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1. 늦지 않았다 >
비록 다른 대회들에 비하면 중요도가 많이 떨어지는 리그 컵에 대한 이야기였지만, 축구 종가라 불리는 영국에서 열린 대회의 결승전이었던 만큼 사람들의 관심이 적지 않았기에 일간지들의 헤드 라인들이 온통 그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이다.
게다가 그 무대에서 만난 상대가 맨체스터 시티와 첼시였으니.
쇼 호스트인 제퍼슨은 연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사실 맨체스터 시티가 우세에 있다는 건 누구라도 예상이 가능했겠지만, 그 무대의 주인공이 최재혁 선수가 될 거라곤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던 일이죠.”
“그 뿐만이 아닙니다.”
제퍼슨이 말을 끝내자 그의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리버풀의 수비수에서 이제는 스포츠 미디어 관련인이 된 제이미 캐러거가 곧장 그의 말을 받았다.
“어느 누구도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런 선수 구성으로 결승전에 임하게 될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 했죠. 세상에, 선발로 출장한 선수들의 평균 연령이 20살이 되지 않는다니. 대체 어느 누가 이걸 예상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것도 결승 무대에서 말입니다.”
“맞습니다. 일각에선 선발 선수들이 발표되기 무섭게 맨체스터 시티 쪽에서 경기 일정 때문에 경기 자체를 포기한 게 아닌가, 라는 말까지 나왔었거든요. 솔직히 그 당시엔 크게 틀린 말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위화감이 없었죠.”
“크룩스 해설 위원님도 그때 당시엔 제법 비슷한 말씀을 소셜 네트워크에 남기시지 않았던가요?”
“하하. 선발 명단을 처음 확인했을 땐 저도 제법 큰 충격을 받았었거든요. 아마 저만 그런 충격을 받았던 게 아닐 겁니다. 그때의 분위기가 바로 설명해주고 있죠.”
제퍼슨이 가볍게 쿡 찌르자 크룩스는 호탕하게 웃어보이면서 말을 계속 이었다.
지금은 웃으며 말하고 있지만, 당시엔 어안이 벙벙했던 순간을 회상하면서 말이다.
“아무리 리그 컵이라고는 하지만 시즌 첫 타이틀 매치였어요. 그 자체로도 분명 의미가 있는 무대였던 게 분명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과르디올라 감독은 선발 선수들을 U-21팀에서만 뽑는, 모두가 미쳤다고 생각할 법한 판단을 내리면서 한 번 충격을 주더니, 그 선수들로 우승 타이틀을 거머쥐면서 또 다른 충격을 사람들에게 선사했습니다. 이건 평범한 감독이라면 절대로 시도는커녕 생각도 못 할 발상이었죠.”
“그렇다면 당시 경기를 복기해볼까요? 준비된 화면 보여주세요.”
제퍼슨이 손짓을 보내자 미디어팀 스태프들은 얼른 기기를 조작해 미리 준비해온 화면을 영상으로 띄웠고, 그렇게 스크린 위로 리그컵 결승전의 전반전 주요 장면들이 천천히 재생되기 시작했다.
가장 처음에 나온 장면은 선축 이후 첼시가 강력하게 맨체스터 시티를 압박하는 부분으로, 아자르를 중심으로 양측면과 중앙에서 첼시가 쉴 새 없이 상대 골문을 노리고 압박하는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보면서 캐러거와 크룩스는 동시에 말했다.
“언뜻 보기엔 첼시의 공세가 대단해보이지만, 맨체스터 시티의 수비를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는 부분이죠.”
“캐러거씨의 말씀처럼 첼시의 공격은 첼시다웠다, 라고 평할 수 있을 정도로 매서웠지만, 그 공격을 무리없이 막아낸 어린 선수들을 칭찬해야죠. 특히 최재혁 선수를 말입니다.”
“저기서도 최재혁 선수를 칭찬합니까? 계속 듣고 있다보니 칭찬 릴레이가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군요.”
“그럴 수밖에 없으니까요.”
