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06화 (106/225)
  • < 106. 진짜 시작 >

    3초 전, 2초 전, 1초 전! 큐!

    스튜디오에서 큐 사인을 외치자 곧장 카메라의 불빛이 바뀌었고, 중계 스튜디오 중앙에 앉아 방송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던 박상철 캐스터가 곧장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대한민국 축구팬 여러분! 캐스터 박상철입니다. 옆에는 오늘 저와 함께 대한민국 대 콜롬비아의 평가전을 중계해주실 최장수 해설이 앉아 계십니다.”

    “반갑습니다. 해설의 최장수입니다.”

    “오늘 경기를 기대하는 분들이 정말 많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최장수 해설께선 어떻게 보고 계십니까?”

    박상철은 곧장 본론을 물었고, 손에 쥐고 있던 시트들을 짧게 훑어본 최장수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아무래도 당장 내년으로 다가온 월드컵을 앞두고 진행될 평가전이니 축구에 관심이 있으신 분이라면 모두 TV 앞에 자리를 잡고 앉아 계시겠지요. 그 감정이 애정이든, 혹은 분노든 말입니다.”

    “하하하, 그렇겠죠. 그만큼 기대가 크다는 말씀이시겠죠?”

    끝에 약간 날이 선 코멘트가 붙었지만 박상철 캐스터는 능글맞은 웃음으로 받아 넘기면서 대화를 이었다.

    “치열했던 남미 예선을 뚫고 본선에 진출한 콜롬비아가 오늘 평가전 상대입니다. 최장수 해설께선 어떻게 보십니까?”

    “최상위 권인 포트 1은 아니지만, 스페인, 잉글랜드, 우루과이 등의 팀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는 포트 2에 속한 콜롬비아입니다. 월드컵 본선 무대의 수준을 조금이나마 맛볼 수 있는 상대로 손색이 없는 팀이죠.”

    오늘 상대인 콜롬비아에 관한 이야기로 화제가 돌자 둘은 준비한 자료 화면과 함께 계속해서 상대팀에 대한 설명을 이었다.

    “어떻게든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콜롬비아입니다만, 예선에선 꽤 고전을 했죠? 조금만 어긋났다면 바로 플레이오프로 떨어질 4위로 순위를 마감했거든요.”

    “같은 조에 브라질, 우루과이, 칠레, 아르헨티나같은 강팀들이 즐비하기도 했지만, 파라과이와 에콰도르같은 복병들도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으니 쉽지 않은 여정이었겠죠. 베네수엘라가 그 와중 고춧가루 부대 역할을 톡톡히 했어요. 그래서 최종 예선을 진행하면서 콜롬비아도 고민이 많았습니다. 이겨야 할 경기들을 비기거나 진 탓에 순조로웠던 출발에 비해 마무리가 어수선해졌으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콜롬비아 쪽에서 오늘 우리와의 경기에서 전력을 모두 활용하려는 모습을 보이고 있지 않겠습니까?”

    캐스터의 질문에 해설은 고개를 끄덕인 뒤 답했다.

    “대한민국도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상대이니 만큼, 콜롬비아 쪽에서도 오늘 평가전을 통해 무언가를 얻어가겠다는 마음이 커보입니다. 일단 선발 명단만 확인해도 그 의지를 바로 느낄 수 있죠.”

    “최전방에 팔카오, 그 밑을 받쳐주는 하메스, 그리고 아길라르와 C. 산체스 조합까지. 정말 1군 전력이 모두 선발로 올라왔군요.”

    “양 측면을 맡고 있는 카르도나 선수와 콰드라도 선수도 붙박이 주전으로 대부분의 최종 예선전들을 뛰었던 선수들입니다. 아마 콜롬비아는 오늘 이런 생각을 가지고 경기에 임하려는 거겠죠. ‘본선에서 만나게 된다면 확실히 3점을 챙길 수 있는 축구를 실험하겠다’ 라는 생각 말입니다.”

    “최장수 해설의 말씀처럼 경기 전 사전 인터뷰에서 콜롬비아의 페커맨 감독이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죠. 월드컵 본선 무대라고 생각하고 오늘 전력을 다할 것이라고 말예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경기가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겁니다. 본선의 목표가 3패가 아니라면 말입니다.”

