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32화 (132/225)
  • < 132. 목표는 왕관 >

    짧지만 길었던, 그리고 치열했던 박싱데이가 새해와 함께 마침내 끝이 났다.

    대략 10일간 휴식이 거의 주어지지 않는 기간동안 경기를 치러야 했던 구단들은 마침내 한숨 돌릴 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되었고, 선수들도 피로가 중첩되면서 비명을 지르기 시작한 근육을 풀어주기 위해 회복에 몰두했다.

    하지만 휴식의 달콤함도 잠깐이었을 뿐.

    각 구단의 감독들은 손에 쥐게 된 성적표를 앞에 두고 복잡한 심경이었다.

    박싱데이 일정 중 최악의 승률을 기록한 팀들의 감독들, 웨스트햄과 사우스햄턴, 그리고 왓포드의 감독들은 지끈거리는 골치를 부여잡고 고개를 저었고, 그런 감독들의 심정을 그대로 대변한 기사들도 지역지에 매일같이 오르내리면서 그들을 괴롭혔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크게 얻어 맞고 있는 감독은 왓포드의 마르코 실바 감독이었다.

    시즌 초반엔 돌풍을 일으키며 팬들의 기대를 부풀렸던 만큼, 중반기부터 스쿼드가 갑자기 무너지기 시작하자 그 돌풍은 그대로 역풍이 되어 그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이겨야 했던 경기들을 졌다는 부분에서 기자들은 지난 시즌 그가 지도했던 헐시티의 몰락과 연관지어 마르코 실바 감독의 역량을 비판했다.

    허나 어둠이 있으면 빛도 있는 법.

    순위권 싸움에 가장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박싱데이를 성공적으로 보낸 팀들을 향해선 사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다른 어느 구단들보다 좋은 결과를 거두면서 선두를 굳건히 지킨 맨체스터 시티.

    그들을 향한 칭찬은 잉크 통을 모두 써도 모자를 정도였던 것이다.

    맨체스터 지역지 중 한 기자의 말을 빌리자면···.

    [어쩌면 트로피는 누구의 것인지, 벌써 정해졌을 지도 모른다.]

    “이건 좀 과한 칭찬이 아닐까요?”

    ABD 스포츠 채널에 자리한 축구 평론가, 후넬은 지역지의 헤드라인을 가리키며 못마땅하다는 감정을 숨기지 않은 얼굴로 말했고, 그런 후넬의 건너편에 자리하고 있는 또 다른 전문가는 허허, 짧은 웃음을 흘린 후 답했다.

    “글쎄요. 그건 혹시 후넬 평론가님께서 오래된 맨유 팬이라서 그렇게 느끼시는 게 아닐까요?”

    “···.”

    “그럼 다른 분의 의견을 한 번 들어보도록 하죠. 이번 시즌 맨체스터 시티의 기세가 무섭지 않습니까? 이에 대한 주앙 전문가님의 생각은 어떤가요?”

    “일단 전반기가 모두 끝나고 후반기에 돌입한 현 상황에서 우승에 가장 가까운 팀이 누구냐고 굳이 꼽아야 한다면 저 역시도 맨체스터 시티를 짚을 겁니다. 사실 이건 정해진 질문에 대한 너무 당연한 대답이라, 딱히 더 언급하기도 민망하군요.”

    주앙이라 불린 백인 남성은 자신이 지목을 받자 짧게 목을 털어낸 후 머릿속에 정리해두었던 내용을 자연스럽게 풀었다.

    비단 그만이 아닌, 영국 프로 축구의 리그 판도를 지켜보고 있을 모두가 떠올릴 생각을 말이다.

    그런 주앙의 말에 그를 지목했던 남성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나, 방송을 지켜보고 있을 시청자들을 위해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했고, 주앙은 다시 한 번 큼큼, 목을 청소한 뒤 끊었던 설명을 계속 이었다.

