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4. 늪 >
지금까지 케이트가 알고 있던 것과 많이 달랐던 것이다.
그녀가 기억하는 재혁은 항상 미드필더였으니까.
후방으로 내려가 빌드업을 도맡을 때도 있었고, 이따금 공격 상황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때도 있었지만 미드필더라는 특정성만큼은 항상 유지했던 재혁이었기에 케이트는 우측 풀백에 재혁이 이름을 올리자 많이 어색해 한 것이다.
그런 케이트를 향해 안토루는 짧게 웃어보인 다음 답했다.
“아직 어린 선수들을 피치 위에 올리기 위해 이따금 포지션을 바꾸기도 해. 아무래도 중앙 미드필더라고 하면 팀의 허리이고, 중추적인 역할을 하는 곳이니까. 유명한 선수들 중에서도 데뷔를 풀백으로 한 선수들이 꽤 있잖아?”
“그렇지만 지난 경기에선 분명 미드필더로 나왔었는데···.”
“뭐, 결국 선수란 감독이 원하는 곳에서 뛰어야 하는 거니까. 또 상황이 그때랑은 많이 다르기도 하고.”
상황이 다르다.
안토루의 한 마디에 케이트가 고개를 들었고, 안토루는 자신을 바라보는 동생을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상대가 바르셀로나야. 나도 기대했었지만, 일단은 출전하는 것 자체에 의미를 두는 게 좋지 않을까?”
“흐음···.”
“솔직히 나도 재혁이 이번 경기를 선발로 뛸 거라곤 생각 못 했거든.”
“뭐? 왜?”
“아무리 그래도 그렇잖아. 이제 막 합류한 10대 어린 선수를 바르셀로나를 상대로 선발로 뽑아 쓴다니. 평범한 10대 선수라면 아마 긴장으로 발이 굳어서 제대로 뛰지도 못 할 걸?”
“하지만 재혁이는···!”
“나도 알아.”
안토루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케이트가 양손을 움켜쥐고 버럭 목소리를 높이려던 것을 안토루가 씨익 웃으며 잘랐고, 그런 안토루를 멍하니 바라보게 된 케이트는 순간 꿀먹은 벙어리가 되어 두눈을 껌뻑였다.
말문이 막힌 동생을 살며시 내려본 뒤 시선을 TV로 옮긴 안토루가 웃는 얼굴로 말을 계속 했다.
”아마 재혁이니까 저곳에서 뛸 수 있는 거겠지. 긴장이라는 걸 도통 하는 걸 못 봤으니까.”
“···!”
“어린 게 대범한 건지, 아니면 신경이 무딘 건지. 같이 뛸 때도 그 점은 좀 부럽더라. 내가 그걸 반만 닮았다면···.”
“그게 아니야.”
“응?”
안토루의 이어지는 말을 중간에 툭 자른 케이트는 얼굴에 물음표를 띠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오빠를 향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재혁이도 긴장을 하긴 해. 그런데 우리랑 생각하는 게 다를 뿐이야.”
“생각하는게 다르다고?”
“응. 왜냐면 분명 이렇게 이야기 했었는 걸. ‘어떤 무대든, 시험이든, 결국 그게 내 가치를 정하고 바꾸는 게 아니다’라고.”
“가치를 바꾸는 게 아니다···? 그게 무슨 의미야?”
동생이 전한 재혁의 말 속에 담긴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 없었던 안토루가 재차 물었고, 그런 안토루를 향해 케이트는 밝은 목소리로 웃으며 답했다.
“마주하는 게 얼마나 큰 시험대이든, 결국 그 가치를 정하는 건 자기 자신이라는 소리야. 어떻게 본다면 겨우 한 번 지나칠 시험대인데. 거기에 무거운 의미를 부여해서 넘어서기 힘들게 만드는 것도, 가뿐한 마음으로 넘어서는 것도, 모두 자기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거지.”
“으음···.”
