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20화 (120/225)

< 120. 압박 속의 빛 >

후방 미드필더가 풀백의 위치를 커버하는 경우가 아예 없는 건 아니다.

풀백이 오버래핑을 통해 공격에 참여하게 되면서 생기는 빈 공간을 대신 커버해주는 선수들이 보통 후방 미드필더들이니까.

그런 경우 후방 미드필더들은 풀백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시간을 벌어주는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서 펼쳐지는 상황은 그것과 많이 달랐다.

맨체스터 시티가 공격을 시도하고 있는 장면이라는 것은 분명 같았지만, 이미 자리를 지키고 있는 풀백의 곁으로 재혁이 다가갈 이유를 무리뉴 감독은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상대는 그 어떤 감독들보다 각 선수들간의 간격과 공간에 대해 굉장히 철저하다고 알려진 과르디올라였으니.

무리뉴 감독은 꼬인 눈썹을 매만지면서 생각했다.

‘단순한 선수의 실수인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모든 면에서 상대에게 완벽히 압도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선수가 경험하는 압박감은 보통 사람들이 느끼면서 버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맨체스터 시티는 최근 무패 연승이라는 승승장구를 달리고 있던 중이었다.

오늘처럼 사냥꾼이 아닌, 사냥감의 입장에 놓이게 되는 일이 익숙하지 않을 것이리라.

압박감이란 이처럼 하나의 이유가 아닌, 복합적인 이유로 발생할 수 있었으니, 이를 쉬이 버티지 못하고 조급한 마음에 섵불리 내려왔을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약간 실망이군.’

무리뉴 감독의 눈동자에 떠올랐던 이채가 서서히 빛을 잃기 시작했다.

어린 선수들은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과 같다.

모양도 삐뚤빼뚤하고, 크기도 제각각에, 두텁게 쌓인 이물질들 때문에 아직 속에 어떠한 빛을 품고 있는지 알 수 없는 것이 잠재력을 숨기고 있는 선수들과 정말 똑 닮았으니까.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강한 압박 속에 던져 놓아야 하는 게 바로 어린 선수들이다.

그들이 품고 있는 진정한 빛이 어떤 색인지, 그걸 드러내 보일 수 있도록 강한 압력을 가해봐야 어떤 색의 빛을 품고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본 재혁의 빛은···.

‘중요한 순간, 밝아지기 보다 오히려 색을 잃어버리는 보석.’

제법 실망스러운 색을 띠고 있었기에 입술을 쌜쭉 내밀곤 팔짱을 꼈다.

그리곤 이어질 플레이를 기다렸다.

이미 기대는 많이 잃었지만, 그래도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지켜보겠다는 심정으로 말이다.

그러던 중 카일 워커의 발밑에 있던 공이 잔디 위를 굴렀고, 바로 옆에 위치해 있던 재혁에게 공의 소유권이 넘어갔다.

자, 그럼 무엇을 보여주겠느냐?

그런 무리뉴 감독의 의문에 재혁은···.

파앙!

“···롱패스?!”

짧은 패스가 아닌 긴 패스를 시도하면서 그가 생각하고 있던 답을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다만 그 대답을 확인한 사람들은 대부분 당황한 얼굴로 소리쳤다.

“갑자기 저기서 지르는 패스라고?”

“뭐지? 답답함에 일단 보이는 대로 패스를 찔러준 건가?”

“어떻게든 스털링에게 연결이 되긴 했는데, 너무 뜬금없지 않아? 무엇보다 저런 패스는 맨체스터 시티답지 않잖아?”

어느 누구도 지금 재혁이 보여준 플레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과르디올라 감독의 지도 하에 보여준 맨체스터 시티는 그 어떤 때보다 확고한 색깔을 가지고 있지 않던가?

짧은 패스를 통한 점유, 확실한 공간을 찾는 빌드업, 그리고 마지막 순간 골대로 향하는 길을 뚫는 창의력.

하지만 지금 재혁이 시도한 롱패스는 세 가지 중 그 어떤 것에도 포함이 되지 않는 패스였던 것이다.

만약 재혁이 이번 한 번만 그런 시도를 했다면 조급함에 저지른 실수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겠지만···.

파앙, 파앙! 팡!

“계, 계속해서 오는 공을 족족 길게 차 넘기고 있어! 대체 무슨 생각인거야, 저 88번?”

재혁의 롱패스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공이 자신에게 오는 족족, 주변에 분명 공을 받아줄 선수가 지근 거리에 있었음에도 굳이 긴 패스를 이용해 처리한 것이다.

게다가 패스만 이해할 수 없는 게 아니라 자리를 잡는 기준 또한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이 곳, 저 곳을 이동하고 있었으니.

그런 재혁을 지켜보고 있는 올드 트래포트의 홈 팬들은 큰 소리로 웃으면서 소리쳤다.

“하하하! 저게 뭐야?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그뿐인 줄 알아? 저 꼬마 때문에 중원이 완전 엉망이잖아? 실바며, 케빈이며, 모두 자리를 못 찾고 헤매고 있어! 내버려두면 알아서 자멸하겠는데?”

