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72화 (72/225)
  • < 72. 숨지 않는다 >

    “···경기장에서 내가 숨어 있었다고?”

    재혁의 짧은 한 마디를 들은 수용이 굳은 얼굴로 되물었고, 재혁은 그런 수용을 향해 간단히 고개를 끄덕인 뒤 말을 이었다.

    “제가 알던 김수용 선수랑은 많이 다르더라고요. 플레이부터 시작해서 전체적인 모습들이 말예요. 그게 마치 숨으려는 것 같았어요.”

    “···.”

    “물론 그게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그게 나쁜 게 아니면?”

    “···?”

    재혁의 말을 중간에 자르고 냉랭한 목소리로 답을 한 수용의 눈빛을 바로 읽은 재혁의 입술이 순간 굳었고, 입술이 움직임을 멈춘 재혁에게 수용이 계속 물었다.

    “그게 나쁜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면 대체 무슨 의미라는 거지? 경기장에서 내가 제대로 된 플레이를 보여주고 있지 못하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데 말야. 대체 어떤 의미에서 그게 나쁘다는 의미가 아닌 거냐?”

    “그러니까···.”

    재혁이 재차 의미를 설명하려고 했으나, 수용은 그런 재혁을 향해 손을 거칠게 내저은 뒤 자리를 벗어나면서 몇 마디를 더 던지고 잔뜩 찌푸린 얼굴로 먼저 복도를 빠져나갔다.

    “말도 안 되는 말로 변명을 하려는 거라면 그만둬라. 나도 애를 앞에 두고 이게 뭐하는 건지. 망할. 오늘 일은 어린 선수가 실언을 했는 정도로 생각할테니, 앞으로 어디선 입 조심하도록 해. 생각나는 걸 그대로 입밖으로 내놓는다고 그게 다 말이 되는 게 아니라고.”

    “···.”

    “어리다고 그게 언제까지고 방패가 되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야. 어렸을 때의 천재는 이 세상에 수 없이 많으니까..”

    터벅, 터벅.

    말을 끝내고 자리를 벗어나는 수용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재혁은 살짝 말린 얼굴로 머리를 긁적였다.

    ‘정말 나쁜 의미로 한 말이 아닌데.’

    아무래도 말에 오해가 쌓인 듯 했다.

    한 때 재혁은 경기에 나설 수 없는 입장이었던 지라 주로 선수들의 영상을 보며 공부를 해왔고, 그런 영상들 중에선 수용의 경기 영상도 포함 되어 있었는데. 그때 수용이 보여주던 모습과 지금의 모습이 다르다는 점에서 설명을 하려던 것이 묘한 어조로 오해가 쌓일 법하게 그에게 전달된 것이다.

    좀 더 그 의미를 풀어서 말하자면 과거 돋보이는 플레이로 팀을 주도하던 선수에서 상황에 맞춰서 자신을 경기 흐름에 여유를 맡길 수 있는 선수가 되었다는 뜻이었는데.

    물론 그게 한 때의 특징적인 모습이 조금 옅어졌다는 의미는 되겠지만···.

    “흐음.”

    잠시간 턱을 괴고 생각에 잠겼던 재혁이 뺨을 긁적였다.

    다시 생각해보니 자기가 생각하기에도 오해가 쌓일 법한 말투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지금와서 사과를 하기엔 늦었고···.

    ‘또 잘못 말했다간 장난을 친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

    슬쩍 고개를 들어 수용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던 재혁은 아쉬운 얼굴로 입술을 할짝인 뒤 자리를 떠났다.

    다음에 만난다면 그땐 꼭 오해를 풀 수 있기를 희망하면서 말이다.

    ‘아. 아직 후반전이 남았지.’

    뒤늦게 아직 수용과 필드에서 만나야 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재혁은 또 한 번 머리를 긁적이다가 이내 어깨를 으쓱이고 몸을 움직였다.

    ***

    ‘내가 숨는다고?’

    라커룸으로 돌아온 수용이 잔뜩 찌푸려진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재혁에게 들은 짧은 한 마디가 그의 가슴을 깊게 찌르고 간 것이다.

