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34화 (134/225)
  • < 134. 99% >

    영국에서 가장 큰 경기장이며 축구인들의 성지라 불리는 웸블리 경기장은 크고 아름답다라는 설명을 그대로 나타내주는 경기장으로 영국을 대표하는 경기장인만큼 크고 굵직한 경기들도 모두 이곳에서 치러지게 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경기들 중 하나인 리그컵 결승전.

    내일 열리게 될 경기를 위해 전날 런던에 미리 도착한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은 해가 저물어 가고 있었지만 적응 훈련을 진행하기 위해 웸블리로 향했다.

    선수들은 장시간 이동에 피곤할 법도 하건만, 피로한 기색보다 오히려 신이 난 듯 들뜬 얼굴로 복도를 따라 걸으며 크게 소리내 웃었다.

    특히 로스가 말이다.

    “아싸! 드디어 런던이다! 내일 학교 쉰다!”

    “학교는 쉬지만 런던까지 놀러 온게 아니잖아? 너무 그렇게 들뜨지 말라구.”

    “하지만 런던에 오고 싶었던 첫 번째 목적이 그거 였는걸? 목적을 달성했으면 기뻐해야지!”

    함께 이동하는 브라함의 진정하라는 말에도 로스는 싱글벙글 미소가 떠나지 않는 얼굴로 계속해서 떠들면서 길을 따라 걸었고, 그렇게 마침내 도착한 웸블리 경기장의 필드를 눈으로 확인하곤 탄성을 흘렸다.

    다만 이번에는 로스만 목소리를 낸 게 아니었다.

    그의 뒤를 쫓아 이동하던 골키퍼 뮤릭도, 포덴도, 그리고 브라함도, 모두 생전 처음 와보는 웸블리 경기장의 위엄에 넋을 잃은 것이다.

    지금까지 쭉 꿈만 꿔왔던 바로 그곳에서 경기를 치르게 된다는 현실감에 선수들은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주변을 둘러보다가···.

    “그런데 저건 마음에 안 드네.”

    필드 중앙에 그려져 있는 토트넘의 문양을 확인하곤 혀를 찼다.

    홈 경기장의 증축 공사 때문에 웸블리를 홈으로 사용하는 토트넘의 자취가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선수들은 토트넘의 문양을 이리저리 살피며 잠시 멈췄던 발을 다시 경기장 쪽으로 움직이면서 그에 관한 가벼운 농담을 나누기 시작했다.

    “설마 내일 결승전에서 저 마크가 바닥에 그대로 남아 있으려나? 경기는 첼시랑 하는데 말야.”

    “라운드 탈락한 토트넘의 마크를 바닥에 두고 첼시랑 우승 경쟁이라. 이건 이거대로 아이러니하지만 그림 자체는 재밌겠는 걸?”

    “큭큭, 그러게. 결승에 올라온 건 우린데 어째선지 토트넘도 올라온 것 같잖아? 기분이 묘해.”

    “그보다 혹시 토트넘 시즌권을 산 사람들은 웸블리 입장이 공짜이려나? 와, 그럼 완전 대박인데?”

    “설마 그러겠냐. 당연히 따로 티켓을 사야겠지. 우리가 상대할 팀은 토트넘이 아니라 첼시라구, 첼시. 으음···.”

    로스의 장난에 이번에도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해주던 브라함은 순간 굳은 얼굴로 입술을 모으더니 얕은 한숨을 토해내며 뺨을 긁적였고, 그런 브라함을 옆에서 지켜보던 재혁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브라함은 재혁의 목소리에 쓴웃음을 한 차례 흘리더니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내일 첼시 쪽에서도 브리스톨 시티가 그랬던 것처럼 1군 선수들이 나오겠지?”

    “아마 그렇겠지. 아무리 리그 컵이라곤 해도 결승전이니까. 트로피가 욕심 난다면 당연히 1군 선수들을 준비해서 나오지 않겠어?”

    “그런데 그 첼시 1군을 상대할 사람들이···, 바로 우리고?”

    “그건 무슨 의미야?”

    재혁이 고개를 기울이며 물은 것에 브라함은 한숨을 길게 푹 내쉬더니 뺨을 매만지며 대답했다.

    “사실 이거 때문에 걱정이 돼서 어젯 밤에도 한숨도 못 잤어. 첼시 1군을 상대로 우린 이번에도 U-21를 주축으로 한 멤버라니. 이건 현실적으로 이길 확률이 거의 없는 싸움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

    “아무리 이번 시즌 트레블에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하더라도, 그래도 결승전이라면 첼시가 그런 것처럼 우리도 어느 정도 1군 선수의 도움을 받아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이번에도 우리끼리 해결하라니. 하아···. 말만 없었지, 그냥 버리고 가는 경기 취급이랑 다를 바가 없다고.”