장난기가 옅게 섞인 제퍼슨의 말에 얼른 대답한 크룩스는 싱긋, 초승달을 그린 눈으로 즐거운 듯 영상을 바라보며 설명을 계속 했다.
“대충 본다면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이 합심해서 첼시의 공세를 틀어막은 것처럼 보일 수 있는 상황이죠.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본다면···, 바로 이 부분. 아마 캐러거씨라면 제가 짚은 부분의 의미를 바로 아시겠지요?”
크룩스가 멘트를 넘기자 캐러거는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모를 수가 없죠. 몰라선 안되죠. 수비의 핵이 되어주고 있는 선수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전 그동안 수비수로 뛰었던 커리어를 모두 반납해야 하니 말이죠.”
“수비의 핵이요?”
“찾긴 어렵지만 간단한 원리입니다. ‘핵을 중심으로 수비 블록이 열리고, 닫힌다.’ 그 기본적인 전술을 맨체스터 시티에서 선보인 것이고, 그 중심 역할을 최재혁 선수가 맡고 있는 것이죠. 하지만···, 최재혁 선수가 소화한 역할은 평범한 수비 핵이 아니에요.”
“시발점.”
캐러거가 설명할 부분에서 크룩스가 짧은 단어로 보충을 해주자 캐러거는 그의 말에 수긍한다는 듯한 미소를 보이며 말을 이었다.
“수비 상황에서의 압박과 로테이션, 그리고 방향까지. 모든 부분의 시발점이 되어주는 것이 바로 최재혁 선수가 소화한 수비 핵의 역할이었던 겁니다. 한 마디로 최재혁 선수가 없었다면 맨체스터 시티는 어떤 식으로 수비를 해야 할지, 그 시작 점조차 찾을 수가 없었다는 말이죠. 일반적인 수비 핵과는 비중이며 역할까지 완전히 다른 종류의 핵이었습니다.”
“그게···, 가능한 일인가요?”
“가능한 일인 게 아니라, 바로 앞에 보이지 않습니까? 저 선수는 그걸 가능하게 했어요. 그게 중요한 거죠.”
“!”
“하지만 아쉽게도 저 블럭 수비도 한 차례 첼시에게 파훼를 당해버리죠. 바로 다음 부분에서 말입니다.”
찰칵, 화면이 넘어가는 소리와 함께 다음 영상이 재생됐고, 스크린 안에선 아자르가 맨체스터 시티의 공간을 뚫고 들어가는 장면이 흘러나왔다.
네메챠의 어설픈 압박 이후 와르르 무너지기 시작한 맨체스터 시티의 수비 진영.
뒤늦게나마 재혁이 나서서 막아보려 했으나, 이미 커다란 구멍이 뚫린 진영을 홀로 메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고, 결국 손 쓸 틈도 없이 실점으로 이어진 것이다.
해당 장면을 지켜보면서 세 사람은 아자르의 개인 전술에 의한 첼시의 성공적인 공격을 칭찬하면서도 동시에 아쉬워했다.
네메챠의 자리에 경험이 있는 선수가 있었다면 저렇게 쉽게 뚫리지 않았을 거라면서 말이다.
물론 아자르의 기술이 뛰어났던 게 사실이었지만, 그만큼 그들은 아쉬웠던 것이었다.
어린 선수들이 보여준 정신력과 기술력이 조금 더 이어질수도 있었음에 대해서 말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수비는 뚫렸고, 경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동점골과 역전골.
정상의 자리에 준비되어 있는 왕관을 쓰기 위한 과정.
맨체스터 시티는 그 과정을 완벽하게 소화해내면서 첼시를 물리치고 트로피를 차지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도 역시 중심 역할을 톡톡히 한 재혁에 대해 언급하며 셋은 자연스레 박수를 쳤다.
“처음에 했던 말처럼, 최재혁 선수가 모든 걸 결정지었습니다. 수비도, 공격도, 그리고 결과까지도 말입니다. MOM이 최재혁 선수의 차지인 것은 당연한 일이었죠.”
