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74화 (74/225)

< 74. 대체품 >

다양한 국가들이 모여있는 만큼 유럽에는 다양한 팀들이 있다.

인종에 맞춰 모인 팀들, 종교에 따라 유지되는 팀들, 혹은 자금, 또는 문화라는 공통점을 토대로 뭉친 팀들도 있었다.

그만큼 각 팀마다 선수들의 실력은 어떨지 몰라도 색깔만큼은 또렷한 팀들이 많았는데, 상대적으로 실력이 모자란다고 한들, 그렇다고 해당 팀을 절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하나의 구심점을 토대로 모인 그들이 이따금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이변의 주인공이 되기 때문이었다.

한때 영국 클럽 최초의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이자, 유럽 최초의 트레블 달성을 성공한 팀이라는 역사를 지니고 있는 브렌던 로저스 감독이 이끄는 스코틀랜드의 셀틱도 그런 종류의 팀들 중 하나였다.

자국에선 레인저스 FC와 2강 체제를 굳건하게 구축한 안방 호랑이라는 인식이 강하지만, 세계라는 무대를 놓고 비교하기엔 조금은 모자란, 하지만 어느 강호를 상대로 도깨비처럼 활약할 수 있는, 그런 종류의 팀 말이다.

물론 당사자들의 생각은 조금 다를 수 있겠지만 말이다.

“망할.”

브렌던 감독의 입에서 쓴소리가 흘러나왔다.

얼마나 헤집었는지 너덜너덜한 종이 서류들을 또 한 번 눈으로 읽어보던 브렌던 감독은 이내 이마를 벅벅 긁더니 재차 쓴소리를 토해낸 뒤 냉수를 찾았다.

곧 차가운 물이 식도를 타고 내려가면서 열을 어느 정도 식혀주었지만, 하루종일 집무실에 머물면서 쌓인 피로까지는 완벽하게 풀어주지 못했다.

오늘 그가 이렇게까지 열을 내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바로 내일이 챔피언스 리그 조별 예선이 있는 날이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상대는 영국의 맨체스터 시티.

짜증과 함께 치미는 편두통이 지끈거려 관자놀이를 꾹 짚을 수밖에 없었다.

남들은 편하게 도깨비라 부르지만, 도깨비가 되기 위한 준비 과정은 어느 누구도 쉬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답답한 마음에 한숨을 푹 내쉰 브렌던 감독은 손에 쥐고 있던 컵을 내려놓으면서 또 한 차례 생각에 잠겼다.

‘바르셀로나와 치른 경기를 비기기만 했어도 조금은 마음이 편했을 텐데.’

짧은 시간 동안 지난 주에 있었던 경기를 회상해보던 브렌던 감독은 바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7대0으로 끝난 경기를 비기길 바라다니.

차라리 지금 그가 다시 리버풀로 돌아가는 것이 더 현실성 있으리라.

그렇게 다시 내일 있을 경기를 준비하기 위해 서류들을 뒤적이기 시작한 브렌던 감독은 갑자기 걸려온 전화에 눈썹을 찌푸렸다.

코치에게서 온 전화였다.

분명 방해하지 말라고 말을 해두었거늘.

브렌던 감독은 한 차례 걸려온 전화를 그대로 무시하고 다시 업무에 집중하려고 했는데 휴대폰은 그 뒤로도 계속 울렸고, 결국 혀를 차면서 짜증스러운 목소리로 감독이 휴대폰을 붙잡고 물었다.

“무슨 일이야?

[감독님! 기쁜 소식입니다!]

“기쁜 소식?”

코치의 말에 잠시간 미간 주변을 긁적이던 감독은 시계를 살핀 뒤 다시 물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인줄 알고 있겠지? 게다가 내가 방해하지 말라고까지 말을 미리 해뒀는데, 대체 얼마나 기쁜 소식이길래 꼭 그렇게 전화를···.”

[다비드 실바가 부상으로 결장할 예정이랍니다!]

“뭐? 다비드 실바가 부상으로 결장한다고?!”

감독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코치가 소리쳤고, 감독은 자신의 귀를 의심하면서 코치에게 되물었다.

“그거 확실한 거겠지?”

[심각한 부상은 아니지만 앞으로 1주에서 2주간 결장이 불가피 할 것 같다는군요!]

“다비드 실바가 결장한다라···.”

코치가 전해준 말을 곱씹으면서 생각에 잠겼던 브렌던 감독의 눈동자가 순간 이채를 뗬다.

이제 30세를 넘어 몇 해가 지나면 축구선수로서 황혼기에 접어들 다비드 실바였지만, 그의 실력은 시간이 흐를수록 오히려 더욱 강한 빛을 뿜었다. 다른 곳도 아닌 별들의 모임인 맨체스터 시티에서 다른 누구보다 밝은 빛을 말이다.

