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40화 (140/225)
  • < 140. 다행 >

    “마지막까지 뛰어요?”

    “흠, 기억이 나질 않나보군. 그럴 수도 있지. 아무래도 머리에 충격을 받았으니 말야.”

    의아한 듯 되묻는 재혁을 앞에 두고 과르디올라 감독이 턱을 쓸었고, 곧 재혁의 침대 옆에 준비되어 있는 의자에 앉으면서 끊었던 말을 계속 이었다.

    경기가 어떻게 진행됐고, 어쩌다가 재혁이 쓰러졌고, 또 누가 그를 발견해주었는지에 대한 설명을 말이다.

    재혁은 침대에 앉아 조용히 과르디올라 감독의 설명을 들었고, 마지막에 의사의 소견까지 들은 후에야 안도한 얼굴로 천천히 등을 뉘우며 얕은 한숨을 뱉었다. 그리고 중얼거렸다.

    “다행이다. 이겼구나.”

    “뭐? 여기선 이긴 걸로 다행이라고 할 게 아니지.”

    다만 재혁의 혼잣말을 들은 과르디올라 감독은 심지를 켰다.

    감독은 앉고 있는 의자를 재혁의 침대 쪽으로 바짝 끌어 붙인 뒤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상황에선 네 부상이 큰 부상으로 연결되지 않은 것에 대해 다행이라고 해야 할 게 아니냐? 머리에 쌓이는 충격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 폭탄을 심어두는 것과 같은 거라고! 이번에야 다행히 별 문제 없이 지나갔지만, 다음부턴 조심해야 해! 네 몸에 대한 건 네가 가장 잘 아니까, 누가 대신 챙겨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경기를 뛸 땐 분명 괜찮았던 것 같아서 계속 필드 위에 남아 있던 거였어요.”

    “지금 당시 기억을 제대로 못 떠올릴 정도인데도?”

    “···.”

    “후우. 아무튼 이젠 지나간 일이니 더 이상 이야기는 하지 않겠지만, 모든 게 확실해질 때까진 병원에 남아 있어. 다른 곳도 아닌 머리에 충격을 받았으니, 가능한 모든 검사를 받는게 좋겠지. 이거에 대한 불만은 없겠지?”

    과르디올라 감독의 물음에 재혁은 ‘그럼 훈련은요?’ 라고 되물으려다가 얼른 입을 닫고 고개를 위아래로 큼직하게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검사를 받는 동안 만큼은 잠자코 병원에 남아 있으라는 그의 생각이 시선을 타고 그대로 전해진 탓이었다.

    재혁이 자신의 말에 수긍한듯 하자, 과르디올라 감독은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재혁도 그를 따라 상체를 세우면서 물었다.

    “가시게요?”

    “나는 이제 맨체스터로 돌아가야지. 다음 일정도 준비해야 하니까. 여기엔 나 대신 미켈 코치가 남을 거야. 모쪼록 미켈 코치의 말을 잘 따르도록. 아, 그리고 네가 의식을 잃고 있던 동안에 캉테 선수도 왔다 갔어. 정말 미안하다는군. 나중에 한 번 더 찾아올지도 모르니까, 미리 알고 있으라고.”

    “알겠어요.”

    “그 외에 내가 까먹은게 있던가···, 흐음.”

    코트를 걸치면서 입술을 끌었던 과르디올라 감독은 특별히 기억나는게 없었기에 그대로 목도리를 두르고 밖으로 빠져나가려다가 짧은 탄성을 흘리면서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손님이 한 분 와계셨군.”

    “손님이요?”

    “재혁 너랑은 이미 아는 사이 같던데? 고등학교도 같은 곳을 다녔고···.”

    “?”

    “아직도 밖에 남아 계시려나?”

    감독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으면서도 그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던 재혁은 그저 고개를 갸웃이며 침대에 앉아 있을 뿐이었고, 과르디올라 감독은 침대에 남아 있는 재혁을 뒤로 하고서 잠시간 병실을 떠나 복도로 향했다.

    그렇게 몇 초가 흘렀고···.

    “네? 정말로 재혁이가 깨어났어요?”

    익숙한 목소리가 복도 끝에서 들려왔다.

    재혁의 얼굴엔 곧장 느낌표가 떠올랐으나, 동시에 이해할 수 없다는 의아함도 섞였다.

    대체 왜? 아니, 그보다 어떻게 그녀가 이곳에 있단 말인가?

    혼란스러워하고 있는 재혁처럼, 바깥 상황도 제법 당황스러웠는지, 과르디올라 감독과 상대의 대화 소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아, 아니에요. 재혁이가 멀쩡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전 이제 가도 괜찮아요.”

    “복도에서 쪽잠을 주무시고 계실 정도로 걱정이 크지 않았습니까? 얼굴이라도 잠깐 보고 인사를 나누는 것 정도는 괜찮을 겁니다.”

