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26화 (126/225)

< 126. 시작의 밤, 그 전야제 >

탁, 탁!

“그럼 모두 준비하세요!”

돌돌 말아쥔 책자를 부딪치며 소리를 낸 남성의 목소리를 시작으로 어수선하던 주변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남성은 지난 일주일간 있었던 경기들을 분석하고, 토론하는 프로그램인 BDC의 간판 프로그램, 매치 데이즈의 담당 피디로 촬영을 시작하기에 앞서 주위를 깔끔하게 정돈한 것이다.

피디는 천천히 스테이지 위로 오르는 패널들을 맞아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주고 받았다.

“그럼 오늘 하루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게리.”

“나야 뭐 항상 하던 대로 하는 거지. 중요한 건 오늘 같이 하게 된 이 친구가 아니겠나?”

“저도 매치 데이즈 촬영이 오늘이 처음은 아니지 않습니까? 이정도야 여유롭죠.”

“하하! 확실히 그렇겠지. 그럼 오늘은 말 좀 더듬지 말라구. 듣는 내가 다 떠, 떨리던데. 너, 너무 긴장하지 말라구. 큭큭.”

게리가 손을 뻗어 지목한 것에 가벼운 어조로 말을 받은 오늘의 쇼를 함께 할 게스트, 티에리 앙리.

앙리는 이미 게리의 농담이 익숙했는지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저어 보이다가 게리와 함께 스테이지로 올랐고, 준비한 의자에 앉게 된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촬영을 시작하기에 앞서 눈앞에 놓여 있는 큐시트와 분석 자료들을 살폈다.

한 번 카메라가 돌기 시작되면 끊지 않고 계속 이어가야 하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았으니까.

그렇게 모든 게 확실하다는 사인을 주고 받은 두 사람은 담당 피디에게도 신호를 보냈고, 피디는 둘의 신호를 확인 한 뒤 오른손을 높게 든 후 손가락들을 하나씩 접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침내 모든 손가락을 접게 된 PD는 촬영 시작이라는 소리를 크게 외쳤고, 붉은 빛이 들어온 카메라를 향해 게리와 앙리는 인사하는 것을 시작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안녕하십니까, 축구를 사랑하는 여러분. 그럼 오늘도 함께 지난 며칠간 있었던 경기들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요? 오늘 저와 함께 여행을 해주실 게스트는 지난 날, 아스날의 주역이었던 티에리 앙리 해설입니다. 반갑군요, 앙리. 얼마만에 매치 데이즈에 나와주신 거죠?”

“환영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올해 3월 경에 몇 주 함께 했던 적이 있었죠. 그게 벌써 반 년도 훨씬 전의 일이군요.”

“시간이 벌써 그렇게 흘렀습니까? 겨우 엊그제 헤어진 것 같았는데 말예요. 하긴, 이제 눈이 내리는 계절이 찾아왔으니. 곧 또 한 살씩 먹겠군요.”

부드러운 분위기 속에서 시작을 알린 두 사람은 그렇게 서로의 안부를 묻는 것을 간략히 줄였고, 본격적으로 지난 경기들을 복기해보는 시간을 가지면서 가벼웠던 분위기는 잠시 접어두고 진지한 얼굴로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은 호스트인 게리였다.

게리는 며칠 전 있었던 경기들을 언급하면서 말문을 열었다.

“먼저 스완지 시티가 첫 승을 거둔 부분을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죠. 치열하게 강등권 싸움을 이어가고 있던 중, 웨스트 브롬을 상대로 취한 승점 3점은 분명 3점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지 않겠습니까?”

“맞습니다. 아직 전반기가 다 끝나지 않은 상황에 웨스트 브롬도 스완지와 마찬가지로 강등권 싸움을 힘겹게 이어가던 중이었거든요. 3점이 상대와의 격차를 벌리거나, 좁히게 만들어주는 역할은 한다면 3점은 만 금과 같은 값을 하는 점수가 되겠죠.”

“당시 경기를 모두 보신 걸로 알고 있는데요. 혹시 해당 경기를 지켜보시면서 눈에 띄던 장면이 있었습니까?”

“눈에 띄던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면 역시 이 선수를 칭찬하지 않을 수가 없죠.”

앙리는 게리의 질문에 가볍게 대꾸하며 미리 준비한 데이터를 스크린에 띄우기 위해 손을 움직였고, 곧 두 사람이 지켜보는 화면에 앙리가 준비한 선수의 사진과 함께 경기 기록이 떠올랐다.

게리는 사진 속 인물의 얼굴을 확인하기 무섭게 감탄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스완지 시티의 김수용 선수군요. 이 선수의 활약은 두말할 필요가 없죠.”

“그동안 김수용 선수는 스완지 시티가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선택이었습니다. 이전 경기까지의 기록이 그걸 증명해주고 있죠. 하지만 웨스트 브롬과의 경기에 나서면서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여줬어요.”