그런 선수가 부상으로 경기를 결장할 예정이라니.

다른 무엇보다 실바를 어떤 식으로 막아야 할지 고민에 빠져 있었던 감독은 희망이란 빛이 떠오른 것에 크게 기뻐했다.

‘이건 기회다.’

선수의 부상 소식은 안타까웠지만 기쁨을 숨길 수 없었던 브렌던 감독의 입술이 자연히 초승달을 그렸고, 허둥지둥 손을 뻗어 책상 위에 흩뿌렸던 종이들 중 몇 장을 찾아 손에 쥐었다.

빠른 속도로 맨체스터 시티의 로스터를 확인하던 브렌던 감독이 어깨에 끼워둔 휴대폰을 향해 소리쳤다.

“공식 문서로 확인한 게 맞나?”

[아마 오늘 늦은 시간 중이면 오피셜이 뜰겁니다. 게다가 공항으로 향한 선수들 중 다비드 실바가 없었다는 팬들의 정보도 있었고요. 이정도면 99%정도 확실한 겁니다.]

“좋아, 좋아···.”

계속해서 맨체스터 시티의 스쿼드를 확인해보던 브렌던 감독이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였다.

다른 누구도 아닌 다비드 실바가 결장한다면···.

‘맨체스터 시티가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그리 많지 않지.’

기껏해야 이번 시즌에 영입한 선수들을 통해 그의 공백을 메우려 할 것이다.

하지만 아직 조직력이 완성되지 않은 만큼, 분명 파고들 틈이 존재하리라.

‘자 그러면 누가 선발로 나올 것인가, 그걸 예측하는 것이 중요하겠는데···.’

검지로 종이를 쭉 훑어 내려가던 브렌던 감독의 눈에 여러 선수들의 이름이 담겼다가 사라졌다.

만약 자신이 과르디올라 감독이라면 어떤 식으로 대응할 것인가?

팀의 핵이 이탈한 상황에서 그런 선수를 대체할만한 선수를···.

그렇게 쭉 내려가던 그의 손이 한 선수의 이름 위에서 멈췄다.

매우 낯선 동양인의 이름이었지만···.

“어딘가 익숙한데. 어디서 봤더라···, 아!”

[감독님? 무슨 일입니까?]

“아니, 아냐. 그냥···.”

자신을 향해 긴장한 목소리로 물은 코치에게 감독은 씨익 웃으면서 간단히 답했다.

“길을 찾은 것 같아서 말이지.”

[···?]

감독이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바로 이해하지 못한 코치가 고개를 갸웃였고, 그런 코치에게 나중에 연락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감독은 통화를 끝냈다.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집무실에 앉아 준비를 하던 브렌던 감독은 다음 날 경기장에서 발표된 맨체스터 시티의 선발진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나왔군.”

그의 예상대로 재혁의 이름이 실바를 대신해 11명의 선수들 사이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

경기에 앞서 몸을 풀고 있는 재혁을 가만히 살펴보던 브렌던 감독은 벤치에 앉으면서 씨익 웃었다.

“이걸로 일단 반은 먹고 들어갈 수 있겠어.”

아마 오늘 경기는 바르셀로나에게 당한 것처럼 쉬이 경기를 내줄 것 같지 않았다.

***

‘여기가 셀틱 파크.’

경기장 위에 올라 몸을 풀기 위해 가볍게 조깅을 뛰던 재혁이 침을 삼켰다.

6만 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경기장의 크기 때문에 한 번, 그리고 쉼없이 노래를 부르고 있는 관중들의 열기에 또 한 번 놀란 재혁은 비로소 유럽이라는 곳의 크기를 실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재혁의 곁에 다가온 같은 팀의 선수, 케빈이 슬쩍 재혁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물었다.

“혹시 긴장 돼?”

“설마요.”

어쩌다보니 다른 선수들보다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던 케빈의 말에 재혁은 가뿐하게 어깨를 으쓱인 다음 답을 계속 했다.

“긴장이 된다거나 머리가 복잡한 걸로 따지면 엊그제 본 수학 시험이 더 힘들었어요. 하마터면 몇 문제를 틀릴 뻔 했거든요.”

“몇 문제를 틀릴 뻔 했다고? 그게 그렇게 큰일이야?”

“만점을 받을 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는데. 그걸 틀렸으면 99점이 되는 거니까요. 오히려 쉬운 문제를 푸는 게 더 긴장된다는 거죠. 혹시라도 틀리면 내가 손해니까.”

“흐음. 어째 자기 자랑 같지만 일단 넘어가고. 그러니까 결론은 축구가 수학보다는 더 어렵다는 말이로군.”

“당연하죠. 축구에는 공식이 없으니까요.”

“!”

