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2. 조용히, 천천히, 확실히 >
야심한 밤.
대부분의 사람들은 취침할 준비를 끝마치고 침대에 누워 있을 시간이었지만, 한 남성은 치킨을 앞에 두고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그가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잠들지 않고 있던 이유는 간단했다.
해외 축구를 그 누구보다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첼시 대 맨체스터 시티라는 빅 이벤트를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잠옷으로 사용하는 리버풀의 유니폼 위에 튀김 조각이 헤프게 떨어져 있었지만 남성은 털어낼 생각을 하지도 못한 채로 여전히 크게 뜬 두 눈을 껌뻑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세상에···. 저게 무슨 플레이야···?”
눈으로 확인하고도 도저히 믿기 힘들었다.
솔직히 전반에 맨체스터 시티가 2점을 앞서 나갈 때까지만 하더라도 남성은 그대로 첼시가 무너지는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아자르가 투입되면서 분위기가 급격히 첼시 쪽으로 기울었고, 순식간에 2점 차이를 극복해내면서 경기는 더욱 흥미진진하게 진행된 것이다.
과연 이 경기에서 승자가 누가 될 것인가, 라는 호기심을 품고 경기를 계속 지켜보던 남성은 또 한 차례 반전된 경기 양상을 확인하고 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맨체스터 시티의 88번, 최재혁.
과르디올라 감독이 포메이션에 변화를 주고 나자 마치 날개를 달아놓은 것처럼 활개를 치기 시작한 저 어린 선수는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 중원을 활발하게 뛰어다니며 다시금 첼시를 완벽하게 궁지로 몰아넣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은 동점에서 차이를 벌리는 추가골까지 성공시키고 말았다.
동료들의 축하를 받고 있는 한국인 선수를 바라보고 있던 남성은 침을 꿀꺽 삼킨 다음 고개를 황급히 털었다.
“아직 끝나려면 시간이 꽤 남았어. 벌써 기뻐하긴 이르다고.”
겨우 10분 사이에 첼시가 따라잡았고, 그 뒤 5분만에 다시 맨체스터 시티가 겨우 달아난 상황이다.
후반전이 끝나려면 여전히 30분이 남아있었으니, 남성의 말이 크게 틀리진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만큼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경기는 그의 생각과는 다르게 진행되고 말았다.
변화한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첼시가 힘을 전혀 쓰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었다.
단순히 1점이라고 생각했던 그 점수 차이는···.
[맨체스터 시티, 다시 한 번 측면을 이용하는 패스로 공간을 만들고 있습니다! 왼쪽의 실바, 공을 발에 붙이기 무섭게 속도를 내고 있고요! 실바 선수가 측면에서 드리블을 시작하자 이번엔 중앙에 있던 최재혁 선수가 공간을 찾아 움직입니다!]
[모지스를 상대로 간결한 터치를 선보이는 실바! 기회가 생기자 바로 중앙으로 패스! 공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최재혁 선수입니다! 첼시의 파브레가스가 황급히 최재혁 선수의 앞을 가로 막으려 달려오지만···!]
[최재혁 선수, 공을 멈추지 않고 간결한 원터치 2대1 패스로 파브레가스 선수를 손쉽게 따돌립니다! 이어서 앞을 가로 막는 것은 루이스 선수이나···!]
[최재혁, 함께 침투 중이던 케빈 데 브루위너 선수를 향해 침투 패스를 찔러줍니다! 깔끔한 스루 패스! 첼시, 위기에요!]
[케빈 선수의 논스톱 슛! 쿠르투아 골키퍼가 슈팅 코스를 읽고 몸을 날려봅니다만···, 구석으로 빨려들어가는 공을 막아내지 못 합니다! 4대2! 케빈 선수의 추가 골로 맨체스터 시티가 또 한 점 달아납니다!]
