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다양한 사람들 >
폴이 무거운 목소리로 대답해주자 네단이 놀란 얼굴로 그의 말을 받았다.
“처음으로 대표팀에 합류하자마자 선발로 뛴 거야? 그것도 콜롬비아를 상대로? 크, 이건 몰랐네.”
“나도 전혀 몰랐는데. 다른 선수들 경기를 먼저 편집하다보니···. 흠.”
말을 이어가던 폴의 입꼬리가 늘어졌다.
둘은 대화를 계속 나누면서도 눈으론 재혁의 플레이가 담겨 있는 동영상을 쭉 지켜보고 있던 것이다.
이른 시간에 프리킥으로 득점을 성공시키는 모습하며, 적절할 때마다 찔러주는 패스들 하며. 추가 득점에 이어 마지막에 아쉽게 끊어진 플레이까지.
한 경기에 담겨 있는 스토리를 모두 확인한 둘은 짧은 감상을 나눴다.
“나오자마자 바로 에이스로 등극했군.”
“이런 실력의 선수가 에이스가 아니면 또 누가 에이스겠어? 그것도 한국에서 말야.”
짧지만 확실한 한 마디.
실력이라는 단어로 포장된 문장을 들은 폴의 눈동자가 잠깐 반짝였다.
그는 입술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지더니 곧 발을 옮겼고···.
“집으로 가는 거 아니었어?”
의아한 목소리로 묻는 네단의 말에 간단히 웃어보인 후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려고 했는데, 마음이 바뀌어서.”
“마음이 바껴?”
“두 골이나 넣은 선수의 소식을 단순히 문장 몇 줄로 소개할 순 없잖아? 하이라이트라도 하나 추가해야지.”
마시다 만 카페인 음료를 단번에 들이켜 비워낸 폴은 얼굴을 쓸어내린 후 전원을 내렸던 컴퓨터를 다시 켰다. 그리고 동영상 편집 프로그램을 연 뒤 숨을 길게 들이마쉰 다음 천천히 토해냈다.
사실 당장이라도 침대 위에 쓰러지고 싶은 마음은 그대로였지만, 폴은 이대로 집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쉽사리 잠에 들 수 없을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떠오르는 장면들을 도저히 무시할 수 없었으니까.
마치 어릴 적 조립하는 로보트 장난감을 선물 받은 어린 아이처럼, 폴은 재혁의 플레이들을 지켜보니 손이 근질근질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던 것이다.
마우스를 조작해 인터넷에 들어가자 다행히도 라이센스가 통과된 경기 영상이 벌써 올라와 있었다.
폴은 당장 영상을 다운로드 받은 후 인코딩에 들어갔고, 동시에 편집할 장면들을 짜집기 위해 콘티 제작에 들어갔다.
그런 폴을 건너편에서 지켜보던 네단의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저녀석이 저렇게 웃는 것도 오랜만인데?’
맨체스터 시티의 미디어 팀들은 다른 구단에 비해 제법 다양한 구성원들로 팀이 짜여 있었다.
이제 구단의 이름은 단순히 축구 팀을 의미하는게 아닌, 브랜드의 가치를 상징하는 의미로도 전달이 되고 있었으니까.
그런 팀 속에서 네단이 아는 폴은 최고의 홍보대사였다.
단순히 구단을 홍보하는게 아닌, 그 구단에 속한 선수를 홍보하는데 있어서 특화된 홍보대사 말이다.
‘애초에 저녀석이 구단 미디어 팀으로 스카우트된 경위도 선수들의 영상을 하이라이트로 편집하는 기술 때문이었지.’
온갖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선 이미 그가 만든 영상들이 수백 만, 수천 만회 이상 재생된 적이 있었고, 몇몇 영상들은 1억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면서 축구 영상계의 전설로 남아 있었다.
그런 그가 단순히 노동이라는 의미를 넘어 흥미를 갖고 영상을 편집한다는 건···.
네단은 슬쩍 시계를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폴. 작업 끝나면 나부터 먼저 보여줘.”
“···어, 그래.”
이미 집중을 시작한 것인지 단조로운 어조로 대꾸한 폴.
그런 폴의 얼굴을 살핀 네단은 초코맛 에너지 바를 우걱이며 소파에 앉았다.
