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91화 (91/225)
  • < 91. 리그 선발 >

    “후우, 일단은 한 고비 넘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며칠 전까지 진행되었던 친선 경기들을 정리하던 임종철 감독은 길게 한숨을 토해내며 얼굴을 쓸어내렸다.

    1승 1무.

    어떻게든 최악은 면했다.

    러시아와 비겼고 모로코와의 경기에선 진땀승을 거둔 것이다.

    다만 결과보다 과정이 더 중요했던 경기들이었기에 머릿속으로 복기를 시작한 임종철 감독은 굳은 얼굴로 전술 기록지를 살폈고, 곧 또 한 번 한숨을 뱉으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눈에 보이는 성적은 나쁘지 않았지만, 고쳐지지 않고 있는 고질적인 문제점이 이번에도 여실히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는 해결사가 부족한 게 아니야. 해결사가 등장할 수 있는 무대를 못 만들고 있는 게 가장 큰 문제인 거야. 이러니 과연 팀에 해결사가 있는 지도 알 수가 없는 거지.”

    두 경기에서 총 3골을 성공시켰는데, 그 득점들은 모두 세트피스에서 이루어진 득점들 뿐이었고, 실질적인 찬스 메이킹 지표인 키 패스 성공 횟수의 평균이 5번이 채 되지 않은 것이다.

    그나마도 중원에서 박스 안으로 찔러주는 롱패스들이 대부분이었고,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플레이는 겨우 한두 번에 불과했으니.

    근본적으로 공격수들이 제대로 된 상황에서 공을 만져볼 기회가 거의 없었다는 소리였다.

    한동안 전술지를 멍하니 내려보던 임종철 감독은 곧 끄악, 비명을 내지르면서 눈에 보이는 서류들을 허공에 날려버렸고, 팔랑이며 떨어지는 서류들을 노려보다가 또 다시 숨을 토해낸 뒤 의자에 몸을 던지고 늘어졌다.

    “전술을 뜯어고쳐야 하나. 차라리 허리 싸움에서 한 발 빠지고 다시 4백으로 돌아가서 수비쪽 필드 지배력을 늘려 버려? 아냐. 그렇게 무턱대고 빠지면 오히려 팀 자체가 흔들릴 위험이 있어. 그럼 어떻게 해야 한다···.”

    후우.

    한숨이 절로 새어나오는 것에 종철은 담뱃갑을 손에 쥐고 자리에서 일어났고, 창가에 다가가 불을 붙였다.

    뻑뻑한 연기가 밤하늘을 배경으로 풀어지는 것을 멍하니 지켜보던 종철은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문제가 무엇인지 인지하고 있다는 점일까.

    그래도 아직 반 년이 넘는 시간이 남아 있었으니, 분명 무언가 수가 나오겠지.

    그러겠지···

    “그렇긴 개뿔! 에휴, 정말 답이 없구나. 답이 없어. 오늘은 그만 접자. 여기서 머리 빠지게 더 고민을 해봐야 해결 될 것도 아니고···.”

    꽁초까지 태워버린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끈 종철은 리모콘을 손에 쥐고 TV를 켰고, 빠르게 채널을 넘겼다. 그리고 시간을 확인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해 맥주를 한 캔 가지고 돌아왔다.

    때마침 기다렸던 중계가 시작되었고, 필드 위로 입장하는 선수들을 살펴보며 종철이 캔을 땄다.

    맨시티와 번리의 경기였다.

    맥주를 한 모금 삼키기 전, 예고했던 대로 재혁의 이름이 선발 명단에 올라가 있는 것을 확인한 종철은 쓰게 웃었다.

    아마 지금 자신처럼 재혁의 이름을 보고 미소 지은 사람들이 적지 않으리라.

    ‘국대 경기를 보면서 쌓인 고구마 좀 해결해달라는 댓글이 가장 많은 공감을 얻을 정도였으니. 아마 축구 팬이라면 오늘 경기를 모두 보고 있겠지.’

