자신감을 잊지마.”

팡팡, 안토루의 등을 쳐준 모세이는 다음 선수와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멈췄던 발을 움직였고, 멀어지는 주장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안토루는 슬쩍 고개를 돌려 재혁을 찾았다.

경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집중력을 끌어 올리기 위해 잠시간 눈을 감고 명상 중인 재혁을 말이다.

‘솔직히 이길 자신은 없다. 예나 지금이나 저녀석의 플레이를 보고 있자면 경외감밖에 들질 않으니까. 사실 지금까지도 어떻게 저런 녀석이랑 같이 뛰었는지, 이해가 되질 않아. 그렇지만···.’

꿀꺽, 침을 삼킨 안토루가 펼치고 있던 손을 모아 주먹을 쥐었다.

아무리 이길 수 있을 것 같지 않아도, 경외감이 들어도, 자신 또한 이곳까지 온 목적이 있다.

그 목적과 목표를 위해서라도 오늘 경기는 ‘특별한’ 경기가 되어야 한다. 아니, 되게 할 것이다.

바로 내가!

삐이익!

상념이 끝맺기 무섭게 마침내 주심이 입에 물고 있던 휘슬을 불었고, 필드 위에 올라와 있는 22명의 선수들이 동시에 몸을 움직이면서 드디어 FA컵 16강 전의 시작을 알렸다.

***

신기하게도 오늘 경기를 위해 준비한 위건과 맨체스터 시티의 전술은 서로 닮은 구석이 제법 있었다.

일단 두 팀 모두 4-2-3-1을 기본 전술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같았고, 수비 라인을 최대한 높게 끌어 올려 11명의 선수들이 모두 경기에 영향을 줄 수 있도록 준비했다는 점도 비슷했다.

그 외에서도 특별히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면···.

“재밌군요. 두 팀 모두 핵심이라 볼 수 있는 선수들을 센터 서클에 묶어 뒀어요.”

중계석에 앉아 오늘 경기의 해설을 맡은 존위가 신기하다는 듯이 눈을 반짝였다.

해설자로만 이제 30년 이상의 삶을 살아온 존위는 그간의 경험과 공부를 통해 다른 해설자들보다 설명이 듣기 편하다는 장점이 있었는데, 그러한 장점은 바로 지금처럼 어지럽게 펼쳐지는 상황에서도 맥을 정확히 짚는 것이 그 시작인 것이다.

캐스터는 존위 해설의 말에 귀를 쫑긋이더니 좀 더 자세한 풀이를 부탁했고, 존위 해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계속해서 입을 움직였다.

“경기를 계속 지켜보신다면 위건이 최전방 공격수인 안토루를 중심으로 펼치는 공격진과 맨체스터 시티의 공격진이 매우 비슷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두 팀 모두 수비에서부터 공격이 시작된 점이 같았고, 또 각팀의 최전방 공격수인 안토루와 아구에로가 공격이 시작되기 전까진 항상 발꿈치를 센터 서클 끝에 걸치고 있는 점이 같죠.”

“그게 과연 어떤 의미일까요?”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선 강팀보다 약팀의 입장에서 설명을 해드리는게 편하겠군요. 혹시 헷갈리실 까봐 말씀을 드리자면 여기서 약팀이란 위건의 입장을 말하는 겁니다.”

옅은 웃음 소리로 농담을 섞은 존위 해설은 곧 목을 가다듬으면서 표정을 고쳤고, 말을 하면서도 계속해서 작성한 노트를 슬쩍 내려보며 말을 시작했다.

“보통 과르디올라 감독의 맨체스터 시티를 만나게 된다면 상대 팀은 두 가지 선택지를 강요 받게 됩니다. 라인을 내려 수비를 할 것이냐, 혹은 상대가 마음대로 공을 점유하지 못하도록 맞불을 놓을 것이냐. 이 두 가지 선택지들 중 하나를 고르게 되면 감독은 그에 맞춰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하기 위한 그들만의 전술을 준비하죠. 하지만 오늘 위건은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네. 오늘 위건은 다른 팀들과 달리, 두 가지 선택지 중 하나도 고르지 않았어요. 그들은 그들만의 세 번째 선택지를 가지고 오늘 경기를 준비한 겁니다.”

“···세 번째 선택지요?!”

되묻는 캐스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인 존위 해설은 재밌다는 얼굴로 위건 선수들을 한 명씩 살피면서 말을 이었다.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맨체스터 시티와 같은 ‘공간론’을 이용한 전술. 위건 감독은 오늘 그걸 준비해서 나온 거에요. 이러니 재밌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

“!”

“정말 재밌어요. 누구의 생각으로 시작된 것인진 모르겠지만, 맨체스터 시티를 노린 분명한 노림수 입니다. 과연 이 노림수가 어떤 식으로 경기에 영향을 줄지 지켜보는 것 또한 오늘 경기의 흥미 요소들 중 하나가 될 겁니다.”

말을 끝내면서 마이크를 고친 존위 해설은 눈을 내려 중계 화면을 보았다.

정확히는 두 선수, 센터 서클에서 교차하고 있는 위건의 안토루와 맨체스터 시티의 재혁을 말이다.

호주에서부터 인연을 이어와, 이제는 영국에서 다시 만나게 된, 한 때의 전우에서 이제 적으로 만난 두 사람.

리그의 새로운 바람이 되어줄 그 둘을 내려보며 존위 해설은 물을 한 모금 삼킨 후 웃었다.

그렇게 경기는 빠른 템포로 진행됐다.

< 143. 인연의 선택지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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