솔직히 당장 그의 뒤에 앉아 어떻게 영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 지켜보고 싶었지만, 팀이란 팀워크를 유지해야 하는 법.
밤을 샌 폴이 영상을 완성하고 나면 어떤 행동을 취할지 뻔했으니, 네단은 그를 대비하기 위해 미리 숙면을 취하려던 것이다.
‘과연 어떤 영상이 만들어질까?’
다른 누구보다 폴의 영상을 먼저 감상할 수 있다는 특권 덕에 기대에 찬 얼굴로 안대를 착용한 네단은 그렇게 잠에 빠져들었고, 몇 시간 뒤, 폴이 어깨를 흔들어 깨운 것에 졸린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작업 다 끝났어. 완성 파일은 팀 클라우드 폴더에 올려놨으니까 언제든 바로 업로드 해도 될거야. 나 이제 진짜 간다.”
“응···, 그래···.”
아직 잠에서 깨지 못해 반쯤 감긴 눈을 억지로 비비면서 폴을 마중한 네단은 길게 하품을 하면서 슬리퍼를 질질 끌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겨우 3시간 정도 밖에 잘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말인즉, 폴은 편집 작업을 3시간 안에 끝냈다는 소리.
‘흠, 막상 편집을 시작하니 생각보다 별로였나? 겨우 3시간만 사용하다니.’
딸깍, 딸깍.
마우스를 손에 쥐고 클라우드 폴더를 찾으면서 고개를 갸웃이던 네단은 폴의 이름으로 올라온 동영상 파일을 발견하고 그 위로 커서를 옮겼고, 파일을 연 뒤 대략 5분간 재생되는 영상을 모두 지켜본 후 침을 삼켰다.
그리고 폴이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허탈하게 웃었다.
폴은 겨우 3시간만 사용한 게 아니었다.
재혁의 영상을 편집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시간이 3시간이었던 것이다.
최고의 재료란 그런 거니까.
굳이 특별한 양념이나 소스를 추가할 필요 없이, 가지고 있는 본연의 맛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어주면 되는 거니까.
네단은 역시라는 말을 반복하면서 구단 전용 소셜 미디어 계정에 접속했고, 얼른 폴이 완성한 영상을 업로드했다.
반응은 과연 즉각적이었다.
***
[오, 마이, 갓. 이게 정말 18살짜리라고요?]
[완전 미쳤는데요? 프리킥으로만 두 골에, 데드볼이 아닌 상황에서 경기장에서 펼치는 영향력하며···. 한국이 원래 이런 팀이었나요?]
[캬, 하이라이트 2분 경에 나오는 침투 패스 보신 분? 수비 뒤로 돌아들어가는 움직임이 좋긴 했지만, 저걸 확인하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저걸 패스로 찔러 주네요. 진짜 미쳤네.]
영상이 올라간지 겨우 1시간 정도 지났을 때, 처음 재혁의 하이라이트를 접한 사람들은 주로 그저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었다.
여러 구단들을 팔로우 해놓고 그들이 올리는 영상을 순수하게 관람하며 즐기는 부류 말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축구란 삶 그 자체였으니, 어디서 올라오는 어떤 영상이든, 그저 순수한 목적으로 감상하며 관람했고, 재혁의 플레이에 감탄하며 댓글들을 달았다.
그 뒤에 등장한게 맨체스터 시티의 팬들이었다.
이미 재혁이란 존재에 대해 어느 정도 익숙해져 있었던 맨시티 팬들은 팀 밖에서도 최고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선수를 향해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역시 우리 재혁이야. 괜히 과르디올라 감독이 중용하고 있는 게 아니죠.]
[저기서 조금만 더 성장하면 정말 완벽해질 것 같지 않아요? 역대급 선수가 될 거 같은데.]
[이미 기술적으론 흠잡을 구석이 거의 없죠. 하이라이트 마지막에 나온 것처럼 체력쪽 성장만 보충이 되면 아마 최고의 선수가 탄생할 거라 봅니다. 다른 누구도 아닌, 과르디올라 감독이 찍은 선수니까 말예요.]
[펩이 직접 찾아가 계약을 한 선수가 있다고 하던데, 그게 이 선수인가요?]