“그러니까 거기에서 이기든, 지든, 결국 그 가치를 정하는 건 본인이기 때문에 크게 긴장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었는데···, 이 말이 맞나? 하도 어려운 말을 해대서 기억이 잘···.”
“어렵긴 한데, 정말 그 녀석 같은 말이군.”
“그치? 헤헤. 나도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어. 아마 그래서였을까? 그때부터 걔가···. 아, 아무것도 아냐!”
“···?”
말을 하다가 갑자기 중간에 끊어버리고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목이 마르다며 물을 잔에 담으러 간 동생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안토루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시선을 옮겨 TV를 바라보았다.
그곳엔 그도 잘 알고 있는 선수가 때마침 입장을 하고 있었다.
맨체스터 시티의 88번.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전혀 긴장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당당하게 걸음을 걷고 있는 재혁이 말이다.
그래. 마치 그때처럼. 함께 A리그에서 뛰게 되었을 때처럼, 데뷔전임에도 아무런 떨림 없이 필드로 오르던 그때처럼 말이다.
분명 몇 달 전까진 같은 곳에 있었는데, 어느새 저녀석은 저곳에 있구나, 라는 자그마한 혼잣말을 입안에서 오물거리던 안토루는 이내 표정과 함께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러면서 재혁이 케이트에게 해주었다는 말을 다시 한 번 조용히 읊조렸다.
자신의 가치는 자신이 정한다.
어떤 무대를 통해 더 발전할 것을 기대하는 것도, 압박감이라는 벽에 막히는 것도, 결국 모두 본인에게 달렸다, 라는 재혁의 말을 말이다.
‘어린 녀석이 내 동생 앞에서 폼이나 재고 말야. 정말 나이같지 않다니까. 하지만 어쩌면 저 말은 나한테도 도움이 될 것 같군.’
바로 다음 주로 다가온 호주 리그 컵 대회 결승전.
최근 긴장 때문인지 밤에 잠을 이루기 힘들었는데, 어째선지 재혁의 말을 듣고 나서부턴 마음이 한층 편해진 것이다.
이대로 컨디션을 유지할 수 있다면, 그렇게만 된다면, 아마 나도···.
“오빠! 오빠도 마실 거 좀 줄까?”
“어, 응. 탄산수로 부탁해.”
“알겠어.”
동생의 목소리에 짧게 정신을 차린 안토루는 고개를 가볍게 털어낸 후 TV 화면을 빤히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짧게라도 결승전에 대한 부담감을 잊어 보려고 오늘 경기를 보려고 했던 것인데, 그걸 또 이런 식으로 연결시키다니.
다시 생각해도 바보 같았던 자신을 속으로 꾸짖은 안토루는 마음을 풀고 경기에 집중하기 위해 시선을 모았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얼굴을 굳혔다.
확실히 재혁의 말대로 어떠한 무대든 본인이 마음먹기에 달렸다지만.
‘이번 경기는 조금 다를 거다, 재혁. 네가 얼마큼의 가치로 이번 경기를 대하고 있는 지는 모르겠지만, 이따금 자신의 가치는 타인에 의해 정해지기도 하거든.’
다른 어떤 구단도 아닌 바르셀로나.
세계를 상대로 호령하는 최고의 구단들 중 하나를 상대로 무서운 활약을 펼친다면, 그땐 아마 ‘자신이 평가하는 가치’와는 또 다른 가치가 그를 평가하게 될테니까.
그렇게 탄산수를 준비해준 동생과 함께 소파에 앉아 경기가 시작되길 기다리던 중, 케이트가 한 마디를 흘렸다.
“아. 재혁이 긴장했나보다.”
“응? 그걸 어떻게 알아?”
뜻밖의 말에 안토루가 묻자, 케이트가 작게 웃으면서 답했다.
“눈을 감고 입술을 모아서 숨을 크게 쉬고 있잖아? 그때도 그랬거든. 나한테 번지르르 말은 잘하더니 마킹을 실수해서 문제를 틀렸을 때 말야. 뭐, 그래봐야 만점짜리가 97점이 된 거였지만
···.”
