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14화 (114/225)

< 114. 흐름의 변화 >

먼저 재혁을 발견한 세르비아 선수들, 그 중에서도 경험이 풍부한 수비수들의 반응이 더 즉각적이었다.

“부코비치!오브라도비치, 루키바나! 쉬프트다!”

그들은 재혁이 피치 위를 밟는 순간 서로 시선을 교환했고, 센터백으로 출장한 이바노비치를 중심으로 새로운 수비 진영을 짜기 시작한 것이다.

므라덴 수석 코치와 미리 대화를 나누었던 부분이 바로 효과를 발휘한 것이리라.

중앙 센터백과 양쪽 풀백들의 위치를 조정한 이바노비치는 얇게 뜬 눈으로 재혁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저 녀석이 그 문제의 꼬마군.”

나이가 들면서 피지컬로 싸움을 거는 수비수에서 한 발 뒤로 물러선 커맨더 형으로 스타일을 전환한 이바노비치는 재혁에 대해서 수 차례 언질을 들은 바가 있었기에 기대 반, 그리고 걱정 반이 담긴 눈빛으로 재혁을 노려보고 있었다.

패스 능력과 함께 경기장 전역을 훑는 시야를 겸비하고 있고, 킥 능력이 좋아 어느 위치에서든 골문을 직접 노리거나 찬스를 만들 수 있는 데드볼 테이커.

그런데 아직 겨우 10대라.

‘지금 소속팀이 맨체스터 시티라고 했지.’

이바노비치의 입가에 곧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만약 첼시에 계속 남아 있었다면, 이 꼬마를 상대로 경기를 펼쳐야 했겠지.’

물론, 어디까지나 경기에 출장할 수 있는 상황이라는 조건이 붙겠지만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재혁을 상대하는 이바노비치의 마음이 더욱 단단히 굳었다.

반드시 막아 보이겠다. 그리고 증명하겠다. 자신은 아직 건재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런 의미가 담긴 눈빛을 불태우면서 이바노비치가 서서히 집중력을 끌어올리기 시작했고, 그런 세르비아의 반대편에 진영을 펼쳐 놓은 한국의 김수용은 또 다른 의미에서 입술을 깨물었다.

‘결국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되고 말았다.’

초반까진 나쁘지 않았는데.

한 차례 분위기가 반전되자 흐름을 완전히 잃었고, 그 결과 실점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그 상황을 뒤집기 위해 임종철 감독이 투입한 선수가 바로 최재혁.

지금 그의 입맛이 쓴 것은 단순히 입 안이 바짝 말라서 그런 것 때문이 아닐 것이다.

후우, 수용이 호흡을 고르기 위한 의미로 숨을 길게 토해내자 그의 곁에 다가온 재혁이 웃으며 말했다.

“밖에서 지켜볼 땐 잘하고 계시던데. 왜 한숨이에요?”

“너같으면 한숨이 안 나오게 생겼냐? 이번 경기로 결국 선수 한 명에 의지하는 팀이라는 걸 증명하고 말았으니. 이건 주장 실격이다.”

“글쎄요. 꼭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요.”

“뭐?”

“그 선수 한 명도 주장이 말한 ‘팀’에 포함되는 한 명인 거잖아요? 그러니까 너무 따로 보려고 하지 마시라고요.”

“···!”

“그리고 우리가 지금 상대해야 할 건 저 쪽에 있는 상대팀이니까 말이죠.”

재혁의 말에 지금까지 어두웠던 수용의 표정이 변했다.

재혁이 남긴 말처럼, 지금 그들이 집중해야 할 부분은 다른 게 아닌 바로 지금 이 경기였으니까.

표정이 변하자 분위기가 달라졌고, 호흡이 돌아온 수용은 경기가 재개되기 전 재혁에게 다가가 재빨리 물었다.

“그래서 감독님께선 뭐라고 지시하셨지?”