[호주까지 직접 찾아가서 계약을 한 건 맨체스터 시티 팬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한 이야기에요. 솔직히 저도 처음엔 조금 과한 경향이 없지 않나 싶었는데, 매 경기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오히려 펩의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네요.]
아직 재혁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이며, 재혁의 계약 과정과 성장 상황까지 알려주는 맨체스터 시티의 팬들.
그들은 단어 그대로 재혁을 ‘영업’하고 있었다.
자신들이 지지하는 구단에 이만한 유망주가 있다고, 대단한 선수가 있다는 자부심을 가득 담아서 말이다.
덕분에 영상의 조회수는 꾸준히 늘어갔고, 노출되는 장소 또한 영국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를 대상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콰드라도의 드리블을 잘라내고 역습으로 진행한 플레이는 콜롬비아 현지 팬들과 함께 그가 소속된 유벤투스의 팬들까지 매료시켰다.
[와, 콰드라도가 저렇게 철저하게 막히는 건 또 오랜만에 보네요.]
[재혁이라고 했나요? 저런 선수가 한국에 있었다니. 맨체스터 시티도 정말 복 받았군요.]
[우리도 저런 선수 또 안 나오나? 알레그리 감독이 좋아하는 역삼각형에 딱 맞는 선수 같은데···.]
그 와중에 다들 만약 재혁이 지금 스쿼드에 포함된다면···, 이라는 가정을 넣어가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허나 어린 선수가 펩의 지도 하에서 성장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사리 넘어올 것 같진 않았기에 만약의 이야기는 모두 가정으로 남겨둔 뒤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떠나기 전, 모두 하나의 행동을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똑같이 취했다.
그것은 축구 선수를 좋아하는 팬이라면 빼놓지 않는 것으로···.
[그래서 최재혁 선수의 개인 SNS가 뭔가요? 관련 소식들 좀 알고 싶어서 미리 팔로우 해놓고 싶은데.]
바로 선수의 개인 소셜 미디어 계정을 찾는 것이었다.
***
“후우, 오늘도 어떻게든 끝났네.”
콜롬비아 전 이후, 바로 3일 뒤에 있을 세르비아 전 대비 훈련으로 쉴 틈이 없었던 선수들은 하루 훈련을 모두 소화하고 얼굴을 따라 흐르는 굵은 땀방울을 수건으로 닦았다.
이틀을 쉬고 바로 다음 경기를 진행하는 경기 일정을 모두 예상하고 있었지만 막상 소화하려니 보통 힘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일까.
오늘도 어떻게든 살아남았다는 생각에 선수들은 샤워를 하면서 신이 난 목소리로 떠들었다.
“크으, 역시 훈련 후에 하는 샤워가 최고라니까.”
“정말 이 5분을 위해서 산다니까요. 후우. 사우나도 하면 좋겠는데, 그럼 너무 퍼질 것 같으니. 모레 경기가 끝나면 꼭 사우나 하러 가야겠어요.”
정철과 형민, 두 선수가 물을 맞으면서 대화를 나누었고, 그 옆에서 그들과 함께 샤워를 하는 재혁도 거품칠을 간단히 끝내는 것으로 샤워를 끝냈다.
마음 같아선 따뜻한 물에 오랫 동안 몸을 맡기고 싶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분을 좋게 해줄 뿐, 실질적인 피로 회복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지금 상황에선 오히려 근육 마사지를 받는 게 더 도움이 되리라.
‘그리고 마사지가 끝나면 프리킥 연습도 조금 해야지. 오늘은 회복 위주라 공을 많이 차지 못했으니까.’
아마 감독님이나 코치님들이 알게 된다면 펄쩍 뛸 이야기였지만, 공을 사용하는 감각을 잊고 싶지 않았던 재혁은 남들 몰래 따로 훈련할 계획을 세웠다.
장소도 미리 봐둔 참이었다.
풋살용 3번 훈련장은 남들 눈에 쉽게 띄지 않는 장소에 위치해 있었으니, 그곳까지만 들키지 않게 간다면 분명 괜찮을 것이리라.
그렇게 샤워실을 빠져나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낸 재혁은 간편한 복장을 갖춰 입었고, 테라피스트가 있는 회복실로 향했다.