“중간에 캉테 선수의 태클에 의해 한 차례 크게 바닥을 구르는데요. 사실 이 부분을 조금만 자세히 본다면 캉테 선수를 비난할 게 아닙니다. 그도 최재혁 선수의 기술에 당한 거니까요. 아마 평범한 선수의 드리블이었다면 그의 태클은 분명 공에 닿았을 겁니다. 최재혁 선수의 기술적인 턴이 파울을 이끌어낸 거였죠.”
“그 탓에 안타깝게도 머리에 충격을 받았다고 들었는데요. 다행히 가벼운 부상이라고 과르디올라 감독이 인터뷰를 남겼죠. 하지만 머리에 충격이 있었던 만큼, 모쪼록 빠른 쾌유를 바랍니다.”
“자 그럼 이제 다음 이야기로 넘어갈까요? 리그 컵이 끝나고 이제 FA컵과 유로파 리그의 일정이 본격적으로 시작이 됐는데요···.”
***
“검사 결과, 이상 무. 그러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말고 이제 그만 가봐.”
“그런 말 안해도 갈 거였거든? 너, 내가 널 걱정해서 계속 남아 있던 것처럼 말한다?”
“아니었어?”
“난 어디까지나 코치님께 숙소를 잡아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려고 병원에 온 거라구. 맘대로 오해하지 마.”
“그러면 다행이고.”
“흥. 바보.”
“···.”
어제까진 둘 사이의 분위기가 제법 좋던 거 같은데?
재혁과 케이트를 곁에서 지켜보던 미켈 코치는 하룻밤 사이에 뒤집어진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치를 보며 콧등을 긁적이다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그냥 구단이 빌린 방들 중 남는 걸 준 것밖엔 내가 한 일이 없는데···.”
“그래도 그 덕에 제가 잘 머물렀잖아요? 다시 한 번 감사드려요.”
“뭐, 그렇다면야···.”
재혁에게 말할 때와는 전혀 다른 목소리 톤으로 자신에게 말하는 케이트가 어색했던 미켈은 연신 뺨을 긁적이다가 택시를 알아보겠다며 먼저 자리를 벗어났고, 그렇게 둘만 남게 되자 또 한 번 어색한 공기가 주변을 감싸다가···.
“···정말 아무 이상 없는 거지?”
케이트가 차창 너머로 시선을 둔 채로 재혁에게 넌지시 물었다.
자신과 눈을 마주추지 못하고 그저 뺨만 붉히면서 말을 묻는 케이트의 옆모습을 웃으며 바라보던 재혁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전혀 문제 없대. 오히려 너무 건강해서 조심하라던데? 아픈 곳이 없다고 정기 검진 받는 걸 잊지 말라면서 말야. 그러니까···.”
슬쩍 케이트의 곁에 다가간 재혁은 천천히 손을 뻗었고,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를 쓸어주며 웃었다.
“오늘 밤엔 걱정하지 말고 푹 자. 어제 제대로 못 잤지? 얼굴에 다 티난다.”
“누···, 누가 잠을 못 자?”
“그래? 다크 서클이 길게 내려왔는데?”
“뭐? 분명 화장으로 감췄···.”
손거울을 꺼내려고 가방에 손을 넣던 케이트의 움직임이 그대로 굳었다.
재혁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반응하다가 모든 게 드러났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것이다.
이제는 빨갛다 못 해 터질 정도로 뺨이 붉어진 케이트는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로 황급히 고개를 돌렸고, 그런 케이트를 옆에서 지켜보던 재혁은 소리내 웃다가 괜찮다며 케이트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던 사이 미켈 코치가 택시가 도착했다며 준비되면 나오라고 말했고, 코치에게 고개를 끄덕인 재혁은 나중에 기회가 되면 또 보자는 말을 남기고 떠나려다가 짧은 탄성과 함께 케이트에게 돌아가 손을 뻗었다.
여전히 붉은 얼굴을 손으로 감추고 있던 케이트는 재혁의 빈손을 내려보며 퉁명스레 물었다.
