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6. 눈에는 눈, 머리에는 머리 >
캐스터가 재혁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해설자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었다.
“오늘 과르디올라 감독이 선발로 출장할 11명의 선수들을 발표했을 때, 대부분의 반응이 어땠는지 제임스 캐스터는 기억하고 계십니까?”
“아, 예. 분명 전문 풀백이 아닌 최재혁 선수를 우측 풀백에 배치시켰다는 점을 많은 사람들이 의아했죠.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안일한 선발진이라는 이야기도 있었고요.”
“맞습니다. 현재 리그에서 선두를 달리고 있는 공격진을 상대하기에 최재혁 선수는 너무 어리고 약하다는 이야기가 많았죠. 틀린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게 시작이었던 겁니다.”
“시작이요?”
“대 바르셀로나 전을 위한 맞춤 전술의 시작 말이죠.”
“!”
바르셀로나를 상대하기 위한 맞춤 전술.
제임스 캐스터가 그게 무슨 의미냐는 듯, 놀란 얼굴로 해설자를 바라보자 해설자는 준비되어 있는 화면에 전자 마커를 대었다.
“일단 바르셀로나가 중원을 생략하게 만드는 것이 그 기본일 겁니다. 그래야면 꽁꽁 잠겨있는 바르셀로나의 후방이 열릴테니 말이죠.”
“후방이 열린다는 말씀은···, 바르셀로나의 중원이 제 역할을 소화하지 못한다는 말씀이겠죠?”
“그렇죠. 소유권은 넘겨주되, 상대가 공격하는 방향을 읽어낼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식으로든 대응하는게 가능할테니 말입니다. 그 증거로 맨체스터 시티의 3백은 평소보다 공간을 넓게 잡고 사용하고 있어요. 중앙에 한 차례 뭉쳤다가 산개하는 일반적인 3백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죠.”
“호오.”
과연 해설의 말대로 3백을 맡고 있는 선수들 사이의 거리가 평소보다 두어 걸음 정도 넓은 것을 확인할 수 있게 되자 캐스터가 감탄을 흘리며 입술을 모았고, 해설은 멈췄던 설명을 계속 했다.
“비록 위험할 뻔한 장면이 여럿 나오긴 했지만 상대가 바르셀로나라면 그정도 위험은 충분히 감수할만 했던 상황들이었죠. 적어도 중앙을 뚫리진 않았으니까요. 그 증거로 바르셀로나가 시도한 슈팅들 중 어느 것 하나도 골대 정면에서 시도된 게 없었어요.”
“대부분의 슈팅들이 측면에서 벌어진 각도, 혹은 크로스 이후 떨어지는 공을 발이나 머리에 맞춘 것들이었죠.”
“바로 그게 과르디올라 감독이 원했던 두 번째 장치였던 겁니다. 지속적으로 측면을 열어주어 공이 움직이는 길을 한정시킨 거죠.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빠르고 간결한 역습으로 득점을 노린다! 맞나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이루어졌죠. 모든게 과르디올라 감독이 예상했던 대로 말예요.”
해설자의 설명이 끝이 나자 캐스터는 또 한 번 입을 모아 두 감독이 벌이는 지략 대결에 감탄했다.
과연 오늘 경기가 어떻게 끝이 날지, 기대된다는 말을 함께 남기면서 말이다.
그건 해설자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의 기대는 캐스터와 달리 두 감독이 아닌 한 선수, 최재혁을 향해 있었다.
‘지략 대결도 분명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둘의 싸움에서의 핵심은 그게 아니지.’
언제 45분이 모두 흘렀는지, 경기장을 빠져나오고 있는 선수들 사이에서 흘러내린 땀을 훔쳐내고 있는 재혁을 눈동자에 또렷하게 담으면서 해설자는 침을 삼켰다.
언뜻 보기엔 전술과 전술이 맞붙는 것 같았으나, 사실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본다면 오늘 경기는 ‘사용하느냐’와 ‘막아내느냐’의 싸움이었던 것이다.
바로 맨체스터 시티의 88번, 최재혁을 말이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이 경기를 이기려면 남은 45분 동안에도 최재혁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어야 해. 하지만 발바스데 감독은 그 반대지. 어떻게든 저 88번이 마음대로 날뛰지 못하도록 묶어둘 수 있어야 이번 경기를 원하는 대로 풀어나갈 수 있게 될 거야.’
“재밌게 흘러가고 있군.”
“···?”
물을 삼키며 흘린 해설자의 혼잣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던 제임스 캐스터는 고개를 갸웃이다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멀어지는 해설자를 향해 알겠다는 말로 화답한 뒤 자리를 지켰다.