그런 재혁과 이번에도 함께 걷게 된 정철과 형민은 재혁의 양옆을 한 자리씩 차지 한 뒤 웃었다.
“그런데 재혁아, 너 인기가 제법 좋더라?”
“인기요?”
갑자기 인기가 무슨 소리람.
이해가 힘들다는 투로 재혁이 고개를 갸웃이며 되묻자 둘이 고개를 끄덕이며 계속 말했다.
“콜롬비아 전이 끝나고 못 들었어? ‘재혁 오빠아!’라고 소녀팬들이 소리 엄청 지르던데?”
“몇 명은 재혁이보다 나이가 많아 보였지만, 뭐, 호칭이야 본인 마음이죠.”
“···글쎄요. 저는 잘 모르겠네요.”
“에이. 그러지 말고, 우리도 구경 좀 시켜주라!”
“뭘요? 무슨 구경이요?”
재혁이 의미를 알 수 없다며 계단을 올라가며 되물었고, 두 사람은 장난기가 가득 담긴 얼굴로 다시 한 번 부탁했다.
“너도 SNS 계정 있을 거 아냐? 어떤 사람들이 팔로우 했는지 좀 보여줘.”
“그런 게 왜 궁금해요?”
“그냥 궁금한 거지. 넌 안 궁금해? 내가 네 나이 땐 여성 팬이 선물을 보내주면 밤에 잠도 못 잤는데.”
“딱히 누구한테 선물을 받은 적은···, 아 한 번 있구나.”
“뭐? 무슨 선물?”
“동생 친구들이 티켓 고맙다고 초콜릿을 조금 주더라고요. 이제 고등학생이 되는 애들이라 돈도 없었을 텐데. 감사히 받았죠.”
“여고생이 준 정성어린 초콜릿···.”
“부, 부럽다···.”
“···그냥 편의점에서 산 거 같던데. 딱히 정성은···.”
허나 이미 둘에게 재혁의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그저 뜨겁게 불타오르는 시선만이 더욱 또렷하게 느껴질 뿐이었다.
그런 둘의 시선을 차마 외면하지 못 한 재혁은 머리를 긁적인 뒤 휴대폰을 꺼냈다.
괜히 대화를 오래 끄느니, 차라리 원하는 것을 보여주고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득인 것 같았으니 말이다.
다만 문제라면 재혁 본인이 생성한 계정이 아니라는 것일까.
휴대폰을 꺼내 여러 앱을 뒤적이던 재혁이 눈썹을 모으며 중얼거렸다.
“흐음···. 미디어 팀장님이 알려주신 게 분명 여기 있을 텐데···.”
“너 진짜 요즘 애들 같지가 않구나. 이리 줘봐.”
결국 옆에서 보다 못한 형민이 손을 뻗었고, 메모에 저장되어 있는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해 재혁의 계정을 찾아주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열어보게 된 재혁의 SNS의 팔로워 숫자는···.
“켁! 68만?! 이거 실화냐?”
“미, 미쳤다. 뭐가 이렇게 많아? 하물며 포스팅 하나 없이 관리도 안되고 있는 계정이잖아? 야, 적어도 프로필 사진 한 장 정도는 찍어서 올려주지 그랬냐?”
“이게 세계의 숫자인가···. 쩐다, 재혁아.”
“헐, 형! 이거 좀 봐요. 이 사람 스페인 모델 아니에요? 재혁이를 팔로우 하고 있어요!”
“모델만 있는 줄 아냐? 가수도 있어! 와···. 나 이사람 팬인데···.”
‘···괜히 보여줬나.’
후회는 아무리 빨라 봐야 늦는다고 하던가.
마사지를 받는 내내 두 사람에게 시달려야 했던 재혁은 이후 마사지가 끝난 틈을 노려 부리나케 도망쳤고, 간신히 인조 잔디가 깔려 있는 풋살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역시 다른 어느 곳보다 운동장 위가 편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축구화로 갈아 신고 공을 가지고 슬그머니 필드 안으로 향하던 재혁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누가 있었네?’
아무도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운동장엔 그보다 먼저 온 손님이 있었던 것이다.
< 111. 다양한 사람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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