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17화 (117/225)
  • < 117. 각자의 목표 >

    베르겐의 짧은 한 마디를 듣는 순간, 재혁의 얼굴이 잠깐 굳었다.

    지금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라는 착각에 빠진 것도 잠시.

    베르겐은 대답이 없는 재혁을 향해 계속해서 말했다.

    [비단 그 세 구단들만 있는 게 아니야. 파리에서도 연락이 왔었고, 같은 영국 내에 있는 클럽들 중에서도 조금씩 관심을 비추는 클럽들이 계속해서 등장하고 있는 상황이지. 세부적인 조건까지 꺼낸 클럽들은···.]

    “베르겐씨.”

    흥이 오른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던 베르겐의 말이 재혁의 낮은 목소리에 의해 중간에 툭, 잘렸다.

    베르겐은 그 즉시 입을 멈추었고.

    [듣고 있네.]

    휴대폰을 쥔 손을 바꿔 쥐면서 재혁에게 답했다.

    재혁은 그런 베르겐을 향해 짧았던 침묵 이후 조심스레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분명 바르셀로나나 레알 마드리드, 그리고 뮌헨 같은 거대 구단들이 저를 원한다는 이야기는 듣기에 매우 기분이 좋은 이야기에요. 하지만···, 역시 아직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 단순히 프로 경력이 짧기 때문에, 혹은 어리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러면?]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전 아직도 배워야 할 게 많아요.”

    잠깐 말을 멈췄던 재혁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의 이름을 꺼내놓으면서 말을 이었다.

    “특히 과르디올라 감독님께는 말이죠.”

    [···과르디올라 감독이라.]

    “그 분이 특별하다는 건 이미 베르겐도 알고 있겠지만, 제게 있어서 과르디올라 감독님은 단순히 특별하기만 한 감독님이 아니에요. 현재 저게에 있어서 부족한 점들을 채워줄 수 있게 도움을 주시는 감독님이시죠. 끊임없이 발전 가능성을 보여주시는 분입니다. 이런 감독은 어딜가도 흔치 않겠죠.”

    [···.]

    “물론 다른 위대한 감독님들과, 또 위대한 클럽들과도 함께 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분명 멋진 일이겠지만, 전 지금 제 눈앞에 닥친 일들을 소화하는 것만으로도 벅차다는 걸 가끔 느껴요. 이런 상황에서 만약 새로운 클럽으로 이적을 하게 된다면···.”

    [후후. 재혁, 자네같은 선수의 에이전트를 할 수 있어서 나도 참 다행이야.]

    “예?”

    말을 이어가던 중, 베르겐이 작게 웃었고, 그런 베르겐의 웃음 소리를 들은 재혁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이며 되물었다.

    베르겐은 당황해하는 재혁을 향해 예의 밝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내 생각도 재혁과 같아. 막 클럽에 합류한 상황인데, 다른 곳에서 제의가 들어왔다고 해서 바로 이적을 고려할 순 없지. 굳이 맨체스터 시티를 떠나야 한다면 적어도 이번 시즌은 모두 끝내고 커리어에 트로피들을 추가한 다음 떠나도 늦지 않으니까 말야.]

    “그런 생각을 하고 계셨으면서 왜 제겐 그렇게 진지한 목소리로 말씀을 하신 거예요?”

    [그야 난 결국 자네의 대리인이니까.]

    재혁의 되물음에 곧장 대답을 한 베르겐은 입가에 떠올린 미소를 좀 더 짙게 패면서 계속 말했다.

    [로니 단장이 특별히 재혁, 너에 대해 부탁을 했지만 내가 알고 있는 너는 한국에 할머니와 여동생을 둔 프로 선수라는 배경 하나 뿐이야. 과연 자네가 어떤 점을 목표로 하는 프로인지를 내 자신이 확실히 알 수 없었던 거지.]

    “···.”

    [세상엔 다양한 목표를 가진 선수들이 많아. 단순히 돈을, 혹은 명예를 목표로 뛰는 선수들이 있기도 하고, 흔치 않지만 지금 내 앞에 있는 선수처럼 물질적인 목표보다 발전적인 목표를 추구하는 선수도 있기도 하지.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번 기회를 통해 재혁, 너에 대해 확실히 알 필요가 있었어. 네 목표가 정확히 어디를 가리키고 있는 지를 말이네. 나는 그 목표를 돕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니까.]

    “그래서 일부러 구단 명들을 말할 때 그렇게 힘을···.”

