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68화 (68/225)
  • < 68. 재혁의 존재 >

    지고 있던 경기에서 교체로 들어와 흐름을 바꾸고 역전승까지 일궈낸 경기.

    적절한 용병술이었다고 기자들이 칭찬으로 회견을 시작한 것에 과르디올라 감독은 재혁에 대해 먼저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당연히 재혁에 관해 궁금한 점들이 있었기에 기자들은 그런 과르디올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했다.

    “전반전과 후반전의 맨체스터 시티는 확실히 다른 팀인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다른 팀이었죠. 단 한 명의 선수로 시작된 교체였지만, 그 한 명이 전혀 다른 전술적인 움직임을 가져올 수 있는 선수였으니까요.”

    “그 한 명이 계속 말씀하시는 최재혁 선수인가요?”

    기자들에 섞여 있던 동양인 기자 한 명이 손을 들고 물은 것에 과르디올라 감독은 그를 향해 고개를 크게 끄덕여주었다.

    “맞습니다. 최재혁 선수가 있었기에 제가 구상했던 대로 경기를 진행할 수 있었고, 마지막에 승점 3점을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최재혁 선수에게만 따로 지시한 사항이 있어셨던 겁니까?”

    “그런 건 없었습니다. 개인의 능력이 물론 중요하지만 팀이란 단위에 녹아들지 못 한다면 그건 문제가 있는 거니까요.”

    노트와 펜을 손에 쥐고 자신이 하는 말을 문자로 기록하고 있는 기자들을 향해 과르디올라 감독은 계속해서 말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최재혁 선수의 강점이 더욱 도드라지는 거죠. 따로 말을 하지 않아도 이해가 빠르거든요.”

    “그게 어떤 식으로 강점이 되는 건가요?”

    “기본기와 선수의 신체 능력이 아무리 좋아도 축구 지능이 이따금 아쉬운 선수들이 있습니다. 누구라고 콕 집어 말을 하지 않아도 다들 마음속에 떠오르는 선수들이 있겠지요. 물론 지금 저희 팀에도 있고 말이죠.”

    과르디올라 감독이 농담을 섞어 가벼운 어조로 말을 푼 것에 기자들이 작게 웃었고, 그런 기자들을 향해 감독은 계속 말을 이었다.

    “그에 반해 최재혁 선수의 능력은 아직까진 평범한 수준입니다. 신체적으로 아직 성장이 끝나지 않은 10대이기도 하지만, 기술적인 성장도 현재 특별하다고 말할 수준이 아니죠. 하지만 이건 확실히 다릅니다.”

    톡톡, 관자놀이를 건드리면서 말을 이었던 과르디올라 감독이 짙어진 미소를 입가에 머금으면서 말했다.

    “후반전에 진행된 경기를 자세히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운영의 흐름이 넘어오게 된 계기와 그걸 유지하게 도움을 준 선수는 다비드 실바도 아니고, 케빈도 아닌, 최재혁 선수였거든요. 과연 이 선수가 다른 선수들과 달랐던 점이 무엇이었는 지는···, 한 번 직접 알아보시는 게 재밌을 것 같군요. 그럼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감독님! 가시기 전에 한 말씀만 더···.”

    “쟁쟁한 풀백들을 영입하셨는데, 최재혁 선수가 앞으로도 경쟁 구도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다음엔 교체가 아닌 선발로 출장하는 것을 기대해볼 수 있을까요?”

    갑작스레 말을 끝마치고 회장을 빠져나가는 과르디올라 감독의 등을 향해 많은 기자들이 질문을 던졌지만 과르디올라 감독은 대꾸 없이 그저 작은 미소를 보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자리를 빠져나갔다.

    그렇게 날이 저물고 다음 날이 찾아왔을 때.

    “생각보다 타이틀들은 잘 뽑았군.”

    사무실에 앉아 신문을 쭉 읽어 내려가던 과르디올라 감독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스포츠와 관련된 신문들의 메인 페이지에는 모두 맨체스터 시티와 재혁의 사진이 걸려 있었고, 다들 과르디올라 감독이 회견 장에서 남겼던 말들을 토대로 타이틀을 뽑았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드는 제목을 큼직하게 박아둔 신문을 손에 쥐고서 과르디올라 감독은 천천히 기사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맨체스터 최고의 바둑기사의 선택이라(The “Choi”-ce of the “Choi”-est Go Pro in Manchester!), 꽤 재밌는 글을 썼어.”