물잔을 양손으로 모으고 TV 속에서 호흡을 고르고 있는 재혁을 바라보면서 케이트는 재차 미소를 흘렸다.
“그래, 쟤도 사람이구나, 라고 느꼈던 순간이었어. 그러니까 나도 희망이 아주 없진 않겠더라고.”
***
“후욱!”
마지막으로 깊게 삼켰던 호흡을 토해낸 재혁이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제자리에서 몇 차례 뜀을 뛰었고, 곧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가벼운 충격이 무릎, 그리고 어깨까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면서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곧장 느껴지는 감각에 컨디션은 최상으로 나쁘지 않다는 걸 바로 느낄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컨디션과 별개로 머릿속에 차오른 생각에 재혁은 굳은 얼굴로 자신의 눈앞을 살폈고, 눈동자에 들어오는 인물들을 확인한 뒤 뺨을 붉혔다.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진짜 이니에스타랑 부스케츠다···!’
한 때 적수가 없다고 평가받던 팀의 허리를 맡았고, 지금도 유럽 최고의 선수들로 일컬어지는 두 선수, 이니에스타와 부스케츠를 필드 위에서 마주보고 있다는 상황에 자연히 얼굴이 붉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떠오른 아쉬움에 재혁은 얕은 숨을 뱉었고, 그런 재혁의 곁에 다가온 케빈이 슬쩍 어깨를 두른 후 물었다.
“무슨 일이야? 설마 긴장했어? 아, 미안. 네가 긴장을 했을 리···.”
“조금은요.”
“엉?”
“조금은 긴장 했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대답을 들은 탓에 케빈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재혁은 그런 케빈을 향해 씨익 웃더니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것도 금방 풀리더라고요. 제가 뛰어야 할 자리가 여기니까 말예요.”
검지로 자신의 발 아래를 가리킨 것이 무슨 의미인지 바로 파악한 케빈은 실소를 흘렸고, 재혁은 그런 케빈을 따라 웃었다.
두 사람은 서로의 미소가 무슨 의미인지 바로 파악했으나, 이내 굳은 얼굴로 대화를 계속 나눴다.
“그렇다고 실망했어?”
“처음엔요. 하지만 금방 풀렸어요. 이유가 있었으니까.”
이유라는 재혁의 답을 들은 케빈은 여전한 미소를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이유가 있었다.
오늘 경기에서 재혁이 풀백으로 출전하게 된 이유가 말이다.
곧 두 사람의 시선이 벤치로 향했고, 때마침 자신들을 향해 고개를 돌리던 과르디올라 감독과 눈이 마주쳤다.
감독은 서로 어깨를 걸치고 있는 둘을 향해 예의 미소와 함께 엄지 손가락을 들어올려 보였고, 과르디올라 감독의 손짓을 확인한 둘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저 행동의 의미를 바로 이해할 수 있었으니까.
그 뒤로 어깨를 푼 재혁과 케빈은 자리로 돌아가기 전, 서로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힘내자는 말을 주고 받았고, 멀어지는 케빈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재혁은 다시 한 번 숨을 토해낸 뒤 마음을 다잡았다.
우상이나 다름 없는 이들이 상대 팀에 자리하고 있었지만, 지고 싶은 마음은 티끌만큼도 없었으니까.
***
9만 9천여 석으로 이루어진 캄프누.
그만큼 압도적인 홈 팬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경기를 진행하는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이곳이 왜 원정 팀들의 지옥이라 불리는 지를 알려주기 위해 잔뜩 끌어 올린 경기력을 토대로 맨체스터 시티를 강하게 압박했다.