그렇게 모두가 각자의 자리에서 이어질 후반전을 기다리고 있을 때.
바르셀로나의 선수들이 모여 있는 라커룸에 전술판을 펼치고 서있는 발바스데 감독도 나름의 방법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면서 후반전을 준비하다가 숨을 길게 뱉었다.
‘과르디올라 감독이 원하는 바는 대강 알겠다. 하지만···.’
“감독님.”
“응?”
“아무래도 문제가 좀 생긴 것 같은데요.”
“문제라고···?”
곁에 다가온 코치가 전한 말에 발바스데 감독의 눈썹이 슬며시 꼬였고, 고개를 끄덕이며 검지를 뻗은 코치의 손끝에 닿아 있는 한 선수가 왼쪽 다리를 움켜잡고 있는 확인하곤 감독은 혀를 찼다.
전반전을 소화한 데울로페우의 상태가 썩 좋아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호출을 받아 선수의 상태를 확인하던 팀닥터는 감독에게 다가가 고개를 작게 가로저었다.
“후반전은 못 뛸 것 같네요. 피로골절인 것 같습니다.”
“피로골절이라고?”
“그나마 상태가 심각해지기 전에 발견해서 다행이긴 하지만···, 당분간 회복에 집중해야 되겠군요. 일단 교체를 한 후 정밀 검사를 위해 병원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허어···.”
갑작스런 상황에 감독은 안타까워했다.
아직 어린 선수였던 만큼 섬세한 관리가 필요했는데, 선수가 부상을 당할 때까지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있음에 책임을 느꼈던 것이다.
발바스데 감독은 연신 얼굴을 쓸어내리며 아쉬움을 표현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팀닥터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교체는 내가 지시할테니 바로 차량을 수배해서 병원으로 선수를 데리고 가주게. 부상이 확정된 선수를 더 오래 붙잡아두고 있을 순 없지.”
“알겠습니다.”
“그동안 난 데울과 이야기 좀 나눠야겠군.”
황급히 라커룸을 떠나는 팀닥터에게서 시선을 돌린 감독은 데울로페우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토닥였고, 데울로페우는 그런 감독의 얼굴을 마주보다가 뒷목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모처럼 선발이었는데···.”
“내게 미안해 할 게 아니지. 나야말로 미안하군. 상태가 좋지 않다는 걸 바로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관심이 부족했어. 이럴 줄 알았다면 늦더라도 선발에서 제외를 했어야···.”
“예? 아니에요. 분명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어요. 경기를 뛰기 전까진 말예요.”
“뭐?”
예상 밖의 말을 들은 탓에 발바스데 감독의 말꼬리가 높아졌고, 그런 감독을 향해 데울로페우가 계속 말했다.
“제가 상대하던 88번. 그녀석을 무리하게 쫓다가 이렇게 된 거예요. 처음 공을 놓고 경합을 벌였을 때 약간의 충격이 있었는데, 그때부터 발바닥에 피로가 축적되기 시작하더니 쉬지 않고 움직이는 놈을 잡으려다가 무리를 하는 바람에···.”
“쉬지 않고 계속 움직였다고···?”
“네. 45분동안 가만히 한 자리에 서있었던 시간은 아무리 길어봐야 3초도 되지 않았을 걸요?”
데울로페우의 말을 듣고 발바스데 감독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을 때, 팀닥터가 라커룸으로 돌아와 선수를 부축하며 자리에서 일으켰다.
데울로페우는 라커룸에서 벗어나기 전 동료들과 감독, 그리고 코치를 향해 고개를 꾸벅인 뒤 떠났고, 멍하니 그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고 있던 발바스데 감독은 정신을 차린 뒤 코치를 불렀다. 그리고 전반전동안 기록된 몇 가지 데이터를 찾아달라고 부탁한 뒤 전술판으로 향했다.
그렇게 일분 여가 흐르고, 타블렛 PC를 손에 쥐고 다가온 코치가 건네준 데이터를 확인한 발바스데 감독은 쓴웃음을 흘렸다.
자신은···, 아니. 오늘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은 ‘선입견’에 속은 것이다.
과르디올라 감독과 최재혁이 미리 설치해놓은 선입견에 말이다.
생각의 정리가 끝이 나자 발바스데 감독은 라커룸에 앉아 있는 선수들의 시선을 집중 시킨 후, 한 선수에게 교체로 투입될테니 뛸 준비를 하라는 말을 전했다. 그리고 다른 선수들과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후반전을 시작하기 전에 한 가지 당부하겠다.”
감독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꺼낸 것에 선수들은 모두 침을 삼키며 이어질 그의 말을 기다렸고, 발바스데 감독은 바짝 마른 입술을 열어 끊었던 말을 이었다.