    그게 어떤 의미로 한 말인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그 한 마디로 인해 자신이 흔들렸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이었다.

    그렇게 수건으로 얼굴을 쓸어낸 수용이 옆에 내려놓았던 물병을 입에 물고 몇 모금 삼키다가 누군가 옆에 다가온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

    현 스완지 시티의 감독, 클레멘트가 그의 앞에 멈춰서 있었다.

    클레멘트 감독은 수용을 향해 생긋 웃어 보인 뒤 차분한 얼굴로 입술을 뗐다.

    “확실히 몸상태는 나쁘지 않은 것 같군. 무릎은 어떤가?”

    “멀쩡합니다. 후반전도 모두 소화할 수 있습니다.”

    “하하, 설마 내가 후반전에 자네를 뺄 것 같았나? 아직 겨우 한 점 차야. 수를 물리기엔 너무 이르지. 아니면 어디서 무슨 소리라도 들은 건가?”

    홈에서 치르는 경기인 만큼, 경기력이 떨어지는 선수들을 향한 홈팬들의 원망 섞인 목소리들이 관중석에서 터져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클레멘트 감독은 혹시 수용이 그런 소리를 듣고 풀이 죽은 것으로 생각하고 농담을 섞어 대꾸한 것이다.

    감독의 말을 들은 수용은 잠시 얼굴을 붉혔으나 이내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으며 답했다.

    “아뇨. 그런 의미로 한 말이 아니라···.”

    “그럼 무슨 의미로 한 말인가?”

    “···!”

    “하하. 농담이야, 농담. 아무튼 후반전엔 기대하겠네. 복귀전을 화려하게 끝낼 필요는 없지만, 자기 자신은 찾아야지.”

    그 뒤로 수용의 어깨를 토닥이고 다른 선수에게 향하는 클레멘트 감독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수용이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지긋이 감독을 바라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시즌을 준비하던 중 부상을 당했던 그에게 클레멘트 감독이 습관처럼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던 것이다.

    ‘내 자신을 찾으라···.’

    이번 시즌의 구상에 자신이 포함되어 있음을 반복적으로 전해주던 클레멘트 감독.

    처음에는 그저 자신을 달래기 위한 말인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으나···.

    ‘어쩌면···.’

    짝짝!

    “자, 그럼 후반전엔 확실히 달라진 모습으로 경기에 나서는 거다! 아직 겨우 1점차야. 상대가 맨체스터 시티라고는 하지만 아직 새파랗게 젊은 놈들에게 지고 싶은 선수는 이 자리에 없겠지? 마지막까지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예!”

    “좋아, 나가자!”

    상념에 잠기려던 수용을 깨운 감독의 박수 소리와 선수들의 우렁찬 대답에 맞춰 수용도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고, 이동했던 복도를 따라 걸어 필드로 향했다.

    잔디를 밟기 전, 밟은 빛을 등지고 있던 한 남자가 선수들을 한 사람, 한 사람 마주하며 손을 마주쳤고, 수용을 향해서도 손을 쭉 뻗으며 말했다.

    오늘 경기에서 뛰지 않는 스완지 시티의 주장, 리언 브리턴이었다.

    “아직 지지 않았다.”

    “졌다고 생각 안했습니다, 주장.”

    “그러면 다행이고.”

    주장이 웃는 것에 그를 따라 미소를 보이며 손을 마주쳤던 수용은 그대로 필드로 향하려 했으나, 그의 팔을 붙잡는 손길에 발을 멈췄고, 고개를 돌려 그의 팔을 잡고 있는 리언과 눈을 마주쳤다.

    리언은 수용을 향해 전과 달리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네가 처음 팀에 합류했을 때. 네 재능이 부럽다고 말했던 거, 기억하고 있지?”

    갑작스런 말에 잠시 당황했으나, 곧 고개를 끄덕인 수용, 그리고 수용이 고개를 끄덕이자 리언이 재차 미소를 보이면서 수용의 어깨를 토닥인 뒤 자리에서 멀어졌다.

    “그래. 기억하고 있으면 됐어. 후반전에도 힘내라고.”

    “고맙습니다.”