    “하, 하지만 오늘 경기를 보러 간다고 따로 연락도 안 했었는데···.”

    “친구지 않나요? 친구라면 연락 없이 얼굴 정도는 비출 수 있는 거죠. 그리고···.”

    가만히 침대에 앉아 바깥에서 나누고 둘의 대화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이고 있던 재혁은 과르디올라 감독이 하던 말 중 뒷부분이 제대로 들리지 않자 상체를 은근히 기울여 복도 쪽으로 향하다가···.

    끼익.

    병실 문이 조심스레 움직이자 얼른 자세를 고쳤다.

    그렇게 문틈 사이가 서서히 벌어졌고···.

    “아, 안녕?”

    붉은색 수채 물감으로 볼을 빨갛게 칠한 것처럼, 잔뜩 붉어진 얼굴의 케이트가 고개를 빼꼼 내밀고 재혁에게 인사를 건넸다.

    ***

    재혁과 케이트, 둘만 남아있는 병실은 조용했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이미 떠났고, 미켈 코치도 재혁을 도와주기 위해 런던 병원에 남았지만 처리해야 할 업무가 따로 있었으니 노트북을 가지고 병원 내에 위치한 카페로 향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둘만 남게 된 것이고···.

    ‘무···, 무슨 말을 해야 하지?’

    덕분에 케이트의 머릿속은 하얗게 물들었다.

    어쩌다 보니 병원까지 따라오게 됐고, 어쩌다 보니 병실까지 들어오게 됐고···, 그렇게 상황에 휩쓸렸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무릎 위에 양손을 모으고 손가락을 꼬물거리면서 케이트는 계속해서 생각했다.

    안부에 대해 물어봐야 할까? 아니면 몸상태? 그것도 아니면···.

    생각을 이어가던 케이트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도리질 쳤다.

    ‘같이 학교 다닐 땐 이런 걸로 고민 해본 적이 없었는데···! 갑자기 내가 왜 이러는 거야?’

    “케이트, 호주에 있던 게 아니었어?”

    “어? 응? 아, 그게···.”

    생각이 끝나기 전에 재혁이 먼저 질문을 던졌고, 이에 당황한 듯 케이트는 수차례 말을 버벅이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질문에 대한 대답을 건네주었다.

    “영국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고 싶어서 준비하다가 이번에 입학이 확정이 됐거든. 그래서 이곳으로 넘어오게 된거야.”

    “대학? 아, 그렇구나. 이제 대학을 준비해야 할 때지. 그래서 어디 대학이야?”

    “옥스포드 대학들 중 하나야. 너필드 대학이라고, 작지만 내가 공부하고 싶은 전공에 딱 맞아서 거기로 지원했어.”

    “와, 옥스포드? 네가 공부를 잘하는 걸 알고 있었지만, 옥스포드에 합격할 정도라니. 진짜 대단한데?”

    “운이 좋았지. 설마 나도 단번에 합격할 줄은 몰랐거든.”

    재혁의 칭찬이 어색했는지 여전히 붉은 뺨을 긁적이며 대답한 케이트는 시선을 조심스레 올린 후 재혁과 눈을 마주치면서 넌지시 물었다.

    “너는···, 대학 안 가겠지?”

    “나?”

    “사실 공부로만 따지면 네가 나보다 더 잘했잖아? 실제로 나도 재혁이 네 도움을 많이 받았고···. 하지만 아무래도 프로 선수 생활을 해야 하니까···.”

    “흐음.”

    케이트가 아쉬운 목소리로 물은 것에 재혁은 잠시간 생각에 잠긴 것처럼 턱을 쓸다가 이내 씨익 웃어보이면서 대답했다.

    “가능하다면 나도 가고 싶긴 한데, 아무래도 당분간 집중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지금은 축구에 전념해야지.”

    “역시 그렇지?”

    “하지만 케이트, 너랑 이야기를 해보니 확실히 욕심은 나네.”

    “욕심?”

    되묻는 케이트를 향해 재혁은 예의 웃음을 보이면서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응. 대학 욕심. 살면서 한 번 가보고 싶기도 하고, 공부도 계속 해보고 싶기도 하니까. 아마 축구를 그만하게 될 때가 온다면, 그땐 아마 대학 문을 두드려볼 것 같긴 해. 물론 과연 그게 말처럼 쉬울진 모르겠지만 말야. 운동만 하다가 머리가 다 굳어서···.”

    “할 수 있어!”

    “응?”

    “재혁이 너라면 할 수 있을 거야! 틀림없어!”

    재혁의 말이 끝나기 전에 잔뜩 힘이 실린 목소리로 케이트가 그를 향해 말했고, 재혁은 동그랗게 뜬 눈으로 케이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케이트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재혁을 향해 계속해서 말했다.

    같이 공부를 할 때 그에게 얼마나 많은 도움을 받았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힘이 됐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런 케이트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재혁은 눈을 껌뻑이다가 웃었다.

