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67화 (67/225)
  • < 67. 명품 조연 >

    챠박, 챠박.

    잔디 위를 걸으면서 진영을 찾아 움직이던 재혁이 슬쩍 중원에 눈빛을 흘렸고, 그런 재혁을 발견한 다비드 실바가 생긋 웃으면서 재혁의 어깨를 툭 건드렸다.

    “네 위치는 거기가 아니잖아?”

    “알고 있어요.”

    실바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던 재혁은 그를 따라 웃으면서 계속 말했다.

    “하지만 언제고 미드필더로 뛰고 싶어서 말예요.”

    재혁이 건넨 말을 들은 실바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면서 물었다.

    “그 말은 나를 밀어내겠다는 말이냐?”

    “생산적인 경쟁자, 라고 말하면 좀 더 있어 보일까요?”

    “그거나 저거나.”

    재혁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던 실바는 예의 장난스러운 얼굴로 재혁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걸치면서 말을 이었다.

    “너무 조급해 하지마.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 너라면 충분히 뛸 수 있는 자리니까. 하지만 오늘은 아니야. 네가 피치에 올라온 이유가 뭔지, 잊지 않고 있지?”

    실바가 건넨 말에 재혁은 간단히 고개만 끄덕였고, 그런 재혁의 머리칼을 쓸어준 다음 실바는 멀어졌다.

    그렇게 오른쪽 풀백 위치에 들어선 재혁은 호흡을 고른 뒤 주위를 살폈다.

    비록 오늘은 이곳에서 뛰지만, 꼭 언제고···.

    ‘내 자리는 미드필더다.’

    그곳으로 돌아가리라.

    속으로 다짐하면서 고개를 털어낸 재혁이 눈을 빛냈고, 곧 주심의 휘슬과 함께 맨시티의 공으로 후반전이 시작됐다.

    ***

    ‘선수 교체라고?’

    이제는 당당하게 AFC 본머스의 공격의 핵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조슈아 킹이 맨체스터 시티의 오른쪽 풀백으로 새로 들어온 선수를 확인하면서 미간을 좁혔다.

    생긴 것도 평범하고, 특이할 게 없어 보이는 어린 선수가 카일 워커를 대신해 들어온 것에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맨체스터 시티 쪽에서 계속해서 공을 주고 받으면서 점유율을 끌어 올리는 모습을 쭉 지켜보고 있던 킹은 공을 따라 이동하면서 기본적인 압박을 유지하며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했다.

    ‘저 88번에 대해 감독님께서 따로 이야기를 해준 게 있던가?’

    경기 전 대화, 그리고 후반전을 준비하는 동안 나누었던 대화에서 혹시라도 88번에 대해 감독이 언급한 것이 있는 지를 떠올려보려던 킹은 곧 고개를 가로 저을 수밖에 없었다.

    비단 감독 뿐만이 아닌, 어느 누구도 그에 대해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었으니까.

    오늘 경기를 준비하던 과정도 맨체스터 시티의 지난 3경기를 분석하던 것으로 시작되었으니.

    이번 경기가 데뷔 무대인 88번에 대해 알고 있는 바가 있을리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상대에 대해 방심할 수 없었던 킹은 재혁이 공을 만지거나 움직일 때 취하는 모션을 주의 깊게 살피면서 끊임없이 생각했다.

    ‘터치는 평범한데. 패스도 무난하고.’

    ‘피지컬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교체 된 카일 워커가 신체 능력이나 속도 면에서 더 빠르지 않나?’

    ‘그냥 후방에 머무르면서 잠그는데 특화된 선수인 건가?’

    쉬지 않고 재혁을 살펴보며 눈에 보이는 데이터를 수집하는데 여념이 없었던 킹.

    그는 곧 몇 가지 사실들을 토대로 나름의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 교체는 맨체스터 시티의 자충수라는 결론을 말이다.

    카일 워커를 상대로 왼측면에서 활동하는 프레이저가 득을 볼 수 있었던 것은 공간만 주어진다면 언제든 크로스를 올릴 수 있는 프레이저의 능력에 있었던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프레이저의 돌파력이 절대로 약하다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후방에서 수비에 전념할 수 있는 선수를 투입한 게 본머스의 유일한 득점 루트를 막아내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면 과르디올라 감독은 그가 생각한 것보다 멍청한 감독이다, 라고 킹은 옅은 미소를 띠며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사실에 고개를 갸웃였다.