    [혹시 기분이 나빴다면 사과하지. 하지만 나도 이쪽 세계에서 프로인 만큼, 확실히 알 필요가 있었거든. 물론 로니 단장이 몇 가지 언질을 준 게 있긴 하지만, 귀로 들어오는 걸 다 믿어선 안되는 직업인지라.]

    “이해해요.”

    베르겐의 말에 짧게 대답한 재혁은 고개를 끄덕인 뒤 곧장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지금 확실히 말해 둘게요. 아직은 이적을 고민할 때가 아니에요. 일단 주어진 기회에 최선을 다하면서 시즌을 보내고 싶을 뿐이에요. 그게 최선이니까.”

    [나도 동일한 생각이야. 사실 지금 그쪽에서 제안을 준 건 사실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너의 가치를 담기엔 너무 짜거든.]

    “얼마를 제시했는데요?”

    [7천만 파운드.]

    “···예?”

    가벼운 마음으로 호기심에 물었던 재혁이 순간 당황했다.

    7천만 파운드라니?

    7천만 파운드라면 천만 파운드가 약 140억이었으니까···, 그걸 7배···.

    그리고 단순히 이 상황을 숫자 놀음으로만 따질 게 아니지 않던가?

    재혁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귀에 바짝 붙인 휴대폰에 말했다.

    “맨체스터 시티에서 지불한 값의 3배 이상이 아닌가요? 거기서 수수료만 계산해도···.”

    [아마 그렇게 된다면 8천만 파운드에 근접한 값이 되겠지. 하지만 그래도 아직 네 가치를 담기엔 너무 싸. 너라면 나는 가능하다고 믿고 있다. 2억···, 아니. 3억 파운드 이상의 가치를 담아낼 선수가 될 거라고 말이지.]

    “그건 좀 너무 가신 게 아닌지···.”

    [겨우 재물을 사용해 최재혁이라는 선수의 이름을 스쿼드에 올릴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3억 파운드도 싼 거지. 분명 그럴 때가 올 거다. 날 믿어라. 내가 믿는 너는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는 선수니까.]

    생긋.

    확신에 찬 말을 끝으로 미소를 떠올린 베르겐은 화제를 돌려 재혁의 맨체스터 도착 시간을 물었고, 나중에 영국에서 직접 만나 이야기를 더 나누자는 말을 끝으로 대화를 끝냈다.

    재혁도 그런 베르겐의 말에 알겠다고 대답하며 통화 상대를 잃은 휴대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었다. 그리고 멍하니 창밖의 하늘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3억 파운드라.’

    정말 현실감이 떨어지는 금액이었다.

    하지만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2천만 파운드라는 이적료도 처음 들었을 땐 어리벙벙하지 않았던가.

    관점을 바꾸니 재혁의 입가엔 사라졌던 미소가 다시금 떠올랐고···.

    ‘3억 파운드는 무리일지라도···, 적어도 그건 마음에 드는군. 재물로 가치를 따질 수 없는 선수라는 그 마음만큼은 말야.’

    새로운 목표가 설정됐다.

    자신의 가치 발전이라는 목표가 말이다.

    그렇다면 매 순간 증명해야 한다.

    필드 위에 왜 자신이 올라가야 하고, 존재해야 하는 지에 대한 증명을 말이다.

    ‘그러면 시작은···, 여기서 부턴가.’

    슬쩍 고개를 내려 앞으로 이어질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 일정을 살핀 재혁이 눈을 반짝였다.

    ***

    A매치 소집이 있은 후의 경기들은 크게 두 가지 상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친선전과 장거리 비행이라는 두 가지 피로가 쌓인 탓에 부진한 선수들이 생기는 경우, 혹은 국가 대표라는 의미가 담긴 친선전에서의 활약을 토대로 소속팀에서 그 흐름을 이어가는 경우, 두 가지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박싱 데이를 제외하면 A매치 소집 이후의 경기들에서 가장 많은 변수들이 나오곤 했다.

    스타 플레이어들을 다수 확보하고 있는 구단일수록 친선전을 위해 차출되는 경우가 잦았으니까.

    선두에 위치한 구단일수록 다른 구단들에 비해 더 많은 손해를 감수한다는 의미였으니, 중위권 팀들이 도약을 위한 준비를 하기에 가장 좋은 순간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오늘 맨체스터 시티와 레스터 시티와의 경기를 기다리고 있던 팬들, 그 중에서도 레스터 시티의 팬들은 혹시 모를 가능성을 기대하며 경기를 지켜보았지만···.