비록 네이마르가 갑작스레 빠졌지만 수아레즈와 메시는 여전히 세계 최고라는 타이틀을 놓고 다투는 공격수들이었고, 그들과 함께 라인을 맞추고 있는 데울로페우는 한창 꽃을 피우기 시작한 유망주로 만만치 않은 공격력을 선보일 수 있는 전력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세 사람의 뒤를 받쳐주고 있는 선수들이 이니에스타와 부스케츠, 그리고 라키티치였으니.
바르셀로나는 단단히 움켜쥔 공격권을 쉬이 내놓지 않고 끊임없이 맨시티의 빈틈을 노렸고, 그렇게 10여분간 일방적인 공격을 전개했다.
그런 팀의 압도적인 모습을 보면서 홈 팬들은 신이나 연신 목이 터져라 응원을 보냈지만···.
‘뭔가 이상해.’
정작 필드 위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하고 있는 바르셀로나의 선수들은 찜찜한 기분에 쉬이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상했다.
아무리 이곳이 캄프누라지만 지금 맨체스터 시티가 이정도로 밀릴 정도였던가?
그런 의문이 선수들의 머릿속에서 한 차례 떠오르니 도통 지워지질 않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현재 바르셀로나의 중원에서 공을 소유하고 있는 부스케츠도 마찬가지였다.
‘제수스를 원톱으로 내세우고 6명의 선수들을 중원에 투자한 것 치고 허리에서 주는 압박이 너무 약해. 아니···. 이건 약한 수준이 아니야.’
압박이 거의 없다.
그렇게 말할 정도였다.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은 그저 공이 가는 방향을 꺾을 정도로만 앞을 가로 막았고, 공이 멀어지면 다시 자리로 복귀해 공격을 기다렸다.
마치 형태를 잃었다가 다시 찾아가는 늪처럼 말이다.
‘···늪?’
늪이라는 생각을 떠올리자 부스케츠의 발이 순간적으로 멈췄고, 그의 발이 멈추자 동시에 바르셀로나의 공격도 멈추었다.
하지만 그의 머리는 쉬지 않고 회전했고, 곧 한 가지 사실을 상기해낸 부스케츠의 입가에 미소가 서서히 스며들기 시작했다.
그래, 늪이었다.
지금 맨체스터 시티가 원하는 필드의 상태가 말이다.
그리고 그 전술의 핵심에 있는 것이 바로 맨시티의 우측 풀백이자, 88번.
‘최재···, 혁.’
어색한 한국식 이름을 속으로 되뇌인 부스케츠는 멈췄던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고, 곧 그의 생각처럼 움직이기 시작한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에 맞서 공을 돌렸다.
먼저 이니에스타가 있는 좌측으로, 그리고 다시 돌아온 공을 라키티치가 있는 우측으로 꺾어주면서 말이다.
그렇게 양 측면을 한동안 흔들던 부스케츠는···.
‘지금이다···!’
다시 공이 자신에게 돌아온 그 순간, 공을 멈추지 않고 논스톱으로 강하게 찔렀다.
일반적인 패스가 아닌, 발등으로 깎아 보내듯 뿌려진 패스는 부스케츠의 발을 떠나기 무섭게 빠른 속도로 잔디 위를 훑기 시작했고, 곧 필드 한 구석에 박히듯 떨어졌다.
그 공이 떨어진 위치는 맨체스터 시티 3백의 커버 영역을 아슬아슬하게 벗어난 필드 오른쪽 구석으로 재혁이 마크하고 있어야 할 공간이었다.
다만 패스의 속도가 너무 빨라, 재혁이 미처 공을 쫓아 가기 전, 이미 공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그런 패스를 바르셀로나의 좌측 윙, 데울로페우가 재혁보다 먼저 소유해내면서 공격을 계속 이어갔다.
이대로 간다면 분명 맨체스터 시티의 입장에선 위험할 상황이었으나.
“···드디어 왔다.”
뒤늦게 데울로페우의 뒤를 쫓는 재혁의 입가엔 이상하게도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마치 이런 식으로 공격이 전개될 줄 알고 있었다는 듯이 말이다.
< 84. 늪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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