재혁이 필드에 올라오기 전까지 임종철 감독과 제법 긴 이야기를 나누던 것을 수용은 알고 있었기에 물었고, 재혁은 그런 수용을 향해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이며 답했다.

“지금부터 우리도 3백으로 전환합니다.”

“우리도 3백이라고? 상대는 분명 4백이잖아?”

“4백처럼 보이는 변형 3백이에요. 물론 공격을 시작할 때 이야기지만. 감독님은 그에 대한 맞불로 같은 3백으로 진영을 바꾸길 원하고 있어요. 중앙 센터벡들 중 한 명을 보란치 자리에 놓고, 그 위부터 새로이 진영을 구성하기 위해서 말이죠.”

“그 말은 내 위치도 바뀐다는 말인가?”

“네. 주장은 지금부터 저랑 파트너에요.”

“파트너?!”

수용이 놀라 되물었지만 더 이상 재혁에게서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멈췄던 공이 구르기 시작하면서 경기가 재개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 재혁이 말을 거는 게 아닌, 전술 지역으로 나온 임종철 감독이 직접 선수들에게 지시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소훈! 지금부터 네가 한 선 위로 올라간다! 보란치보다는 스토퍼에 가깝게, 공을 잡으면 최대한 짧은 거리에 위치한 동료에게 공을 연결하려고 노력해! 김용구랑 최태성, 너희 둘은 한성이 쪽으로 거리를 좀 더 좁히고! 그리고 김수용!”

“예?”

“너는 재혁이랑 같이 2선까지 올라간다. 흐름에서 낙오 되고 싶지 않으면 부지런히 움직여.”

“···네.”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수용은 입술을 굳힌 후 종철을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금까지 경험한 임종철 감독이라면 분명 포지션을 바꾸려 한 이유가 있을 테니까.

그런 믿음에서 나온 끄덕거림이었고, 그와 함께 줄을 맞춘 재혁을 확인하면서 수용은 다시 한 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수용의 머릿속에는 재혁이 그에게 했던 말이 반복되고 있었다.

‘이 녀석도 포함되어 있는···, 하나의 팀.’

생각과 관점이 바뀌자 더 이상 고민할 이유가 없다는 것에 감정을 다잡은 수용은 머리 위로 떠오르는 공을 쫓아 이동하면서 다리에 힘을 주었다.

더 이상의 고민은 무의미하다.

의미는 오직 경기 결과에 달려 있다.

‘그러니까 의미를 남기기 위해 오늘은 무조건 이긴다!’

투웅!

공중볼 경합을 위해 한 차례 몸을 날렸던 수용은 이마에 맞은 공이 떨어지는 위치를 확인하기 무섭게 재차 다리를 움직이며 계속 공세에 나섰다.

어떻게든 흐름을 빼앗아 오겠다는 의지를 내비쳐 보이면서 말이다.

***

“와아, 할머니! 드디어 재혁 오빠가 나왔어요!”

“이제야 재혁이가 나왔네. 너무 오래 기다렸잖아.”

“···응?”

재혁이 등장하기 무섭게 목소리를 높였던 재희와 가연이 서로를 찾았다.

낯선 목소리가 재혁의 이름을 부른 것에 서로 놀란 것이다.

둘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상대를 살피면서 생각에 잠겼다.

‘오빠랑 아는 사이인가?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런데 저거 국가대표 선수들이 입는 트레이닝 복아닌가? 그러면 팀과 관련된 사람?’

‘굉장히 어려 보이는데. 많아 봐야 고등학생? 재혁이를 보고 오빠라고 부른 걸 보면···, 혹시 지인?’

정확하진 않지만 어느 정도 서로에 대해 유추한 두 사람.

거기서 둘은 공통적으로 떠올린 생각에 입술을 기묘하게 비틀었다.

‘화장도 특별히 안 하신 거 같은데 되게 미인이시네. 이거, 오빠 훈련하다가 이상한 곳에서 코가 꿰이는 거 아냐?’

