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첫 선발 >
지난 시즌부터 메인 스폰서 없이 새로이 시작된 잉글리쉬 풋볼 리그컵.
아무래도 정규 리그라던가, 챔피언스 리그, 혹은 FA컵에 비하면 중요도가 많이 밀리는 대회이긴 하지만, 그래도 영국에서 활동하는 다양한 팀들이 경쟁을 한다는 부분에서 어린 선수들 혹은 자신의 가능성을 알리고 싶어하는 팀과 선수들에게는 여전히 경쟁력이 있는 무대였고, 그건 다른 나라에서 축구를 보고 있는 팬들도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다들 컵 대회 일정들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었고, 32강 경기 일정이 발표되는 오늘, 많은 사람들은 그에 대해 이야기를 떠들면서 인터넷에 한시라도 빨리 관련 정보가 공개되길 기다렸다.
[32강 대진표 떴습니다!]
[오 드디어 나왔나요?]
[링크 아시는 분, 댓글로 좀 달아주세요.]
[굳이 링크 달 필요 있나요. 지금 제가 리스트 적어 드릴게요.]
일정이 공식 홈페이지에 발표된지 채 3분이 지나지 않았거늘.
수십, 수백의 사람들은 새벽부터 빠른 속도로 댓글을 달았고, 관련된 일정표를 훑으면서 이어질 경기들을 손꼽아 기다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정규 리그도, 유럽 대항 대회도 아니었기 때문에 오히려 관심이 적을 수도 있었을 대회였지만···.
[와, 드디어 우리팀 중계 경기 타겠다. ㅠㅠ.]
[어디 응원하시는데요?]
[사우스햄턴이요···. 이번 시즌 중계 경기들이 죄다 빅네임들이랑 겹쳐서 제대로 보질 못 했네요.]
[전 프레스턴 응원하는데. 정말 마이너한 팀들 응원하는 팬들은 티비로 경기 보기 너무 힘들어요.]
[그나마 지역 중계 방송이라도 돌면 다행인데, 아닐 경우엔 그냥 문자 중계로 봐야 되죠. 그럴 땐 그냥 영국으로 이민 가고 싶어져요. 하지만 현실은···.]
[영국으로 이민갈 수 있었으면 이 처지도 아니죠.]
같은 고민을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 한숨을 내쉬며, 하지만 희망에 찬 얼굴로 자판을 두드렸다.
영국의 컵대회라는 특징적인 구조상, 2부 리그 혹은 하위권 팀들을 응원하는 팬들은 그나마 이런 기회를 통해 제대로 된 중계를 통해 경기를 볼 수 있는 상황이 왔음에 조금이나마 기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진표와 함께 중계 일정이 뜨자 몇몇 팬들은 환호성을, 그나마도 소외된 사람들은 아쉽지만 그래도 지역 중계 방송을 통해 경기를 지켜볼 수 있음에 만족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한 차례 시끌벅적했던 커뮤니티의 소음이 차츰 잦아들 때 즈음···, 누군가 새로운 글을 하나 작성하면서 관심이 꺼져가는 커뮤니티에 또 한 차례 기름을 부었다.
[맨체스터 시티 1군 훈련에 유소년 선수들을 소집했다던데, 혹시 자세히 아시는 분 계신가요?]
[유소년 선수들을 소집해요?]
[네. 주말 오전 훈련 풍경이라면서 사진을 찍어 올린 영국 스포츠 기자가 있는데, 거기에 어린 선수들이 많이 참가했다고 하더라고요.]
맨체스터 시티라는 이름이 나오자 지금까지 조용하던 사람들이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엇보다 맨체스터 시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을 꺼내며 사람들은 대화를 계속 했다.
[맨체스터 시티면 최재혁 선수가 있는 곳이죠? 지난 번에 본머스 전에서 활약했던 그 선수요. 그 뒤로 한동안 교체 명단에만 이름을 올렸던 거 같은데···.]
[아 맞아요. 최재혁 선수도 그 사진에 찍혀 있더라고요.]
[최재혁 선수도 있어요?! 진짜로요?]
[본머스 전 이후로 시간 끌기용으로 투입되던가, 벤치만 달구다가 그냥 돌아가던데. 이번엔 확실히 선발로 뛰게 되려나요?]
[제발 그랬으면 좋겠네요. 아직 어리지만 가능성 하나 만큼은 확실한 친구라···.]
재혁이 보여주었던 움직임과 피치 위에서의 영향력.
그 점을 떠올리면서 사람들은 아쉬움 섞인 말로 이번에 찾아올 경기에서 만큼은 꼭 선발로 뛰길 기대하다가···.
[그런데 맨체스터 시티의 EFL 컵 상대는 누구에요?]
맨체스터 시티가 상대하게 될 팀이 누군지 알아보기 위해 대진표를 다시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머지 않아 이번에도 익숙한 이름을 발견하고 다들 눈을 크게 떴다.
[스완지 시티가 상대였네요?]
[헐. 스완지 시티요? 지금 스완지 시티라면···.]
***
[선발로 나설 수 있을 거 같아?]
“글쎄요.”
