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78화 (78/225)

< 78. 느껴지는 감각 >

“그 부분은 자만이야. 우승 경쟁팀을 상대로 5대0이라니. 플레이에 자신을 잃지 않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그게 넘치는 건 모든 선수들이 항상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라고.”

재혁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목소리를 낸 것은 주장인 콤파니였다.

평소 과묵하고 필요한 순간이 아니면 자주 입을 열지 않는 콤파니였지만, 리그 우승을 위한 첫 번째 길목인 첼시와의 경기를 꽤나 신경을 쓰고 있었는지, 그는 선수들의 눈동자가 자신에게 모이자 다시 한 번 또렷한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열정은 악의가 아니지만, 방심은 프로 선수로서 부끄러워야 할 일이야. 방심으로 인해 이겨야 할 경기를 놓치게 된다면 결국 우리 모두와 경기를 지켜보는 팬들을 실망시키는 일이니까. 그 부분을 절대 잊지 마.”

콤파니의 말에 귀를 기울였던 다른 선수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답했고, 시간을 확인한 콤파니는 경기 전 라커룸 미팅을 준비하기에 앞서 해결해야 할 일이 있으면 지금 미리 처리하고 오라는 말을 남기고 슬그머니 자리를 떠났다.

콤파니가 사라지자 다른 선수들도 하나둘 이동했고, 재혁도 그런 선수들 사이에 섞여 라커룸으로 향했다.

그렇게 몇 발자국을 걸었을 때, 재혁의 어깨를 툭 건드리고 등장한 케빈이 씨익 웃으면서 한쪽 팔을 재혁의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주장이 뭐라고 했다고 너무 기죽지마. 사실 누구보다 긴장하고 있고, 또 누구보다 너에 대해 기대하고 있어서 그런 거니까.”

“긴장이랑 기대요?”

“지난 시즌 첼시한테 더블을 당하고 우승 경쟁에서 멀어졌잖아. 똑같은 상황을 반복할 수 없다고 저렇게 이를 갈고 계신 거지. 물론 나도 그렇고. 오늘 경기는 복수전이야, 복수전.”

케빈의 설명을 듣자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지난 시즌 첼시는 리그 타이틀 경쟁에서 다른 어느 팀보다 앞서나가고 있었던 게 사실이었지만, 유리한 고지를 점하게 된 시점은 4월,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2대1 승리를 취한 바로 그때부터였으니까 말이다.

당시 4위에 위치해 있던 맨체스터 시티는 첼시전에서의 패배로 경쟁에서 크게 멀어졌고, 첼시는 트로피에 한 발 더 가까워지면서 결국 우승 타이틀을 확정짓는데 성공했던 것이다.

게다가 일반적인 패배도 아닌 홈과 원정에서 모두 패배하는 더블.

콤파니에게 있어서 그 더블은 잊고 싶지만 절대 잊을 수 없는 기억이리라.

케빈의 설명에 재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와 함께 발을 맞춰 걷다가 뒤늦게 떠오른 것을 연이어 물었다.

“그런데 저에 대해 기대하고 있다고요?”

“뭐야, 못 느끼고 있었어?”

“느끼다니요? 뭘요?”

“네가 학교 끝나고 훈련장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패스를 주던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고 있었냐고.”

“가장 먼저 패스를 주던 사람···? 아!”

“이제 기억 났어?”

재혁이 탄성을 흘리자 케빈은 웃었고, 재혁은 콤파니가 사라진 방향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아무래도 아직 학생인지라, 1군 훈련에는 간헐적으로 참여를 해왔는데, 이따금 오후 훈련 일정에 맞춰 필드에 도착하면 콤파니는 누구보다 먼저 자신을 향해 공을 차주면서 몸을 풀라고 했던 것이다.

그제야 콤파니가 자신을 꽤나 신경써주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재혁이 쑥스러웠는지 머리를 긁적였고, 그런 재혁의 얼굴을 슬쩍 살핀 케빈은 머리를 헝클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주장이 뭐라고 했다고 삐지지마. 다 어린 친구 잘 되라고 하는 말들이었으니까.”

“하하하···.”

어린 친구라.

하긴 커리어를 놓고 본다면 자신은 콤파니의 10분의 1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으로 겨우 걸음마를 시작한 단계였으니.

게다가 요즘은 과거의 기억도 거의 떠올리지 않고 지내고 있던 탓에 케빈의 말에 별다른 위화감을 느낄 수 없었던 재혁은 케빈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말씀인지, 잘 알겠어요. 하지만 한 가지는 역시 포기하기 힘들겠네요.”

