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23화 (123/225)
  • < 123. 교과서 >

    짧은 한 마디.

    안토루는 여러 감정들이 담겨 있는 짧은 한 마디를 객석에 남기면서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고, 그런 안토루의 뒤를 쫓으면서 옆구리를 쿡 찌른 여성은 입술을 쌜쭉 내밀곤 퉁명스레 말했다.

    “뭘 그렇게 폼을 재고 있어? 그래봐야 간신히 임대생이 될 예정이면서.”

    “케, 케이트.”

    “정신차려 오빠. 오빠랑 재혁이는 출발선이 다르다고. 저쪽은 구단에서 몸값 이상의 이적료까지 동원해가며 영입한 선수고, 오빠는 이제 겨우 임대 테스트생으로 영국에 도착한 선수야. 조금 더 확실히 비유를 하자면 숲에 포함된 나무와 아직 발아되지 못 한 씨앗만큼의 차이라구.”

    “···.”

    “지금처럼 여유 부리다간 결국 피치도 제대로 못 밟고 다시 호주로 돌아가야 할 걸? 그러니까 정신 똑바로 차려. 그리고 아직 임대도 확정이 아닌 거잖아? 테스트 후 입단이라는데 벌써부터 상태가 이래서야···.”

    동생 케이트의 닿으면 베일듯한 날이 바짝 선 말에 안토루는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무리 평소에 부끄럼이 없고 넉살이 좋은 안토루라 할지라도, 동생에게 팩트로 두들겨 맞으니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게 한동안 입술을 닫고 조용히 출구를 찾아 이동하던 안토루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린 뒤 간신히 몇 마디를 꺼낼 수 있었다.

    “네가 그렇게 설명해주지 않아도 잘 알고 있어. 나도 여유부릴 생각은 전혀 없다고. 그저···, 아직 시작도 제대로 안 한 상황이니까. 긴장이나 풀어보려고 중얼거린 거야.”

    “그래? 그렇다면 다행인데···.”

    “그보다 너야말로 오늘 되게 날카로운데? 혹시 대학 인터뷰 때문에 긴장하고 있는 거야? 아니면···, 혹시 오랜만에 재혁이를 실물로 봐서 가슴이 콩닥콩닥?”

    하지만 안토루는 역시 안토루였다.

    틈이 보이자 이내 실실 웃기 시작하더니 케이트의 어깨를 툭 건드리면서 장난이 반 쯤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넨 것이다.

    그런 안토루의 질문에 케이트의 뺨이 확 달아올랐고, 발걸음까지 멈추더니 뻣뻣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그런 거 아니거든? 그리고 인터뷰 준비는 이미 완벽하게 해놨다구. 그냥 가서 평소대로 하기만 하면 돼, 평소대로!”

    “그래? 옥스포드 대학정도 되는 명문을 상대로 평소대로만 하면 된다라. 내가 운동밖에 안해서 잘은 모르지만, 그것도 쉬운 건 아니겠지?”

    “···.”

    “뭐, 그래도 무조건 영국에 있는 대학을 가겠다는 일념 하나로 여기까지 온 것도 난 칭찬해. 그러니까 너무 부담갖지 마렴, 동생아. 네가 못해도 오빠는 어떻게든 영국에 남을테니까. 그럼 되는 거 아니겠느냐?”

    어째선지 갑자기 위치가 바뀐 느낌이 든 케이트는 안토루를 향해 무어라 대꾸하려다가 입술을 벙긋이기만 할뿐, 목소리를 내진 않았다.

    왠지 여기서 더 이야기를 나눴다간 속마음을 들킬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런 케이트의 생각과 달리, 안토루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음흉한 얼굴로 한 차례 웃어보이더니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 안되면 재혁이랑은 내가 만나줄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구.”

    “그, 그게 무슨 바보같은 소리야?! 재혁이랑 만난다니?”

    “이전 소속팀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인데. 같은 영국에 머물고 있으면 만나지 못 할 이유는 없잖아? 그렇게 같이 밥이라도 한 끼 하는 거지. 어이쿠, 동생아. 대체 무슨 상상을 한 것이느냐? 이거, 이거. 마냥 곰인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시, 시끄러! 얼른 걷기나 해! 런던으로 가는 비행기 타려면 서둘러야 한단 말야!”