케빈의 말에 고개를 바로 끄덕인 재혁이 밝은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고, 그의 말을 들은 케빈은 짐짓 놀랐으나 가벼운 미소로 표정을 숨긴 채로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그렇지. 축구엔 정해진 공식이 없지. 그래서 매 순간 풀이와 답이 다른 거고 말야. 하지만 한 가지는 똑바로 알고 있어야 돼.”

“뭘요?”

“공식은 없지만 풀이라는 방식은 있다는 거. 다비드 실바가 빠진 오늘, 우리 팀의 방식은 바로 너라는 사실을 잊지 마.”

검지와 중지를 쭉 뻗어 재혁의 상의 유니폼 가슴께에 자수된 맨체스터 시티의 문양을 찌르면서 케빈이 말을 전했고, 케빈이 전한 말과 가슴을 찌른 행동이 담고 있는 의미를 잠시간 머릿속에 떠올려보던 재혁은 그를 향해 무겁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런 재혁을 마주보면서 케빈이 웃었다.

‘이정도면 되겠지.’

긴장을 안하는 것이 장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이 친구는 나이에 비해 너무 성숙한게 문제였다.

귀여운 맛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고등학생이라고는 믿기 힘든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는데. 그런 재혁의 모습에 케빈은 끌리기도 했지만, 이따금 걱정이 들기도 했던 것이다.

예상치 못한 상황은 마음이 해이해진 상태에서 벌어지니까.

그리고 그런 상황이 일어난다면 어린 선수들은 자신을 되찾는데 더욱 오랜 시간이 걸렸고, 그런 상태가 이어진다면 좋지 않은 결과까지 이어질 수 있었다.

그런 점들을 고려해 케빈은 조금이나마 재혁에게 경각심을 일깨워주려고 했던 것인데···.

“흐음, 방식이라.”

케빈을 앞에 두고 턱을 슥 쓸어낸 재혁이 곧 씨익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다른 선수들은 숫자가 되겠군요.”

“숫자?”

“제가 원하는 풀이 방식대로 끼워 넣어 답을 찾아 갈 때 사용하는 숫자 말예요. 손에 펜을 쥔 게 저라는 사실이 약간 부담이 되긴 하지만, 썩 기분 나쁜 부담감은 아니네요. 오히려 재밌겠어요. 제 가치가 조금이라도 더 빛날 수 있을 테니 말예요.”

“···!”

뒤늦게 재혁의 말을 이해한 케빈의 얼굴에 느낌표가 떠올랐다.

부담감, 혹은 조금이라도 긴장을 했으면 하는 바람에서 했던 말을 듣고 오히려 자기 식대로 해석하고 즐기는 모습이라니.

아직까지도 동그랗게 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케빈을 향해 재혁은 ‘그러면 오늘 경기 잘 부탁드릴게요, 17번씨’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떠났고, 멀어지는 재혁을 멍하니 바라보던 케빈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역시 쟤도 정상은 아니야. 인생을 다 살아본 것도 아니고, 무슨 10대 꼬맹이가 여유가 저리 넘쳐?”

나이에 걸맞지 않은 재혁의 언행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던 케빈은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생각을 머릿속에 담더니 몸을 풀기 위해 공을 차기 시작한 재혁을 살펴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쩌면 단순히 실바의 ‘대체품’이 아닐지도···.”

지금까지 누구도 넘보지 못 할 정도로 굳건했던 실바의 자리.

어쩌면 그 자리에 균열이 일어날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케빈도 모여있는 선수들 사이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코치의 지도에 맞춰 몸을 움직이는 선수들 사이에 섞인 재혁도 서서히 얼굴을 굳히면서 눈을 빛냈다.

‘팀의 입장에선 어떨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기회다.’

실바가 부상을 당해 생겨난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게 된 상황인 만큼, 팀에게 있어서 현재 상황은 위기일 수 있겠지만, 재혁에게는 오히려 위기 상황이 찾아왔기에 얻을 수 있는 기회였던 것이다.

그 점을 유의하면서 이번 기회를 절대로 허투루 보낼 수 없다며 입술을 곱씹던 재혁은 이후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운동장에 올랐다.

양팀의 11명의 선수들이 악수를 교환하고 진영에 맞춰 선 상황.

주심의 휘슬에 맞춰 맨체스터 시티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고, 자신의 발밑으로 굴러온 공을 가볍게 건드리면서 앞으로 나아가던 재혁이 눈앞에 바짝 다가온 상대를 확인하고 공을 멈춘 다음 상대 진영을 확인한 뒤 눈썹을 모았다.

‘더블 볼란치를 기반으로 한 텐백인가?’

최전방 공격수가 수비수들의 뒷공간을 노리는게 아닌, 자신의 앞을 막아서며 1선 수비수가 되어 공을 빼앗으려 하는 상황에 재혁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흘렸다.

< 74. 대체품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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