    최재혁의 성과 동양의 바둑을 섞어 말장난을 친 제목.

    하지만 단순히 말장난으로 치부하기엔 ‘공간’이라는 개념을 머리로 이해하고 축구를 하고 있는 재혁을 꽤나 심오하게 설명하고 있었고, 경기에 대한 해석도 썩 괜찮았기에 과르디올라는 흥미롭게 기사를 읽은 뒤 신문을 접었다.

    이제 겨우 한 경기.

    재혁이 직접 뛴 경기는 이제 겨우 한 경기였지만···.

    “이런 식이라면 자주 써먹을 수 있을 지도 모르겠군.”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린 과르디올라 감독은 자리에서 일어나 트레이닝복을 갖춰 입고 훈련장으로 향했다.

    ***

    처음으로 필드에 모습을 드러낸 재혁을 보고 꽤나 강렬한 인상을 받았는지, 뜨거운 반응을 보여주고 있는 영국 현지처럼 한국에서도 재혁을 향해 적지 않은 관심을 쏟아내고 있었다.

    어린 나이에 프로 무대에, 그것도 영국의 EPL이라는 무대에 발을 올렸다는 사실에 다들 열광한 것이다.

    경기를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지켜보았거나, 하이라이트라도 보았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기대에 찬 이야기를 떠들었지만, 단순히 기사나 몇몇 글줄들로 재혁에 대해 알 수 있었던 사람들은 비관적인 태도로 일관하며 혀를 찼다.

    [단순한 마케팅용 띄워주기 아님? 게다가 상대팀도 중하위권인 본머스였고. 겨우 한 경기만 보고 저렇게 열광하는 거 이해가 안 되는데. 이거 죄다 시티 팬들이거나 알바들인듯.]

    [사실 어시스트를 한 것도 아니고, 득점을 한 것도 아니고. 경기에 얼마나 영향력을 끼쳤다고 표현하기엔 좀···.]

    [그렇죠.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없었으니까 말예요.]

    [위에 분들 축알못이네. 그런 식으로 따지면 수비수들은 경기력 측정이 불가임?]

    [그래서 수비를 위한 스텟들이 따로 있는 거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풀백으로 출전했을 때 정작 수비적인 스텟은 별로였는데요?]

    [기본적인 스텟이 좋았잖아요. 턴오버도 없었고. 그런 걸 봐야죠.]

    처음엔 비관적인 반응만 일색이던 곳에 몇몇 사람들이 그래도 긍정적인 이야기를 풀었고, 곧 게시판은 전쟁터가 되었다.

    본래 무기 없는 싸움이 더 무섭다고 하지 않던가.

    사람들은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키보드로 무장한 뒤 온갖 기록들과 정보들을 가지고 와 풀었고, 게시판은 순식간에 재혁에 관한 이야기로 도배가 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게 사람들은 시간가는 줄 모르고 쉴새 없이 싸웠다.

    누군가 하나를 꺼내놓으면 그에 반하는 생각을, 또 그것에 대조되는 정보로 상대의 생각이 틀리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싸운 것이다.

    거진 반나절이 지나도록 싸움은 그칠 줄 모르다가 누군가 인터넷에 새로 올라온 기사를 가지고 오면서 모두의 시선이 그쪽으로 쏠렸다.

    [이상민 기자님도 최재혁 선수가 뛴 맨체스터 시티와 본머스 전에 대해 글을 올리셨네요.]

    [이상민 기자님이 글을 올렸어요?]

    [저 링크 좀 주세요.]

    [그냥 베스트 웹 메인 페이지로 가보세요. 거기에 걸려 있으니까 바로 찾을 수 있을 거예요.]

    이상민 기자.

    벌써 십수 년의 기간동안 스포츠 기자로 활동하면서 유망주에서 성인 선수에 이르기까지, 적지 않은 선수들을 취재하고, 유럽에서도 발로 뛰면서 현지 취재까지 나서는, 몇 명 되지 않는 모두가 인정하는 ‘참’ 기자들 중 한 명이었다.

