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105화 (105/225)
  • < 105. 좋은 날 >

    “재희야! 같이 가자!”

    “너희들끼리 가라니까. 난 따로 갈 곳이 있다고 몇 번을 말하니?”

    “그러니까 혼자 어딜 가는데. 우리도 같이 가자니까?”

    책가방을 메고 학교를 빠져나오자 재희의 뒤로 두 명의 여학생들이 따라 붙었고, 그런 친구들을 힐끗 곁눈으로 살핀 재희는 옅게 한숨을 뱉곤 말했다.

    “놀러 가는 게 아니라 할머니를 도와주러 가야 하는 거래도.”

    “우리도 같이 도와줄게! 시장에 있는 분식집 맞지? 지난 번에 같이 갔을 때 할머니가 우리도 굉장히 예뻐하셨잖아?”

    “히히, 맞아. 언제든 놀러 오라고도 하셨고!”

    “···그러니까 놀러 가는 게 아니라니까 그러네. 에휴, 모르겠다.”

    더 이상 말려봐야 들을 친구들이 아니었기에 재희는 한숨을 또 한 번 폭 내쉰 후 단발머리를 찰랑이며 고개를 돌렸고, 그런 재희의 행동을 승낙으로 이해한 친구들은 재희의 양 옆에 붙어 밝은 목소리로 재잘거렸다.

    “할머니가 해주신 떡볶이 진짜 맛있던데.”

    “튀김도 짱이야. 특히 김말이가 오지는 부분인 거 동의?”

    “어, 보감!”

    “꺄르륵, 너 어젯밤에 한 개그서커스 봤구나? 짱 재밌었지?”

    ‘···동의? 어, 보감? 저게 대체 무슨 소리야?’

    분명 또래 친구들 사이에 섞여 있었거늘.

    재희는 도통 이해가 힘든 친구들의 대화를 들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학교, 집, 그리고 할머니가 있는 분식집.

    기껏해야 주말에 도서관을 가는 정도가 재희가 하는 활동의 전부였기에 오히려 또래들과 말을 섞는게 영 불편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따라오는 두 친구들의 심성이 나쁜게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재희였기에 에라 모르겠다, 라는 생각으로 다같이 할머니가 계신 분식집으로 향했고, 재희와 친구들이 온 것을 발견한 할머니는 떡볶이들을 휘적이다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고, 우리 강아지랑 고양이들 왔능겨?”

    “할머니! 보고 싶었어요!”

    “허이구, 우리집 강아지보다 더 반갑게 안기네! 공부는 잘했고?”

    “그럼요! 재희랑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요!”

    “기말고사 공부도 주말에 재희랑 같이 할 거에요!”

    “뭐? 내가 언제 그런 약속을···.”

    “참말이여? 아이구, 장허네!”

    가방을 내려놓고 교복 위로 앞치마를 두르던 재희가 친구의 말에 놀라 빽 소리를 지르려다 친구들과 기쁜 얼굴로 대화를 나누고 계신 할머니의 얼굴을 발견하곤 이내 말을 멈췄다.

    분식집으로 일을 도우러 올때면 이따금 할머니가 했던 말이 떠오른 것이다.

    일은 괜찮으니 친구들과 놀러 나가라는 말을 말이다.

    그럴 때면 항상 괜찮다고 대답한 후 할머니 어깨를 주물러 드렸었는데.

    ‘···이번 주말엔 쟤들이랑 도서관으로 가야겠네.’

    이 모든게 할머니를 위해서라는 생각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던 재희는 소매를 걷어 올린 후 친구들에게 소리쳤다.

    “너희들! 계속 놀고만 있을 거야? 그러면 그냥 보내버린다!”

    “아, 알겠어! 난 테이블 닦을게!”

    “난 바닥 청소를···.”

    “꾀부리기만 해봐. 걸리면 떡볶이 안 줄거야.”