    또렷한 눈동자로 카메라를 정면으로 응시하면서 남긴  최장수 해설의 말에 박상철 캐스터는 마른 침을 삼켰다.

    짧은 한 마디에 스튜디오 내가 술렁이는 것을 보면 시청자들의 반응이 자연히 유추가 됐던 것이다.

    ‘결국 여기서 또 터트리는구나.’

    평소에도 좋지 않은 경기력을 보여준다면 솔직함을 바탕으로 날이 선 비판을 거침없이 쏟아내던 최장수다.

    그런 그가 지난 평가전 내용을 기억하면서 쓴말을 뱉지 않을 이유가 없던 것이다.

    하지만 저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찾는 거다.

    ‘요즘 세상에는 남의 눈치 안 보고 솔직한 말을 해주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까 말이지.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최장수와 최고의 파트너인 것이다.

    박상철은 최장수가 얼린 분위기 속에서 가벼운 미소를 떠올리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 목표를 바꾸기 위해 바로 오늘 콜롬비아와의 경기를 준비한 게 아니겠습니까? 향상된 경기력을 기대하면서, 저희는 짧은 광고 후에 돌아오겠습니다!”

    ***

    “향상? 웃기고 있네. 바뀌긴 개뿔이!”

    치킨집에 모여 앉아 TV를 보고 있던 남성들 중 하나가 거칠게 소리쳤다.

    초저녁부터 얼큰하게 취했는지 코와 볼이 빨갰고, 흰자위까지 붉게 충혈된 남성은 광고로 넘어간 화면을 향해 연신 욕지거리를 뱉었다.

    “니들이 인마, 밥먹고 축구만 했으면! 그따구로 뽈을 차면 안되지! 축구로 돈을 버는 것들이 말야, 어? 공을 그따구로 밖에 못 차?!”

    “어이, 조씨. 많이 취했어. 좀 천천히 마셔.”

    “이거 놔! 내가 저것들 축구하는거 보면 안 취하게 생겼냐고? 아주 그냥 마시고 죽자, 죽어!”

    벌컥, 벌컥!

    말아놓았던 술을 그대로 넘겨버린 조씨는 안주로 주문한 치킨을 크게 한 입 뜯었고, 기름이 번들거리는 입술을 계속해서 놀렸다.

    “협회라는 것들은 매번 개판이지, 선수들은 발이 개발이지, 그리고 감독에 있는 놈은 머리가 개지! 이번에 뽑은 선수들 봐, 딱 봐도 협회 애들이 추천한 선수들을 그대로 뽑은 거 아녀? 아주 비리로 얼룩져가지고···.”

    “다른 건 몰라도 선수 선발은 아닐 걸요?”

    “으잉? 뭐? 누구야 지금 내가 한 말에 말대꾸한 놈이!”

    “전데요. 아저씨가 한 말이 전부 사실은 아닐 거라고요.”

    중년 남성은 자신의 말을 자르고 불쑥 튀어오른 젊은 목소리에 쌍심지를 켰고, 척 보기에도 어려보이는 상대를 향해 계속 고함을 내질렀다.

    “너 인마, 딱 봐도 고등학생 같아 보이는데, 어디서 감히 어른이 하는 말에 토를 달아?! 내가 너만한 아들이 집에 있어!”

    “별로 토를 달고 싶진 않았는데요. 저도 그냥 친구들이랑 조용히 치킨 먹으면서 경기 보고 싶었는데, 아저씨가 너무 시끄러워서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죠.”

    “이, 이, 어, 새파랗게 어린 놈이!”

    “조, 조씨! 조씨가 참어! 그리고 학생도 이제 그만해. 원래 이런 아저씨가 아닌데, 이 아저씨가 많이 취해서 그래.”

    “취하긴 무슨! 나 아주 멀쩡해!”

    우당탕!

    지인의 만류에도 의자를 넘어뜨리며 자리에서 일어난 남성은 계속해서 소란을 피웠고, 손가락을 쭉 뻗어 TV 화면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거 봐봐, 저거! 지금 선발로 나오는 선수들을 보라고! 지난 번에 바보같은 실수로 골을 먹은 골키퍼나, 멍청한 수비수들이나 그대로잖아!”