    덕분에 유럽에서도 어느 정도 인정을 받고 있는 기자였는데, 그런 사람이 글을 기고했다는 것에 곧 커뮤니티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싸움을 멈추고 그의 글을 읽기 위해 시선을 옮겼다.

    길지 않은 글이었고, 내용도 냉정한 평가보다는 경기에 대한 감상이 주를 이루고 있던 글은 마지막에 다른 무엇보다 어릴 때부터 재혁을 보아왔던 기자로서 또 한 번 그가 품고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 무대였다는 점에서 크게 호평을 했고, 해당 기사를 읽은 사람들은 기사에 댓글을 달고 다시 커뮤니티로 돌아와 다시 한 번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확실히 이상민 기자님이 인정한 선수라면 실력적인 부분에선 부정할 수 없죠.]

    [다른 누구보다 다양하고 오랫동안 축구를 보아왔던 분이잖아요? 하지만 역시 자신이 진짜 원하는 포지션인 미드필더로 뛰지 못하고 있는 걸 보면 아쉽긴 하네요.]

    [그래서 이상민 기자님도 그렇게 썼잖아요. 지금은 혹평할 때가 아니라 기다릴 때라고. 저도 일단 최재혁 선수가 자기 포지션을 찾을 때까진 기다려 보렵니다.]

    [하긴. 이제막 데뷔한 선수한테 너무 날을 세워서 평가를 하려고 했던 듯. 죄송요. 어린 선수가 어릴 때부터 해외에서만 뛰어가지고 고생이 많았을 텐데. 앞으론 응원만 해주렵니다.]

    이상민 기자의 글을 읽고 마음이 한 차례 움직인 사람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은 재혁이 유망주와 후보군이 아닌, 붙박이 주전이 되는 순간까지 응원하겠다며 훈훈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물론 그 사이에서도 몇몇 사람들은 마지막까지 악에 받친 글들을 썼지만 말이다.

    그렇게 온라인 상에서 일어났던 소동이 한 차례 진정이 되어 가고 있을 동안···.

    “그러면 시간 끝. 다들 펜을 내려놓으시고, 뒤에서부터 시험지를 걷도록 하겠습니다.”

    “아···. 다 못 풀었는데!”

    “선생님 잠깐만요. 저 이거만···.”

    “얼른 가지고 오세요. 1분 안에 가지고 오지 않으면 전부 0점 처리하겠습니다.”

    학교에서 쪽지 시험을 치렀던 재혁은 또래 아이들이 비명을 지르며 울상을 짓고 있는 사이를 유유히 지나쳐 자신의 답안지를 제출했다.

    선생님은 다른 누구보다 자신있게 답안지를 제출한 재혁을 신기하게 보다가 다른 학생들을 닦달했고, 혼잡스러운 교실을 빠져나온 재혁은 가방을 챙겨들고 운동장으로 향했다.

    맨체스터 아카데미의 방과후 훈련이 진행되고 있는 장소였다.

    이미 먼저 도착해 있던 아이들은 공을 가지고 놀거나 몸을 풀고 있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다가 재혁도 슬그머니 어깨에 걸치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고, 재혁을 누구보다 먼저 발견한 자메인 로스가 그에게 다가와 반갑게 손을 흔들면서 인사를 건넸다.

    “재혁! 왜 이렇게 늦었어?”

    “난 진학반이잖아. 시험이 있었거든.”

    “아, 그래? 그럼 얼른 옷만 갈아 입고 나와. 다 같이 스트레칭을 하다가 가볍게 미니게임을 하기로 했거든. 괜찮지?”

    로스의 질문에 재혁은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럼 나중에 보자면서 로스는 먼저 자리를 떠나 패스를 돌리고 있던 친구들 사이에 섞였다.

    그 뒤로 재혁은 탈의실 안으로 사라졌고, 로스는 아무렇지 않게 동료들과 패스를 주고 받다가···.

    “야, 로스.”

    “응?”

    “쟤 왜 불렀어?”

    “왜 부르냐니?”

    “쟤 때문에 너 콜업 못 받았잖아.”

    한 친구가 한 말에 로스의 눈썹이 살짝 꼬였고, 그 뒤로 다른 친구들의 말이 이어지는 것을 가만히 자리에 서서 듣기 시작했다.

