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9. 마법을 부리다 >
에디 하우 감독이 놀란 것처럼, 케빈이 드리블을 시작하는 순간을 포착한 본머스 선수들 또한 화들짝 놀란 얼굴로 황급히 라인을 뒤로 물리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그 중에서도 센터백을 맡고 있는 아케와 스티브 쿡, 두 선수는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얼굴로 거리를 좁혀들고 있는 케빈을 노려보며 생각했다.
‘분명 압도하고 있던 건 우리 쪽이었는데···?’
‘한 번에 뚫려 버렸어···! 크윽, 일단은 상대 팀의 플레이를 끊는 게 우선이다!’
머리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한들. 이미 벌어진 일이었고, 그렇다면 일단은 막는게 우선이다.
아케와 스티브 쿡, 두 선수는 본능적으로 서로의 위치를 파악한 후 라인을 정리했다.
상대적으로 케빈에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고 있었던 아케가 앞을, 스티브 쿡은 그 뒤를 지켜주는 형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그 둘이 생각하지 못 한 부분이 하나 있었다.
두 사람이 수비 라인을 짜기 위해 잠시 멈칫한 그 순간.
그 짧은 순간에도 케빈은 공을 가지고 계속 움직이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리고 그 움직임의 목적은···.
투웅!
“···!”
앞을 가로 막는 아케를 뚫어낼 ‘라인’을 미리 준비하는 것.
스토퍼의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앞으로 달려가던 아케의 표정이 굳은 것은 그런 케빈의 움직임을 뒤늦게 파악하고 난 후였다.
‘이, 이건···, 늦는다!’
‘좋아, 뚫었다!’
사악!
특유의 간결한 드리블 터치.
정확히 세 번째 터치에서 옆을 뚫고, 네 번째 터치부터 거리가 벌어지기 시작하는 케빈의 뒷모습을 노려보며 아케가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손을 뻗었으나, 그가 뻗은 손은 이미 꼬리를 남기고 사라진 케빈의 잔향을 움켜쥘 뿐.
결국 케빈을 놓친 아케는 꼬이는 스텝을 간신히 재정비 한 후 다른 공간을 찾아 달렸고, 그러는 사이 이번엔 스티브 쿡이 케빈의 앞을 가로막으면서 잔스텝을 밟았다.
그리고 잔뜩 신경을 끌어 올리면서 케빈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살폈다.
케빈은 득점력도 있으면서 순간의 창조력으로 기회를 만들 줄 아는 선수였으니, 섣불리 움직이면 오히려 독이 될 것이리라.
‘어떻게 해서든 공이 케빈의 발을 떠나는 순간을 잡아야 한다! 그때가 아니면 노릴 틈이 없어!’
그렇게 둘 사이의 거리가 세 걸음···, 두 걸음···, 그리고 한 걸음이 되었을 때.
스티브 쿡이 눈을 빛내며 몸을 날렸다.
‘슛이다!’
뻐엉···, 파앙!
“큭?!”
정확히 골대로 향할 궤도에 끼어든 스티브 쿡의 발에 공이 걸리면서 슈팅이 위로 크게 떠올랐고, 동시에 케빈의 눈썹도 기묘한 모습으로 하늘을 향했다.
아케를 돌파한 이후 아주 잠깐 템포를 낮췄는데, 설마 그 순간을 읽힐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아쉬움에 찬 눈빛으로 코너 플래그 주변을 구르고 있는 공을 바라보던 케빈은 곁을 다가온 재혁에게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미안하다. 그 기회가 어떻게 찾아온 기회였는데···. 그걸 이렇게 날려 버리네.”
경기 내내 지속적으로 압박을 당하던 중 찾아온 꿀같은 기회이지 않던가.
그런 기회를 너무도 허무하게 날려 버렸다는 사실에 케빈은 면목이 없다는 듯, 붉어진 얼굴을 가만두질 못하고 이리저리 흔들었고, 그런 케빈의 곁을 슬쩍 지나치던 재혁은 이해한다는 듯이 옅은 미소를 떠올리며 옆을 지나치며 말했다.