    차가운 캔맥주를 들고 한 모금 길게 삼킨 종철은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탄산에 살짝 미간을 찡그렸다가 이내 또 다시 미소를 떠올리면서 중얼거렸다.

    “오늘 경기에서 꼭 뛰길 바라는 마음에서 쉬게 한거다, 재혁아. 그러니까 꼭 모두에게 보여줘라. 내가 널 뽑아야만 하는 그 이유를 말이다.”

    삐이익!

    종철의 혼잣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심이 호각을 불었고,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이 공을 굴리면서 재혁의 첫 번째 리그 선발 경기가 시작됨을 알렸다.

    ***

    시즌 초반부터 번리의 기세가 무서웠다.

    일단 개막전에서 첼시를 잡은 것부터 시작해서 일명 빅4라 불리는 팀들을 상대로 어떻게든 승점을 확보하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그것도 전부 원정에서 치러진 경기들이었음에도 말이다.

    그 덕에 자신감을 얻은 선수들은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원정을 왔음에도 두려움이 없었고, 마치 홈 경기장에서 플레이하는 것 같은 경기력을 선보이며 전반 초반부터 분위기를 우세하게 이끌어갔다.

    그런 번리의 중심에 선 선수, 코크는 우측면을 따라 달리는 동료 선수 로튼의 움직임을 재빨리 캐치해 바로 패스를 찔러주며 소리쳤다.

    “모두 올라가!”

    뻐엉!

    좌측에 살짝 치우친 중원에서 우측 공간을 목표로 보내는 장거리 패스는 정확히 로튼의 발등에 내려앉았고, 로튼이 공을 트래핑 하는 것과 동시에 번리 선수들은 산개해 공간을 찾아 움직였다.

    그 모습을 보면서 번리의 션 다이크 감독이 미소를 떠올리더니 손을 모아 작게 박수를 쳤다.

    “좋아, 아주 좋아.”

    그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약팀의 축구를 오늘 선수들이 완벽하게 구사하고 있던 것이다.

    어떠한 수를 써서든 공은 최대한 밀어내듯 상대쪽 필드에 오래 머물게 하고, 기회가 온다면 측면을 이용한 플레이로 골문을 노린다.

    언뜻 본다면 계획 없이 무작정 공을 걷어내는 것처럼 보일 지도 모르지만, 이건 나름 그만의 철학이 담긴 축구였던 것이다.

    ‘우리는 첼시나 맨유, 다른 강팀들처럼 여유있게 빌드업을 꾸릴 시간이 없으니까. 가능한 공이 상대 골문에 가깝게 유지하는 축구를 해야 한다. 그래야···, 기회가 온다!’

    한창 생각을 이어가던 중 로튼이 크로스를 올리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고, 굵은 궤적을 그리며 패널티 박스 안쪽으로 공이 떨어지기 시작하면서 여러 선수들이 모여들었다.

    그 중에서 공을 머리에 맞출 수 있었던 것은 맨체스터 시티의 센터백 스톤스였고, 스톤스의 머리에 맞은 공은 한 차례 높게 붕 떠올랐다가 서서히 낙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떨어지는 공을 가만히 노려보던 다이크 감독의 입가에 또 한 번 미소가 떠올랐다.

    익숙한 장면이 눈앞에 펼쳐진 게 그 이유였다.

    번리의 미드필더, 스콧 아필드.

    그가 공이 떨어지는 위치를 정확히 포착하고 공이 잔디에 닿기 전, 논스톱 발리 슈팅을 때리기 위해 오른발을 크게 휘두르고 있었던 것이다.

    발등으로 공을 때리자 파앙, 짧은 타격음이 울렸고, 묵직한 슈팅이 맨시티의 골문을 노리고 날아들기 시작했다.