    떡볶이가 걸리자 두 친구들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열심히 일을 하기 시작했고, 손녀와 친구들을 곁에서 지켜보던 할머니는 쟁반에 떡볶이와 튀김, 순대같은 분식 종류들을 담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홀홀, 배고프제? 일단 간식 좀 묵고 혀. 마침 한가할 때니께 지금 미리 묵어둬.”

    “와아! 진짜요? 할머니 최고!”

    “어, 할머니. 우리 이제 왔는데···.”

    “재희도 그러지 말구 얼른 앉어. 식기 전에 묵어야 맛난겨.”

    “에휴. 알겠어요.”

    할머니의 말이었기에 재희는 군말없이 자리에 앉았고, 친구들이 그런 것처럼 포크를 손에 쥐고 떡볶이와 튀김들을 하나둘 입에 넣기 시작했다.

    한창 무엇을 먹어도 맛있게 먹을 나이인 세 소녀들의 대화 주머니가 터진 것은 바로 그 이후부터였다.

    “꺄악, 역시 너무 맛있어! 세상에서 먹어본 떡볶이들 중 할머니가 해주신게 정말로 제일 맛있다니까!”

    “순대는 어떻고? 쫄깃하면서 당면들이 한 올, 한 올 살아있는게···. 완전 오지고 지리는 부분이고요!”

    “···너희들 먹을 거 다 먹었다고 일 대충하면 안된다. 그럼 주말에 각오해.”

    “호호, 물론이지. 아, 그 전에 우리 주말에 일찍 만나서 밥부터 먹고 공부할까? 사거리에 새로 생긴 카페가 있다는데···.”

    “거기 나도 알아! 거기 디저트가 진짜 맛있데. 우리 꼭 같이 가보자!”

    “···.”

    과연 이번 주말에 공부가 제대로 될까?

    재희는 다시 한 번 옅은 숨을 토해내며 떡볶이를 찌른 포크를 입에 물었고, 그런 손녀를 곁에서 지켜보던 할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품고서 국자를 휘적였다.

    그렇게 쟁반 위 접시들을 하나둘 비워가던 세 소녀들은 배가 좀 차자 주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무슨 일인지 왁자지껄한 TV소리에 가장 먼저 반응했다.

    친구 중 한 명이 눈을 반짝이며 소리쳤다.

    “어어! 드디어 왔다!”

    “오다니, 누가?”

    “그 분 말야! 영국에서 뛰고 있는 축구 선수! 맨시티의 별!”

    “맨시티의 별?”

    친구 둘이 큰목소리로 떠드는 것에 재희는 그저 물잔을 기울이며 둘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만 있었고, 처음 목소리를 냈던 친구는 잔뜩 흥분한듯 손을 흔들면서 말을 이었다.

    “응! 이번 시즌부터 영국에 있는 축구 팀에 합류하게 된 우리나라 선수인데, 축구 완전 잘해! 그리고 멋있어!”

    “그런 사람이 있어? 한국 사람이야?”

    “물론 한국인이지. 듣기론 호주에서부터 축구를 했다고 하더라고. 어릴 때부터 해외를 전전하면서 축구를 하다가 마침내 빅 리그에 입성! 그것도 아직 10대의 나이에! 듣기만 해도 멋지지 않니?”

    ‘···듣기만 해도 우리 오빠랑 비슷하네. 그러고 보니 오빠가 뛰고 있는 팀도 맨···, 뭐라고 하지 않았나? 흐음.’

    최근 시험 공부를 하느라 전화 통화를 자주 못했는데.

    생각이 난 김에 오늘 밤엔 오빠한테 연락이나 한 번 해봐야겠다, 라는 생각을 이어가던 중···.

    “어, 재희도 있었네.”

    “?!”

    뒤에 들린 목소리에 재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 목소리.

    몇 번이고 전화기를 통해 들었지만, 절대 잊지 않고 있는 목소리를 들은 재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고개를 돌렸고, 분식집 입구에 어깨를 걸치고 서있는 재혁을 발견한 재희가 입을 가리고 소리쳤다.