“모든 선수들이 주어진 기회를 다 살리면 해트트릭이 어려운 일도 아니겠죠? 괜찮아요. 그럴 수도 있죠. 그리고···.”
코너킥을 준비하기 위해 이동하면서 재혁은 케빈을 향해 짧은 한 마디를 추가로 남겼다.
“앞으로 기회라면 셀 수 없이 만들어 드릴테니. 그 이야기는 경기가 다 끝난 후에 다시 한 번 해주세요.”
“!”
짧지만 확신에 찬 목소리.
그런 목소리를 남기고 코너 플래그를 향해 멀어지는 재혁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케빈은 이내 호흡을 가다듬은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재혁을 알게 된 지 겨우 반 년이 조금 넘었지만 그 기간 동안 하나 확실히 배운 게 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재혁이 한 말이라면 믿어주는게 우선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재혁이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을 지키지 못 한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 믿음은 순전히 재혁을 알고 있는 동안 우연처럼 생겨난 게 아닌, 같이 호흡을 맞추면서 쌓은 학습의 결과였기에 케빈은 코너킥을 차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재혁을 바라보며 언제든 움직일 수 있도록 마음을 다졌고, 공을 바닥에 한 차례 굴리면서 찰 곳을 정하던 재혁은···.
‘흐음.’
코너킥을 통해 연결할 플레이를 고민하며 입술을 모았다.
‘지금 상황에서 코너킥은 보너스 같은 거야. 한 번 정도 기회는 노릴 법 해. 하지만 감독님이 구상하는 그림 속에서 이런 세트 피스 상황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다.’
오타멘디에 이어 콤파니, 그리고 페르난지뉴까지 모두 패널티 박스에 자리를 잡고서 그의 발을 떠나 올라올 공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재혁은 쉽게 해결되지 않는 고민에 빠졌다.
공을 올려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마음 먹은 대로, 그리고 흐름에 맞춰 올려주면 되는 거니까.
그렇지만 머릿속으로 끊임없이 ‘하지만’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서 재혁은 선택 가능한 시나리오들을 고민하며 미간을 모았다.
이대로 공을 올릴 것이냐, 아니면 그가 ‘믿고 있는’ 방법대로 진행할 것이냐.
그렇게 선택지들을 눈앞에 두고 고민하던 재혁은 마침내 마음을 정한 듯, 모았던 숨을 토해내며 천천히 공을 앞에 두고 뒤로 몇 발자국을 걸었고, 이제야 재혁이 코너킥을 찰 것이란 것을 확인한 선수들도 모두들 박스 안에서 치열하게 자리 경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곧 올라온다! 공이 올라오면 확실히 끊어야 돼!”
“서먼, 절대 마크 놓치지마! 공보다 일단 사람이 먼저야!”
“집중, 집중! 이제 달린다! 그리고 찬다···, 어?!”
“뭐, 뭐야?!”
다만 재혁이 찬 공이 이동하는 방향을 확인한 양팀 선수들은 모두 당황한 얼굴로 헛숨을 토해냈다.
분명 높게 날아올 것이라 예상했던 코너킥은 양팀 선수들 중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 한 방향으로 날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방향을 중계를 통해 확인한 캐스터와 해설자들도 당황한 듯, 단어 사이가 떨렸다.
“최, 최재혁 선수! 공을 패널티 박스가 아닌, 같은 진영 후방을 향해 길게 찼습니다!”
“사전에 미리 이야기가 된 게 아니었던 것 같죠? 본머스의 선수들처럼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도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어디로 가야할지 갈피를 못 잡고 있습니다!”
“특히 세트 피스에 가담하기 위해 올라왔던 오타멘디와 콤파니가 황급히 뒤로 물러나고 있군요. 어쨌든 공은 중앙을 지키고 있던 델프 선수에게 이어졌습니다! 델프, 자신에게 패스가 올 줄 몰랐기에 누구에게 공을 건네줘야 할지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모습이죠?”