    “표면적으로 보더라도 이번 시즌 맨체스터 시티는 적수가 없습니다. 리그에선 단 한 번의 무승부를 제외하면 모두 이겼고, 리그 컵도 순항 중에 챔피언스 리그 예선도 비록 시즌 첫 패배를 경험하긴 했지만 조 1위로 다음 라운드로 진출에 성공했죠. 몇몇 사람들은 03-04 시즌에서 무패 우승이라는 대업을 기록했던 아스날과 현재의 맨체스터 시티를 비교하고 있는 상황입니다만···, 저는 오히려 그때의 아스날보다 지금의 맨체스터 시티가 더욱 강하다고 생각합니다.”

    “호오, 앙리와 베르캄프가 이끌던 아스날보다 지금의 맨시티가 강하다고요?”

    “굳이 논란을 일으키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제 개인적인 의견은 그렇다는 거지요.”

    흥미롭다는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두 사람을 앞에 두고서 주앙은 턱을 쓸어내리며 앉은 자세를 고쳤고, 본격적으로 머릿속에 담아두고 있던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기 시작했다.

    주앙은 03-04 시즌 아스날의 기록을 차트 위에 풀어 놓으면서 계속 입을 움직였다.

    “해당 시즌에서 아스날이 기록한 전적은 26승 12무 0패죠.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리그에서의 전적을 계산 했을 때 나온 기록입니다. 컵 대회와 유럽 대항전을 포함하게 된다면 FA컵에서의 패배가 하나, 리그 컵에서 경험한 패배가 둘, 그리고 유에파에서 경험한 패배 셋이 추가되게 됩니다. 이 말인즉, 리그를 제외하면 다른 대회에선 제대로 된 결과를 내놓지 못 했다는 소리죠. 하지만 맨체스터 시티는 다릅니다.”

    챠락.

    손가락을 가볍게 넘기자 스크린에 떠올라 있던 차트가 다음 장면으로 넘어갔고, 그곳엔 과르디올라 감독의 맨체스터 시티가 이번 시즌을 진행하면서 기록 중인 전적이 떠올랐다.

    주앙은 그 두 기록을 대회에 맞게 배치하면서 말을 계속 했다.

    “맨체스터 시티는 비단 리그에서만 강력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게 아닌, 모든 컵 대회와 유럽 대항전에서까지도 압도적인 기량으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는 중이죠. 그리고 이 비교를 리그에도 대입해 본다면 또 하나의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게 됩니다. 아스날이 21승을 거두었을 때의 페이스와 맨체스터 시티가 21승을 거두었을 때의 페이스가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죠.”

    “확연히 다르다고요?”

    “왜냐면 맨체스터 시티는 아스날과 달리, 이겨야 할 경기를 비기지 않았거든요.”

    “!”

    “아스날이 리그에서 21승을 거두었을 때가 3월인 것에 비해, 맨체스터 시티는 1월 초에 벌써 21승을 기록하는데 성공했습니다. 무려 두 달이나 차이가 나죠. 만약 이런 페이스가 이후로도 쭉 이어진다면···.”

    탁!

    “아스날이 우승을 확정 지었던 순간보다 훨씬 빠른 시간 내에 맨체스터 시티는 우승 트로피를 캐비넷에 추가할 수 있게 되겠지요. 제 예상대로라면 모르면 몰라도 이번 2월, 아마 그때 즈음이면 모든 게 결판 날 겁니다.”

    주앙이 논리정연하게 말을 끝내며 손으로 2월 달력을 가리키며 말을 끊었고, 현재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는 남성은 그런 주앙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뒤 슬쩍 시선을 옮겨 후넬을 바라보았다.

    혹시 하고 싶은 말이 있느냐, 그런 의미가 담긴 시선을 말이다.

    다만 후넬은 그런 진행자의 시선을 애써 넘기고 목을 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고, 진행자는 그 의미를 바로 이해한 뒤 고개를 작게 끄덕이며 입가에 미소를 떠올렸다.

    “무패우승이라는 대업을 두고 비교가 가능한 상황이 벌어지니, 확실히 볼 거리가 늘긴 했군요. 자세한 분석으로 눈을 밝게 해주신 주앙 전문가님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자 그러면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으니, 분석에 대한 이야기도 한 번 들어봐야겠죠?”