    말을 중간에 자른 브라함은 긴장 때문인지 잔뜩 굳은 얼굴로 한숨을 토해낸 뒤 이마를 쓸어내렸고, 그런 브라함의 말에 다른 선수들도 하나둘 현실을 직시하고 서서히 얼굴 색을 잃기 시작했다.

    깊게 생각해보면 브라함의 말대로였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제 결승전이지 않던가?

    우승컵을 목전에 둔 상황이라면 최상의 전력을 동원해 경기에 임해야 하거늘, 과르디올라 감독은 이번에도 소집 대상을 U-21에 국한시켰던 것이다.

    그만큼 리그 컵에 대한 중요도가 많이 떨어지기 때문에 이런 결정을 내린게 분명하다는 확신이 머릿속에 떠오르자 걱정 때문에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만 그 사이에서 단 한 명, 재혁만큼은 변화가 없는 얼굴로 턱을 쓸어내리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고···.

    “하지만 그렇게 되면 여기까지 올라온 우리의 노력을 1군 선수들한테 포기하게 되는 거잖아?”

    “···?”

    “준결승까지 우리가 모두 이겨서 올라왔는데, 정작 결승 무대를 양보한다고? 정말 그러고 싶어?”

    “!”

    재혁의 목소리를 듣게 된 선수들의 표정에 또 한 번 변화가 찾아왔다.

    가슴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크게 때리는 듯한, 그런 감정의 변화가 말이다.

    브라함을 포함한 모든 선수들은 순간 할 말을 잃은 것처럼 넋을 놓고 재혁을 바라보았고, 재혁은 그런 선수들을 향해 계속해서 말했다.

    “나라면···, 아니. 나니까 오히려 양보하고 싶지 않아. 우리가 힘들게 쌓아 올린 탑이니까, 그 마지막도 우리가 함께 해야지.”

    “그렇지만 만약 그러다가 지기라도 한다면···.”

    “그럼 지는 거지. 하지만 그 패배를 정면에서 제대로 맞을 줄 알아야 해. 결승전에서 패배하는 경험은 오직 우승을 목표로 한 팀밖에 경험할 수 없는 거니까.”

    “!”

    재혁은 무겁게 말했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를 듣는 동료들은 그 무거움의 무게를 족쇄처럼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반대였다.

    무거웠지만 자신감을, 그리고 자유로움을 주는 무게가 그들의 가슴에 닿아 날개가 되어 몸을 전율시킨 것이다. 그리고 곧 모두들 재혁의 말을 이해했다는 듯, 한층 밝아진 얼굴로 필드를 향해 멈췄던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런 동료들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재혁은 빙그레 미소를 떠올린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런데 감히 누구 맘대로 진다고 생각을 한거야? 난 처음부터 질 생각이 하나도 없었는데 말야.”

    “그러게 말이다. 나도 질 생각으로 너희들을 소집한 게 아닌데 말이지.”

    “응? 감독님?”

    뒤에서 들린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리자 과르디올라 감독이 그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던 재혁은 놀란 얼굴로 그를 불렀고, 과르디올라 감독은 재혁을 향해 손인사를 보낸 후 슬쩍 그의 옆에 멈춰서며 웃었다.

    “설마 선수들이 저런 고민을 안고 있을 줄은 몰랐는데, 네 덕에 그 불안함을 동기부여로 바꿀 수 있었군. 따로 코치 봉급이라도 챙겨서 줘야겠는 걸?”

    “정말 모르셨어요?”

    “내가 신은 아니니까. 모든 선수들의 마음을 읽을 순 없지. 몇은 가능하지만 말야.”

    말을 끊으면서 과르디올라 감독은 재혁을 내려보며 오묘한 미소를 또 한 번 흘렸고, 그런 감독의 미소에 재혁도 그를 따라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앞으론 외투라도 한 벌 더 걸쳐야겠네요.”

    “큭큭. 그런다고 숨겨질 정도면 보이지도 않았어.”

    “그래도 노력은 해봐야죠.”

    그렇게 자연스레 발을 맞춰 걷기 시작한 두 사람은 머지않아 운동장에 도착할 수 있었고, 재혁은 슬슬 본격적으로 몸을 풀어보기 위해 이동하려다가···.

    “그런데 재혁.”

    뒤에서 들린 과르디올라의 목소리에 발을 멈췄다.

    재혁은 살며시 고개만 돌린 채로 왜 불렀는지를 물었고, 감독은 재혁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치며 물었다.

    “너도 내가 정말 리그 컵 결승을 포기했기 때문에 선수 선별을 U-21에 한정했다고 생각하나?”

    “글쎄요. 제가 신은 아니라서···.”

