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 마지막의 마지막 >
임종철 감독이 선수 교체를 진행하면서 자신에 찬 미소를 떠올리고 있을 때,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중계진들도 변화를 알아차리고 방송을 보고 있을 시청자들을 위해 설명을 시작했다.
“아, 임종철 감독이 선수 교체를 지시했나 봅니다. 최전방에 위치해 있던 최주성 선수가 교체 아웃 되고, 미드필더인 정영우 선수가 들어오는 군요?”
“오른쪽 윙을 뛰던 이백주 선수도 경기장을 빠져나가면서 이경훈 선수가 그 자리로 들어오고 있고요, 마찬가지로 권제훈 선수를 대신해 이최민 선수가 들어오고 있습니다.”
“음? 그리고 선수들의 위치도 변하고 있는데요? 최재혁 선수가 조금 더 아래로 내려오고 그 자리를 미드필더인 정영우 선수가 차지합니다. 그 우측엔 이경훈 선수가 라인을 맞추고 있고···.”
“신형민 선수도 조금 더 내려와서 자리를 잡는군요. 이건 아무래도 제로톱 전술인 것 같은데요.”
“제로톱이라고요?”
최장수 해설의 말에 박상철 캐스터가 놀라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런 캐스터를 향해 최장수 해설은 고개를 끄덕이며 눈에 보이는 것들을 세세히 분석해 내놓았다.
“이경훈 선수가 피지컬을 이용한 타겟형 공격수이긴 하지만, 위치를 우측 측면에 배치 시켰어요. 그에 반해 움직임이 좋은 정영우 선수를 처진 중앙 공격수 자리에 배치했죠. 노림수가 제로톱이 아니라면 이해할 수 없는 선수 배치입니다.”
“과연 최장수 해설의 말씀처럼 뼈대는 그대로 유지한 채로 전체적으로 공격 라인을 허리 쪽으로 내린 모습이군요.”
“단순히 공격 라인만 내린 게 아니죠.”
“예?”
“최재혁 선수도 한 라인 뒤로 물러났어요. 이건 의미하는 바가 크죠.”
“!”
재혁에 대해 언급하자 박상철 캐스터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재혁의 위치를 확인했고, 과연 그의 말처럼 전보다 조금 더 아래쪽으로 내려온 재혁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정말 최재혁 선수도 다른 미드필더들과 간격을 좁힌 자리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게 의미하는 바가 크다는 건 또 무슨 말씀이신가요?”
“오늘 한국의 키패스와 공격 전개가 누구의 발끝에서 시작됐는지를 생각하시면 이해가 편하실 겁니다. 모두 최재혁 선수의 발에서부터 시작이 됐죠. 물론 중간중간 김수용 선수의 중거리 패스로 길이 열리기도 했습니다만, 결정적인 찬스는 모두 최재혁 선수의 스루 패스로 연출이 됐었습니다. 그런데 임종철 감독이 그런 최재혁 선수를 내렸다는 것은···.”
잠시간 말을 멈춘 최장수 해설은 머릿속에 떠오른 단어들을 정리했고, 곧 천천히 입술을 움직여 그것들을 마이크 위에 풀어놓았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하나는 무승부에 만족하며 수비적인 운영으로 경기를 종료하겠다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마지막 한 방을 위해 준비한 플레이가 있다는 의미겠지요.”
“최장수 해설께선 어떤 쪽에 더 무게를 실으시겠습니까?”
“지금까지의 경기를 본다면 임종철 감독은 충분히 만족스러운 경기력을 보여줬다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전자의 말씀에···.”
“하지만.”
잠시 캐스터의 말을 자른 최장수 해설은 이내 다시 재개된 경기를 지켜보면서 말을 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기대가 되는군요. 지금까지 보여준 모습이라면 지금 선보이는 제로톱도 분명 준비한 전술일테니 말입니다. 무엇보다 대표팀을 응원하는 입장이라면 후자인 편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아.”
최장수 해설의 말에 박상철 캐스터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대표팀을 응원한다.
평소라면 당연했을 전제였으나, 그동안 협회와 대표팀이 보여준 행보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 팬들은 응원보다는 쓴소리를, 그리고 비난 섞인 비판을 쏟아내 왔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반응이라던가, 경기장에 가득찬 열기는 분명 전과 달리 팬들은 하나가 되어 대표팀을 응원하고 있던 것이다.
박상철 캐스터는 잠시간 말을 잇지 못하고 있다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때마침 경기장 위에서는 한국의 공격이 이어지고 있었다.
***
선수 교체가 이루어지고 3분간 양팀은 한 치의 양보도 없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한 싸움을 이어갔다.
상대가 패스를 시도 하면 패스를 받는 상대 선수를 향해 저돌적으로 달려가 압박을 넣었고, 틈을 보이면 곧장 어깨와 발을 집어 넣으면서 빼앗긴 공을 다시 탈환해 오기 위해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은 것이다.