‘엄청 귀엽게 생겼네. 흐음. 저런 아이랑 아는 사이라면 재혁이도 눈이 보통 높진 않겠는데···?’

서로를 힐끔거리며 살피는 동안 둘 사이에는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는데, 그 침묵이 깨진 것은 다른 사람에 의해서 였다.

“오, 재희양이 이곳에 있었군요. 할머님도 오래 간만에 뵙습니다. 응? 이가연 선수도 이곳에 있었나? 재밌는 우연이군.”

“차범수 아저씨!”

“서, 선배님!”

한국 축구의 전설로 통하는 차범수.

그가 세 사람을 알아보고 지나가던 발을 멈춘 것이다.

재희와 가연은 상대방이 차범수를 부르는 호칭을 듣고 또 한 번 놀랐다.

아저씨라니? 선배님이라니?

대체 어떤 사이길래 저런 호칭이 나온다는 말인가?

다만 당황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에서 할머니는 차범수의 목소리를 듣고 반가운 얼굴로 그의 손을 붙잡으며 말했다.

“어응? 총각이었누? 여기는 어쩐 일이여?”

“하하. 저도 할머님처럼 축구를 보려고 온 거죠.”

“그런 거여? 그럼 자리가 필요할텐디···, 아. 여기 앉을랑가?”

“그럴까요?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나이가 벌써 60줄이 넘었는데 총각이라 불리는 것이 어색할 만도 하건만, 차범수는 할머니의 말에 간단히 고개를 끄덕이며 빈 자리에 엉덩이를 붙였다.

재희와 가연, 둘 사이에 남아 있던 자리였다.

어차피 VIP 클럽 룸이었기에 어느 자리를 앉아도 괜찮았기에 차범수는 부담 없이 앉은 것이었고, 시합이 재개되는 경기장을 향해 시선을 내리다가 옆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기울였다.

가연이 잔뜩 굳은 얼굴과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이며 물은 것이다.

“저···, 선배님. 옆에 있는 아가씨랑은 어떤 사이세요?”

“재희? 재희는 재혁이의 친동생인지라 어릴 때부터 나랑 인연이 있었지. 잘 알려지진 않았지만 내가 나름 재혁이 녀석의 후견인이거든. 후후. 그러다 보니 자연히 재희와 할머님과도 인연이 닿았던 거지.”

‘친동생이었구나.’

의외의 부분에서 안도의 한숨을 짧게 흘렸던 가연은 이어지는 궁금증을 계속해서 물었다.

“그런데 선배님께서 최재혁 선수의 후견인이셨어요? 전혀 몰랐어요.”

“특별히 어딘가에 알리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재혁이도 그 점을 따로 이용하려 하지 않았으니, 모르는게 당연하지. 그런 의미에서 참 대견한 녀석이야. 스스로 지금 저 자리까지 올라간 거니 말이야. 그렇지 않나? 그런데···, 자네도 재혁이와 면식이 있는 사이였나?”

“아, 그게···.”

차범수의 말에 당황했는지 잠시간 말끝을 흐리던 가연은 이내 그에게 재혁과 만나게 되었던 인연에 대해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훈련장에서 만났던 것과 그에게 킥에 대해 배웠던 것, 그리고 그 덕에 이어진 인연으로 오늘 경기 관람까지 오게 된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 가연의 이야기를 모두 들은 차범수는 고개를 한 차례 갸웃 기울이더니 턱을 긁적였다.

“그렇다면 지금 옆에 있는 재희와는 인연이 없다는 소리군. 한 번 인사를 나눠보는게 어떻겠나? 굉장히 착한 아이야.”

“네? 구, 굳이 그럴 필요까진···.”

“재희양. 이쪽은 이가연 선수라고 여자 축구 국가대표로 활약하고 있다네. 재혁이와 면식이 있어 응원을 왔다는군.”

“아하, 그러셨구나. 반가워요, 이가연 선.수.님. 저는 최재희라고 해요. 옆에 계신 분은 저희 할머니시고요.”