“이거, 이거. 역시 입소문은 믿을 게 못 된다니까. 저 모습이 어떻게 이번 시즌 최고로 기대되는 유망주야? 그냥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 강아지 한 마리지! 클클클!”

재혁의 행동을 향한 명백한 비웃음.

수만 여 관중들은 하나가 되어 큰 소리로 웃더니 즉석에서 노래까지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다.

시끄러운 이웃인 맨체스터 시티가 큰 맘 먹고 경비견을 한 마리 샀는데, 알고 보니 그저 관상용으로 귀엽게 생긴 말티즈였다는 내용의 노래를 말이다.

대놓고 재혁을 겨냥해 조롱의 의미가 담긴 노래였다.

하지만 사람들의 조롱에도 재혁은 꿋꿋하게 자신의 플레이를 계속 이어나갔고···.

‘···?!’

무언가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이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그 차이를 느낀 사람은 맨유의 미드필더, 마티치였다.

‘맨체스터 시티가···, 안정감을 되찾았어?’

단어 그대로였다.

이전까지 태풍을 만난 난파선마냥 크게 흔들리던 맨시티였으나, 언제부턴지 서서히 파도에 적응을 하기 시작하더니, 흔들리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진영을 다시 꾸리면서 천천히 원래 모습을 회복하기 시작한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현재 필드 위에서 맞붙고 있는 상대팀이기에 그 차이를 바로 알 수 있었던 마티치는 입술을 깨물고 눈썹을 찌푸렸다.

‘압박에서 벗어나는 게 자연스러워졌어. 그뿐만이 아니야. 공을 점유하는 것도, 공격을 진행하는 것도···. 이건 3분 전과는 완전 다른 팀이이야! 대체 어떻게···? 설마?’

생각을 이어가던 마티치의 눈이 한 선수를 앞에 두고 멈췄다.

맨체스터 시티의 꼬마, 최재혁.

이번에도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위치에서 공을 연결 받은 그는 압박을 하기 위해 달려드는 마샬을 앞에 두고 여유있게 공을 소유하더니···.

뻐엉!

또 한 번 길게 뻗어나가는 롱패스를 시도하면서 모두의 발을 멈추게 한 것이다.

그렇게 멀리, 대각선으로 뻗어나간 공은 정확히 제수스의 발밑에 떨어졌고, 재혁의 패스를 받은 제수스는 트래핑과 동시에 재빨리 턴을 이어가면서 공격을 전개했다.

열린 공간을 노리고 들어가는, 간결한 동작으로 속도를 살린 드리블을 통해서 말이다.

다만 그런 제수스의 시도는 마티치가 그의 앞을 막아서면서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고, 길이 막히자 제수스는 무리하지 않고 주변에 위치한 동료를 향해 공을 넘겨주면서 다음 기회를 노렸다.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대로 공간을 허용할 뻔한 위험천만한 순간이 지나간 것에 안도한 마티치, 그리고 그런 마티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은 하나둘 무언가 흐름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을 느끼고 침을 삼켰다.

“왜, 왜지···? 어째선지 최근 10분간 우리 쪽에서 제대로 된 공격을 전혀 시도하고 못 하고 있는 것 같은데···, 내 기분 탓이겠지?”

“설마. 점유율을 보라고. 수치상으론 분명 우리가 유리해.”

“그렇지? 그런데 왜···.”

꿀꺽.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남성이 목울대를 크게 움직인 후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왜···, 계속 불안한 느낌이 드는 걸까?”

그리고 그런 남성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후우, 간다.”

그동안 웅크리고 있던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이 숨기고 있던 발톱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 시작은 이번에도 재혁의 발끝에서부터였다.

한 차례 제수스에게 닿았던 공이 케빈을 통해 다시 내려왔고, 페르난지뉴를 거쳐 돌려 받게 된 공을 재혁은 이번에도 지체없이 긴 패스로 최전방을 향해 찔러준 것이다.

그런 재혁의 패스를 발견한 마티치가 동료들을 향해 큰소리로 소리쳤다.

“또 온다! 막아!”

“알고 있어!”

우측 풀백으로 출장한 발렌시아가 마티치의 목소리에 재빨리 대답하며 발을 움직였다.

마음 같아선 허공에 떠있는 공이 스털링의 발에 닿기 전에 잘라내고 싶었지만···.

‘속도도, 높이도, 너무 정확한 패스야. 자칫했다간 오히려 내 뒤를 빼앗길 위험이 있어!’

어쩔 수 없이 일단은 자리를 지키면서 스털링의 발밑으로 공이 떨어지길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공이 스털링의 발등에 얹혀지면서 바닥에 내려왔고, 그와 동시에 발렌시아는 스털링을 압박해 들어갔다.

쉽사리 골문을 향해 드리블을 시작할 틈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런 발렌시아를 등 뒤에 두고서 이번엔 스털링이 눈썹을 모았다.