콜롬비아도, 대한민국도, 모두 중원에 선수들을 밀집시켰던 만큼 흐름을 가져오기 위한 허리 싸움에 모든 것을 쏟아냈는데, 그 틈바구니 속에서 재혁도 거친 숨을 토해내며 다리를 움직이고 있었다.
‘슬슬 한계일 지도···.’
어떻게든 지친 모습을 상대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숨겨보려 했지만, 그게 숨겨지지 않을 정도로 지쳐버린 재혁.
그는 슬쩍 시선을 돌려 남은 시간을 확인한 뒤 또 한 번 뜨거운 숨을 뱉었다.
곧 경기 진행 시간이 80분에 가까워지려는 게 보였다.
종철에게 말했던 5분이 벌써 지나려 하고 있다는 사실에 조급함과 피곤함을 동시에 느낀 재혁이었지만 그렇다고 발을 멈출 순 없었다.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선수, 콰드라도가 공을 몰면서 돌파를 시도하고 있었으니까.
콰드라도는 오른발에 둔 공을 가볍게 끌고 가며 눈앞에 있는 재혁을 살핀 뒤 인상을 구겼다.
‘당장이라도 퍼질 것 같은 모습을 하고서 계속 쫓아 오겠다고? 그냥 그대로 엎어져 있어!’
오늘 재혁에게 두 골이나 실점했다는 사실보다 지금까지 그를 단 한 번도 제대로 제치지 못했다는 사실에 콰드라도는 잔뜩 열이 올라있었다.
개인기와 드리블, 그리고 속도를 살린 돌파가 장점이었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선수에겐 그 어떤 것도 효과적이지 못했다는 것이 개인적으로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다르다.
콰드라도는 입술을 깨물고 눈동자를 빛냈다.
놈의 거칠어진 숨소리가 지금 그의 몸상태가 정상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주고 있었으니까.
물론 기술적인 우위가 아닌 체력적인 우위로 뚫어야 한다는 사실에 자존심이 상하긴 했지만, 프로란 그런 것이다.
‘아마 네가 조금만 더 성장했다면 그땐 어떻게 될지 몰랐겠지. 오늘의 경험을 토대로 더 발전하길 바라마.’
톡, 톡.
마음속으로 재혁에 대해 진심으로 인정한 콰드라도의 드리블이 시작됐다.
오른 발등으로 공을 살며시 밀며 재혁의 눈을 현혹시키기 위해 상체를 흔들었고, 언제든 좌우 어떤 방향으로든 돌파할 각을 찾기 위해 쉬지 않고 동작 사이에 페인팅을 넣었다.
그렇게 두어 동작을 드리블에 심었을 때.
‘···왔다!’
콰드라도의 상체가 급격히 기울어지며 서서히 앞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침내 돌파할 구멍을 찾은 것이다.
왼쪽으로 헛다리를 짚으며 한 차례 상체를 기울이자 재혁이 페인팅에 속아 하체의 중심을 옮기는 것이 보였고, 콰드라도는 동시에 열리는 반대편 공간을 노리고 서둘러 공을 옮긴 뒤 앞으로 밀며 돌파를 시도했다.
그의 입가에 회심에 찬 미소가 떠오른 것은 그 직후였다.
‘뚫었다!’
완벽했다.
상대는 이미 중심이 벌어졌고, 억지로 발을 뻗는다면 균형을 잃을 게 확실했으니.
이것처럼 완벽한 돌파는 또 없을 것이리라.
그런 생각을 하며 오른쪽으로 옮긴 공을 발등으로 재차 밀며 드리블을 이어가던 콰드라도는···.
톡.
“···?!”
발끝을 통해 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에 당황했다.
하지만 분명 공에 무언가 닿는 소리는 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대체 그 소리는 어디서···?
머릿속으로 생각을 이어가면서 콰드라도는 서서히 고개를 내려 공을 찾았고, 그의 생각과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진 것에 당황해 눈을 부릅 떴다.
공은 분명 구르고 있었다.
다만 그의 발에 닿아 구른 게 아닌···.
“저 꼬마가 대체 어떻게?!”
재혁의 길게 뻗은 오른발 끝에 닿아 틀어진 방향을 향해 구르고 있던 것이다.
재혁은 몸을 날리는 슬라이딩 태클로 콰드라도의 드리블을 끊어내면서 잔디 위를 거칠게 굴렀고, 잔뜩 헝클어진 머리칼 사이로 공이 수용의 발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뒤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휴식을 원하는 근육과 뼈마디들이 모든 부위에서 비명을 지르는게 느껴졌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어쩌면 이게 자신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으아아아!”
평소와 달리 잔디 위를 내달리며 재혁은 고함을 내질렀다.