    [고오올! 맨체스터 시티, 또 한 번 추가 점을 성공시키면서 승리에 쐐기를 박습니다!]

    “아아, 다 망했어···.”

    “벌써 3대0이라니.”

    “···기대는 무슨. 그냥 돌아갈까?”

    그런 희망은 처음부터 헛되었다는 것을 알려주려는 듯, 레스터 시티의 홈 구장인 킹 파워 스타디움에서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은 마치 본인들을 위해 준비된 무대에 나선 연기자들처럼 경기장을 누비면서 레스터 시티를 유린했다.

    해당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팬들뿐만이 아닌, 경기를 함께 지켜보고 있는 중계진들도 연신 혀를 내두르면서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력을 칭찬했다.

    그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한 선수.

    재혁에 대한 언급을 계속하면서 말이다.

    해설자는 다시 중계 화면에 떠오른 득점 상황을 설명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완전히 변했습니다.”

    “뭐가 말인가요?”

    “최재혁 선수 말입니다.”

    캐스터의 물음에 일단 간단히 대꾸한 해설자는 다른 각도에서 보여지는 영상을 눈에 담으면서 설명을 계속 했다.

    “플레이가 전과 다르게 공격적인 시도를 자주 하고 있어요. 지금 만들어진 이 득점도 센터 서클 주변에 위치해 있던 최재혁 선수가 순간적인 센스를 발휘해 라인 브레이킹을 시도하는 제수스의 발 밑으로 침투 패스를 밀어주면서 시작된 상황이거든요.”

    “포지션이 전보다 공격적인 위치에 배치되었기 때문이 아닐까요?”

    “글쎄요.”

    캐스터의 물음에 목소리를 길게 늘린 해설자는 손에 쥐고 있는 펜을 뻗으면서 말을 이었다.

    “이전까지의 최재혁 선수는 확실한 기회가 아니면 모험을 꺼려하는 모습을 많이 보여줬습니다. 모험이 아닌 무난한 빌드업이라면 방금 같은 기회에서 제수스를 향한 전방 패스가 아니라 같은 라인 선상에서 플레이를 만들려고 하는 케빈, 혹은 측면을 넓게 벌리고 있는 사네라던가, 스털링을 향해 긴 패스를 넘겨주었겠지요. 그 편이 훨씬 안정적으로 기회를 만들 수 있는 패스들이니까요.”

    “하지만 최재혁 선수는 제수스 선수를 선택했죠.”

    “바로 그 부분이 달라졌다는 겁니다. 최재혁 선수는 이제 ‘중간’이 아닌, ‘시작’이 되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어요.”

    “중간이 아닌 시작이요···?”

    캐스터가 의아하다는 목소리로 되물었고, 해설자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두 눈으로 화면 한구석에 얼굴을 비추고 있는 재혁을 담으면서 말이다.

    “다른 선수가 그리는 그림에 포함되는 게 아닌···, 본인이 직접 그림을 그리기 위해 마침내 붓을 손에 쥐었다는 말입니다.”

    “···?”

    “과연 이 상황이 맨체스터 시티에 어떤 효과를 가져올지, 정말 기대되는 군요.”

    설명을 끝내면서 해설자는 마른 목을 축이기 위해 물 잔을 기울였다.

    많은 말을 떠들어야 했기에 목은 아팠지만, 목은 말랐지만, 그의 눈동자에 들어온 선수는 그런 사소한 고통쯤은 가뿐히 해결해줄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리고 그 존재의 활약을 지켜보고 있던 과르디올라 감독의 눈동자에도 한 차례 이채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정말 무서운 녀석이야. 그 사이 또 발전했어.’

    여름에 합류하고 나서 한 번.

    시즌 중에 한 번.

    그리고 A매치 이후에 또 한 번.

    매 순간 발전하는 재혁을 보고 있자니 과르디올라 감독은 등골이 오싹한 감각을 느끼곤 몸을 떨었다.

    지금 이 상태대로라면 단순히 트로피가 문제가 아니었다.

    ‘유럽. 지금의 재혁이라면 유럽에 도전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의 재혁과 함께 라면···.’

    생각을 길게 늘려가던 과르디올라 감독이 씨익, 미소를 떠올린 후 중얼거렸다.

    “내가 원하는 축구를 완성시킬 수 있다.”

    < 117. 각자의 목표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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