    “큭큭. 그래, 그래. 티켓을 공으로 날리면 그것처럼 아까운 돈이 또 없지.”

    잔뜩 붉어진 얼굴로 안토루의 등을 떠밀면서 얼른 움직이라고 재촉하는 케이트와 그런 케이트를 귀엽다는 듯이 웃으며 계속해서 장난을 거는 안토루.

    호주에서 건너온 남매는 그렇게 올드 트래포트를 빠져나갔다.

    그 후 인파에 섞여 출구로 걸어 나왔고, 공항으로 향할 택시를 찾기 위해 움직였다.

    그러던 중, 둘의 시선을 붙잡는 한 대의 버스가 앞을 지나쳤다.

    하늘색으로 치장된 맨체스터 시티의 버스였다.

    거리를 둘러싼 맨유 팬들의 야유를 한껏 받으면서 도로를 타고 이동하는 맨시티의 버스.

    그곳에 타고 있을 재혁을 생각하니 자신도 모르게 케이트는 발을 멈추고 멍하니 멀어지는 버스를 바라보았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안토루가 뺨을 긁적이며 물었다.

    “메일이라도 한 통 보내보는게 어때?”

    “···아직은 아냐.”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택시!”

    동생의 말에 간단히 수긍하고 지나치는 택시를 잡기 위해 손을 흔들던 안토루는 어렵지 않게 공항으로 향하는 차 안에 자리를 잡고 앉을 수 있었고, 그의 옆에 같이 앉은 케이트는 턱을 괴고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일단은 합격···. 합격을 하면 그때는···.”

    당당하게 재혁의 앞에 모습을 보일 수 있을 것이리라.

    적어도 그때부터는 자신도 자신의 길을 걷기 시작한 때이니까.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참자.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케이트는 공항에 도착, 곧 런던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올랐고, 밤공기를 타고 떠오르면서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자신도 언젠가 밤하늘에 떠있는 별들처럼 스스로 빛을 밝히는 날이 올 것이라 기대하면서, 천천히 말이다.

    그리고 며칠 뒤.

    깔끔한 드레스 차림으로 대학 사무실에 앉게 된 케이트는 면접관들과 인터뷰란 항목으로 대화를 나누었다.

    면접관들은 케이트와의 대화가 만족스러웠는지, 모두 미소를 띤 환한 얼굴로 계속해서 케이트와 말을 나누고 있었고, 케이트 또한 자신에 찬 표정을 숨기지 않고서 목소리에 힘을 주어 대답했다.

    그렇게 인터뷰가 모두 끝날 때 즈음.

    한 면접관이 케이트의 입학 동기를 확인한 뒤 고개를 갸웃이며 물었다.

    “그런데 조금 묘한 부분이 있군요. 분명 케이트 학생은 뛰어난 재목이에요. 하지만 굳이 우리 칼러지의 진학을 목표로 한 이유가 뭔가요? 호주의 학과들로도 분명 모자라진 않았을 텐데 말이죠.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조금 들을 수 있을까요?”

    “그건 간단해요.”

    면접관의 말에 가뿐히 고개를 끄덕인 케이트.

    그녀는 한껏 차오른 감정을 그대로 나타내면서 면접관의 질문에 대답했다.

    “최고를 목표로 하기 위해서, 그리고 최고가 되기 위해서 영국으로 온 친구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저도 이곳으로 온 거예요. 그 친구의 옆에 함께 섰을 때 모자라고 싶지 않았으니까요.”

    짧지만 확실한 단어로 설명을 한 케이트는 이후 인터뷰가 모두 끝났으니 돌아가도 좋다는 면접관의 말에 간단히 고개를 꾸벅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고, 케이트가 사라지자 면접관들은 서로의 얼굴을 살폈다.

    케이트와의 인터뷰가 어땠는지를 간략하게 묻고 답하는 시간을 가진 것이다.

    다만 오랜 시간동안 이야기를 나눌 필요는 없었다.