“그러는 사이 최재혁 선수가 델프 선수 곁으로 다가왔습니다! 일단은 최재혁 선수에게 공을 다시 돌려준 델프 선수지만, 이게 대체 무슨 목적인 걸까요?”
중계진들의 말처럼,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시청자들 또한 선수들 못지 않게 당황했다.
특히 맨시티를 응원하는 사람들은 너무도 허무하게 날려버린 세트 피스 기회를 아쉬워하며 비명을 질러댔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오타멘디와 콤파니라면 코너킥 상황에서 헤딩을 이용해 충분히 상대 골망을 위협할만한 선수였거늘.
그런 기회를 그냥 날려버리다니!
“오늘 대체 뭐가 문제인 거야?!”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한 팬들은 지금까지 연승을 기록하며 보여준 모습과 거리가 있는 플레이를 계속하고 있는 선수들을 향해 불만 섞인 야유를 쏟아내기 시작했다.
몇몇은 선수들의 이름까지 불러가며 직접적으로 지목까지 했다.
하지만 그 사이에서도 한 사람만큼은 여전히 믿음과 신뢰가 가득 담긴 눈빛으로 경기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선수들을 필드에서 직접 관리하고 있는 과르디올라 감독.
평소 쉬지 않고 끊임없이 지시를 내리면서 모든 게 완벽할 때까지 만족하지 않는 그 과르디올라 감독이···.
“좋군.”
오늘은 아주 짧은 한 마디로 재혁의 플레이를 평가한 뒤 만족스럽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것이다.
대체 무엇을 보고 저렇게 만족스러워한단 말인가?
그의 머릿속 안을 알 수 없었기에 많은 이들이 궁금해 하던 것은 머지않아 밝혀졌다.
재혁 스스로가 경기력으로 증명하는 방법으로 말이다.
다만 아직까진 어떤 식으로든 플레이가 형태를 이룰 것인지 알 수가 없었기에 본머스의 에디 감독은 맨체스터 시티가 라인을 물리는 모습을 확인하기 무섭게 선수들을 다그쳤고···.
“다들 조금만 더 힘내라! 흐름을 놓치면 안 돼! 계속 압박해!”
“글쎄요. 그게 과연 처음부터 그쪽의 흐름이었을까요?”
그런 에디 감독의 목소리를 얼핏 들은 재혁은 공을 소유한 채로 은은한 미소를 입가에 떠올리면서 천천히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텐션을 쌓으며 준비한, ‘올가미’를 펼치기 위해서 말이다.
다만 그 부분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본머스의 선수들은 에디 감독의 명령에 따라 진영을 빠르게 위로 끌어 올리면서 압박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재혁에게 달려든 선수는 본머스의 미드필더, 루이스 쿡이었다.
‘절대로 쉽게 등을 돌리게 만들지 않겠다! 등을 돌리려면 공을 포기해!’
루이스 쿡은 공을 아끼기 위해 등을 지고 있는 재혁의 뒤를 강하게 치고 들어갔고, 연신 다리를 뻗으면서 그의 발밑에 있는 공을 건드리기 위해 압박했다.
그러면서 재혁이 취하려는 움직임을 유의 깊게 살피면서 연신 호흡을 골랐다.
공격의 시작되는 순간은 일단 공을 가지고 골대를 바라보는 것부터다.
골대를 바라보지 못한다면 공을 앞으로 보낼 수 없을 것이고, 그렇다면 공격도 시작되지 않을 테니.
‘이대로만 계속 막는다면 어쩔 수 없이 공은 다시 뒤로 빠질 거다!’
루이스 쿡은 그 점을 끊임없이 상기하면서 재혁이 쉽게 등을 돌지 못하도록 끊임없이 괴롭혔다.
절대로 재혁, 네 녀석이 공격의 시발점이 되게 두지 않겠다.
그런 각오를 계속해서 다지면서 말이다.
