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76화 (76/225)
  • < 76. 부수다 >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도, 경기를 뛰고 있는 사람들도, 그리고···.

    ‘정말 공이 왔어?!’

    재혁의 패스를 받게 된 카일 워커까지도 모두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지금 재혁의 주위에 포진하고 있는 상대 선수들의 숫자만 따져도 다섯이 훌쩍 넘었고, 아군 선수들까지 포함한다면 그 수는 거의 여덞에 가까웠던 것이다.

    그렇게 겹겹이 쌓인 선수들 사이에서 자신이 우측의 공간을 찾아 달리고 있음을 포착하고 바로 공을 찔러주다니.

    ‘방금까지 주고 받던 단순한 짧은 패스들은 공간을 찾지 못해서 주고 받던 게 아니었단 말인가?’

    허공에 떠오른 공이 자신의 발에 닿을 때.

    워커의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들이 떠올라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지만 딱 한 가지만큼은 끝까지 그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

    재혁이 보내준 패스가 그의 머릿속에 심어준 ‘그림.’

    공이 발에 닿는 순간 눈앞에 펼쳐진 장면에 카일은 부릅 뜬 눈으로 침을 삼켰고.

    뻐엉!

    트래핑과 동시에 곧장 흐름에 맞춰 행동을 취했다.

    코너 플래그에 가까운 우측면에서 패널티 박스 안쪽을 향해 낮고 빠른 크로스를 재빨리 올려준 것이다.

    높지 않았던 크로스를 향해 셀틱 수비수들의 몸을 날렸으나 정말 공 하나 차이로 그들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간 공은 골키퍼의 장갑까지 피해 아래로 뚝 떨어지면서···.

    “흐읍!”

    파앙!

    케빈 데 브루위너의 발등에 걸리면서 발리 슈팅으로 이어졌다.

    붉게 상기된 얼굴로 호흡을 멈추고 정확히 왼발등으로 강하게 공을 때린 케빈은 슈팅과 동시에 균형을 잃고 바닥을 굴렀고, 그가 반 바퀴를 구른 후 다시 몸을 일으켰을 때 공이 골망을 찢을 듯 틀어박힌 것을 확인한 다음 환희에 찬 함성을 목청껏 내질렀다.

    1대0.

    마침내 맨체스터 시티가 그렇게 고대하던 선취점을 터트린 것이다.

    선수들을 포함해 팬들의 목청이 커진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으워어어!”

    “캬, 마무리 좋았는데?”

    “진즉에 그런 식으로 슈팅을 시도해보지 그랬어?”

    답답한 상황이 이어지다가 드디어 터진 첫 골을 동료들이 축하해주기 위해 케빈에게 달려들었고, 케빈은 그런 동료들의 손길을 뿌리치며 얼마 되지 않는 원정팬들이 모여 앉아 있는 관중석 앞에서 양손을 크게 흔들었다.

    크게 기뻐하고 있는 케빈처럼 원정을 함께 하고 있는 팬들도 기쁜 목소리로 그를 향해 소리를 내지르며 화답했는데, 그런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을 보면서 중계석에 앉아 있는 두 사람도 잔뜩 흥분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골이 터질듯, 말듯,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는 상황이 연속되다가 마침내 첫 골을 터트린 맨체스터 시티! 선취골의 주인공은 쉬지 않고 경기장을 누비던 케빈 선수입니다!”

    “기가 막힌 슈팅이었어요. 떨어지는 공을 놓치지 않고 정확하게 때리는 모습이 정말 인상적이었죠. 그 전에 있었던 카일 워커 선수의 크로스도 훌륭했고 말이죠. 하지만 역시 카일 워커 선수에게 공을 연결해준 최재혁 선수의 패스를 언급하지 않을 수가 없겠죠.”

    해설자의 말에 캐스터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대화를 이었다.