순식간에 2점으로 벌어졌고, 머지않아 또 한 골을 성공시키면서 맨체스터 시티는 잃을 뻔 했던 경기의 판도를 다시 한 번 완벽하게 뒤집는데 성공했다.
그 이후 이어진 후반 추가시간에 아자르가 어떻게든 한 점을 만회했지만 결국 팀의 패배를 막지 못하면서 경기는 5대3으로 종료.
홈 팬들은 참담한 기분을 숨기지 못했고, 원정을 함께 한 맨체스터 시티의 팬들은 목놓아 노래를 부르면서 승리의 감정을 만끽했다. 그리고 그 경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남성은···.
“미쳤네. 이걸 이렇게 이겨?”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연신 침을 삼키다가 닭다리를 들고 있던 손을 내렸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보기 시작했던 경기였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도저히 가벼운 마음으로 TV를 끌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중계가 모두 끝이 나고 한동안 CF로 이어지는 TV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던 남성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 앞에 앉았고, 마우스를 움직여 한 웹사이트를 찾았다.
오늘 같은 떡밥이 있을 때 항상 찾는 곳이었고, 과연 예상대로 국내에서 활동하는 해외 축구 팬들이 모이는 웹사이트는 단어 그대로 ‘폭발’하고 있었다.
[첼-시-침-몰!]
[와ㅋㅋㅋ 이걸 이렇게 이기네. 맨시티 선수들 런던에서 잠수탈 거라던 첼시 팬들 다 어디로 갔음? ㅋㅋㅋ 잠수를 타긴 탔네. 템스 강에 침몰한 첼시 선수들 뚝배기 깨려고 따라가려 잠수한 거 잖어. 으억ㅋㅋㅋ.]
[킹-맨-시. 우승 후보의 자격을 갖춘 팀답게 황족의 면모를 숨기지 않고 보여주면서 첼시 정도는 에피타이저로 가볍게 발라주네요. 역시 맨체스터는 시티입니다!]
[지금 첼시 까고 있는 애들. 두고 봐라. 디펜팅 챔피언의 근본이 뭔지 만나면 꼭 보여준다.]
[발려놓고 근본론ㅋㅋㅋ.]
[네 다음 5따리. 사실상 5백, 5실점, 그리고 현재 순위 5등이죠? 첼시는 우승 경쟁이 아니라 유로파 진출권부터 디펜딩 해야 겠죠? 오늘 새벽, 기분 좋게 마무리합니다 ^^. 모두 굳나잇.]
[하, 진짜 빡치네···. 아무리 그래도 우리 팀보다 순위 낮은 애들은 지금 글쓰지 마시길. 보고 있기 빡치니까요.]
[네 다음 5엄령ㅋㅋㅋㅋ.]
맨체스터 시티의 팬, 첼시의 팬, 그리고 다른 구단의 팬.
다양한 사람들이 뒤엉켜 글을 쓰고 있는 커뮤니티는 난장판이라는 단어로도 제대로 설명하기 힘들었다.
한 쪽 팬은 기쁨을, 다른 쪽은 슬픔을, 또 그 사이에 섞인 다른 구단 팬들은 떡밥이 식기 전에 실어 나르기 바쁜 모습을 지켜보던 남성은 실실 웃는 얼굴로 쏟아지는 게시글들을 구경하다가 천천히 키보드로 손을 올렸다.
지금 이 상황을 계속 지켜보는 것도 꽤 재밌을 것 같았지만, 그가 보고 싶은 장면은 따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심스레 자판을 두드린 뒤 글을 완성한 남성이 마우스 커서를 옮겨 게시 버튼을 눌렀다.
[근데 오늘 선수들 중에서 가장 쩔었던건 맨시티에서 뛰던 최재혁 아님? 경기를 그냥 자기 혼자 가지고 놀던데요ㅋㅋㅋ. 중앙에서 압박 풀리니까 미친놈처럼 패스 찌르고 다니던 거 보고 소름 돋아버렸잖아요 ㄷㄷ. 완전 축구력 터지는 날이었음.]