“한 가지···?”

자신에 찬 목소리로 답을 하는 재혁을 향해 케빈이 말꼬리를 올렸고, 재혁은 그런 케빈을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다섯 골을 만들겠다는 건 절대 자만이 아니었어요. 상대보다 많은 골을 넣어야 이기는 거잖아요? 그 다섯 골은 절대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는 제 나름의 표현이었다고요.”

“!”

이따금 자기 생각을 강하게 표현할 때면 눈을 빛내는 재혁.

그런 재혁을 옆에서 바라보던 케빈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생각해보면 저만한 자신이 있기 때문이 지금 이곳에서 뛸 수 있는 거겠지.’

케빈이 본 재혁은 ‘단순히 운이 좋아’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었다.

실력을 믿고 공을 맡길 수 있는 동료이며, 발전을 위해 경쟁하는 라이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어린게 너무 까불어. 가끔은 네 나이를 생각해서 말 좀 하면 안되냐? 고딩이면 좀 고딩답게 귀여워 보라고.”

“축구장 위에선 선수일 뿐이라면서요. 갑자기 고딩 타령이라니···.”

“그러니까 그런 점들이 귀엽지 않다는 거야. 하아, 내 아들은 꼭 너랑 달리 애교가 많았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아, 사진 보여줄까? 며칠 전에 찍은 사진이 있는데···.”

“그거 이미 며칠 전에도 보여주셨잖아요.”

복도를 따라 걷기 시작하기 무섭게 가족 자랑을 늘어놓는 케빈을 옆에 두고 재혁은 실소를 흘리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러고 보니 케빈은 축구를 하는 이유 중 가족이 가장 큰 부부을 차지하고 있다고 했지.’

잠재력을 터트리고 세계 정상급 플레이어로 성장하게 된 원동력.

그 이유가 항상 관중석에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부인과 어린 아들이라는 말을 습관처럼 떠드는 케빈을 보면서 재혁은 잠시간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나도···.

‘나를 지켜보는 누군가가 생긴다면···. 아, 무슨 생각이냐. 가족은 이미 있잖아. 재희랑 할머니. 그래, 난 두 사람이 있으니까 힘을 내는 거야.’

표정을 고치고 입술을 꾹 다문 재혁이 두 눈동자를 빛냈다.

이미 지켜야 할 것이 있는 만큼, 이번 경기에서도 최선을 다하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게 라커룸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은 재혁이 수분으로 입술을 축인 후 호흡을 고르며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다섯 골이다.”

절대 지지 않겠다는 다짐을 반복하면서.

***

경기 전, 라커룸에서 마지막으로 미팅을 가졌던 선수들이 하나둘 필드 위로 모습을 다시 드러내기 시작했고, 그런 선수들을 향해 관중들은 뜨거운 박수로 환호를 보냈다.

경기가 치러지는 장소가 런던의 스탬포드 브릿지였던 만큼, 첼시 선수들을 향한 환호가 특히 대단했는데, 환호를 받으며 필드 위로 등장하는 동료들을 벤치에 앉아서 지켜봐야 했던 아자르는 턱을 긁적이며 뚱한 얼굴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런 아자르의 곁으로 콘테 감독이 슬그머니 다가와 물었다.

“컨디션은 어때?”

“선발로 뛰어도 좋을 정도에요. 물론 제 의지랑은 상관 없는 일이긴 하지만요.”

이번 경기를 벤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불만을 숨기지 않고 또렷하게 나타내는 목소리였다.

콘테 감독은 그런 아자르를 이해할 수 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단호하게 답했다.

“아직도 시즌이 끝나려면 멀었어. 단순히 한 경기를 뛰는 게 목표가 아니잖아?”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이렇게 조용히 자리에 앉아 있는 거죠.”

“조용히 앉아 있는 것 치고는 눈빛이 꽤 무섭군.”

“벤치에 앉아 있어야 하는 저를 달래주려고 오신 게 아니던가요?”

대화가 이어질수록 퉁명스러워지는 아자르의 말투에도 콘테 감독은 크게 개의치 않았는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사실 그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재활 훈련을 지독하게 소화하면서 다른 누구보다 스트레스가 크게 쌓였을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니고 선수 본인일테니 말이다.

다만 그는 감독이다.

선수의 감정에 휘둘리는 게 아닌, 그의 감정을 조정해주어야 하는 입장인 것이다.

물론 실패한 예시가 있긴 하지만 말이다.

콘테 감독은 아자르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했다.

“첼시의 10번은 너다.”

“···.”