    “재, 재혁 오빠!”

    “응, 맞아. 그 선수 이름이 재혁인데···. 뭐? 재혁 오빠?!”

    “재혁이? 재혁이가 왔어야?”

    “할머니, 재희야. 오랜만이지? 할머니는 그렇게 말렸는데 결국 일을 하고 계시고 말이지. 하여간 고집은 알아주셔야 한다니까.”

    “아, 아이고. 재혁아! 요것이 진짜 재혁이 맞는겨? 진짜 재혁이 맞어?”

    “그럼요, 할머니. 저 진짜 할머니가 키워주신 최재혁이에요. 오늘 한국으로 들어와서 가장 먼저 여기로 온 거예요. 할머니 얼굴 보려고요.”

    “오빠···.”

    갑작스런 재혁의 등장에 재희는 어안이 벙벙했는지 발을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가 조심스레 한 발자국씩 재혁을 향해 다가간 뒤···.

    “오면 온다고 미리 말을 해야지!”

    “아, 아야야. 아파 재희야!”

    “더 아파야 돼!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그의 어깨를 사정없이 꼬집으며 말했다.

    재혁은 산만한 덩치를 베베 꼬면서 고통에 찬 비명을 질렀고, 재혁을 째려보면서 재희는 손에 힘을 풀 줄 몰랐다.

    그런 재혁을 구해준 것은 이번에도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재희에게 그만하면 됐다고 말하며 밥은 먹었냐고 물었고, 할머니 덕에 간신히 재희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재혁은 생긋 웃으며 밥은 먹었으니 물이면 된다고 답했다.

    그렇게 다시금 대화를 나누게 된 세 가족.

    재혁은 간단한 안부를 주고 받다가 재희와 할머니의 앞으로 봉투 하나를 건네며 말했다.

    “사실 공항에서 바로 여기로 온 이유는 이거 때문이었어요. 이번에 한국에서 축구 시합이 있거든요. 봉투에 든 건 경기장 입장 티켓이에요. 재희랑 같이 경기 보러 오세요.”

    “축구 시합? 그것 때문에 한국에 온거여?”

    “네, 할머니. 저는 축구 선수잖아요? 축구 선수니까 축구를 해야죠. 그것도 그냥 축구 선수가 아니라 국가 대표에요. 나라에서 제일 잘하는 선수들만 뽑힌다는 그거. 그러니까 고물상 할아버지 만나면 꼭 자랑하세요.”

    “그려, 내가 꼭 자랑할거여! 우리 강아지가 으뜸이라는데 당연히 자랑을 혀야지!”

    양 손의 엄지를 우뚝 세워보이며 답하는 할머니를 보며 재혁은 빙그레 미소를 보이다가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혹시 같이 오고 싶어할 사람이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여분의 티켓들을 넣어뒀으니까, 혹시 손님이 있다면 함께 오세요. 그러면 전 경기장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오늘부터 바로 합숙에 들어가야 해서 집으론 못 가겠네요.”

    “그려, 그려. 나랏일을 하러 가야 하는디, 나가 우리 강아지를 계속 붙잡고 있을 순 없지. 어여 가봐.”

    “그래도 시합들이 다 끝나면 만나뵐 수 있으니까. 그때 다시 올게요. 재희 너도 할머니 잘 모시고 있어.”

    “항상 잘 모시고 있었거든, 바보 오빠야.”

    “흐흐, 그래. 그럼 나중에 보자.”

    그렇게 짧았던 만남이 끝이 났다.

    재혁은 왔던 것처럼 홀연히 모습을 감췄고, 재혁이 사라진 자리를 멍하니 바라보던 재희와 할머니는 다시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이 말이다.

    다만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재희도, 할머니도, 모두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는 것일까.

    그렇게 재희가 다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물잔을 향해 손을 뻗으려던 순간.

    “재희야! 정말 최재혁 선수가 네 오빠야?”