곧 로딩 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가 페이지가 넘어갔고, 글이 성공적으로 게시가 되자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남성은 서둘러 새로고침 버튼을 눌렀다.
현재 웹사이트에 접속 중인 유저들의 숫자가 최소 수백이었으니, 반응도 즉각적일 것이라 생각하며 눌렀던 것이고, 과연 그의 생각처럼 적지 않은 사람들이 댓글을 달아주며 남성의 글에 호응하기 시작했다.
[맞아요. 88번이 한국인 선수였죠? 맨시티 팬은 아닌데 솔직히 그 선수 때문에 응원함ㅋㅋ.]
[기술이 좋으니까 응원할 맛도 나더라고요. 후반 초반엔 콘테한테 전략적으로 먹히는 분위기였는데 그걸 또 역전하는게 정말 ㅎㄷㄷ···.]
[그건 과르디올라 감독하고 콘테 감독의 머리 싸움이었죠. 물론 감독들의 생각대로 제대로 경기해준 선수들도 무시할 순 없지만, 일단은 지략전이었음. 그치만 최재혁은 인정 ㅇㅇ.]
[이래도 맨체스터 시티 팬을 안 하십니까? 빛-재-혁. 한국 축구 희망의 등불이 되어줄 선수의 이름입니다. 다들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시켜두시길.]
[대-재-혁.]
[킹-짱-혁.]
[우-리-혁.]
[다음 경기 삽질하면 느그혁 할 놈들이···. 같은 컨셉 두 번 이상은 하지 마셈. ㅡㅡ. 노잼이니까.]
[위에 계신 분 혼자 진지하시네. ㅋㅋ. 혹시 첼시 팬?]
[하지만 최재혁 선수는 진짜 기대되지 않아요? ㅎㅎ. 우리 리버풀에 왔으면 솔직히 더 좋았을 거 같긴 한데···.]
[무슨 소리신지? 근본이 있다면 당연히 맨유로 와야죠. 황족의 근본. 다음 시즌 이적 기대해봅니다.]
[우리 아스날도···.]
[가능하다면 스페인으로 임대를···.]
글은 짧았으나 재혁이 경기장에서 보여주었던 모습이 너무도 인상적이었기에 댓글이 작성되는 속도도 빨랐고, 또 추천을 눌러주는 사람들의 숫자도 많았는지 해당 글은 순식간에 커뮤니티 메인 페이지에 올라가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되니 게시글로 유입되는 유저들의 숫자는 계속해서 불어났고, 곧 재혁에 관한 이야기로 게시판은 도배되기 시작했다.
사실 프로로서 이제 겨우 시즌을 시작한 어린 선수였고, 리그 경기에도 처음으로 출장한 선수였지만 사람들의 관심이 이처럼 뜨거운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지금 대표팀에···, 최재혁 선수가 합류하면 뭐가 달라질까요?]
[에이. 아무리 그래도 아직 너무 어리지 않아요? 이제 겨우 18살인데···.]
[백지성 선수가 처음으로 올림픽 대표에 뽑혔을 때가 19살이었는데요. 솔직히 무리는 아니죠.]
[아무리 그래도 올림픽을 목표로 하던 팀하고 지금 월드컵을 목표로 하고 있는 팀하곤 차이가 좀···.]
[전 그래도 찬성입니다. 떡잎이 다른 선수잖아요? 그럼 키워야죠.]
내년으로 다가온 월드컵.
바로 그 본선 무대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비록 실점은 많지 않았지만 경기력 부분에서 최악의 예선전을 치르면서 간신히 본선행을 확정 시킨 대표팀을 향한 축구 팬들의 걱정이 적지 않았기에 사람들은 새로운 바람인 재혁이 혹시 지금 분위기를 환기시켜줄 수 있는 신선함이 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숨기지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있던 만큼, 각기 다른 생각을 지니고 있는 사람들이 등장하면서 곧장 논쟁으로 이어졌다.