    “고마우면 경기에서 이기던가! 관중석에서 지켜보고만 있는 것도 고역이다, 고역이야.”

    오늘 경기에는 교체 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해 그대로 밖으로 빠져나가는 리언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수용은 축구화 끈을 다시 동여매고 필드 위에 섰고, 곧 많은 사람들의 얼굴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함께 공을 차고 있는 선수들, 반대 진영에서 눈빛을 불태우고 있는 상대 선수들, 그리고 관중석에 앉아서 경기장을 내려보고 있는 팬들의 얼굴들이 마치 눈동자에 아로이 새겨지듯이 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멍하니 경기장을 둘러보던 중 주심이 휘슬을 불었고, 마침내 후반전이 시작됐다.

    후반전의 흐름도 전반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스완지에서 중원을 활용해 강하게 압박을 하고, 맨체스터 시티에선 기회를 엿보다가 빠르고 굵게 공세를 취했다.

    다만 전반전과 확연히 다른 점이 있었다면···.

    ‘···밀리고 있다.’

    분위기가 달랐다.

    전반전엔 확실히 압도하고 있다는 느낌이 있었지만, 후반전에선 어거지로 현재 상황을 이끌어 나가고 있다는 느낌이 강했던 것이다.

    후반전이 시작된지 겨우 10분 정도가 지났을 뿐이지만, 벌써부터 느껴지는 차이에 수용이 불편한 듯 미간을 구겼을 때, 공이 그의 발밑에 굴러 들어왔다.

    왼쪽 풀백, 노턴이 그의 발밑으로 공을 붙여준 것이다.

    동료가 보내준 패스를 받은 수용은 곧장 전방으로 몸을 틀었고, 빠르게 흘러가는 흐름에 맞춰 패스를 이어줄 줄기를 찾았다.

    일단 얇지만 최전방으로 높은 패스를 이용해 사용할 수 있는 줄기가 하나, 우측면으로 향하는 평범한 줄기가 하나, 그리고···.

    ‘아브라함이 침투할 공간을 노리고 보낼 수 있는 줄기가 또 하나. 하지만···.’

    눈으로 읽을 수 있었던 여러 줄기들이 있었지만 동시에 떠오르는 위험 부담에 수용은 결국 가장 안전한 루트인 우측면으로 패스를 찔러준 뒤 자리를 이동했고, 수용의 패스를 받은 아위유는

    터치 라인을 따라 달리면서 우측면을 파고 들기 위해 부단히 드리블을 시도하면서 발을 놀렸다. 하지만 아쉽게도 이를 악 물고 수비에 나선 로스를 뚫어내지 못하고 탄식을 흘려야만 했다.

    맨체스터 시티의 반격이 이어진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아위유의 공격을 무난히 막아내고 공까지 뺏어낸 로스가 드리블을 치면서 앞으로 이동하다가 중원에 위치해 있던 재혁을 찾은 뒤 그를 향해 패스를 보내준 것이다.

    재혁이 가벼운 몸짓으로 로스의 패스를 받은 후 몸을 움직였고, 그런 재혁의 앞을 바로 가로막으면서 수용이 차갑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재혁을 내려보았다.

    ‘최재혁.’

    이제 겨우 18살. 포지션은 미드필더.

    해외에서 생활하다가 어린 나이에 프로에 입문.

    성격은 어떨지 몰라도 자신과 비슷하게 커리어를 시작한 같은 나라 출신의 어린 친구였다.

    하지만 동정이라던가, 봐주고 싶은 마음은 절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철저하게 부숴주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프로 생활을 막 시작했을 때의 자신의 모습과 너무 비슷했으니까.

    또래들보다 앞서 나간다는 자신감에서 나오는 건방짐과 오만함.

    본인도 그게 부숴지기 전까진 깨어나지 못했으니, 선배가 후배를 위한다는 마음으로 수용은 재혁의 움직임을 모조리 눈에 담에 반드시 막아주겠다고 생각하며 눈썹을 모았고, 그런 수용을 앞에 두고서 재혁은 침착하게 공을 컨트롤 하면서 서서히 앞으로 움직였다.

    ‘어떻게 할거냐?’

    지금 상황에서 재혁이 취할 수 있는 행동은 간단하게 두 가지.