    ‘···그런데, 지금 몇 분째 공을 가지고 있는 거지?’

    후반전이 시작되고 시간이 꽤 흘렀는데, 아직까지도 맨체스터 시티에선 공을 빼앗기지 않고 패스를 주고 받으면서 공략할 틈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자신들의 압박과 수비벽이 견고해서 맨체스터 시티가 섣불리 공격을 시도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라 생각했던 킹은 중앙에서 실바가 지속적으로 전진 패스를 시도하고 있음을 확인하고 문제가 그게 아님을 알아차렸다.

    지금 맨체스터 시티는 수비에 막히고 있는 게 아닌···.

    ‘저게 빌드업을 준비하는 과정이라고?’

    자신들의 의지대로 경기를 조율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그럴리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킹이었으나, 좌우 측면의 이동이 자유롭고, 기회가 왔을 때 중원에서 단번에 최전방까지 뚫어내는 상대의 패스 워크를 보고서 확신할 수 있었다.

    지금 맨체스터 시티에는 단순히 안정감만 더해진 것이 아닌, 길을 읽어내는 눈이 추가되었다는 것을 말이다.

    실바에서 시작되어 케빈, 이후 아구에로로 이어지는 삼각 패스가 마지막에 슈팅까지 연결되는 모습을 뒤에서 지켜보던 킹은 보루스 골키퍼가 손끝으로 간신히 슈팅을 걷어내는 것을 확인하고 내심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토해냈다.

    후반전에 갑자기 기세가 오른 맨체스터 시티의 공세를 보루스 골키퍼가 잘 막아주었으니, 이제 돌아오는 기회를 잘 살려 흐름을 바꾸면 되리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맨체스터 시티가 시도하는 코너킥을 수비하기 위해 박스 안으로 향했던 킹은 슬쩍 주변을 살폈다.

    먼저 코너 플래그에서 코너킥을 준비하고 있는 케빈 데 브루위너가 눈에 들어왔고, 장신의 선수들이 세트에 맞춰 이리저리 몸을 이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센터 서클 근처, 맨시티의 최후방에 머물면서 역습을 막기 위해 서 있는 두 명의 선수들을 중 한 명인 재혁을 눈에 담으면서 킹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이런 상황이라면 공만 빼낼 수 있다면 충분히 역습을 시도할 수 있겠어.’

    최전방에서 중앙선에 한쪽 발을 걸치고 있는 데포를 포함해 그의 양옆에서 각자의 위치를 지키고 있는 아이브와 프레이저.

    만약 코너킥을 끊어내고 저 셋에게 플레이를 연결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추가 득점을 노릴 만한 상황이 분명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을 떠올리면서 머릿속을 정리한 킹이 케빈이 올린 코너킥을 쫓아 고개를 들었고,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동시에 그와 함께 경쟁을 하려는 듯 콤파니가 같이 허공에 떠올랐지만, 위치를 먼저 선점한 킹의 머리가 먼저 공에 닿았고, 강력했던 코너킥만큼이나 공이 공중으로 높게 떠올랐다.

    본머스 선수들이 동시에 다리에 힘을 주어 달려나간 것은 그 직후였다.

    “빠르게 퍼져!”

    마침 공이 떨어지는 장소에 같은 팀의 미드필더, 서먼이 위치하고 있었기에, 동료가 공을 컨트롤 하는 것과 동시에 송곳같은 역습을 시도할 목적으로 큰 소리로 고함을 내지른 것이다.

    본머스의 다른 선수들도 킹의 의도를 바로 파악하고 연습했던 대로 비어있는 공간을 찾아 달리면서 좌우 측면과 중앙을 노리고 뛰기 시작했고, 킹 또한 서먼이 패스를 줄 수 있는 장소를 찾아 달리면서 그의 눈앞을 살폈다.

    왼쪽을 노리고 달려드는 프레이저의 뒤를 받쳐줄 목적으로 그의 뒤를 쫓아 이동하는 킹의 눈에 맨체스터 시티의 88번이 그에 맞춰 잰발로 거리를 조절하고 있는 게 눈에 보였고, 곧 서먼의 패스가 프레이저의 발을 향해 굴러가는 것을 확인하고 킹이 다리에 힘을 주어 속도를 붙였다.

    ‘이대로라면 왼쪽으로 내가 오버래핑해서 들어가는 걸로 충분히 돌파가 되겠어!’