막 러닝을 끝내고 왔는지, 이마에서 줄기차게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아낸 김수용이 휴대폰을 고쳐쥐면서 대답을 이었다.
“일단 몸 상태는 계속 체크하시더라고요.”
[그래? 그럼 나쁜 상황은 아니네.]
수용의 대답에 그의 에이전트가 한층 들뜬 목소리로 답했고, 그런 에이전트를 향해 수용은 이내 담담한 어조로 그에게 계속 말했다.
“하지만 바로 선발로 뛰게 해줄 거라는 기대는 잠시 접어두는게 맞지 않을까요?”
담담하지만 현실적인 목소리.
그런 수용의 목소리가 무슨 의미인지 에이전트는 바로 이해하고 쯧, 혀를 찼다.
수용은 지난 시즌 후반기에 당한 무릎 부상을 또 한 번 당하면서 수술까지 해야 했다.
개막전과 함께 시즌이 시작되는 8월에 모든 경기들을 결장을 하면서 재활에 전념하고 있었으니. 비록 본인과 의료진이 생각하기에 몸이 완성되었다고 할지라도 또 어떤 상황에서 부상이 재발할지 몰랐기에 복귀 시점을 신중히 고려해야 했던 것이다.
재활과 훈련장에서 아무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었다고 하더라도 부상이란건 이따금 예기치 못 한 상황에서 터졌으니 말이다.
그런 수용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있었던 에이전트는 그래도 마음 한켠에 떠오르는 기대감을 숨기지 않고 목소리로 비추어 보였다.
[그래도 이젠 슬슬 준비해야지. 재계약을 노리든, 다른 팀으로 이적을 노리든, 경기장 위에서 결과물을 내야 가능한 일이니까.]
“알고 있어요.”
그렇게 한동안 하늘을 바라보다가 머리를 긁적인 뒤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던 수용은 휴대폰이 재차 몸을 떠는 것을 느끼고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떠내 상대를 확인했다.
익숙한 이름인 것을 확인한 수용은 눈을 동그랗게 뜬 뒤 곧장 통화 버튼을 누르고, 상대에게 대답을 하다가 목소리가 반쯤 잠겨있던 것에 자신도 모르게 헛기침을 토해냈다.
상대, 스완지 시티의 감독 폴 클레멘트는 그런 수용의 반응에 작게 웃더니 말했다.
[뭔가? 맛있는 거라도 몰래 먹고 있다가 전화를 받은 건가?]
“아닙니다. 조깅을 막 끝낸 참이라···.”
[조깅? 무릎은 이제 괜찮은 건가?]
오늘도 따로 재활 훈련을 소화했던 것을 기억한 감독이 물었고, 수용은 곧장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답했다.
“그런 것 같습니다. 지난 주부터 통증이 거의 없었거든요.”
[그래도 그럴 때 일수록 더욱 조심해야 해. 조급해하지 말고. 이젠 막 뒹굴러도 뼈가 붙는 나이가 아니잖아?]
“그래야죠. 그러기 위해 조깅을 한 겁니다. 몸상태를 가능한 만족스러운 수준으로 끌어올리고 싶거든요.”
[!]
수용의 자신감의 찬 한 마디에 클레멘트 감독은 잠시간 입을 다물고 침묵하고 있다가 짧게 미소를 보인 뒤 말을 이었다.
[노력하는 사람에겐 역시 그에 합당한 선물을 주는 게 맞겠지.]
“···?”
[이번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에 몸상태를 확실히 맞출 수 있도록 해. 혹시라도 10분 뛰고 지쳤다고 징징거리지 말라고.]
“그, 그 말씀은···!”
수용이 놀라 눈을 크게 뜬 것에 클레멘트 감독은 예의 미소를 흘리면서 좋은 밤이지만 밤바람은 적당히 맞으라는 작별 인사를 마지막으로 통화를 끝냈다.
그렇게 한동안 자리를 지키고 서있던 수용은 시간이 지나고 간신히 자신을 추스른 뒤 고개를 들었다.
흐려지던 중, 마침내 기회가 다시 한 번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32강 경기가 치러지는 날이 찾아왔을 때.
새벽에 시작될 경기를 기다리고 있던 한국의 축구 팬들은 최재혁과 김수용, 익숙한 두 선수의 이름이 모두 선발 명단에 오른 것을 발견하고 환호성을 질렀다.
***
보통 원정에서 치러지는 경기라면 이른 시간부터 이동을 시작해야 했기에 많은 선수들이 이동 수단에서 반쯤 곯아 떨어져 있었으나, 오늘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은 조금 달랐다.
다들 긴장한듯, 바짝 날이 서있었고, 졸기는커녕 연신 창밖을 내다보면서 호흡을 고르거나 긴장을 풀기 위해 떨리는 손과 발을 털어내기 일쑤였던 것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오늘 자리하고 있는 선수들 중 대부분이 유소년, 혹은 2군에 포진해 있던 선수들이었던 탓이다.
그리고 그것은 이번에 처음으로 선발 명단에 포함되었던 자메인 로스도 마찬가지였는지, 반복적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다가 옆에 앉아 있는 재혁을 향해 긴장으로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어떡하지?”