    “측면을 노리고 소리없이 침투 중이던 카일 워커 선수를 향해 정확한 패스를 연결해주었죠? 과연 거기서 워커 선수에게 패스를 연결해줄지, 누가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예상한 선수들은 없었지만 최재혁 선수 본인은 처음부터 예측하고 있었죠. 그가 찔러준 공이 마지막에 골망으로 향할 것이라는 것을 말예요.”

    “최재혁 선수는 예측하고 있었을 거라고요?”

    “예.”

    되묻는 박상철 캐스터를 향해 얼른 대답한 최장수 해설.

    그는 아직까지도 흥분이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설명을 계속 했다.

    “그러기 위한 짧은 패스들이었고, 그러기 위한 침투 패스였으니까 말이죠.”

    “그러고 보니 최장수 해설께선 방금 최재혁 선수의 행동이 빌드업이라고 표현하셨었죠? 어떤 부분을 보고 그런 생각을 하셨던 겁니까?”

    “반복적인 패스를 주고 받으면서 최재혁 선수가 위태롭다고 느낀 분들이 많았을 겁니다. 실제로 패스의 축이 되었던 최재혁 선수를 중심으로 셀틱의 선수들이 하나둘 모여들었으니까요. 하지만 그 점을 최재혁 선수가 의도했던 겁니다. 상대팀 선수들이 공이 있는 장소에 모였다면 분명 ‘어딘가’는 열려있다는 소리였으니 말이죠.”

    “어딘가는 열려있다···. 아, 그렇다면 최재혁 선수는 처음부터···?”

    “맞습니다.”

    캐스터의 추리에 미소로 화답한 해설자가 목을 가다듬으면서 말했다.

    “자신에게 이목이 쏠린 틈을 노려 동료가 침투할 공간을 만들고, 공간이 열릴 곳을 향해 패스를 찔러준 거죠.”

    “설마 그런 식으로···.”

    “···공간을 창출하는 게 가능하다고? 겨우 18살짜리가?”

    할말을 잃었는지 넋을 놓아버린 브렌던 감독이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뒤 얼굴을 쓸어내렸다.

    제대로 한 방 얻어 맞았다.

    아니, 이건 한 방을 얻어 맞은 수준이 아니었다.

    ‘모든 게 엉망이 되어 버렸다.’

    브렌던 감독은 멍하니 재혁을 바라보고 있다가 두눈을 질끈 감고 짜증스럽게 머리를 벅벅 긁으면서 생각을 계속 했다.

    다비드 실바가 부상으로 결장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비록 경기는 끌려갈지언정 적어도 결과에선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어쩌면 운 좋게 한 골이 얻어 걸려 승점 3점을 챙길 것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착오가 있었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처음부터 오늘 경기를 준비할 때 다비드 실바는 빼놓고 준비하고 있었던 거였어.”

    88번, 최재혁.

    실바를 대신해 맨체스터 시티의 중원을 조율하고 있는 어린 선수.

    하지만 단순히 어린 선수라고 평가할 수 없는, 필드 위에서 선수들을 이용해 그림을 그릴 줄 아는 미드필더였고, 상황이 예상과 다르게 흐르자 브렌던 감독은 마음을 바꿀 수밖에 없었다.

    “브라운, 은참!”

    중앙 미드필더로 뛰고 있는 두 선수의 이름을 부른 브렌던 감독은 두 사람을 향해 바쁜 손짓을 섞어 소리쳤다.

    “라인을 올린다! 패스의 축을 끌어 올려!”

    지금까지 계속 뒤에만 머물러 있던 라인을 위로 한 층 끌어올린다.

    더 이상 후방에서 수비에만 치중하는 것만으로는 경기에 변화를 줄 수 없다는 판단에서 내린 결정이었고, 그런 감독의 결정에 두 선수들은 곧장 고개를 끄덕인 후 진영을 정비했다.

    어차피 한 점을 뺏긴 이상, 비기려면 그 한 점을 도로 되찾아와야 했으니까.

    셀틱의 다른 선수들도 그런 감독의 결정을 이해하고 두눈을 열의로 불태우며 얼굴을 굳혔다.