“아, 예. 반갑습니다. 최재혁 선수를 많이 닮으셨네요.”

“당연하죠. 남.매.니까요.”

“···.”

어째선지 기묘하게 흐르는 원인 모를 긴장감에 재희도, 가연도, 뻣뻣한 목소리로 인사를 나눈 뒤 서로를 바라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다만 그 기류를 읽은 것은 두 사람뿐이었는지, 차범수는 경기를 쭉 지켜보며 연신 안타까운 목소리를 흘렸다.

“임종철 감독이 재혁이를 투입하면서 승부수를 던졌는데, 바로 효과가 나오진 않는군. 어쩌면 오늘 경기는 생각보다 힘들어질 수도 있겠어.”

“설마요!”

“재혁이라면 분명 변화를 가져올 수 있어요!”

“음···? 물론 그럴 수야 있···.”

“그럴 수 있는게 아니라, 확실해요!”

“맞아요! 무조건이라고요!”

“···.”

저 둘이 저렇게 죽이 잘 맞았던가?

차범수는 깨끗하게 면도가 된 턱을 긁적이면서 경기장을 내려보다가 눈에 들어오는 장면을 확인한 뒤 생긋 미소를 떠올리며 말했다.

“과연, 둘의 생각대로구만.”

“네?”

“일어나기 시작했어.”

되묻는 두 사람을 향해 검지를 뻗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차범수가 미소를 띤 얼굴을 그대로 유지하며 말을 이었다.

“재혁이를 중심으로, 필드 위에 변화가 말이지.”

***

“절대 틈을 주지마! 공을 컨트롤 할 시간을 주지 말고 계속해서 압박하는 거다!”

“이쪽, 이쪽으로 패스 줘!”

“크윽, 늦었어! 공 돌려!”

재혁이가 투입되고 5분여가 흐른 후반 20분.

후반전이 시작되면서 세르비아에게 있었던 주도권이 마침내 다시 한국에게 돌아오면서 경기의 흐름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다.

세르비아의 3백에 맞불을 놓기로 내린 임종철 감독의 판단은 확실한 유효타였던 것이다.

다만 그런 상황 속에서 동점골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순전히 세르비아 수비진들의 집중력이 예상보다 날카로웠기 때문이었다.

최전방에 자리하고 있는 최주성은 공을 받아도 원하는 대로 방향을 틀지 못하도록 단단히 조여오는 세르비아 수비수들의 견제에 입술을 깨물곤 어쩔 수 없이 공을 다시 뒤로 돌려 보냈다.

‘이대로 가다간 남은 시간을 다 써도 기회를 만들 수 없겠어.’

공이 뒤로 빠지자 재빨리 수비 라인을 위로 올리면서 미드필더들과의 간격을 좁히기 시작한 세르비아의 수비수들.

덕분에 계속되는 압박을 받게 된 김수용이 어떻게든 공을 지켜내기 위해 좌우로 몸을 흔들면서 미간을 구겼다.

‘대체 감독님께선 무슨 생각으로 나를 위로 올리신 거야?’

차라리 후방에서 공을 받았다면 좀 더 여유롭게 플레이를 이어갈 수 있었을 텐데.

이래서야 자신도 공을 뒤로 돌리는 것 외에 다른 판단을 내릴 수가 없다.

그런 생각을 이어가며 패스할 선수를 찾던 수용은 그와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선수를 발견하곤 패스를 찔러주려다가···, 한 차례 망설였다.

공을 받기 위해 다가온 재혁의 뒤엔 이미 세르비아의 수비수가 바짝 따라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후방에 위치해 있는 정소훈에게 공을 넘겨준 수용은 그제야 압박에서 풀려나면서 자유로워질 수 있었고, 리턴 패스를 받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다리를 움직이려 했다.

“주장.”

그의 곁으로 다가온 재혁이 말을 걸지 않았다면 말이다.