    패스와 드리블이다.

    안전한 쪽을 택한다면 두 말 할 것이 없이 패스를 선택할 것이고, 그 중에서도 좌우 측면을 통해 공간을 넓게 사용하는 패스를 뿌릴 것이 당연했다.

    현재 공이 놓여 있는 곳은 재혁의 오른발.

    ‘왼측면으로 공을 보내기 위해 왼발로 공을 옮긴 다음 패스를 시도하려 한다면 바로 달려 들어 플레이를 끊어낼 수 있다. 하지만 오른발로 바로 패스를 뿌린다면 더 안전하겠지.’

    길어봐야 1초.

    채 2초가 되지 않는 짧은 순간에 재혁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와 확률을 계산한 수용은 이어질 재혁의 행동에 맞춰 어떤 판단을 내릴 지 마음을 정했고, 그 다음 순간 재혁이 오른발에 두고 있던 공에 발을 가져가는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두 눈을 빛내며 발을 쭉 뻗었다.

    ‘우측면으로 향할 패스다!’

    현재 재혁이 취할 수 있는 절대적으로 안전한 선택지.

    그것을 바로 읽고, 공을 향해 오른발을 사용하려는 것까지 완벽하게 읽어낸 수용은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흘렸다.

    이번 커트를 시작으로 기본부터 철저하게 재혁의 모든 것을 부숴주리라 마음 먹으면서 말이다.

    다만.

    스륵.

    “?!”

    공을 향해 오른발을 뻗은 것이 패스가 아닌, 드리블을 위한 선택이었다는 것이 현재 상황의 모든 것들을 바꾸어 놓았고···.

    ‘···뚫렸다!’

    오른 발끝으로 공을 왼쪽 다리 뒤편으로 굴리면서 시계방향으로 도는 가벼운 턴과 함께 자신의 옆을 지나치는 재혁을 그대로 보내줄 수밖에 없었던 수용은 황급히 앞으로 뻗던 다리에 힘을 주어 재혁의 뒤를 쫓으려 했다.

    하지만 재혁은 수용을 뒤에 놓고 벌써 두어 번 공을 치고 달리기 시작하면서 둘 사이의 거리를 더욱 벌린 상황.

    결국 이번에도 어쩔 수 없이 재혁을 바라보기만 해야 하는 상황이 찾아온 것에 수용은 입술을 깨물었고, 이어지는 재혁의 플레이를 지켜보면서 수용은 혹시 찾아올 기회를 놓치지 않게 눈을 부릅 떴다.

    그렇게 재혁의 행동을 지켜보던 수용은 계속해서 머릿속으로 재혁이 과연 어떤 행동을 취할지 쉬지 않고 계산했다.

    비록 자신은 뚫렸지만 그 직후 캐롤이 바로 수비를 돕기 위해 재혁에게 따라붙고 있었으니, 더 이상 모험적인 선택지는 택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쭉 재혁을 지켜보았는데···.

    “!”

    재혁은 거기서 또 한 번 수용을 비웃듯이, 그의 예상을 벗어난 행동을 취했다.

    ‘또···, 드리블로 돌파를 시도하겠다고?! 아니, 돌파 시도하겠다는 게 아니야···!’

    이미 뚫었다.

    속도를 줄이지 않고 그대로 공을 밀어내면서 캐롤의 다리 사이로 공이 빠져나갔고, 재혁은 어처구니 없어하는 얼굴로 스텝이 꼬인 캐롤까지 가뿐하게 지나치면서 계속해서 공을 치고 달린 것이다.

    그 상황을 중계석에서 지켜보고 있던 캐스터의 목소리가 커진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다.

    “최재혁 선수! 김수용 선수의 압박을 가볍게 벗겨내더니 이번엔 캐롤 선수마저 뚫어내면서 계속해서 공을 몰고 전진합니다!”

    “좋습니다. 포백 라인을 보호해주던 두 선수가 순식간에 벗겨졌어요. 이렇게 되면 바틀리 선수가 앞으로 나와야죠.”