    모두가 머릿속에 떠올린 답은 하나였으니까.

    면접관들 중 한 명이 대표로 스탬프를 향해 손을 뻗었고, 쿵소리와 함께 합격이라는 표시를 남긴 후 다음 인터뷰어를 찾아 손을 움직였다.

    ***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맨체스터 시티.

    두 팀간의 격돌이 끝이나자 단어 그대로 ‘세상’이 뒤집어졌다.

    [맨체스터 시티, 맨체스터의 새로운 주인임을 선포! 마침내 맨체스터의 왕좌에 오르다!]

    [(포토) 패배 이후 고개를 떨구고 경기장을 빠져나가는 맨유의 선수들.]

    [(포토) 환호하는 시티 팬들과 절망하는 맨유 팬들.]

    [맨유, 맨시티와의 ‘격차’를 실감한 경기. 이제는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맨시티는 단순히 이웃이 아닌, ‘우승 후보.’]

    [리그 14연승! 맨시티, 단일 시즌 최다 연승 기록 수립! 하지만 여전히 겸손한 과르디올라, “당장 다음 경기에서 질 수도 있다. 그렇지만 흔들리진 않을 것. 우리는 강하다.”]

    [리그 우승을 향한 6부 능선을 넘은 맨체스터 시티. 무패우승도 무리가 아니다!]

    그야말로 천지개벽.

    맨시티의 독주를 맨유가 막아줄 것이라 생각했던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이 헛된 꿈이었음을 깨닫게 해주는 경기였고, 맨시티의 팬들은 자신들이 응원하는 팀이 리그 우승을 하기에 결코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기쁨에 찬 찬가를 부르며 그들의 세상이 마침내 찾아 왔음을 기뻐하며 거리와 인터넷을 활보한 것이다.

    그리고 그런 화제는 단순히 팬들간의 움직임에서 끝나지 않았다.

    해당 경기를 직접 눈으로 확인한 스포츠 기자들.

    그들 또한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현재 EPL의 확실한 1강이 맨체스터 시티임을 말이다.

    그리고···.

    [최재혁, 맨체스터 시티의 새로운 핵! 티키타카의 무궁한 가능성을 보여주다!]

    [달라진 티키타카. 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나?]

    [‘개혁자’ 과르디올라와 ‘더 피스-Piece-’ 최재혁. 의문의 조합은 최고의 조합이었다!]

    재혁의 존재가 단순히 선수 한 명으로 끝나는 존재가 아님을 말이다.

    그들은 무리뉴 감독이 경기 후 기자회견장에서 풀었던 말들을 인용해 기사에 싣기 바빴고···.

    [‘우리는 전술에 지지 않았다. 선수에게 졌다.’ 무리뉴 감독의 애매한 독설. 칭찬인가, 변명인가?]

    [11명의 전술로도 막지 못한 1명의 선수. 무리뉴에게 재혁의 존재란 그저 ‘불운’이었을까?]

    [‘버스’를 ‘조각’내다!]

    그 대부분은 무리뉴 감독에게 부정적인 단어들로 점칠된 기사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으리라.

    다른 더비도 아닌, 맨체스터 더비에서 남겨진 패장에게 주어질 관은 가시관이거나, 땅 속에 묻힐 오동나무 관밖엔 없었으니까.

    하지만 하나를 칭찬하기 위해 굳이 하나를 깎아내려야 하는 법은 꼭 없는 법.

    흥분했던 분위기가 점차 사그라지자 사람들은 서서히 집중하기 시작했다.

    두 팀간의 차이를 만든 무언가. 바로 그 무언가를 분석하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런 기사와 동영상들이 하나둘 세상에 공개되자, 해당 기사들을 접한 사람들은 연신 믿기 힘들다는 투로 의견을 공유했고···.

    [확실히 전술에서 지지 않았다는 무리뉴 감독의 말도 꼭 틀리진 않았네요. 전반전 초반까진 분명 흐름이 좋았으니까요. 하지만···, 최재혁 선수의 이 움직임들은 도저히 보고도 믿기가 힘들군요.]