    반드시 빼앗긴 한 점을 만회하겠다는 의지가 가득 깃든 눈빛을 번득이며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드디어 올렸다.’

    상대 진영의 변화를 바로 파악한 재혁이 손등으로 뺨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아내고 씨익 웃었다.

    이대로 경기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면 계속 뒤에만 머물고 있을 수는 없었겠지.

    감독의 선택을 이해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전반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조급해졌군.’

    문제는 필드 위에는 감독이 아닌 11명의 선수들이 그를 대신해 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11명의 선수들 중 몇몇은 감독이 원하는 바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경기를 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걸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선수가 있다면?

    공을 돌리면서 틈을 노려 공격을 시도하려는 셀틱 선수들의 움직임을 천천히 살펴보던 재혁의 눈에 한 선수의 행동이 특히 눈에 띄었다.

    셀틱의 왼쪽 측면을 담당하고 있는 포레스트였다.

    브라운과 은참이 라인을 올리자 그에 맞춰 꽤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포레스트는 언제든 공을 받으면 몸을 틀어 드리블을 시도하려는 듯한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재혁은 계속해서 포레스트를 주의 깊게 살폈고, 마침내 셀틱의 공이 포레스트의 발밑으로 향할 때 재혁도 행동을 취했다.

    “!”

    포레스트가 자신의 바로 앞으로 바짝 다가온 재혁을 앞에 두고서 순간 표정을 굳혔다.

    일단 침착하게 공을 트래핑한 후, 정면과 측면을 살핀 포레스트가 눈썹을 모았다.

    ‘굳이 나를 막겠다고 중원에서 이곳까지 왔다고? 아니 그 전에···, 혼자 움직이는 건가?’

    앞을 가로 막고 선 재혁.

    그런 재혁의 뒷쪽 공간에 다른 선수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말 그대로 크게 열려 있어, 재혁을 뚫기만 한다면 어디로든 공격을 진행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무리 측면으로 수비를 하기 위해 왔다고 해도 쉬이 이해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다른 의미로는 재혁만 뚫어낸다면 여러 선택지가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으니.

    ‘그렇다면 내 입장에선 굳이 너를 피할 이유가 없지!’

    득과 실의 계산을 끝내고 공을 앞으로 살며시 밀면서 전진하기 시작한 포레스트가 이를 물었다.

    반드시 놈을 뚫어내고 얼른 만회골을 기록하고 말 것이다. 그리고 본선 진출이라는 꺼져가는 희망을 다시 빛나게 하리라.

    그런 생각을 품고 공격적으로 드리블을 시도했던 것인데···.

    ‘걸렸다.’

    포레스트의 드리블을 확인하기 무섭게 재혁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고, 포레스트가 드리블로 돌파를 하려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브라운이 비명을 내질렀다.

    “거기서 거기로 가면 안 돼!”

    11명의 선수들이 감독 한 명의 생각에 따라 움직인다.

    그렇기 때문에 변수가 생기는 것이다.

    모두가 같은 생각을 하면서 움직일 수가 없었으니 말이다.

    브렌던 감독이 라인을 끌어 올리긴 했지만 기본적으로 텐백이라는 수비적인 성향을 완전히 버린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선수비 후역습이라는 방식을 제외한다면 셀틱의 입장에서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효과적인 공격을 시도할 틈이 생길리 만무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라인을 올렸던 것은 운신할 공간을 조금 더 넓게 가져가고, 혹시 공세를 취하게 될 시 보다 많은 선택을 미리 고를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서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선택지라는 것은 드리블이 아닌 패스를 통해 만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는다면···.

    투웅!

    ‘좋아! 뚫었···, 헙?!’

    재혁의 왼쪽을 뚫고 돌파한 직후, 라인을 따라 달리면서 전방을 살피던 포레스트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재혁을 뚫어내는 것까진 좋았으나, 이후 라인을 따라 쭉 이동하면서 알아차린 한 가지 사실 때문에 표정을 풀 수 없었던 것이다.