    “바틀리 선수, 최재혁 선수를 향해 한 걸음 이동하면서 서서히 압박을 넣으려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최재혁 선수, 속도를 멈출 기미가 없어요! 계속해서 드리블을 치고 달리다가···!”

    “센터백과 좌측 풀백 사이로 패스를 집어 넣었습니다! 당황하고 있는 올슨과 반 데 후른 선수 사이에서 재차 공을 잡은 것은···!”

    “브라함! 선취골의 주인공이었던 브라함에게 다시 한 번 찾아온 기회! 최재혁 선수의 패스를 받은 브라함 선수, 가볍게 왼발로 공을 건드리고 그대로 슛···!”

    철썩!

    골망이 또 한 차례 크게 흔들렸다.

    재혁의 날카로운 스루 패스를 이어 받은 브라함이 침착하게 골대 구석을 노린 슛으로 추가골을 터트린 것이다.

    추격해야 할 상황에 놓였던 스완지 시티의 선수들에겐 찬물을 쏟아 붓는 한 골이었고, 확실하게 흐름을 탄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에겐 텐션을 한껏 높일 수 있는 한 골이었다.

    브라함을 중심으로 재차 모인 선수들은 원정을 따라온 팬들이 모여 있는 관중석 앞으로 달려가 세레머니를 이었고, 그런 맨체스터 시티 선수들을 멍하니 바라보던 수용은 양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결국 이대로 지는 건가, 라는 생각이 스완지 시티의 모든 선수들의 머릿속에 스며들고 있었는데, 그건 수용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이번 경기는 도저히 뒤집기 힘들 것 같다는 기분이 들어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내리려던 수용의 앞으로 재혁이 슬쩍 지나쳤고, 수용과 잠시간 눈이 마주쳤던 재혁은 그런 수용을 향해 짧은 한 마디를 던지고 멀어졌다.

    “전 숨지 않았어요.”

    “···!”

    처음엔 재혁의 그 한 마디가 무슨 의미인지 파악할 수 없었던 수용이었으나, 지금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숨지 않았다.

    필요한 순간에 도전적으로 자신을 믿었다는 의미였던 것이다.

    그 증거가 바로 자신과 캐롤을 상대로 보였던 드리블이었고, 그 결과가 추가골이었다는 의미였던 것이리라.

    동시에 수용의 뇌리로 한 가지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지금 난 뭘하고 있던 거지?’

    한 번 상념이 떠오르자 그 크기는 이후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커져갔다.

    집요할 정도로 안정적인 루트만 찾아 해매는 자신의 모습이 과연 지금 이 자리에 자신을 있게 만들었던가?

    “···후우.”

    짧게 숨을 토해낸 수용의 얼굴이 변했다.

    이후 ‘좋아’라는 짧은 한 마디와 함께 자신의 양뺨을 때린 수용은 공이 센터 서클로 돌아오기 전, 벤치에 다가가 물을 한 모금 입에 물었고.

    “표정이 한결 좋아졌군.”

    “2점이나 뒤쳐져 있으려니 열이 좀 받아서요.”

    “!”

    수용의 목소리에 실린 감정을 바로 읽어낸 클레멘트 감독은 짐짓 놀랐으나, 이내 예의 미소를 펼쳐 보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가서 열 좀 식히고 와. 무슨 의미인지 이제는 알고 있겠지?”

    “물론이죠. 하지만 열이 식진 않을 거예요.”

    입에 또 한 모금을 머금고 있던 수용이 그것을 뱉어낸 뒤 경기장으로 돌아가며 짧게 답했다.

    “식는 순간 다시 모든 게 끝이 나는 거니까요.”

    수용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웃음으로 그를 마중한 클레멘트 감독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코치가 그에게 다가와 물었다.

    “교체 준비는 어떻게 할까요? 역시 수용을 빼는 것이···.”

    “아니. 수용은 오늘 경기 마지막까지 뛸 거야.”

    “예? 하지만 교체를 준비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3분 전까지는 그랬지.”

    앉은 자리에서 턱을 괴고 다시 필드 위에 올라선 수용을 눈동자에 담아 지켜보던 클레멘트 감독은 자세를 고쳐 앉으면서 미소가 깃든 얼굴로 말을 계속 했다.