    에데르손을 대신해 골문을 지키고 있던 브라보는 크게 당황한 얼굴로 공의 궤적을 따라 뒤늦게 몸을 날렸으나 장갑은 손에 닿지 않았고, 브라보의 손을 피해간 공은···.

    터엉!

    “칫! 아깝군!”

    맨시티의 입장에선 다행히도 골대를 때리고 골라인 밖으로 나가버렸다.

    심판이 골킥을 선언하는 모습을 보면서 다이슨 감독은 아쉬움에 혀를 찼으나 크게 실망한 얼굴은 아니었다.

    분명 기회는 또 올테니까.

    다음 기회를 살려 득점에 성공한다면 오늘 경기에서도 승점을 챙겨가는 게 무리는 아니일 것이리라.

    다이슨 감독은 그런 생각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브라보가 골킥을 준비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옮겨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 중 한 명을 빤히 바라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런데 저건 전혀 예상 못 한 건데 말이지. 흐음, 뭐가 있는 건가?”

    이미 몇 차례 경기에 출장해 얼굴을 알린 적이 있는 어린 선수, 최재혁.

    하지만 설마 저 친구가 오늘 경기에서 선발로 뛸 줄은 전혀 몰랐다는 듯, 다이슨 감독은 턱을 괴고 고개를 갸웃였다.

    게다가 다른 자리도 아닌 수비형 미드필더라니.

    ‘페르난지뉴가 벤치에 앉아 있는 걸 보면 부상은 아닌데···. 부상의 정도가 경미한 거라 그런 건가? 뭐, 우리 입장에선 다행이지만.’

    오늘 경기를 준비하면서 다른 무엇보다 페르난지뉴의 존재 때문에 걱정이 많았던 다이슨 감독이었기에, 그를 대신해 나온 재혁을 꾸준히 살펴보며 흐뭇하게 웃었다.

    마치 짠 것처럼 자신에게 유리하게 작용하는 요소들이 마치 오늘 경기에서 꼭 승리하라는 신의 목소리처럼 느껴져 자연히 미소가 떠오르게 된 것이다.

    ‘중원 싸움 때문에 걱정이 많았는데, 이거라면 될 지도 모르겠어.’

    짧은 고민 이후 다이슨 감독은 마음을 정했는지 두손을 모아 선수들에게 큰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1번은 이제 됐다! 기회를 봐서 2번을 시도한다!”

    “1번이 아닌, 2번?”

    “벌써?”

    감독의 지시를 들은 선수들은 순간 당황스러워 했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고 고개를 끄덕였다.

    1번이 아닌 2번.

    그것은 다이슨 감독이 미리 정해놓은 지시였다.

    1번이 기존의 측면에 기반한 플레이를 유지하는 것이라면 2번은 상대와의 싸움을 피하지 않고 정면을 파고드는, 중앙 돌파형 전술이었던 것이다.

    보통 상대가 자신들이 펼치는 측면 플레이에 익숙해졌을 때 허점을 노리는 식으로 사용되었던 2번 전술을 벌써 꺼내든 것에 번리 선수들은 의아해 했지만, 그 이유가 바로 상대 중원에 있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현재 수비형 미드필더 위치에 있는 맨체스터 시티의 88번.

    저 꼬마를 공략하라는 의미였으리라.

    재혁과 직접적으로 충돌해왔던 번리의 공격형 미드필더, 아필드는 특유의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코크를 향해 말했다.

    “언제든지 놈이랑 싸움을 붙여줘. 몇 번 어깨를 걸어봤는데, 역시 아직 애야.”

    “그래도 방심하면 안 돼. 반응 속도라던가, 달리는 속도는 무시할 수 없으니까.”

    “괜찮아, 괜찮아. 일단 패스가 오면 녀석을 등지고 홀딩하다가 틈을 봐서 우드에게 찔러줄 거니까. 항상 그래왔잖아?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아필드의 답에 코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하게 공을 받고 등을 지는 포스트 플레이를 한다면 몸싸움을 토대로 공을 지켜낼 수 있을 테니. 지금 상황에서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지인 것이다.