수용은 바쁜 와중 재혁이 말을 걸어온 것에 최대한 간략하게 되물었다.

“왜?”

“제가 처음에 했던 말 기억해요? 주장하고 전 파트너라고요.”

“···그게 어쨌는데?”

“파트너니까 조금 더 서로의 움직임을 자세히 살피고, 서로를 믿어보도록 하자고요. 그냥 그 말을 하고 싶었어요.”

“···?”

그 말을 끝으로 멀어지는 재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수용의 눈썹이 이마에 꼬리를 남겼다.

재혁이 무슨 의미로 그런 말을 한 것인지 바로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필드 위의 공이 멈추지 않고 계속 움직이고 있었기에 그의 고민은 오랫동안 이어지지 못 했고, 다시 한 번 자신의 발밑으로 굴러온 공을 트래핑하면서 수용이 전방을 살폈다.

이번에도 눈앞에 펼쳐진 풍경은 전과 비슷했다.

최전방을 지키고 있는 최주성은 단단히 묶여 있었고, 양측면을 파고 들기 위해 틈을 노리고 있는 선수들 또한 쉽사리 견제를 떨쳐내지 못 하고 있었다.

그 중에서 그나마 패스를 시도해볼 만한 선수는···.

‘재혁이뿐인가. 하지만 이번에도 재혁이의 뒤에는 전담 마크맨이 바짝···.’

“?!”

아주 짧은 순간이었지만, 무언가 보였다는 생각에 눈을 반짝였던 수용의 얼굴이 굳었다.

분명 좁은 틈 사이로···.

‘재혁이 마크맨을 끌고 앞으로 나오면서 뒷공간이 한 번 열렸었어.’

아무도 없던 공간.

자유로운 공간이 열린 것이 그의 눈에 한 차례 보였던 것이다.

패스로 연결만 할 수 있다면 분명 치명적인 플레이로 이어질 수 있을 공간이었지만, 문제라면 방금 생각했듯, 그곳에 공을 받을 선수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공간이 열린다고 한들, 공을 받을 선수가 없다면 그 공간은 사용할 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그런 생각을 이어가며 일단 또 한 번 공을 뒤로 물리면서 다시 만들어질 틈을 노릴 계획을 짜고 있던 수용은 재혁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변화한 것을 확인하고 눈을 부릅 떴다.

마크맨을 한 차례 앞으로 당긴 재혁이 급격히 방향을 틀면서 공간을 파고 들기 시작한 것이다.

방금까지 아무도 없어서 공을 찔러줄 수 없었던, ‘무인의 영역’을 향해서 말이다.

재혁의 움직임을 확인한 수용은 입가에 비릿한 미소를 떠올리며 힘차게 공을 찼다.

이제야 파트너란 말의 의미와 왜 재혁이 자신에게 움직임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보라고 했던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였다면 진즉 그렇게 말을 하지 그랬냐, 최재혁!’

그리고 그런 수용의 빠른 땅볼 패스가 굴러가는 위치를 확인한 재혁의 입가에도 마침내 미소가 지어졌다.

패스의 속도가 분명 빠르긴 했지만···.

투웅!

‘바운스 직후 역스핀 때문에 속도가 급격히 죽는 패스라면 충분히 잡을 수 있어!’

마침내 재혁에게 연결된 수용의 패스.

재혁이 공을 잡는 위치를 확인한 세르비아 선수들의 얼굴이 순식간에 색을 잃었다.

그 중에서도 이바노비치는 핏대가 돋아난 얼굴로 동료들을 향해 소리쳤다.

“아무나 가서 일단 앞을 막아! 지금 저 꼬마가 공을 잡은 지역은···!”

“이곳에서 노마크 찬스라면···.”

토옹, 토옹.

가볍게 발등으로 공을 밀면서 이동하던 재혁이 입가에 떠오른 미소를 더욱 짙게 만든 후···.

“내가 할 수 있는 게 너무 많잖아?”

파앙!