    “선수들이 실수할 때도 있는 거죠. 그리고 경기력으로 따지면 썩 나쁜 건 아니었어요. 오히려 김종건 골키퍼는 선방도 많이 했으니 칭찬해야죠.”

    “이게 계속···!”

    조목조목 따져드는 학생의 말에 조씨는 붉으락푸르락 변하는 얼굴 색처럼 감정을 숨기지 못했고, 다시 한 번 높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기, 지금 저기 보이는 저 꼬마 같은 놈이 뽑힌 것도 뒷배가 아니란 말이냐?”

    “꼬마 같은 놈이요?”

    “그래, 저기! 저 88번!”

    남성이 선수들이 입장하고 한 명씩 얼굴을 비춰주고 있는 화면을 가리키며 말한 것에 학생이 고개를 TV쪽으로 돌렸고, 그가 가리킨 88번 선수를 발견하게 씨익 웃었다.

    학생은 다시 남성을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저기에 있는 어려 보이는 선수가 뒷배가 아니냐고 물으신 겁니까?”

    “그래! 타이밍이 그렇잖아! 예선 동안은 코빼기도 안 비추다가 슬그머니 나타나서 말야, 게다가 저거 몇 살이야? 18살? 그럼 내년에 19살이 되는 거야? 저런 어린 놈을 뽑았는데, 뒷배가 아니면···.”

    “아저씨. 평소에 축구 안 보죠?”

    “···뭐?”

    느닷없은 질문에 남성이 학생을 향해 되물었고, 학생은 미소를 띤 얼굴로 계속해서 말했다.

    “그러니까 그런 소리를 하죠. 그럼 아저씨 같으면 지금 영국에서 뛰면서 경기에 꾸준히 출장하고 있는 선수를 안 뽑아요?”

    “여, 영국···, 뭐?!”

    “이번 시즌 재혁이가 뛴 경기에서 올린 득점이며, 도움들의 갯수가 몇 갠지 알아요? 키 패스는요? 평균 패스 성공률이 몇 퍼센트인지는 아세요?”

    “그, 그런 게 다 뭐야! 그래봐야 어차피···!”

    “아마 오늘 경기.”

    학생의 묻는 것들에 대해 한 가지도 반박하지 못한 남성은 귀를 틀어막고 소리쳤고, 그런 남성을 향해 학생은 쓰게 웃으며 말했다.

    “기적이 일어난다면 아마 아저씨가 무시한 저 88번이 만드는 걸 겁니다. 그러니까 적어도 경기가 진행되는 90분 동안은 조용히 지켜보자고요.”

    “어이, 야! 이게 어따 대고 그런 시건방진 말을···!”

    “어어, 와아아아!”

    “골이다, 벌써 골이야!”

    “?!”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학생을 향해 소리치던 남성의 말이 중간에 끊어졌다.

    갑자기 주변이 소란스러워진 탓이었다.

    그것도 다른 이유가 아닌 골때문이라니.

    남성은 입꼬리를 잔뜩 말아올리면서 화면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보나마나 콜롬비아가 넣은 거겠지!’

    그것말고는 이처럼 이른 시간에 득점이 터질 이유가 없었다.

    설마 한국이 콜롬비아를 상대로 선취점을 터트릴 일은 절대 없었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중계 화면을 향해 시선을 옮겼던 남성은···.

    [고오올! 대한민국이 이른 시간에 선취점을 얻는데 성공하면서 앞서 나갑니다!]

    “뭐, 뭐라고?!”

    전혀 예상 못한 그림이 펼쳐진 것에 놀라 비명을 질렀다.

    설마했던 일이 벌어지고 만 탓이다.

    기대했던 것과 달리 득점에 성공한 것은 한국이었고, 골을 터트린 선수는 동료들의 축하를 받으며 잔디 위에 누워있던 것이다.

    대체 어떻게···, 라는 생각과 함께 계속 화면을 지켜보던 남성은 득점 과정을 확인하고 입을 크게 벌렸고, 그런 남성을 향해 학생이 웃으며 말했다.