“뭘?”
“나 화장실 가고 싶어 졌어.”
“···그러게 적당히 마시라니까.”
긴장된다고 연거푸 생수를 들이키더니.
혀를 차던 재혁은 슬쩍 고개를 들어 네비게이션의 거리를 확인하고 다시 자리에 앉으면서 얼마 남지 않았으니 참으라고 말했다.
그런 재혁의 말에 앓는 소리를 흘리던 로스는 이내 괜찮아졌다며 작게 웃더니 곧 오늘 치러질 경기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오른쪽 풀백을 주된 포지션으로 뛰는 로스였지만, 재혁이 우측면에서 뛰는 모습을 보면서 많은 부분을 배울 수 있었기에 오늘처럼 기회만 된다면 항상 축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언뜻 로스와의 대화에서 재혁이 일방적으로 가르친다는 느낌일 들 수도 있었지만, 어린 나이때 부터 맨체스터 시티 운영진에 의해 스카우트 될 정도인 재능을 품고 있는 로스와의 대화를 통해 재혁 또한 생각하지 못 했던 부분을 떠올릴 수 있었기에 로스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재혁도 즐겼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마침내 스완지 시티의 홈구장, 리버티 스타디움에 도착했고, 과르디올라 감독이 먼저 버스에서 내리면서 코치들에게 선수들을 부탁했다.
“클레멘트 감독과 인사만 나누고 나도 곧장 구장으로 향하겠네.”
“몸풀기는 세트 별로 할까요?”
“그거면 될거야. 다만 아직 선수들이 피로할 수 있으니까, 과하겐 하지 말고.”
과르디올라 감독의 자세한 설명에 곧장 고개를 끄덕였던 코치들은 선수들을 이끌고 이동하기 시작했고, 재혁도 그 뒤를 쫓아 이동하려다가···.
“코, 코치님! 전 화장실 좀 먼저 다녀오고 싶은데요.”
“뭐? 또?”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는 로스의 말에 코치는 재혁에게 그와 함께 다니면서 라커룸까지 돌아올 것을 부탁했다.
재혁은 그런 코치의 부탁이 애를 돌봐달라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이내 알겠다고 대답한 뒤 로스와 함께 화장실로 향했다.
복도를 잰걸음으로 이동하던 둘의 눈에 곧 화장실이라 적혀있는 문구가 들어왔고, 로스는 금방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복도 벽에 등을 기대어 서서 로스를 기다리던 재혁은 얼마 뒤 누군가 화장실에서 빠져나오는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들었다가···.
“어?”
“응?”
물기가 젖은 손을 털어내면서 화장실 밖으로 빠져나오던 수용과 재혁,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처음 보는 얼굴의 동양인이었지만, 그가 입고 있는 유니폼이 맨체스터 시티의 것인 것을 발견한 수용은 잠시간 고개를 갸웃이더니 이내 씨익 미소를 보이면서 한국어로 말했다.
“네가 최재혁이지?”
수용의 첫 마디에 잠시간 얼었던 재혁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고, 그런 재혁을 향해 다시 한 번 미소를 보이면서 손을 쭉 뻗었던 수용은 짧게 악수를 나눈 뒤 경기장에서 보자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수용과 악수를 나눈 손을 잠시간 내려보던 재혁은 바닥을 내려보던 고개를 들어 수용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았고, 곧 안도한 얼굴로 화장실을 빠져나오던 로스가 그런 재혁을 발견하고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니. 별 거 아니야. 그냥···.”
로스에게 대답을 하다가 말꼬리를 슬쩍 늘이던 재혁이 표정을 굳이면서 말을 이었다.
먼저 도착해 스트레칭을 해주고 있는 다른 선수들 사이에 스며든 재혁은 슬쩍 고개를 돌려 반대편에서 몸을 풀고 있는 스완지 시티의 선수들을 살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안쪽에서 동료들과 패스를 주고 받고 있는 김수용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눈을 빛냈다.
그와 같은 포지션인 미드필더로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성장해 현재 한국의 기둥이 된 선수.
물론 재작년부터 연이은 부상으로 인한 컨디션 난조와 폼의 저하로 소속팀에서 입지가 불안하다고 평가 받고 있지만, 이제막 커리어를 시작한 재혁의 입장에서 보기에 커다란 벽처럼 보이는 선수를 빤히 바라보던 재혁은 곧 천천히 고개를 주억였다.
‘얼마나 큰 벽이든, 언제고 넘어야 한다. 아니, 이겨야 한다.’
다른 곳도 아닌, 프로 무대에서 만난 상대였으니까.
그렇게 멍하니 수용이 있는 곳을 바라보던 재혁의 귓가로 과르디올라 감독의 목소리가 들렸고, 정신을 차리고 몸풀기 훈련에 온 집중을 쏟았다.
그 뒤로 재혁이 수용을 다시 만나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이 마주친 장소는 리버티 스타디움의 피치 위, 각자의 소속팀의 선발로 이름을 올린 상태에서 였다.
< 69. 첫 선발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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