재빨리 공을 오른발로 넘긴 다음 차냈다.

재혁의 발 끝을 떠난 공은 작지만 확실한 포물선을 그리며 허공을 갈랐고, 그런 재혁의 패스를 확인한 양팀 선수들의 얼굴에 희비가 엇갈렸다.

재혁을 막으라고 소리치던 이바노비치의 얼굴엔 절망이, 재혁의 패스가 박스 안으로 침투하며 균열을 만든 것에 한국 선수들의 얼굴엔 희망이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활기 넘치게 움직인 것은 지금까지 수비수들에 의해 꽁꽁 묶여 있던 최주성이었다.

“으랴아!”

터엉!

공을 따라 달리던 최주성은 몸을 날리는 헤딩으로 재혁의 패스를 받아 그대로 다이빙 헤딩슛으로 이어갔고, 세르비아의 골키퍼, 스토코비치는 주성의 슈팅 각을 좁히기 위해 달려들다가···.

철썩!

자신의 뻗은 장갑을 완벽히 벗어난 공이 골망 안에 떨어지는 것을 확인하고 허망한 얼굴로 무릎을 꿇었다.

지금까지 어떻게든 지켜왔던 점수가···.

“우와아아! 드디어 동점이다!”

균형을 찾는 순간이 찾아오고 만 것이다.

이바노비치는 짜증이 잔뜩 일어난 얼굴로 머리를 벅벅 긁더니 지금 이 상황을 만들어낸 선수, 최재혁을 찾았다.

‘저 꼬마 녀석을 더 확실히 붙잡아 뒀다면 점수를 지킬 수 있었을 텐데!’

실점과 함께 찾아온 실망감에 무기력하게 고개를 떨구었던 이바노비치는 애써 박수를 치며 선수들의 사기를 북돋았다.

아직 경기가 끝나려면 20분은 더 남았으니, 다시 한 번 흐름을 찾아오자는 의미로 목소리를 크게 높인 것이다.

하지만 이미 흐름은 완벽하게 한국에게 넘어간 상황.

거기다가···.

삐이이익!

공격을 이어가던 중 주심이 길게 휘슬을 불었다.

흥분한 세르비아의 수비수가 무리하게 수비를 펼치다가 신형민의 유니폼을 붙잡고 늘어지면서 반칙이 선언된 것이다.

그 탓에 감정이 잔뜩 격양되었던 선수들 사이에 가벼운 실랑이가 벌어졌다가 주심의 제지로 풀어졌고, 프리킥을 차기 위해 준비하고 있는 선수를 발견한 관중들 사이에서 소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재혁이다! 재혁이가 프리킥을 찰 준비를 하고 있어!”

“게다가 저 위치면 콜롬비아를 상대로 골을 넣었던 위치잖아?”

“오오, 최재혁! 최재혁!”

콜롬비아를 상대로 두 번의 프리킥을 모두 득점으로 연결시킨 최재혁.

그가 공을 앞에 두고 호흡을 고르면서 프리킥을 찰 준비를 하고 있었다.

재혁은 눈앞에 세워진 수비벽과 함께 골라인에 발을 붙이고 서있는 골키퍼의 위치를 한 눈에 담은 뒤 씨익 웃었다.

그리고 천천히 한 발, 두 발···, 공을 향해 발을 옮기기 시작했고.

파앙!

짧고 굵게 터지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발을 떠나 허공에 궤적을 그리기 시작한 공을 쫓아 눈을 움직이다가 주먹을 불끈 움켜 쥐었다.

긴장감에 다들 숨을 죽이고 있다가 기쁨의 함성을 터트린 것은···.

“바로 이거지. 이 맛에 프리킥을 찬다니까.”

철썩!

“와아아아!”

재혁이 찬 프리킥이 골망을 흔들면서 승리를 확정짓는 득점과 세르비아의 방패가 완전히 와해 됐음을 모두에게 알렸을 때였다.

< 114. 흐름의 변화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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