이런 식으로라도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당장 쓰러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런 재혁의 고함 소리를 들은 수용은 망설이지 않고 재혁에게 땅볼로 깔리는 빠른 패스를 찔러주었다.
솔직히 재혁의 상태는 당장이라도 다리가 풀려 바닥을 뒹굴 것만 같았지만···.
‘저녀석이 아니면 안되니까, 망설일 이유 따윈 없지.’
촤르륵!
수용의 발을 떠난 공이 잔디 위를 훑으며 굴렀고, 재혁은 공이 오는 방향을 확인하기 무섭게 재빨리 공이 오는 방향을 향해 몸을 틀었다.
동시에 콜롬비아의 아길라르가 재혁의 등뒤로 바짝 달라붙었다.
‘더 이상 못 간다!’
투욱, 툭!
등을 지고 있는 재혁에게 달려 들어 쉽사리 공을 소유하지 못하도록 압박을 넣는 아길라르.
그는 재혁의 발에 공이 닿는 그 순간을 노려 발을 뻗을 준비를 하며 눈을 얇게 떴다.
이미 지칠대로 지친 녀석이었으니, 제 몸을 간수하는 것만으로도 벅찰게 분명 했으니까.
그렇게 공이 서서히 재혁의 발밑을 향해 굴러왔고, 아길라르는 타이밍을 재며 기다리다가···.
파앙!
“?!”
공이 멈추지 않고 그대로 떠오르는 것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등을 진 상태에서 원터치 다이렉트 패스라고?!’
저렇게 무책임한 패스라니.
지쳐서 막무가내식으로 패스를 찌른 게 분명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날아가는 공을 따라 고개를 돌렸던 아길라르는 재혁의 발을 떠난 공이 정확히 대한민국의 선수를 향해 날아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당황해 침을 삼켰고, 우측에서 재혁의 패스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던 이경훈은 공중을 향해 번쩍 뛰어 오르면서 이를 악물고 머리로 공을 받았다.
1미터 90센치가 넘는 신체 구조와 한국식 ‘제로톱’을 완성시키기 위한 전술적 선택이 마침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이마로 공을 받은 경훈은 곧장 공을 상대 패널티 지역을 노리고 떨어뜨렸고, 공을 쫓아 이동한 선수···.
“으아아아!”
재혁은 다시 한 번 고함을 내지르며 공을 쫓아 전속력으로 달렸다.
쉬지 않고 이어지는 패스 앤 무브로 등뒤에 달라 붙었던 아길라르는 이미 진즉에 떨쳐냈다.
콜롬비아의 센터백들이 패스가 떨어지는 방향을 뒤늦게 파악하고 자신을 막기 위해 따라오고 있었지만, 약속된 플레이를 기다리고 있었던 재혁의 라인 브레이킹을 쫓기엔 이미 한 발자국 느린 상황이다.
오스피나 골키퍼가 황급히 달려 나오며 각을 좁히려는게 눈에 보였으나, 그것까지도 전술에 포함되어 있었다.
재혁은 자신처럼 반대쪽에서 라인 브레이킹을 시도하고 있는 선수, 신형민을 발견하고 씨익 웃었다.
공을 저쪽으로 연결해주기만 하면 활짝 열린 골문을 향해 형민이 슈팅을 때릴 것이고,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게 계획대로 이루어진다.
3-2 승리로 경기는 끝이 나게 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떨어지는 공을 향해 오른발을 쭉 뻗은 재혁은 발등으로 공을 받아 완벽한 트래핑에 성공한 것에 미소를 떠올렸다.
그의 귓가에 기대에 찬 관중들이 입을 모으는 소리가 서서히 퍼지기 시작했다.
거기서 재혁은···.
***
“···죄송해요. 하필 거기서 다리에 쥐가 나는 바람에···.”
경기가 끝난 직후, 회복실에 누워 물리치료사의 마사지를 받게 된 재혁은 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선수들을 향해 면목이 없다는 목소리로 말하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에게 공을 연결해주었던 수용, 헤딩으로 패스를 떨어뜨려 준 경훈, 그리고 그와 함께 라인 브레이킹을 시도하며 달리던 형민.
그 외에도 오늘 함께 경기를 뛰었던 선수들이 마사지를 받고 있는 재혁을 둘러 싸고 있던 것이다.
그런 선수들을 향해 가장 마지막에 플레이를 망쳤다는 것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던 재혁은 사과를 했으나, 선수들은 크게 웃으면서 손을 내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2-2 무승부로 끝이 난 것도 네가 쥐가 날 정도로 열심히 뛰어준 덕이었잖아? 아마 욕을 먹어도 우리가 먹게 될테니까, 헛소리 말고 마사지나 제대로 받아.”
< 109. 마지막의 마지막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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