    [저 자리에서 저런 패스를 망설이지 않고 바로 뿌리다니. 무슨 기곕니까? 아니면 드론으로 경기장 전체를 따로 보고 있대요? 이게 말이 되는 시야에요?]

    [말이 되는지, 안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하나는 확실하죠. 그 어려운 걸 저 선수가 해낸 겁니다.]

    [그냥 미쳤네. 저는 더 이상 할 말 없음.]

    칭찬일색에 이어 미드필더의 역할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런 반응을 보인 것은 단순히 팬들만이 아니었다.

    이제 현역 은퇴를 선언하고 역사 속의 전설로 남게 된 이탈리아의 지휘자, 안드레아 피를로.

    그가 소셜미디어에 남긴 짧은 한 줄의 문장이 또 한 번 세계를 흔들었다.

    [역시 은퇴하길 잘했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시대에 맞춰 등장한 새로운 얼굴, 최재혁이라는 친구를 보면서 떠올린 생각이다. 이미 뇌가 굳어버린 나라면 아마 과르디올라 감독에게 저런 전술을 이행하라는 지시를 들었다면 ‘웃기지 마라’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하지만 용기있는 젊은 친구는 자연스럽게 지시를 받아들였고, 용기의 결과로 승리라는 최고의 선물을 스스로 타냈다. 아마 당분간 미드필더의 교과서를 참고하라면 저 친구를 주시하면 될 것이다.]

    다시 없을 극찬.

    한 때 미드필더의 교과서라 불리던 피를로가 재혁을 보고 그 냄새를 맡았다는 문장들은 읽는 이들에게도, 또 축구와 관계된 인물들에게도 모두 충격을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것이다.

    해당 글은 순식간에 사람들의 손을 타고 세계에서 세계로 퍼져나갔고, 재혁이 속해있는 맨체스터 시티의 귀에도 닿았다.

    다음 경기를 앞두고 아침 훈련을 진행하기 위해 훈련장에 출근한 사네는 그보다 먼저 도착해 있는 동료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오, 교과서! 오늘도 제일 먼저 와있었네?”

    “교과서요? 그게 무슨 소리에요?”

    다만 재혁 본인은 그 이야기에 대해 듣지 못 했는지, 고개를 갸웃이며 되물었고, 그런 재혁을 향해 사네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재차 말했다.

    “무슨 소리긴. 이 이야기지. 이거 몰라?”

    “피를로가 소셜미디어에 남긴 말···? 이게 제 이야기라는 거예요?”

    “그래. 우리 팀에 Choi라는 이름을 가진 선수가 너 말고 또 있냐?”

    “흐음···. 확실히 그렇긴 하죠. 그나저나 이런 과찬이라니. 이러면 부담되는데.”

    “부담될 게 뭐 있어? 너라면 그냥 평소대로 하면 돼, 평소대로!”

    뺨을 긁적이며 자신없는 목소리로 대꾸하는 재혁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사네가 크게 웃었다.

    이 친구라면 분명 있는 그대로라도 무언가 보여줄 듯한 번득임을 지닌 친구였으니까.

    그런 이유로 자신을 잃지 말라는 의도로 말을 건넸던 것인데, 재혁은 사네의 말에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게, 평소대로 못 할 거 같으니까 그렇죠.”

    “뭐? 평소대로···, 못 할 거 같다고?”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라는 얼굴로 사네가 되묻자 재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대답했다.

    “네. 오늘 아침에 훈련장에 와보니 라커에 또 이런 게 쌓여 있더라고요.”

    그러면서 슥, 손에 쥐고 있던 물건을 사네에게 보여준 재혁.

    사네는 고개를 갸웃이며 재혁이 건넨 종이더미를 확인하더니···..

    “자, 잠깐만···. 이게 대체 뭐야?”

    눈을 크게 키우면서 소리쳤다.

    도저히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그런 사네를 향해 재혁은 쓰게 웃어보인 뒤 덤덤하게 답했다.

    “뭐긴요. 또 새로운 전술노트죠. 다만 이번에는 전처럼 하나만 외울 게 아니라 20여 가지정도 되는 패턴들을 모두 외우라고 하시네요.”

    < 123. 교과서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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