    툭툭, 서류를 정리하며 화제를 자연스럽게 연결지은 진행자는 부드러운 손길로 스크린을 넘겼고, 곧 천천히 떠오르는 새로운 주제를 둘에게 이야기하면서 자세를 고쳤다.

    “그렇다면 현 맨체스터 시티가 이만한 강력함을 유지할 수 있는 이유로는 무엇이 있을까요? 이에 대한 대답이 가장 기대되는 건···, 역시 맨유의 오래된 팬이신 후넬 전문가님의 이야기를 먼저 듣고 싶군요.”

    “오늘 프로그램은 저를 괴롭히기로 마음 먹은 특집처럼 느껴지는 건 단순히 제 착각이겠죠?”

    “매 주 새롭다는 점이 이 프로그램의 재미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아예 후넬 전문가님의 특집으로 각을 잡고 가보도록 하죠. 자, 맨유 팬으로서 맨체스터 시티에서 가장 눈엣가시처럼 느껴지는 요소가 누굽니까?”

    “아주 그냥 오늘 절 지옥 밑바닥에 묻어버릴 계획이시군요.”

    진행자의 말에 쓰게 웃었지만, 그래도 재미로 떠들기엔 제법 흥미가 끌리는 주제였기에 후넬은 이내 표정을 고치고 이마를 긁적이며 고민을 거듭한 끝에 조용히 한 사람의 이름을 꺼내놓았다.

    “굳이 꼭 한 명을 짚어야 한다면 역시 과르디올라 감독이겠죠. 세계적인 명감독이지만 라이벌 구단에 적을 둔 이상, 그 사람만큼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또 없으니까요.”

    “하하, 역시 그렇군요. 하지만 말씀을 들어보니 어째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은 흥미가 생기는데요? 그렇다면 과르디올라 감독을 제외한다면 누가 있습니까?”

    “이것 또한 그리 어려운 질문이 아니라 바로 대답해드릴 수 있겠습니다. 바로 최재혁 선숩니다.”

    “···최재혁 선수요?”

    “현재 맨체스터 시티의 스쿼드 중 가장 신경쓰이는 선수의 이름이죠. 이건 아마 다른 구단의 팬들도 저랑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후넬이 말을 끝맺으며 후우, 길게 한숨을 토해냈고, 후넬이 호흡을 고르는 모습을 지켜보던 진행자는 정말 예상 밖의 이름을 들었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고서 그에게 물었다.

    “다비드 실바라던가, 케빈 데 브루위너 같은 선수가 아닌, 최재혁 선수가요?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그리고 그런 질문에 후넬은 가벼운 미소로 대답을 시작했다.

    “지금 진행자님께서 그 이유를 말씀하고 계시네요. 다비드 실바라던가, 케빈 데 브루위너가 아니기 때문에 신경이 쓰이는 겁니다. 저 둘을 제외하고도 경기의 흐름을 바꿀 수 있는 선수가 또 생겼다는 것이니, 맨시티가 아닌 팬의 입장에서 최재혁 선수만큼 신경 쓰이는 선수가 또 없는 거죠.”

    “!”

    “이제 겨우 19살이 될 10대 선수가 현재 보여주고 있는 모습은 최상위 선수의 전성기와 비교해도 모자람이 없어요. 게다가 부족하다고 평가되던 능력들까지도 시즌이 진행되며 보완하거나 발전시키고 있는 상태죠. 그런데 만약 이 선수가 시간이 흘러 20대 중반 전성기를 맞게 된다···?”

    말을 끊고 자신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킨 후넬.

    그는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때가 오게 된다면 전 바로 백일 기도에 들어갈 겁니다. 최재혁 선수가 얼른 맨시티를 떠나주길 바라는 백일 기도를 말이죠. 차라리 다른 어느 구단에 가서 성공을 해도 기쁘겠지만, 맨시티는 안 돼요.”