“왜?”
“생각해보니 번호가 없잖아. 휴대폰 줘봐. 내 번호 줄게. 그래도 타국에서 만난 동창인데, 연락은 자주 해야지. 영국 번호 있지?”
“어, 응···. 있긴 한데···.”
“응? 이 휴대폰 아직도 써? 이거 호주에서부터 계속 쓰던 거 맞지?”
“아직 멀쩡한 거야! 전화만 잘 걸리면 됐지! 그러는 너도 휴대폰 그대로네!”
“내꺼도 전화는 잘 걸리니까 굳이 바꿀 필요가 없었거든. 그럼 이걸로 저장하고···.”
“재혁! 비행기 시간 맞추려면 이제 출발해야 돼!”
“네, 지금 가요!”
코치의 재촉에 알겠다고 대답한 재혁은 케이트의 번호를 저장한 뒤 가방을 어깨에 걸쳤고, 기숙사에 도착하면 연락하라는 말을 전하면서 손을 흔들었다.
그런 재혁을 향해 혀를 빼죽 내밀어 보였던 케이트는 곧 재혁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자···.
“후우, 내가 왜 이러는 거야?”
얕은 숨을 토해낸 뒤 머리칼을 헝클었다.
만나면 좋은 말만 해주기로 마음 먹어 놓고 막상 만나면 항상 이렇게 일이 틀어지니···.
생각과 너무 다르게 흘러간 현실에 또 한 번 한숨을 토했던 케이트는 시계를 확인했고, 기차를 타기 위해 이동을 시작했다.
마침 병원 앞에서 대기 중이던 택시에 무사히 오를 수 있었던 케이트는 기사에게 가야할 터미널을 알려주었고, 이내 폭신한 쿠션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밤을 설쳤던 탓에 쌓인 피로가 뒤늦게 찾아오는 느낌에 자연히 눈이 감긴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눈을 감고 자리에 앉아 있던 케이트는 가방 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무거운 눈꺼풀을 살며시 끌어올리다가 재혁의 이름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라 얼른 휴대폰 잠금을 풀었다.
[맨체스터로 올 일이 있으면 언제든 연락해. 숙소부터 시작해서 이동 수단까지, 이번엔 내가 알아봐줄테니까.]
“풉. 바보. 그래도 은근히 신경이 쓰이긴 했나 보네?”
그리고 실웃음을 흘렸다.
다행히다, 라는 생각을 떠올리면서 말이다.
재혁에게 얼른 알겠다는 답장을 보낸 케이트는 이후 휴대폰을 다시 가방에 집어 넣었고, 생각에 잠겼다.
맨체스터라.
과연 언제 갈 일이 생길까?
약간의 기대와 조금의 아쉬움이 섞인 듯, 그렇게 고개를 주억이던 케이트는 예상보다 빠르게 맨체스터를 방문할 일이 생긴 것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또 날아온 한 통의 문자.
다만 이번엔 재혁이 보낸 게 아닌, 그의 오빠인 안토루가 보낸 문자로 그 내용을 보면서 케이트는 놀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FA컵 16강 대진 상대 발표 됐다! 오빠한테 감사하렴. 내 덕에 맨체스터로 올 변명 거리가 생겼으니까 말이지. 흐흐. 그럼 맨체스터에 보자, 동생아.]
안토루가 합류한 3부 리그의 위건 애슬레틱 FC.
그곳과 재혁이 속해 있는 맨체스터 시티와의 16강전 대진이 발표된 것이었다.
***
“드디어 만나는 구나.”
툭, 케이트에게 문자를 보내기 위해 손에 쥐고 있던 휴대폰을 내려놓으면서 안토루는 모니터로 시선을 옮겼다.
FA컵 대진 추점이 끝나고 올라온 대진표.
그곳에 적혀 있는 두 구단의 이름을 빤히 바라보던 안토루는 곧 만족스러운 얼굴로 미소를 띠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많이 늦진 않았어. 얼른 다시 만나보자고, 최재혁.”
< 141. 늦지 않았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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