그렇게 십여 초 이상을 압박해내자 루이스 쿡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번지기 시작했다.
재혁은 압박으로부터 공을 지키는 것에 전념하느라 다른 일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던 것이다.
자신의 행동이 팀에 긍정적인 효과를 미치고 있다는 것에 미소를 떠올리던 루이스 쿡.
그는 이제 조금 더 욕심을 내 공을 막는 것이 아닌, 그 다음 단계인 뺏는 단계에 돌입하기 위해 숨을 골랐다.
그러면서 동시에 서서히 템포를 조절했다.
단 한 순간.
공을 빼앗을 그 순간을 노리기 위해서 천천히 스텝을 고쳤고, 틈이 보이는 순간 언제든 달려들 준비를 끝마쳤던 루이스 쿡은 문득 시야에 들어온 기묘한 상황에 눈썹을 꼬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지금 그의 압박을 받고 있던 재혁은···.
‘우···, 웃고 있어?!’
여전한 미소를 떠올리고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라는 생각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갈 때 즈음, 루이스 쿡은 상황이 변한 것에 얼른 목소리를 높여 소리쳤다.
‘제길, 놓쳤어!’
“공이 또 한 번 뒤로 빠진다! 계속 압박해!”
미소가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 보이는 상황과 흐름이다. 그리고 그 두 조건 상에서 유리한 것은 현재 자신들이다.
그 점을 기억하면서 목소리를 높이던 루이스 쿡은 재혁을 지나치면서 공이 흘러내려간 최종 라인을 압박하기 위해 계속 달렸다.
만약 여기서 공을 끊을 수만 있다면 그거야 말로 최상의 결과가 나올 수 있는 조건이었으니까.
그러니까 쉬지 않고 계속 달린다!
그런 생각을 하며 이동하던 루이스 쿡의 눈에 또 한 번 공이 바닥을 구르는 것이 보였다.
오타멘디의 발끝에 머물었던 공이 우측면과 중앙, 그 사이를 향해 잔디를 훑으며 이동한 것이다.
공이 향할 위치를 파악한 루이스 쿡의 두 눈이 번득였다.
“최재혁이다! 최재혁을 향해 구르고 있어! 저거만 끊으면 바로 역습 찬스야!”
그의 말처럼 오타멘디의 리턴 패스는 자리를 이동한 재혁을 향하고 있었고, 그 뒤론 동료인 서먼이 함께 달리면서 재혁을 압박하고 있었다.
이거다.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서먼과 재혁을 지켜보던 루이스 쿡의 얼굴은···.
“‼”
미소를 떠올렸던 그 모습 그대로 굳어버리고 말았다.
분명 공이 재혁에게 향한 건 맞았지만, 이어지는 장면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장면을 연출하고 있던 것이다.
아니, 이미 한 번 본적이 있는 장면이었다.
루이스 쿡이 당황한 듯, 혀를 더듬으면서 소리쳤다.
“케, 케빈! 또 다시 케빈에게 간다!”
“저기서 등을 진 채로 바로 패스를 찌른다고? 무슨 말도 안되는···!”
“크, 큰일이다! 압박에 집중하느라 수비 라인이 무너졌어!”
“젠장! 일단 막아! 누구든 붙어서 막아!”
“막는다고?”
투웅!
생긋, 공을 받음과 동시에 미소를 떠올린 케빈은 이번에도 정확하고 깔끔한 완벽에 가까운 터치로 공을 받아내며 중얼거렸다.
“재혁이가 부린 마법 같은 패스가 이렇게 깔끔하게 연결된 상황인데. 이걸 그냥 막는다는 말로 막을 수 있을 거 같아? 그리고···.”
사락!
터치와 동시에 바로 드리블을 시작한 케빈.
케빈은 빠른 속도로 공을 치고 달리면서 본머스의 진영으로 침투를 시작하며 웃었다.
“마법은 이제 겨우 시작된 참이라고.”
< 129. 마법을 부리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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