‘너무 타이트한데?’

재혁의 패스를 받는 것까진 좋았는데, 이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가 없으니 짜증이 일었다.

바로 한 명만 넘으면 넓은 뒷 공간이 그대로 열리는데 그걸 마음대로 갈 수가 없으니···.

그런 스털링의 감정은 드리블에 그대로 묻어 나왔다.

투웅, 퉁!

측면 터치 라인을 따라 억지로 발렌시아를 돌파하려 시도한 것이다.

다만 그런 스털링을 발렌시아는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았다.

어떻게든 중앙을 파고드는 것을 막아내면서 스털링을 측면에 완벽히 가두어내는데 성공해냈다.

결국 발렌시아를 뚫는데 실패한 스털링은 재빨리 공을 다시 자신의 소유로 돌리기 위해 골대와 등을 졌고···.

“···어?!”

뜻밖의 인물이 그를 돕기 위해 다가온 것을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재혁? 네가 여기에 왜 있는 거야?’

언제 다가왔는지, 재혁이 그를 돕기 위해 와있던 것이다.

분명 지금 이곳에 있어야 할 사람은 실바였는데, 왜 재혁이···?

그런 의문이 들었던 스털링이었으나···.

“!”

곧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야 왜 재혁이 이곳에 있는지, 그리고 왜 지금까지 롱패스들을 시도해왔는 지를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자. 그러면···,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봐!’

토옹!

짧았던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스털링은 공을 재혁에게 보내주었다.

모두가 보기에 아주 평범한 땅볼 패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패스였다.

하지만 그 평범한 패스가 지금 재혁에게 도착하는 순간···.

“변한다.”

씨익.

모든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과르디올라 감독의 입가에 기다란 미소가 떠올랐다.

설마하며 준비했던 플레이였다.

혹시라도 경기가 원하는 대로 흐르지 않는다면, 차선으로 꺼내놓을 수 있는 전술을 바로 사용할 수 있게 준비한 플레이 말이다.

하지만 그만큼 문제가 많은, 양날의 검같은 전술이기도 했다.

전술을 이해해주어야 할 핵심 선수가 온전히 모든 상황을 컨트롤 하게 되고, 모든 부담을 안고 플레이 해야 하니까.

그래서 처음엔 다비드 실바에게 준비시킬 요량이었던 과르디올라 감독은 마음을 바꿔 그 핵심 선수를 재혁으로 바꿨다.

원석이란 바로 그런 존재이니까.

강렬한 압력 속에서 버텨내면서 자신의 색깔을 보여주어야 하는 존재이니까.

누구는 도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선택이었지만, 그런 압력을 버태내고 보여준 재혁의 빛은···.

“푸른 색이군. 그것도 하늘처럼 맑은, 경기장 전역을 비추어줄 수 있는 아주 밝은 푸른 색 말야.”

파앙!

“차, 찼습니다!

재혁의 가볍지만 체중이 확실히 실린 롱패스가 허공을 가르면서 쭉쭉 뻗어나갔다.

왼쪽 측면에서 중앙을 가로질러 오른쪽 측면으로 향하는 패스.

그 패스를 받은 선수는···.

“다비드 실바! 재혁의 패스를 마치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가뿐한 발놀림으로 공을 받았습니다!”

“패스 한 번에 포그바, 마티치, 그리고 래쉬포드까지···, 한 번에 세 명의 선수들을 건너 뛰는 정확한 롱패스가 이번에도 최재혁 선수의 발끝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다비드 실바 선수, 린델로프를 앞에 두고 침착하게 공을 컨트롤 하다가···, 수비수 사이를 빠져나가는 케빈 데 브루위너 선수의 발 앞으로 스루 패스를 성공 시켰습니다!”

“이건 위험하죠! 데 헤아 골키퍼가 각을 좁히기 위해 황급히 뛰쳐나오고 있습니다만···.”

경기를 함께 지켜보고 있는 해설자와 캐스터, 충격에 휩싸인 듯한 두 사람의 다급한 목소리가 다음에 외친 단어는 모두가 알고 있는 바로 그 단어였다.

공이 골망에 걸리면 자연스레 터지는 바로 그 단어.

“고오오올!”

“순식간에 이루어진 전개로 맨체스터 시티가 벼락 골을 성공시키면서 한 점 앞서나가게 됐습니다!”

“아, 올드 트래포트를 가득 채운 관중들은 받은 충격이 엄청난지 무어라 말을 잇지 못하고 있네요. 몇몇 사람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얼굴을 감싸쥐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캐스터의 말에 짧은 한 마디로 대꾸한 해설자는 케빈 데 브루위너의 근처에 모여 득점 세레머니를 펼치고 있는 선수들, 그 사이에 섞여 있는 재혁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플레이로 인해 지금 막···, 티키타카에 새로운 공식이 생겼으니까요. 이걸 보고 충격을 받지 않았을 사람은 아마 아무도 없을 겁니다.”

< 120. 압박 속의 빛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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