챡, 챡.

이번엔 지난 경기와의 비교 스텟을 꺼내든 앙리는 스크린을 계속 살펴보면서 설명을 계속 했다.

“일단 전체적인 패스 성공률의 변화를 보실까요? 그동안 90%대의 비현실적인 패스 성공률을 보여주던 선수였으나, 웨스트 브롬을 상대로 펼친 경기에선 다소 떨어진 84%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변화가 생기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확인한다면 다들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겁니다. 게리는 뭐가 변화했는지 바로 보이시겠죠.”

“안정성이 떨어진 만큼, 찬스 메이킹 능력이 늘어났군요.”

“바로 그겁니다.”

게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손가락을 튕긴 앙리는 특정 스텟을 확대해 보여주면서 말을 이었다.

“웨스트 브롬 경기에서만 성공시킨 키 패스가 8횝니다. 이건 선발로 출장한 지난 3경기를 합친 키 패스 숫자와 동일한 횟수죠. 게다가 후방으로 이어지는 패스보다 전방으로 이어지는 패스의 시도가 더욱 잦아졌어요. 안정적으로 공을 소유하는 것보다 보다 공격적인 전개를 주도하기 시작했다는 말이죠. 그리고 그 결과가···.”

“연패를 끊는 승리.”

“이번 승리가 보여준 과정들을 생각해 본다면 단순히 연패만 끊었다고 말할 수 없을 겁니다. 스완지 시티는 이제야 키를 잡은 겁니다. 어떤 식으로 강등권에서 탈출해야 할지, 그 배를 운영할 키를 말이죠.”

앙리가 말을 끝내며 물을 한 모금 입에 머금자 게리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에 살을 붙였다.

“그동안 기대 이하의 경기력으로 팬들을 실망 시키고 있던 스완지에겐 기쁜 소식이겠습니다. 과연 다가올 경기에서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기대를 하고 싶지만···. 하필이면 그 상대가 같은 한국인 선수가 핵심 전력으로 뛰고 있는 구단이군요?”

“확실히 이게 가장 큰 문제죠.”

물을 삼키기 무섭게 입을 연 앙리의 입에서 가장 먼저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럴 수밖에.

앙리는 새로운 화면에 준비해온 자료들을 띄웠고, 곧 모두의 입에서 왜 탄식이 먼저 튀어 나왔는 지를 설명해주었다.

“연고지 라이벌 맨유를 상대로 승리하면서 단일 시즌 최다 연승이라는 14 연승을 기록한 맨체스터 시티. 그들이 하필이면 다음 경기 상대라니. 클리멘트 감독이 과연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적어도 하나는 확실하죠. 아마 경기를 준비하는 내내 골치가 썩고 있을 겁니다. 특히 바로 이 선수.”

툭!

“김수용과 같은 한국 출신의 미드필더, 최재혁 선수에 대해 고민하면서 말입니다.”

스크린을 건드리자 화면이 넘어가며 수용에 이어 이번엔 재혁의 프로필 사진이 스크린에 떠올랐다.

하늘색 유니폼을 입고 있는 맨시티의 최재혁.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앙리는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한 마디를 나지막이 흘렸다.

“이 친구가 몇 살이라고요? 이제 내년이면 19살?”

“아직 고등학생이죠.”

“미친 거예요.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가장 최근 19살 짜리 선수가 프리미어에서 활약했던 게 언제였죠? 아마 맨유의 래쉬포드였죠? 그 전이 스털링, 그리고 루니. 하지만 이 친구는 정말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일을 해내고 있어요. 바로 그 점 때문에 전 지난 맨체스터 더비를 지켜보며 제 눈을 의심했습니다.”

“앙리가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고요? 골대로 향하는 수만 가지의 갈래를 보는 당신이요?”

“아마 저뿐만이 아닐겁니다.”

꿀꺽, 침을 한 번 삼킨 앙리는 한 점의 거짓도 없는 진실한 얼굴로 게리를 바라보며 말했다.

“과르디올라 감독의 지도를 받은 적이 있는 선수라면 누구라도 그랬을 겁니다. 그만큼 최재혁 선수가 보여준 움직임은 완벽했거든요. 과르디올라 감독이 지향했던 축구의 그 정점. 그걸 보여준 것이 바로 최재혁 선수였으니까 말입니다.”

“과르디올라 감독이 지향했던 축구의 정점이요? 그게 그 정도였습니까?”

“제가 지난 번에 출연했을 때 했던 말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과르디올라 감독의 공간론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이제 영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죠.”

경기를 어떤 식으로 준비하고, 파이널 써드로 향하는 길까지 어떤 방식으로 나아가는지.