아직 어리다, 좀 더 성장하거나 경과를 지켜봐야 한다는 사람들이 반이었고, 일단 기회가 있을 때 실험해 봐야 한다는 사람들도 결코 적지 않았던 것이다.
양측 모두 일리가 있었기에 사람들은 팽팽하게 대립했고, 결국 한 가지 의견에 모두 동의하면서 논쟁을 일단락 지었다.
[아무리 그래도 일단 지켜봐야죠. 한 경기에서 활약했다고 바로 대표팀에 승선할 수는 없는 거잖아요? 이제 커리어를 시작한 선수이니, 다들 일단은 응원해주도록 합시다.]
적어도 재혁이 보여준 가능성에 대한 부분만큼은 모두가 인정하면서 앞으로 9개월간 보여줄 경기력을 한 번 지켜보자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한 차례 인터넷에 몰아쳤던 폭풍은 지나갔고, 마침내 10월. 완연한 가을이 찾아왔다.
그 말인즉.
부상으로 선수단을 이탈했던 선수, 다비드 실바가 드디어 훈련에 복귀한다는 의미였다.
오랜 만에 얼굴을 비춘 다비드 실바를 향해 다들 먼저 인사를 건네며 웃었다.
“재활은 어땠어?”
“나쁘지 않았어요. 하지만 역시 가만히 앉아 있는 게 가장 힘들더군요.”
동료들의 환대에 실바도 웃음을 숨기지 않으며 화답했고, 곧 잔디 위에 발을 올린 뒤 호흡을 골랐다.
역시 이 감각이다.
앞으로도, 아니. 평생토록 아마 이 감각을 잊으며 살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슬쩍 고개를 돌린 실바가 한 선수를 향해 시선을 옮기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제가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누군가가 뛰고 있는 모습을 보려니 조바심이 나더라고요.”
“···.”
“잠깐이었지만 ‘내’ 공백을 말끔하게 채워주더군. 그동안 고생했어.”
“그동안으로 끝날 게 아니라 ‘앞으로도’ 해야죠. 저도 계속 경기에서 뛰고 싶거든요.”
“뭐? 하하핫! 역시 이 꼬맹이는 나이같지 않다니까. 근데 이젠 건방지다고 말도 못 하겠어. 떠들 실력이 되잖아?”
그동안 멈췄던 경쟁이 다시 시작 됐다.
어린 재혁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에 실바는 헛웃음을 흘리다가 이내 표정을 굳혔다.
여태까진 그저 어린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지난 경기에서 보여준 퍼포먼스를 보고 난 이후 재혁을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이다.
그저 어린 선수에서 포지션을 두고 선의의 경쟁을 펼치게 된 선수로 말이다.
실바 외에도 많은 선수들이 첼시 전 이후, 재혁을 바라보는 시선을 고쳤고, 그런 선수단의 분위기를 바로 읽은 과르디올라 감독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뒤 수첩을 꺼냈다.
“이런 상태라면 준비하기 수월하겠군.”
앞으로 다가올 경기들의 일정이 빼곡하게 적혀 있는 수첩을 빤히 내려보던 과르디올라 감독은 붉은색 펜으로 큼지막하게 표시되어 있는 경기를 확인하면서 씨익 웃었다.
당장 다가올 리그 경기도 아니었고, 컵 대회도 아닌, 챔피언스 리그 예선전.
그것도 다른 팀도 아닌 바르셀로나라는 만만치 않은 상대의 이름이 적혀 있는 일정을 확인하면서 과르디올라 감독은 작은 목소리로 한 마디를 읊조리고 훈련장에 합류했다.
“이번엔 확실히 이길 수 있겠어.”
빅 네임들이 넘실거릴 경기.
과르디올라 감독은 그 경기를 위해 준비할 선수들 중 가장 먼저 재혁의 이름을 수첩에 적었다.
< 82. 조용히, 천천히, 확실히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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