“우리가 바르셀로나라는 사실을 잠시간 잊어라.”
“예? 감독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바르셀로나를 잊으라는 말씀은, 우리가 하는 축구를 잊으라는 말씀이신가요?”
“바로 그거지.”
몇몇 선수들이 불만을 토하는 것에 발바스데 감독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오늘 경기에서 이기기 위해서 우린 잊어야 한다. 잊지 못하면···, 100% 질테니까.”
***
하프 타임이 끝이 나자 사람들은 하나둘 자신의 자리를 찾아 이동했다.
관중들은 객석으로, 선수들은 필드 위로.
과르디올라 감독도 다른 이들처럼 벤치로 돌아온 뒤 손에 쥐고 있던 음료를 내려놓았고, 전과 달라진 상대팀 진영을 확인하고 흐음, 턱을 괴었다.
“아무래도···.”
“간파 당했네요.”
“응? 아직 안 올라갔어?”
“테이핑을 다시 해야 돼서요.”
과르디올라 감독의 물음에 재혁이 손에 쥐고 있던 스포츠 테잎을 슬쩍 들어올렸고, 길게 한 줄씩 뜯어 보호대 아랫부분에 감기 시작했다.
그런 재혁의 모습을 빤히 살펴보던 과르디올라 감독은 재차 턱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네가 상대하던 왼쪽 윙포워드가 나가면서 아무래도 알아차린 것 같다. ‘가짜 풀백’ 전술 말이다.”
“상대가 알아차릴 걸 예상하긴 했지만 예정보다 빨리 간파된 것 같죠?”
“그건 분명 데울로페우를 싣고 병원으로 향한 구급차 때문이겠지. 전반전이 끝날 때 즈음부턴 몸놀림이 심하게 나빠 보였어. 아마 피로골절이겠지. 전반전을 쉬지 않고 뛰던 너를 무리하게 쫓았으니까.”
쯧, 한 차례 혀를 찬 과르디올라 감독은 아쉬움을 숨기지 못했다.
이대로 후반전까지 끝까지 상대를 교란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 같았던 것이다.
하지만 당장 경기가 시작되기까지 1분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무언가를 급격하게 바꿀 순 없었으니. 과르디올라 감독은 일단 자리에 남아 있는 재혁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상대가 원하는 건 뻔해. 지금까지 당했던 걸 그대로 복수하려고 들겠지. 일단 그 시작은 네가 있는 우측면일거다.”
“하지만 그래서야 전반전과 다를 게 없잖아요? 중앙을 버리고 측면을 노린다는 건···.”
“아니. 전반전과 달라. 상대 윙포워드를 대신해 들어온 선수가 파울리뉴니까.”
“!”
“아마 발바스데 감독은 이런 말을 하려는 거겠지. ‘너희가 원하는 싸움을 한 번 정면에서 벌여 보자.’ 말야. 그런 것 같지 않나?”
슬쩍 재혁의 얼굴을 살피며 과르디올라가 물었고, 재혁은 그런 감독을 향해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뇨. 감독님 말씀이 맞아요. 제 생각도 그렇거든요.”
“알고 있다니 다행이군. 그러면 문제는 지금부터인데···. 상대가 원하는 대로 움직여주기엔 우리가 너무···.”
“하지만 말예요 감독님.”
턱을 괴고 다시 고민에 빠지려던 과르디올라 감독을 재혁이 깨웠고, 고개를 돌려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감독을 향해 재혁이 자신에 찬 얼굴로 계속해서 말했다.
“상대는 오히려 우리가 반응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지 않을까요?”
“뭐라고?”
“말씀대로 파울리뉴를 제가 있는 곳에 배치했다는 것 자체가 우리가 계획했던 ‘우측 중원 싸움’에 정면으로 맞서겠다는 의미잖아요? 그렇다면 상대는 저희가 피할 것이라 예상을 하고 있을 텐데···. 그런 상황에서 만약 오히려 우리가 정면에서 맞부딪치는 시도를 한다면 어떻게 될 것 같아요?”
“···!”
“이건 어디까지나 제 생각이었고, 결국 중요한 건 감독님의···.”
“재혁. 자신 있는 거겠지?”
말이 늘어지려는 재혁의 이름을 부른 과르디올라 감독은 반짝이는 눈동자로 시선을 맞추며 다시 한 번 물었다.
확신을 바라는 듯한 얼굴로 말이다.
그런 과르디올라 감독을 향해 재혁은···.
“물론이죠.”
그에 지지않을 정도로 밝은 미소를 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반전의 시작을 알리는 알림 소리와 함께 말이다.
< 86. 눈에는 눈, 머리에는 머리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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