    “하지만 지금의 수용이라면 이번 시즌의 마지막까지도 함께 할 것 같군.”

    “···?”

    갑자기 일어난 감독의 변덕을 이해할 수 없었던 코치는 감독의 곁에 앉아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이어지는 상황을 확인하곤 곧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확실히 달라졌네요.”

    ***

    맨체스터 시티의 승리로 끝이 난 경기의 결과에 변화는 없었다.

    맨시티는 선취한 2점을 무난히 지켰고, 결국 경기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용에서 분명한 차이는 있었다.

    스완지 시티가 단순히 한 점을 만회했다는 결과적인 차이가 아니었다.

    분위기가 달라진 수용을 중심으로 스완지의 허리가 점차 생기를 찾기 시작했고, 그 흐름을 타고서 마지막 순간까지 뜨겁게 싸우면서 경기의 결과를 섣불리 장담할 수 없게 만든 점이 그 차이점이었다.

    전반전에는 무기력하게 패배하려는 기색이 역력했던 스완지 시티였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후반전에서 스완지가 보여준 모습은 전성기적 ‘스완셀로나’를 연상케 했던 것이고, 그 중심에서 김수용은 자신의 존재감을 진하게 남겼던 것이다.

    비록 경기에선 패배했지만 그 모습을 기억한 많은 사람들이 수용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면서 이번 시즌 밝은 전망을 내놓았는데, 그런 수용이 머릿속에 또렷하게 새긴 한 선수를 향해 다가가 손을 슥 내밀었다.

    “안 숨고 악수하러 왔다.”

    “!”

    “무슨 놀란 표정을 지어? 너 싸가지 없는 거 다 아는데.”

    “제가 싸가지가 없다니요. 저처럼 성실한 사람이 어디 있다고. 감독님 보면 꼬박꼬박 인사하고, 동료들 보면 존중해주고, 연습도 열심히 하고···.”

    “그리고 하루 종일 축구 생각만 하겠지. 그래서 싸가지가 없다는 거야. 내가 딱 그랬거든. 사교성을 팔아서 운동 신경을 산건지, 네 나이 때 나도 참 답이 없었지.”

    재혁의 말을 중간에 툭 자르고 내밀었던 손으로 재혁의 머리칼을 쓱 쓸어버린 수용은 이내 짧게 웃어 보인 뒤 나중에 따로 연락하겠다는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나려 했다.

    짧게 아, 라는 탄성을 흘린 수용이 슬쩍 고개를 돌려 재혁을 다시금 찾으며 물었다.

    “결국 네가 원하는 포지션은 미드필더인 거겠지?”

    “그렇죠.”

    “그럼 내 걱정을 할 게 아니라 오히려 네 걱정을 해야지. 경쟁해야 할 선수들이 얼마나 빡빡한데.”

    현재 맨체스터 시티에 소속된 중원의 경쟁자들.

    다비드 실바, 케빈 데 브루위너, 페르난지뉴, 베르나르두 실바, 야야 투레···. 그 외에 다른 성인 선수들도 포함되어 있는 두터운 스쿼드 층을 고려하면 재혁의 미래가 꼭 평탄한 것은 아니었기에 수용은 걱정어린 목소리로 물었던 것이지만 재혁은 그런 수용을 향해 씨익 웃어 보이며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요. 저도 숨을 생각은 없거든요.”

    동료이지만 경쟁자.

    그 의미를 확실히 이해하고 있었던 재혁이 미소를 보이며 답하자 수용은 한결 안심한 얼굴로 손을 흔들며 자리를 떠났다.

    어린 선수일수록 기회가 부족하다면 초조해 할 수 있었는데, 재혁은 나름 침착하게 상황을 기다릴 줄 아는 것 같았으니까 말이다.

    그렇게 스완지를 떠나 맨체스터로 돌아온 재혁의 입지에 두 가지 변화가 일어났다.

    하나는 리그컵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친 것에 다들 기대에 찬 반응을 보여준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다비드 실바, 훈련 중 부상으로 다음 경기 결장이 불가피!]

    경쟁자이자 동료의 부상 소식이었다.

    < 72. 숨지 않는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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