    “그 꼬마 녀석이 프리킥도 제법 잘 차거든요. 존(Zone) 14처럼 위험한 지역에서 파울을 했으면 그 대가를 치러야 하는 거죠.”

    “조···, 존 14? 그게 뭐야?”

    “설명해봐야 내일 기억이나 하시겠어요? 아무튼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오늘 경기는 조용히 지켜보세요. 제법 재밌을 거니까.”

    말을 끝낸 학생은 원래 자리로 돌아와 앉았고, 그런 학생을 노려보던 남성은 이를 뿌득 갈더니 담배가 땡긴다면서 치킨집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제야 조금 주변이 진정되자 학생의 친구들이 그에게 다가가 걱정스레 물었다.

    “야, 너 평소답지 않게 왜 그래?”

    “가만히 듣고 있자니 열받잖아. 그래서 좀 나섰다.”

    “잘했어. 취해서 이상한 소리하는 아저씨 때문에 중계 못 들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아주 잘했다, 인마. 그런데 너 축구에 그렇게 관심이 많았냐?”

    “그러게. 저 88번에 대해 아주 빠삭하게 알던데? 그리고 존 14는 또 뭐야? 축구 용어야?”

    다른 또래 친구가 어깨를 두드리며 한 말에 대학을 눈앞에 둔 케이브랜드 사장의 아들, 세훈은 그저 웃었다.

    빠삭하게 알 수밖에 없었다.

    88번은 그의 아버지가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고, 지금까지도 꾸준히 지원해주고 있는 선수인 재혁이었으니까.

    게다가 올해 맨체스터 시티에 입단하면서 계약 기간을 늘리기 위해 아버지 회사와 재계약까지 했다고 들었다.

    지금 재혁이 신고 뛰고 있는 케이 브랜드의 축구화가 바로 그 증거였다.

    ‘맨체스터 시티같은 거대 구단에 들어가면 메이저 브랜드 회사에서 스폰을 해주겠다고 난리일텐데. 바보 녀석.’

    재계약의 이유로 은혜라는 말을 꺼낸 친구에 대한 한 마디.

    물론 아버지가 재혁을 상대로 떨어지는 계약 조건을 건 것도 아니었지만, 바보 같은 이유를 들어 재계약을 한 친구를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비록 몸은 떨어져 있어 많은 대화를 나눌 순 없었지만, 그래도 항상 응원하겠다고.

    그게 친구니까.

    ‘그리고 친구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부분에선 무조건 도와줘야지.’

    딸랑!

    담배를 다 피고 돌아온 남성이 낸 종소리에 그와 눈을 마주쳤던 세훈은 턱짓으로 TV화면을 가리켰고, 남성은 붉어진 얼굴을 푹 숙이고 들어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 남성에게서 시선을 거두고 TV 화면, 그 속에 비춰지는 재혁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세훈은 손을 모았다.

    ‘그러니까 너도 힘내라.’

    경기의 균형이 시작한지 3분만에 무너졌지만, 끝나려면 아직 87분이 남았다.

    세훈은 콜라를 삼키면서 이어질 경기에 집중했다.

    ***

    “이거 진짜 대박이네. 거기서 프리킥을 그렇게 차?”

    “골대 구석에 정확히 박혔잖아. 오스피나가 반응도 못하는 거 봤어?”

    “그럴만한 프리킥이었어. 코스가 워낙 좋았잖아?”

    수원 월드컵 경기장.

    그 필드 위에 모여 있던 콜롬비아 선수들은 하나같이 재혁의 프리킥에 감탄한 얼굴이었다.

    설마 3분 만에, 그것도 프리킥으로 득점을 성공할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흔들린 얼굴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에 찬 얼굴로 미소를 보였고, 서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감정을 공유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서있던 하메스는 동료들을 향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놀아주는 건 여기까지. 한 점을 내줬으니 이제부터 시작인거야. 다들 오늘 경기의 목적이 뭔지 잊지 않고 있지?”

    경기의 목적.

    하메스의 말에 선수들은 라커룸에서 페커맨 감독과 나누었던 대화 내용을 떠올렸다.

    ‘한국과의 경기는 압박에 대처하는 연습을 할거다. 일단 한 점을 내줘라. 우린 그때부터 시작한다.’

    < 106. 진짜 시작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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