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 근원 >
“또 다른 새로운 전술 노트? 그것도 20여 가지나?!”
재혁의 말에 사네가 놀라 소리쳤다.
새롭다 못해 혁명이라 불리던 전술을 보여준게 바로 며칠 전에 펼쳤던 맨유전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또 다른 전술이라니?
게다가 20여 가지나 되는 숫자가 준비되어 있다는 말에 사네는 믿지 못하겠다는 어조로 재혁에게 장난치지 말라며 웃었는데, 그런 사네를 향해 재혁은 뺨을 긁적이더니 손에 쥐고 있던 노트를 그에게 건넸다.
“그렇다면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는게 빠르겠네요. 한 번 살펴보실래요?”
“그래도 돼?”
“사네가 다른 구단의 스파이만 아니라면 문제가 생기진 않겠죠?”
“당연하지! 나만큼 구단에 충성스러운 선수가 누가 또 있다구!”
“뭐, 며칠 전 트래핑 실수로 상대방한테 공을 그대로 헌납했던 장면을 떠올리면 무리도 아닌 것 같지만···.”
“됐거든. 그건 어디까지나 실수였어, 실수. 그럼 실례 좀 할까.”
큼큼, 애써 목을 털어내던 사네가 손을 뻗어 노트를 쥐었고, 첫 장부터 천천히 읽어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장, 그리고 두 장···.
처음엔 느렸던 손이 점차 빨라졌고, 손이 빨라지는 만큼 사네의 눈동자도 서서히 떨기 시작했다.
그리고···.
꿀꺽, 침을 삼킨 사네는 잔뜩 굳은 얼굴로 숨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뭐야···, 진짜였잖아? 진짜 새로운 전술들이···.”
“그럼 거짓말인줄 알았어요?”
“하, 하지만···. 맨유와의 경기가 바로 며칠 전이었는데, 이런 걸 또 준비하셨다고? 그리고 그걸 네게 숙지하라고 하셨다고?”
미친 거 아냐?
목끝까지 올라온 말을 순간적으로 참아낸 사네.
그는 곧 피식, 실소를 흘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하긴 다른 사람들도 아니고 지금 그가 알고 있는 두 사람이라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리라.
평소 과르디올라 감독과 재혁, 둘이 보여주던 행실이 어떻던가?
누구보다 먼저 훈련장에 출근하고, 누구보다 늦게 퇴근한다.
그걸로 끝이느냐?
‘휴일에도 따로 공부하고, 또 개별 훈련까지 진행한다고 누군가 그랬었지.’
사네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이미 축구에 단단히 미쳐있는 사람한테 미쳤냐고 물으려 하다니.
이래서야 미친 사람한테 실례이지 않겠는가?
미쳐 있는 것을 쭉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나도 어렸을 땐 훈련만 소화하고 일과를 끝내진 않았던 것 같은데···. 축구가 정말 좋아서 하루종일 공을 찼던 것 같은데, 지금은···.’
한 번 생각에 잠기자 턱을 괴고 계속해서 생각을 거듭하기 시작한 사네.
그런 사네를 마주보면서 재혁은 뺨을 긁적이더니 손을 뻗으며 물었다.
“저, 다 보셨으면 다시 돌려줄 수 있나요? 아직 다 못 외운 부분들이 남아 있는데.”
“아. 그렇지. 미안. 여기 있어.”
“고마워요.”
그렇게 사네에게서 노트를 돌려 받은 재혁은 다시 내용을 복기해보기 시작하면서 말문을 닫았고, 복기에 집중하면서 말이 없어진 재혁을 한동안 옆에서 빤히 지켜보던 사네가 목덜미를 긁적이며 조심스레 입술을 떼며 물었다.
“그런데 말야. 그렇게 보고만 있어도 공부가 돼?”
“일단은 읽는 대로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이미지를 그려보곤 있어요. 물론 실전에서 이론적인 공부를 모두 적용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상황에 맞춰 적용할 수 있는 응용력이라는 것은 기본이 깔려 있으면 생기지 않는 부분이니까요.”
“흐음, 확실히 그렇지.”
“그리고 딱히 공부라고 생각하면서 보고 있는 건 아니에요.”
“···?”
재혁의 마지막 말에 물음표를 띠며 고개를 갸웃인 사네는 이어지는 재혁의 설명을 듣곤 눈동자를 크게 키웠다.
“축구 선수라는 직업을 선택한 이상, 축구라는 분야에 대한 노력을 쏟는 건 공부가 아니라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니까요.”
“!”
“당연한 일을 당연히 할 수 있게 되는 순간까지···, 그냥 꾸준히 노력해야죠.”
“흠···, 그렇군.”
재혁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 사네.
이후로 한동안 둘 사이에는 침묵이 머물렀다.
그렇게 멍하니 재혁의 옆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사네는 콧잔등을 긁적이더니 다시 한 번 재혁에게 말을 붙였다.
“그러면···, 그거 나도 같이 할 수 있나?”