    “그래? 그렇게까지 말해주니 나도 희망이 있겠는데? 그런데 너무 칭찬일색인 거 아냐?”

    “어? 왜? 뭐가?”

    “너 원래 나 싫어하지 않았어?”

    “···!”

    “같이 과제할 때도 엄청 뭐라 했던 것 같고, 그거 말고도 수업을 들을 때면···.”

    “그, 그거야 어디까지나 당시에 합리적인 판단으로···, 모두가 잘 됐으면 해서···. 아, 아무튼 그런 거야! 갑자기 너는 그때 일을 왜 꺼내니? 기껏 칭찬을 해줘도···.”

    “하하하. 장난이야, 장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게 너무 오랜 만이라.”

    재혁이 웃으며 장난이라고 말하자 케이트의 뺨이 또 한 번 붉어졌고, 계속해서 미소를 띠며 웃고 있던 재혁은 순간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긁적였다.

    케이트에게 장난이라니.

    ‘나도 변하긴 했구나.’

    같이 학교에 다닐 땐 케이트는 자신과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생각을 편하게 하려고 해도, 몸은 어렸지만 머리는 그렇지 못했으니까.

    좀 더 직설적으로 말하자면 자신은 아이들처럼 순수하지 못했으니까.

    그래서 나름 거리를 두었던 것이고, 최대한 나이에 맞는 ‘연기’를 하려고 했던 것이거늘.

    이제 보니 자신이 지금까지 해온 것은 연기가 아니었다.

    ‘적응’이었던 것이다.

    여러 현실적인 상황에 맞는 행동을 하기 위한 적응 말이다.

    그리고 비로소 지금에서야 편해질 수 있었다.

    과거의 자신과 지금의 자신, 그리고 미래에 알게 될 자신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모든 게 깔끔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어느 정도 느낌은 알겠다는 생각에 재혁은 만족스럽게 미소를 띠고 있었던 것인데, 그런 재혁을 곁에서 지켜보던 케이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재혁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 괜찮아? 왜 갑자기 그렇게 웃고 있어? 혹시 머리를 다쳤다더니···, 정신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난 멀쩡해. 그냥, 옛날 생각을 좀 하다보니 재밌어서.”

    “그래? 그럼 다행이고. 아, 그나저나 정말 다친 데는 없는 거지? 경기장에서 갑자기 쓰러졌을 땐 얼마나 놀랐다고.”

    “내일 정밀 검사를 한다던데, 아마 별 문제 없을 거야. 지금도 사실 멀쩡한데···.”

    “그래도 안 돼! 검사는 확실히 받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당분간 조심, 또 조심하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하는 케이트를 보면서 재혁은 자신도 모르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 뒤로도 한동안 부상 재발에 대한 위험이 있으니 몸 조심할 것을 몇 번이고 강조하던 케이트는 시계를 확인하더니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재혁에게 말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내가 환자를 너무 오래 붙잡아두고 있었지? 미안.”

    “미안할게 뭐가 있어? 네가 말동무를 해준 덕이 시간이 빨리 가서 오히려 고맙지. 그래서 이제 돌아가려고?”

    “그래야지. 기차 시간이 남아 있을지 모르겠는데···, 없으면 버스라도 타고 가야지.”

    원래 일정대로라면 경기만 보고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기에 따로 숙소를 구해두지 않았던 케이트는 시간이 애매한 것에 난감한 얼굴로 겉옷을 주섬주섬 걸치다가···.

    “바로 옥스포드로 가려고? 늦었는데 그냥 자고 가지?”

    재혁의 말을 듣는 순간 다시금 양뺨을 붉게 물들이며 잔뜩 당황한 얼굴로 횡설수설 소리쳤다.

    “···뭐, 뭐? 어···, 어, 어떻게 내가 여기서 자고 가냐?! 너, 너, 내가 그렇게 쉬워 보이니? 그리고 여긴 병원이야!”

    “아니. 여기서 자란 게 아니라 코치님께 말씀드리면 우리가 쓰던 호텔의 게스트 룸 정돈 쓰게 해주니까 거기서 자란 소리였는데.”

    “···.”

    “설마 여기서 자려고?”

    재혁의 이어지는 질문에 케이트는 무어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로 그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렇게 분위기가 얼었고, 하필이면 그때 업무를 끝낸 미켈 코치는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가···.

    “···나중에 다시 오마.”

    그대로 다시 빠져나갔다.

    다행히도 오해는 금방 풀렸고 케이트는 재혁과 코치의 도움으로 묵을 호텔로 안전하게 향할 수 있었다.

    ***

    “그 결승전은 최재혁 선수로 시작해서 최재혁 선수로 끝이 난 경기였습니다!”

    리그컵 결승전이 끝이 난 다음 날.

    TV쇼 호스트는 잔뜩 쌓여 있는 일간지들의 헤드 라인을 하나씩 읽으면서 연신 감탄을 흘렸다.

    < 140. 다행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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