    “어, 응.”

    “그럼 방금 TV에서 이야기 하던게 재희네 오빠 이야기였던 거야?”

    “그렇겠지? 세상에 또 다른 최재혁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박!”

    전과 달라진 게 하나가 더 있었다.

    재희의 친구들은 크게 놀란 얼굴로 재희를 붙잡고 재혁에 대해 계속해서 묻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하, 할머니요! 방금 재혁이 지나갔던 겁니꺼?”

    “재혁이? 그랐제. 방금 왔다가 나랏일 하러 가부렀어.”

    “아이고야! 재혁이 고놈한테 싸인 받아야 했는디! 우리 아들놈이 글쎄 재혁이 광팬이라 안카요!”

    “재혁이라고? 방금 재혁이 왔다갔어?”

    “뉴스에서 왔다더니만! 벌써 여기도 왔다 갔구만!”

    “금세 커가지고 말이야. 벌써 어른이 다 됐다니까? 장가보내도 되겠더라니까!”

    중앙 시장 상인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어 재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남자 상인들 중 축구를 좋아하는 몇몇은 신문에서 읽었던 내용들을 읊으며 재혁에 대해 아는 것들을 늘어놓았고, 그 옆에 같이 앉은 아주머니들은 손뼉을 치며 역시 재혁이가 크게 될 줄 알았다며 호들갑을 떨었다.

    그 사이에서 할머니는 흐뭇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자랑스러움.

    재혁에 대한 자랑스러움이 그대로 묻어나는 웃음이었다.

    그런 아저씨, 아주머니들의 모습을 빤히 지켜보던 재희는 작게 미소를 떠올리며 물잔을 기울였다.

    그래도 오빠가 칭찬 받는 모습을 보니 썩 기분이 괜찮았던 것이다.

    그렇게 물을 두어 모금 더 삼키고 잔을 내려놓자, 재희는 전에 느끼지 못했던 눈빛을 확인하고 몸을 움찔였고, 두 친구가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왜, 왜 그래?”

    “재희야···. 우리 친구 맞지?”

    갑자기 친구가 맞냐니.

    느닷없는 질문에 재희가 엉겁결에 고개를 끄덕였고, 두 소녀는 재희의 양손을 하나씩 붙잡으며 말했다.

    “그러면 이번 축구 경기에 우리도 데려가줘!”

    “나 진짜로 꼭 한 번 최재혁 선수···, 아니. 네 오빠가 뛰는 모습을 보고 싶었거든! 그러니까 부탁이야, 우리도 좀 데리고 가주라!”

    그거 때문이었냐.

    재희는 눈빛의 의도를 파악한 후 작게 고개를 저었다.

    딱히 친구들을 데리고 가는 건 문제가 없었지만···.

    “대신 조건이 있어.”

    “조건?”

    “이번 주 일요일, 허튼 짓 안하고 공부만 하기로 약속한다면 데리고 가줄게.”

    “뭐? 하지만 카페는 어디까지나 점심을 먹으러 가는 거니까···.”

    “안 돼. 집에서 먹고 와.”

    “그, 그럼 마실 거 정도는···.”

    “집에서 물 싸와.”

    “···흐잉.”

    재희의 말은 단호했고,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것에 두 친구는 울상이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이미 정해진 것.

    둘은 일요일, 도서관에서 하루 일과를 보내기로 약속을 하고 나서야 재희에게서 티켓을 건네 받을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금요일.

    콜롬비아와의 친선전이 열리는 당일 아침,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재혁은 임종철 감독으로부터 도착해 있는 문자 메시지를 확인하고 웃었다.

    [오늘 선발이니까 컨디션 조절 확실히 해라.]

    첫 국가 대표 경기.

    상대는 콜롬비아.

    그리고 선발.

    이불을 털고 일어난 재혁은 해가 떠오르는 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경기에서 이기기 좋은 날이구나. 아주 좋은 날이야.”

    < 105. 좋은 날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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