    어느 맨유 팬이라도 공감할 한 마디로 말을 끝낸 후넬은 동시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고, 그런 후넬을 이해한다는 듯 지켜보던 진행자는 천천히 프로그램을 마무리지은 후 클로징 멘트와 함께 다음에 또 찾아 오겠다는 말을 끝으로 작별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새해 첫 축구와 관련된 티비 쇼가 끝이 났지만, 재혁을 향한 폭발적인 관심은 이제 시작이었을 뿐이었다.

    ***

    “최재혁 선수! 싸인 좀···, 싸인 좀 해주세요!”

    “저 사진 한 번만 같이 찍어주시면 안 돼요? 정말 팬인데···!”

    “저는 유니폼도 있어요! 제발 싸인이랑 사진 한 번만 같이 찍어주세요!”

    “아···, 저···. 죄송합니다. 훈련에 가야 해서요. 정말 죄송합니다.”

    훈련장으로 향하는 게이트 바깥 쪽에 모여있는 팬들의 목소리에 재혁은 어찌해야 할 바를 모르다가 고개를 크게 숙이는 것과 함께 진심을 담아 사과한 뒤 얼른 발을 옮겨 안으로 들어갔고, 그런 재혁을 먼저 도착해서 지켜보고 있던 케빈은 축구용품들이 들어 있는 숄더백을 바닥에 내려놓으면서 쯧쯧 혀를 찼다.

    “이젠 적응 좀 하라니까. 그러다가 오늘도 훈련 끝나고 싸인 다 해주고, 사진도 다 같이 찍어주고 집에 가겠네.”

    “그럼 어떡해요? 저기에 서서 훈련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데.”

    “그래도 자를 건 잘라야지. 경기 중에 상황을 읽는 눈은 그렇게 뛰어나면서, 이상하게 이런 건 또 약하네.”

    “이건 축구가 아니니까요. 공은 차면 끝나지만 인간 관계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잖아요?”

    케빈의 말에 간단히 대꾸한 재혁은 이후 머리를 벅벅 긁었고, 그런 재혁을 멍하니 지켜보던 케빈은 10대가 고민하기엔 조금 복잡한 고민인듯 싶었지만···.

    ‘사춘기겠지, 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어깨를 간단히 으쓱인 뒤 운동복으로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렇게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으면서 훈련장으로 향할 준비를 하던 케빈은 마지막으로 축구화를 챙겼고, 재혁과 함께 이동하다가 문득 떠오른 의문에 손뼉을 치며 물었다.

    “아, 그러고 보니 그거 진짜야?”

    “뭐가요?”

    “리그 컵!”

    되묻는 재혁을 향해 한 단어를 큰 목소리로 소리친 케빈은 눈썹으로 팔자를 그리며 재차 질문을 던졌다.

    “앞으로 리그 컵 경기 일정들도 빠지지 않고 출장하게 해달라고 했다며? 그거 진짜야?”

    “어떻게 아셨어요?”

    “왜···, 왜 그랬어? 리그 컵보단 당연히 다른 대회들이 더 중요하잖아? 당장 다음 경기 일정만 봐도 컨디션 관리를 하려면 리그 컵은 빠져야 하는데···.”

    당황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되묻는 케빈.

    그는 그의 머리로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내린 재혁을 앞에 두고 혼란스러워하고 있었고, 재혁은 그런 케빈을 빤히 지켜보면서 이해한다는 듯이 미소를 보인 후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서야 달성할 수 있는 왕관이 한정적이잖아요? 그래도 가능하다면 좀 더 많은 걸 목표로 하고 싶었거든요.”

    “한정적이라고? 설마···.”

    “네.”

    씨익, 입가에 떠올린 미소를 더욱 짙게 한 재혁.

    그는 물음표로 가득한 케빈을 향해 자신의 생각을 똑똑히 전했다.

    “이번 시즌, 전 트레블이 아니라 쿼드러플을 달성하는게 목표에요. 케빈도 그게 더 대단할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 132. 목표는 왕관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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