    “뭐? 큭큭.”

    자신이 했던 농담을 그대로 되받아친 재혁의 말에 과르디올라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천천히 호흡을 골랐고, 자뭇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너도 그렇겠지만 나도 지는 게임을 싫어해. 물론 싫어한다고 해서 모든 경기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지만···.”

    툭툭.

    “그래도 항상 이길 수 있는 경기를 준비하지. 예를 들면 지금 보이는 50%의 확률을 51%로 만드는 것 같은 준비를 말야. 그리고 이번 경기의 1%는 바로 너, 최재혁이다.”

    “!”

    “그러니까 내일 경기도 잘 부탁···.”

    “겨우 1%에요?”

    “응?”

    자켓 자락을 걷어내며 길을 떠나려던 과르디올라 감독의 발이 재혁의 목소리에 붙잡혔다.

    과르디올라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재혁을 찾았고, 재혁은 고개를 돌려보고 있는 과르디올라 감독에게 생긋 웃어보이면서···.

    “제가 본 확률은 감독님이 떠올린 확률과 조금 다르거든요.”

    “다르다고? 어떻게?”

    “99%.”

    자신에 찬 얼굴로 말했다.

    “99%의 확률로 우리가 이길 겁니다.”

    ***

    마침내 밝은 결승전의 날.

    하늘은 평온했고, 기온도 제법 따뜻한 날이었지만 고대하던 경기의 선발 명단을 확인한 사람들은 태풍이라도 맞은 것처럼 잔뜩 흥분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 보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크게 당황한 것은 맨체스터 시티의 승리를 예상한 사람들이었다.

    맨체스터 이브닝 스포츠의 기자, 브라운은 다시 읽어봐도 그대로인 선발 명단을 계속 읽어보다가 머리를 벅벅 긁더니 신음에 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예···, 예상은 했지만 설마 진짜 이렇게 선수들을 뽑아올 줄은···.”

    “이거, 맨체스터 시티가 99%의 확률로 지겠는 걸?”

    “아놀드 기자님!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부정타요!”

    “부정이 아니라 현실이지. 브라운 기자가 다시 한 번 살펴보라고.”

    같은 매거진 스포츠 기자인 아놀드의 말에 브라운이 빼액 소리를 내지르자 아놀드는 쯧쯧, 혀를 차면서 손에 쥐고 있는 선발 명단을 그의 눈앞에 펼쳐주었다.

    “일단 첼시 쪽부터 볼까? 선발로 뽑은 톱자원이 모라타, 그 양옆을 받쳐주는 선수들이 윌리안과 페드로, 중원에선 아자르, 그리고 파브레가스까지···.”

    “···.”

    “수비수들도 뤼디거에 케이힐, 그리고 크리스텐센으로 이건 그냥 전원 베스트 멤버로 출장한 거라고. 리그컵이지만 기왕이면 결승이니까 이겨야지, 이런 마인드가 아니라. 첼시는 그냥 이기려고 이곳에 온거야. 하지만 그에 반해···.”

    말꼬리를 슬그머니 늘리던 아놀드는 과르디올라 감독이 준비한 11명을 확인하곤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마 시티 팬들이라면 모두가 했을 행동을 말이다.

    그는 골키퍼부터 시작해서 11명의 선수들이 모두 U-21 출신임을 알아보고 이마를 긁으며 중얼거렸다.

    “이건···, 그냥 소꿉장난이지. 브리스톨 시티까진 어찌어찌 이겼지만, 첼시는 다르다고.”

    “그래도···.”

    “그래도, 그나마 희망이 있다면 이 친구에게 걸어봐야 할 것 같지만, 그래도 이번엔 좀 힘들겠지.”

    툭툭, 손가락을 튕겨 선발 명단에 적혀 있는 한 사람의 이름을 건드렸던 아놀드.

    그는 그 직후 멈췄던 발을 움직여 웸블리 안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그러면서 뒤에 남아 있는 브라운을 향해 짧게 한 마디 했다.

    어차피 지게 될 모습을 보게 될거면, 지금부터라도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한 마디를 말이다.

    그런 아놀드의 말에 브라운은 눈썹을 바짝 세우고 그럴 일 없으거라며 재차 소리치며 그의 뒤를 쫓았다.

    그렇게 다시 시간이 흘러 경기가 시작 되기 30분 전.

    일반 관람객들의 입장이 시작되었고···.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대단해.”

    인파에 뒤섞여 관중석으로 향하는 케이트는 순간 발을 멈추더니 멍하니 웸블리 경기장 전광판에 걸려 있는 재혁의 이름을 빤히 바라보다가 천천히 경기장 안으로 다시 움직였다.

    < 134. 99% > 끝

    ⓒ 권주호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