“네?”
“아니, 그냥···. 원래 축구란게 혼자 하는 게 아니잖아? 그리고 계속 머리로만 공부하는 것보단 실전에서 어떤 식으로 적용할 수 있을지 공부해보려면 혼자보단 둘이 나을 테고···.”
“호오.”
“뭐, 뭐야. 왜 그런 식으로 쳐다봐?”
재혁이 노트를 덮고 눈썹을 기묘하게 그리자 사네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고, 그런 사네를 향해 재혁은 간단히 대꾸했다.
“저는 사네가 훈련보다 장난 치는 걸 더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요. 스털링이랑 같이 맨날 훈련 세션이 끝나면 이상한 내기를 하러 다녔잖아요? 멀리 있는 쓰레기통에 공 넣기라던가, 도구들을 발로 차서 정리한다던가···.”
“그, 그거야, 우리도 어디까지나 훈련의 일환으로 그런 걸 했던 거라구!”
“본인이 그렇다면 뭐 그런 거겠죠. 그러면 같이 할래요?”
“그래도 돼?”
긍정적인 대답을 듣게 되자 귀를 쫑긋이며 사네가 되물었고, 재혁은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딱히 안 될 이유는 없죠. 그리고 말해주신 것처럼 혼자보단 둘이 나으니까. 정규 훈련이 시작되려면 아직 30분은 더 남았죠? 30분이면 스트레칭을 겸하면 딱이겠네요. 그럼 공부터 준비할까요?”
“오케이! 공은 내가 가지고 올게!”
재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이 난 발걸음으로 창고를 향해 달려간 사네.
그런 사네를 뒤에서 지켜보던 재혁은 피식, 짧은 미소를 흘리며 웃었다.
‘아무래도 맨유와의 경기에서 벤치를 지킨게 자극이 됐나 보네.’
사네의 나이도 지금 자신처럼 프로로 치면 많은 나이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지난 경기에서 활약한 본인과 제수스를 보며 느낀 바가 많았을 것이리라.
자신보다 한 살, 그리고 두 살이 어린 선수들이 활약하는 모습을 벤치에 앉아서 지켜보고만 있어야 하는 게 분명 기쁜 경험은 아니었을 테니까.
‘뭐. 나야 실제 나이를 따지는 건 무의미하지만···, 신체 나이라는 건 있으니까.’
이제는 제법 익숙해졌지만, 여전히 오묘한 감각에 어깨를 으쓱이던 재혁은 멀리서 사네가 소리를 치며 다가오는 것에 고개를 들었고, 둘은 곧 개별 훈련을 시작하면서 공을 주고 받았다.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얼굴로 재혁과의 훈련에 임하는 사네는 본 훈련이 아님에도 최선을 다했고···.
“이건 이거대로 긍정적이군.”
두 사람의 모습을 사무실 창가에서 바라보던 과르디올라 감독은 블라인더를 슬그머니 다시 올려놓으면서 자리를 벗어났다.
재혁을 전적으로 기용하기 시작하면서 기존 선수들이 혹시라도 박탈감을 느끼게 되면 어쩌나 걱정을 했었지만, 아무래도 그 걱정은 자신만 느꼈던 기우였던 것 같았다.
오히려 서로에게 좋은 자극이 되어주는, 긍정적인 긴장감을 끌어내주는 역할을 해주고 있었으니.
“그냥 재혁의 존재 자체가 복덩어리야. 2천만 파운드면 정말 싸게 사왔어.”
클클, 짧게 웃어 보인 과르디올라 감독은 이후 훈련장으로 향할 준비를 하면서 달력을 살폈다.
이제 바로 다음 경기부터 시작되는 일정에···, 곧 찾아올 박싱데이까지.
모든 경기들이 3일 혹은 4일이라는 짧은 간격을 두고 계속 이어지고 있었으니, 당분간 휴식과는 담을 쌓고 지내야 하리라.
그렇게 자켓에 팔을 꿰던 과르디올라 감독은 또 한 가지 이벤트를 떠올리곤 탄성을 흘렸다.
“이런,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 했군.”
저벅, 저벅.
발을 옮겨 다시 달력 앞으로 다가간 과르디올라 감독은 오늘 날짜가 붉은 색 펜으로 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지는 만큼, 절대 잊어서는 안 될 일이 바로 오늘 있었으니까.
절대 까먹지 말자, 그렇게 다시 한 번 재차 스스로에게 다짐을 한 과르디올라 감독은 훈련장으로 향했고, 필드 위에 모여 있는 선수들을 향해 박수를 치며 오늘 하루도 다치지 말고 최선을 다해 훈련할 것을 주문했다.
그렇게 훈련이 시작되었고, 재혁을 포함해 모든 선수들은 감독과 코치들의 지시에 맞춰 구슬땀을 흘렸다.
바로 며칠 전, 맨유와의 경기에서 승리했다는 기쁨도 모두 잊은 것처럼.