    그렇게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지던 동안 브라보가 골킥을 짧게 찼고, 왼쪽 측면에 위치해 있던 델프를 통해 맨시티는 공격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델프에서 투레, 그리고 귄도간을 거쳐 제수스로 이어진 공은 순식간에 번리의 패널티 박스 안으로 향했으나, 골키퍼 포프가 몸을 날리는 펀칭으로 공격을 끊어내 수비에 성공했고, 떨어지는 공을 번리의 수비수들이 받아내면서 공수가 바뀌었다.

    그 뒤로 공은 천천히 굴러 코크의 발밑을 향했고, 센터 서클에서 상대 진영을 노려보던 코크의 눈에 여러 선수들이 움직이는 게 들어왔다.

    일단 양쪽 측면 플레이어인 브레디와 구드문드손은 넓게 벌어져서 언제든 뛸 준비를 하고 있었고, 최전방 공격수인 크리스 우드와 그의 뒤를 받쳐주는 아필드도 코크의 눈치를 살피면서 집중력을 끌어 올렸다.

    그런 동료들의 행동을 쭉 지켜보던 코크는 일단 같이 중원을 책임지고 있는 데푸르와 짧은 패스를 주고 받다가···.

    ‘지금!’

    투웅!

    투레와 귄도간 사이의 공간이 살짝 벌어지면서 열린 틈을 놓치지 않고 재빨리 패스를 밀어넣었고, 코크가 보내주는 패스를 눈에 담으면서 아필드는 몸에 바짝 힘을 주었다.

    ‘흐흐, 좋아. 패스는 정확해. 이제 이 공을 잡아서 우드에게 침투 패스만 찔러주면···!’

    “ ⁈”

    머릿속으로 어떤 식으로 플레이를 이어나갈지 생각하던 아필드의 안색이 순간 굳었다.

    도저히 믿기 힘든 일이 갑자기 벌어진 탓이었다.

    그리고 그건 번리의 감독 다이슨도 마찬가지였고, 아필드에게 직접 패스를 찔러 주었던 코크도 도저히 믿기 힘들다는 듯, 높은 목소리로 비명을 질렀다.

    “마, 말도 안 돼! 거기서 발이 나온다고? 아니 그전에···.”

    “아, 아필드가 밀려서 자리를 뺏겼어?! 분명 먼저 자리를 잡고 있었는데?”

    다이슨 감독의 말대로였다.

    아필드의 뒤에서 기묘하게 튀어나온 재혁의 발이 공을 아필드보다 먼저 건드리면서 자리 싸움이 벌어졌고, 그 싸움에서 재혁이 아필드를 이겨내고 공을 뺏는데 성공한 것이다.

    번리 선수들 중 어느 누구도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 예상하지 못했기에 크게 당황하며 허둥지둥 몸을 틀었으나, 이미 역습을 마음먹고 있던 재혁의 행동이 더 빨랐고, 순식간에 아필드에게서 멀어지고 커버링을 위해 달려드는 코크까지 가뿐하게 벗겨낸 재혁은···.

    토옹!

    가벼운 패스로 공을 전방으로 연결했다.

    재혁의 발을 떠난 공은 빠른 속도로 잔디를 훑으며 사네의 발에 달라 붙었고.

    “이걸로 일단 하나인가?”

    이어지는 플레이를 쭉 지켜보던 과르디올라 감독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떠올랐다.

    모든 게 예상대로, 아니. 그 이상이었다.

    과르디올라는 중앙에서 전방으로 공을 연결해준 뒤, 동료들을 지원해주기 위해 계속해서 발을 움직이다가 제수스가 깔끔한 슈팅으로 골망을 흔드는 것을 확인하고 기뻐하는 재혁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역시 2천만 파운드는 싸게 먹힌 거였어.”

    < 91. 리그 선발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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