    “로스가 뛰는 자리가 오른쪽 풀백인데, 저녀석 때문에 못 올라간 게 맞지. 쟤만 아니었으면 이번 프리 시즌에 로스가 1군에 합류 했을 걸?”

    “그것도 그렇고, 사실 팀에서 취급 받는 걸 보면 우리랑 별 다를 바 없는 유소년 아카데미 선수잖아? 그런데 왜 특별 취급을 받는 것처럼 혼자만 빼고 다니냐?”

    “게다가 학교에서도 진학반이라던데.”

    “와, 진짜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네.”

    한 번 이야기를 시작하자 끊임없이 언급하면서 재혁에 관한 생각들을 풀어놓기 시작한 아이들.

    물론 좋은 이야기는 하나도 없었다.

    그런 친구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로스는 머리를 긁적이더니 목을 가다듬었고···.

    “동양인이면서 그런데 또 호주에서 살다 왔다며? 이거 사실 완전 부자면서 운동은 취미로···.”

    “그게 중요한가?”

    “어?”

    “재혁이가 팀에 합류해서 여러 가지 상황들이 생긴 것도 맞지만, 그게 중요하냐고.”

    “···.”

    갑작스런 로스의 한 마디에 다들 할 말을 잃은 얼굴로 얼어 붙었고, 그런 친구들을 향해 로스가 계속 말했다.

    “어쩌면 오히려 우리한테 기회가 아니냐? 어리지만 그래도 1군에 합류해서 뛰었던 친구잖아. 그런 친구랑 같이 공을 차다보면 배울 점도 있을 거고, 그러다보면 분명 우리한테도 기회가 오겠지. 그러기 위해서 방과후 아카데미 훈련이 있다고 알려준 거고, 데리고 온 건데. 벌써부터 배척하려고 하면 어떡해?”

    “···.”

    “그리고 따지고 본다면 내가 실력이 부족해서 콜업되지 못한 게 맞지. 이번에 풀백으로 팀에 합류한 선수들을 봐봐. 그 사이에서 내가 낄 틈이 있겠냐? 오히려 최재혁, 저녀석이 대단한거야. 그 사이에서 교체라도 한 경기를 뛰어 봤으니까.”

    그러니까 너무 반감을 갖지 마라.

    로스는 마지막까지 친구들에게 재혁이 돌아오면 잘 대해줄 것을 당부했고, 모두가 고개를 끄덕인 것을 확인하고 빙긋 웃었다.

    그러다가 슬그머니 떠오른 기억에 머리를 긁적였다.

    양발 잡이로 양측면을 가리지 않고 뛸 수 있는 풀백인 자메인 로스였으나, 이번 시즌에 영입된 선수들을 떠올리면 아무래도 앞으로의 미래가 험란할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토트넘에서 온 카일 워커, 레알 마드리드의 다닐루, 그리고 모나코에서 넘어온 망디까지.

    하나같이 리그 톱 수준, 그리고 이적 자금으로도 적지 않은 금액을 투자한 선수들이었다.

    ‘그런 선수들 사이에서 과연 내가 콜업되는 일이 있을까?’

    일단 큰 소리는 쳤지만 자연히 차오르는 한숨을 속으로 삼킨 로스는 멈췄던 공을 굴리면서 발을 풀었고, 그러는 사이 탈의실을 빠져나온 재혁이 로스의 곁으로 다가와 말을 붙였다.

    “몸은 다 풀었어?”

    “응? 대충은. 넌 아직이지? 나랑 패스나 주고 받을까?”

    “나를 대신해 변호사를 자처한 친구랑 패스를 주고 받는다면 내 쪽에서 영광이지.”

    “!”

    재혁의 말을 들은 로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고, 그런 로스를 바라보다가 씨익 웃은 재혁이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발밑에 굴러온 공을 로스에게 넘겨주며 말했다.

    “그렇게 큰 목소리로 이야기를 떠드는데, 안 듣고 배기냐?”

    “혹시 다른 애들이 한 말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면···.”

    “설마. 뭐, 그럴 수도 있는 거지. 사실 따지고 본다면 다들 경쟁자잖아? 1군에 합류할 수 있는 선수는 한정되어 있고, 필드에서 뛸 수 있는 선수는 오직 11명 뿐이니까. 사실 나도 붙박이 주전이 아니니 열심히 경쟁을 해야 할 처지에 있는 거지.”