“많은 것이 바뀌어도 몇 가지는 절대 바뀌지 않는다는 소리지. 선수들이 자네를 바라보는 시선이 바로 그것들 중 하나야. 그건 두텁게 쌓인 신뢰와 믿음으로 이루어진 거거든. 쉽게 바뀔 종류의 것이 아니지. 그리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말이 이어지던 중, 슬쩍 고개를 든 아자르와 눈을 마주친 콘테가 미소가 담긴 얼굴로 그를 마주보며 말했다.

“상황이 위태롭다면 바로 투입하게 될거다. 그러니까 혹시 모를 그 순간을 대비해 마음을 단단히 먹고 있으라고.”

“···.”

“하지만 몸 상태가 좋지 않다면 굳이 무리해서 뛸 이유는 없으니까···.”

“위태로운 상황이라는 조건의 기준이 뭐죠?”

콘테 감독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질문을 던진 아자르.

그런 젊은 선수의 목소리를 들은 콘테 감독은 오른손을 들어 슬쩍 손가락 두 개를 펼쳐보였다.

“2점. 우리가 2점을 빼앗기게 된다면 바로 그 순간이 위태로운 상황이다.”

“2점···.”

조그마한 목소리로 콘테가 남긴 말을 되뇌였던 아자르는 곧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고, 콘테 감독도 만족스러운 얼굴로 다시 한 번 그의 어깨를 토닥인 뒤 자리에서 벗어났다.

혼자 남게 된 아자르는 한동안 말없이 필드 위를 노려보다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벤치에서 시작하는 건 언제 경험해도 참 적응하기 힘들다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그렇게 마침내 경기가 시작됐다.

***

이번 경기에서도 콘테 감독이 들고온 전술은 3-4-3.

다만 풀백들의 위치에 따라 언제든지 자유롭게 4백, 혹은 5백으로 변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특징으로 삼고 있는 3-4-3이었다.

활동력이 좋은 알론소와 모지스를 선발로 뽑아 양 측면에 배치한 것부터가 콘테 감독이 무엇을 의도하고 있는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었다.

수비시엔 최대 5백을, 공격시엔 최대 5톱을.

폭 넓게 경기장을 운영하면서 필요한 순간에 수적인 우위를 차지하여 상대를 압박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전술이었던 것이다.

그에 반해 과르디올라 감독이 꺼낸 카드는 이번에도 4백을 기반으로 한 4-1-4-1.

원정 경기인 만큼, 홈팀인 첼시와 달리 뒷라인을 단단하게 지킨 후, 안정적인 빌드업을 토대로 경기를 운영하려는 목적인 듯한 구성이었다.

다만 플레이에 창의성을 더해줄 선수인 다비드 실바가 부상으로 결장한 탓에 공격 상황에서 과연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보다 의심이 더 차오르는 구성이었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두 팀의 라인업을 토대로 분석한 호사가들의 이야기었을 뿐.

‘폭을 넓게 가져가는 3-4-3인가.’

첼시를 직접 상대하고 있는 재혁의 눈동자가 빛을 품고 번득였다.

과르디올라가 배치한 두 명의 공격형 미드필더들 중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만큼, 다른 누구보다 첼시가 구성한 진영을 가장 깊숙한 곳에서 지켜볼 수 있었던 재혁은 침착한 얼굴로 눈동자를 반짝였다.

대략 10분 정도의 시간동안 특별히 무언가를 하려고 하기 보단 상대팀을 분석하는데 시간을 더 투자했는데, 과연···.

‘감독님의 말씀대로군.’

입가에 자연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특별히 웃어보려고 한다던가, 혹은 감정을 숨기기 위해 떠올린 미소가 아니었다.

정말 순수한 의미가 담긴 미소였던 것이다.

이유는 간단했다.

‘공간이···, 보인다.’

첼시를 어떤 식으로 공략해야 할지, 그 시나리오를 머릿속으로 또렷하게 그려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같은 순간.

‘···웃어?’

벤치에 앉아서 재혁의 미소를 확인한 아자르의 눈썹이 살며시 꼬였다.

지금 이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니.

어린 선수라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설마 저렇게 겁을 상실한 녀석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어이가 없었던 아자르는 예의 뚱한 표정으로 재혁을 계속 노려보고 있다가.

“···?!”

자신의 발밑에 공이 오기 무섭게 갑작스레 원터치로 스루 패스를 찔러버리는 재혁의 모습을 확인하고 놀라 두눈을 크게 떴다.

“뭐, 뭐야? 저 겁을 상실한 패스는?!”

< 78. 느껴지는 감각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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