그들이 원하는 리그 우승이라는 목적을 달성하려면 과거에 달성한 기쁨에 취해 멈춰 있을 게 아닌, 끊임없이 새로운 기쁨을 위해 전진을 해야 했으니까.
그렇게 오전 훈련과 점심 이후 오후 훈련까지 모두 끝을 낸 선수들은 샤워를 끝내고 하나둘 훈련장을 벗어났고, 재혁 또한 남들처럼 옷을 갈아입고 기숙사로 향하려고 했는데···.
“재혁. 혹시 바쁜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던 과르디올라 감독이 그를 불러 세웠다.
재혁은 감독의 부름에 간단히 고개를 저어보인 후 다가갔다.
“아뇨. 특별히 할 일도 없고, 어차피 주말이라. 아마 기숙사로 돌아가면 그냥 쉬겠죠?”
“그래? 그러면 나랑 같이 좀 가지.”
“같이요? 어딜요?”
평소 축구에 관한 이야기는 자주 나누었지만, 어디를 같이 가자는 말은 처음이었기에 재혁이 고개를 갸웃이며 되물었고, 그런 재혁을 향해 과르디올라 감독은 씨익, 밝은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내가 축구를 하고 있는 근원이 있는 곳으로.”
***
끼이익.
“도착했군. 내리면 되네.”
“여기가···, 감독님께서 축구를 하고 있는 근원이 있는 곳이에요?”
창밖의 건물을 확인하면서 재혁이 확인하듯 되물었고, 과르디올라 감독은 그를 향해 씨익 웃어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였나?”
“의외라기보다···.”
턱을 긁적이며 말을 늘였던 재혁이 눈에 보이는 건물의 정문을 살피며 말했다.
“여긴···, 병원이잖아요?”
“그렇지. 그것도 일반 병원이 아니라, 장기 입원한 환자들이 주로 모여있는 곳이야. 일명 암환자 병동이라고도 불리는 곳이지. 그 이유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바로 이해할 수 있겠지?”
“암환자 병동···.”
감독의 말에 조그만 목소리로 혼잣말을 읊조리며 병원 간판을 살핀 재혁.
하지만 그 이상 생각에 잠겨 가만히 서있을 수 없었다.
과르디올라 감독이 문을 향해 다가가더니 병원 안으로 말도 없이 쑥 들어가버린 탓이었다.
재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감독의 뒤를 쫓아 이동했고, 눈앞에 펼쳐진 풍경을 확인하곤 눈을 크게 떴다.
순백색의 병동은 크리스마스를 맞아 알록달록하게 꾸며져 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금방이구나.
그런 생각에 빠져있던 재혁은 옆에서 들린 여성의 목소리를 쫓아 고개를 돌렸다.
“과르디올라 감독님! 또 와주셨네요! 피곤하실텐데.”
“어디 먼 곳에 있는 병원도 아니지 않습니까? 지나가는 길에 또 들린 겁니다. 아. 헨델 간호사님, 오늘은 이 친구랑 함께 왔습니다. 최재혁이라고 저와 같은 구단에 속해있는 선수죠.”
“어머, 안녕하세요! 정말 최재혁 선수님이셨네요! 당연히 알죠! 맨체스터 시티의 최재혁 선수를 모르는 사람은 이 병원에 아무도 없는 걸요!”
“저를···, 아세요?”
과르디올라 감독과 헨델 간호사,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던 재혁은 뻘쭘하게 검지를 뻗어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고, 그런 재혁을 향해 헨델은 입을 가리고 호호 웃으며 답했다.
“당연하죠. 이곳은 맨체스터 시티의 정기 후원을 받는 병원들 중 하나인 걸요. 맨시티의 선수를 모를 수가 있나요? 그리고 최재혁 선수라면 절대로 모를 수 없는 이유가 또 하나 있기도 하고요.”
재차 입을 가리며 웃는 헨델 간호사.
다만 간호사가 이어 설명한 뒷부분은 쉽게 이해할 수 없었기에 재혁은 고개를 갸웃였고, 그러는 사이 옆에서 들린 또 다른 어린 목소리에 재혁의 고개가 이동했다.
“허···, 헉! 최재혁 선수···, 지, 진짜 최재혁 선수에요?!”
재혁이 목소리를 쫓아 시선을 옮기자 대략 9살 정도로 되어 보이는 소년이 인형을 끌어 안고서 그를 바라보고 서있었다.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지, 머리카락이 한 올도 남아있지 않았지만, 똘망똘망한 눈을 가진 제법 귀엽게 생긴 어린 영국 소년이 말이다.
소년은 마치 못 볼 사람을 본 것처럼 청색 눈동자를 떨면서 재혁을 바라보고 있었고, 재혁이 무어라 대답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를 대신해 재혁의 곁에 다가온 과르디올라 감독이 소년을 향해 답을 해주었다.
“그렇단다, 조엘. 네가 정말 보고 싶어했던 바로 그 최재혁이야.”
< 124. 근원 > 끝
ⓒ 권주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