    모두가 경쟁자다.

    그런 재혁의 말에 공감할 수 있었던 로스는 한 편으로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지만, 여기에 우리가 모인 건 어디까지나 서로의 발전을 위해서···.”

    “알고 있어.”

    “알고 있다고?”

    “이곳을 봐주시는 코치님이 따로 계신 것도 아니고, 우리들만 있는 거 자체가 아마 따로 훈련을 하기 위해 모인 게 목적인 거겠지.”

    “!”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또 마음에 드네.”

    스윽, 턱주변을 오른손으로 쓸어내면서 슬며시 미소를 떠올린 재혁이 조그마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직 고등학생인지라 아침에 시작되는 1군 팀의 오전 훈련에 참가할 수 없고, 그나마도 1군 코치들과 할 수 있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시간동안 진행되는 개인 훈련 뿐이었다.

    물론 과르디올라 감독이 때에 맞춰 사용할 수 있게 개인 전술을 포함해 팀 대비 훈련을 위한 코스를 따로 짜두었고, 또 혼자서 그를 진행하면서 컨디션을 조절할 수는 있었지만, 사람들과 하는 훈련을 항상 그리워하던 재혁이었다.

    한국에서도, 호주에서도. 그 누구보다 오랜 시간을 연습과 훈련에 투자했던 재혁에게 있어서 영국에서의 생활은 한적하다 못해 따분할 정도였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라면 다른 생각 안하고 온전히 훈련에만 시간을 쏟을 수 있겠어.’

    따로 혼자서 기본기를 연습할 장소도 마련되어 있고, 원한다면 또래 선수들과 발을 맞추거나 상대하면서 기술과 패스등을 연습할 수도 있다.

    게다가 시간도 학교를 다니고 있는 자신들과 똑같으니, 더 없이 만족스러운 상황.

    재혁은 굳어 있는 어깨를 풀고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흔들어 보다가 정면에 자리하고 있는 로스를 웃으며 바라본 뒤 말했다.

    “내 파트너로 뛰려면 좀 힘들 수도 있는데 괜찮겠어?”

    “무려 1군에서 뛰었던 선수님을 맞추려면 당연히 죽을 노력을 해야지.”

    “오, 마음가짐이···.”

    “만년 유망주란 그런 거야. 죽을 노력을 해야 기회가 오거든.”

    이번엔 로스가 재혁의 말을 끊으며 미소를 보였고,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친 뒤 고개를 끄덕이며 발을 맞췄다.

    앞으로 함께 할 많은 날들을 중 그 첫 날의 시작이었고, 언제고 함께 필드에서 뛸 날이 있겠지라는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에게 기회는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다.

    8월이 지나고 9월.

    벌써 7라운드 이상 진행된 리그 일정표에 작성된 경기 결과를 쭉 훑어보던 과르디올라 감독이 며칠 뒤에 있을 경기를 머릿속에 떠올리면서 수염을 긁적였다.

    그의 눈에 이번 시즌의 우선 순위에서 한참 뒤떨어지는 경기인 EFL컵 대회의 경기 일정과 그 상대 팀이 눈에 들어왔다.

    “흐음, 컵 대회라.”

    1부 리그에 속한 참가팀이라 32강부터 시작되는 EFL 컵 대회의 첫 경기와 그 상대 팀을 확인하던 과르디올라 감독이 슬슬 선수 명단이 적힌 종이들을 넘기면서 새로운 전술지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 놓고 펜을 손에 쥐었다.

    아무래도 그동안은 중요도가 높은 리그 경기들과 챔피언스 리그 예선에 중점을 맞춘 선수들을 선발했지만, 컵 대회라면···.

    “선발로 충분히 쓸 수 있겠지.”

    백지로 누구의 이름도 적혀있지 않던 곳에 가장 먼저 재혁의 이름을, 그 다음으로 자메인 로스의 이름을 적은 과르디올라 감독은 하나둘 빈 곳에 선수들의 이름을 적어 넣으면서 11명의 선발진을 꾸렸다.

    그동안 교체 명단에만 이름을 올리거나, 그나마도 본머스 전을 제외하면 제대로 뛴 적이 없었던 재혁의 첫 선발 경기가 정해진 것이다.

    < 68. 재혁의 존재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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