과르디올라 감독이 머릿속에 담고 있는 이야기를 풀어 설명했던 앙리의 지난 말을 떠올리며 게리가 대답하자 앙리는 그를 향해 곧장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때 제가 핵심적으로 설명했던 부분은 포지션과 점유였습니다. 그를 통해 선수들은 과르디올라 감독이 원하는 빠르고 유기적인 패스를 주고 받아 전진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게 되죠. 하지만 이 두 개념을 완벽히 부숴버린 게 바로 재혁이 맨유 전에서 보여준 플레이였습니다.”

“확실히 그 날 최재혁 선수의 플레이는 기존의 과르디올라 감독이 말하던 공간론과는 거리가 있었죠.”

“아뇨. 거리가 있던 게 아닙니다. 다시 말씀 드리지만 그건 과르디올라 감독이 지향하는 축구의 ‘정점’이었습니다.”

단호하게 다시 한 번 자신의 말을 확인한 앙리.

그는 게리와 눈을 마주치면서 머릿속에 정리해두었던 내용을 술술 꺼내놓았다.

“사람들은 티키타카라는 환상에 얽매여 과르디올라의 축구를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강요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공간을 찾는 플레이었지, 짧은 패스가 아니었으니까요. 패스가 길기 때문에 티키타카가 아니다? 그거야 말로 잘못된 선입견이 낳은, 과르디올라 감독의 축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사람들이 오류를 범하는 실수였던 것이죠. 다시 한 번 이 패스들을 한 번 보십시오. 과연 최재혁 선수가 시도한 패스들 중 공간을 찾지 못 해 엇나간 중장거리 패스들이 있던 가요?”

“거의 없었죠.”

“거의가 아닙니다. 적어도 공간을 찾는 그 시야와 이해력 만큼은 다시 없을 정도로 완벽했던 겁니다. 그리고 그 완벽함이 바로 완벽한 승리라는 결과를 불러 일으킨 겁니다.”

확언.

신뢰와 믿음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확언을 토해낸 앙리는 재혁을 향해 다시 없을 극찬을 쏟아냈다.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가 직접 언급했던 것처럼 과르디올라 감독의 지도를 받아본 적이 있기 때문에 재혁이 보여준 플레이들이 얼마나 대단했던 것인지, 앙리는 직감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런 극찬을 토해낼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게리는 거기서 앙리를 따라 흥분하지 않았다.

방송을 보고 있을 시청자들은 과르디올라 감독의 지도를 받아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니까.

그들을 이해시키려면 좀 더 비교가 될 수 있는 지표가 필요하다.

그 점을 떠올리면서 게리는 잠시간 고개를 주억이더니 앙리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렇다면 말입니다. 이해하기 쉽게 단도직입적으로 하나 묻고 싶군요. 이야기를 듣다보니 궁금한 점이 하나 생겨서 말입니다.”

“궁금한 점이요?”

“만약 최재혁 선수를···.”

슬쩍, 앙리의 눈치를 한 번 살핀 게리가 입가에 장난기가 가득 실린 미소를 띠며 물었다.

“사비 에르난데스 선수와 비교를 한다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최재혁 선수를 사비랑요?”

“진지한 비교는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재미를 위한 비교죠. 그리고 방송을 보고 계시는 시청자분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비교 정도로 생각해주시면 됩니다.”

“아, 그런 비교를 말씀하신 거였습니까?”

“예?”

게리의 눈썹이 순간 한 차례 떨렸다.

그런 비교라니?

앙리의 대답에서 무언가 미묘한 이질적인 요소를 감지한 것에 게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를 향해 되묻고 만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게리의 되물음에 앙리는 주름진 이마를 몇 차례 긁적이더니 말했다.

“저는 진심으로 두 선수를 비교 선상에 올려놓는다 하더라도 큰 문제가 될 것 같다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오히려 재밌는 지표가 하나 생길 것 같다는 생각을 떠올렸지요.”

“···!”

“물론 이제 커리어를 시작한 선수와 은퇴를 목전에 둔 선수를 비교한다는 점에서 여러 문제점이 있긴 하겠지만, 전 이런 식으로 두 선수를 평가하고 싶군요.”

꿀꺽, 살짝 마른 입술을 핥으며 침을 삼킨 앙리.

그는 갈색 빛이 머무는 눈빛을 똑바로 빛내면서 끊었던 말을 이어 붙였다.

“이전까지 사비가 보여준 것이 과르디올라식 티키타카의 시초였다면, 재혁이 앞으로 보여줄 축구는 또 다른 티키타카. 아마 새로운 시대를 열게 될 축구가 그의 발끝에서 시작될 겁니다. 비교보다는 변화···, 그렇군요. 재혁은 분명 사비와는 다른 축구로 변화를 일으켜줄 겁니다. 그리고 아마 그 기점은···.”

찰칵.

슬라이드를 한 번 넘긴 앙리는 펼쳐진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 일정을 보여주면서 웃었다.

“다이나믹한 일정 뒤에 찾아올 크리스마스 이브 전야제. 바로 이 날이 되겠군요.”

< 126. 시작의 밤, 그 전야제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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