    ‘패스를 줄 곳이 없다···?’

    단어 그대로, 고립됐다.

    재혁을 지나친 뒤 앞으로 계속해서 전진하며 드리블로 이동을 했지만 공을 연결해줄 수 있는 다른 선수가 그의 눈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다.

    그렇다고 공을 뒤로 돌릴 수도 없었다.

    이미 그의 뒤에는 방향을 바꾸고 압박해 들어오고 있는 재혁이 자리하고 있었으니까.

    뚫어냈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제보니 뚫은 게 아니었다.

    상대는 처음부터 뚫려줄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뒤늦게 모든 상황을 파악한 포레스트가 당황한 듯이 공을 가지고 연신 몸을 비틀었지만 상황은 나아지질 않았다.

    앞으로 나아가지도, 뒤로 빠질 수도 없었으니까.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 포레스트를 보면서 브라운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게 안된다니까!’

    속으로 비명을 지르면서 포레스트를 향해 달리기 시작한 브라운.

    지금 위치에서 포레스트를 도와줄 수 있는 선수는 그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기에 달리기 시작했던 것인데···.

    그 또한 셀틱을 위기 상황으로 몰아넣게 되는 자충수가 되리라고는 브라운도 예상하지 못 하고 있었다.

    “···왔다.”

    브라운이 포레스트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재혁은 보다 강하게 어깨를 밀어 넣으면서 압박을 넣었고, 발끝으로 공을 건드리면서 포레스트의 발밑에 놓여 있던 공이 바깥으로 튕겨나가게 만드는데 성공했다.

    포레스트가 놀랐는지 황급히 멀어져가는 공을 향해 다리를 움직였지만, 그보다 먼저 자리를 취하고 있던 페르난지뉴가 공을 향해 발을 뻗으면서 셀틱 소유에 있던 공을 뺏는데 성공했다.

    그 직후, 방금까지 수비 일변도에 맞춰 행동해던 재혁이 달리기 시작했다.

    다른 선수들이 반응하기 전에 누구보다 먼저 달리기 시작한 재혁이 노리던 공간은 센터 서클 안쪽에 위치한 중앙, 방금까지 브라운이 위치를 지키고 있던 장소였다.

    페르난지뉴는 그런 재혁을 향해 바로 공을 찔러주었고···.

    ‘다, 당했다···!’

    포레스트를 도와주려다가 재혁을 놓쳐버린 브라운의 안색이 창백하게 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공세를 취하기 위해 라인을 무리하게 끌어 올렸는데 한 순간의 실수로 상대방에게 본인들이 지켜야 할 후방을 빼앗겨 버리고 말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후방을 빼앗겼다는 의미는···.

    “자아. 그럼.”

    페르난지뉴의 패스를 이어 받은 재혁의 입가에 또 한 번 미소가 떠올랐다.

    “어디를 찔러볼까?”

    그의 눈앞에 펼쳐진 수십 개의 패스 줄기.

    어떠한 것을 골라도 상대에겐 치명적일 수밖에 없는 패스 줄기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입가에 자연스레 미소가 떠오른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줄기.

    재혁은 최전방에서 쉬지 않고 자신의 앞에 공간을 만들기 위해 뛰고 있는 선수가 있는 장소를 찾았고, 센터백들 사이로 침투해 들어가는 제수스의 발앞에 정확하게 떨어지는 패스를 찔러주었다.

    오프사이드 트랩을 완벽히 부수고 골키퍼와 1:1 상황을 만드는데 성공한 제수스의 슈팅이 골키퍼를 피해 골망을 가르는 것은 당연히 정해진 수순이었고, 전반전이 끝나기 직전에 추가골이 터진 것을 확인하면서 과르디올라 감독이 주먹을 불끈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건 이겼군.”

    셀틱 원정, 승리 확정이었다.

    < 76. 부수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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