    혹여 프레이저가 자신에게 패스를 주는게 아닌, 중앙을 파고드는 선수라던가 반대 측면을 따라 달리는 동료에게 연결만 해주어도 충분히 위협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 것이리라.

    게다가 상대는 카일 워커에 비해 속도도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어린 선수이니, 프레이저가 무리없이···.

    터엉!

    “···?!”

    킹은 귓가로 들린 이질적인 소리에 두눈에 물음표를 떠올렸고, 고개를 돌렸을 때 연출된 장면이 기대와 다른 것에 의아한 얼굴로 헛숨을 토해내며 중얼거렸다.

    “공을···, 끊었어?”

    프레이저의 발밑에 있어야 할 공이 맨시티의 88번에 의해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갑작스런 상황에 킹의 발이 멈췄고, 프레이저도 당황했는지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재빨리 멀어지려는 공을 향해 발을 움직였다.

    어떻게든 공을 다시 잡고 공격을 이어가려는 심산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재혁의 움직임이 더 빨랐고, 재혁이 오른발로 공을 건드리는 것을 확인하면서 프레이저가 입술을 깨물었다.

    ‘어린 자식이···!’

    자신보다 한참은 어린 선수에게 공을 빼앗겼다는 부끄러움, 역습 찬스를 날려버린 것에 대한 책임감 등등 다양한 감정이 뒤섞인 프레이저는 재혁의 발밑에 있는 공을 노리고 압박에 들어갔고, 재혁과의 거리를 순식간에 좁히면서 왼발을 뻗었다.

    좌우, 어느 쪽으로든 공이 빠지는 순간 두 번째 압박을 시도함과 동시에 몸싸움으로 공을 빼앗을 심산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공을 향해 왼발이 나아가면서 재혁의 행동을 한눈에 담던 프레이저의 두눈이 매섭게 빛났다.

    자, 어느 쪽이냐.

    얼른 선택하라는 듯, 곧 프레이저의 발이 공에 닿을락말락한 거리까지 나아갔을 때, 마침내 재혁이 오른발에 놓고 있던 공을 슬쩍 발 안쪽으로 컨트롤 하다가···.

    사륵.

    “!”

    공을 가볍게 대각선으로 굴렸다.

    아주 느릿하게, 하지만 정확하게 재혁의 의지대로 공은 굴러갔고, 잔디 위를 종종거리며 구른 공은 정확하게 벌어진 프레이저의 다리 사이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설마 여기서 공을 가랑이 사이로 빼낼 줄이야.

    당황한 프레이저가 황급히 몸을 돌리려고 했으나, 재혁은 이미 그의 옆을 지나치고 있었고, 그런 재혁의 옆으로 이번엔 킹이 달려들었다.

    ‘아직 안 늦었어!’

    비록 공을 빼앗기긴 했으나, 아직 중앙선 근처였고, 지금이라도 공을 빼앗는다면 어떻게든 공격을 다시 이어갈 여지가 남아있는 상황이다.

    절대로 이런 기회를 그냥 놓칠 수 없다고, 킹이 단단히 각오한 얼굴로 프레이저에 이어 재혁이 다시 발밑에 놓은 공을 노리고 다 몸을 날렸는데···.

    투웅, 퉁!

    “?!”

    팬텀 드리블.

    재혁의 오른쪽 발에 머물던 공이 순식간에 왼쪽으로 이동하더니 앞으로 움직이면서 순식간에 킹의 압박에서 벗어난 것이다.

    마치 자신이 덮쳐올 것까지 예측했다는, 기계적이면서 정확한 판단에 킹은 당황했으나, 그가 더 놀란 건 그 뒤에 이루어진 재혁의 플레이에서였다.

    두 선수의 압박에서 벗어난 선수라면 적어도 한 템포 정도는 쉴 만 하거늘, 재혁은 거기서 흐름을 놓치지 않고 곧장 다이렉트 패스를 전방으로 찔러넣은 것이다.

    본머스의 선수들은 모두 저 패스가 어디로 향하는지 의아해 했으나,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들은 재혁의 패스가 이동하기 무섭게 진영을 새로 꾸렸다.

    특히 재혁의 패스를 기다리고 있던 실바의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까지 떠올라 있었다.

    “···아!”

    그제야 맨체스터 시티에서 재혁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파악해낸 킹이 탄식을 흘리면서 눈동자를 떨었다.

    재혁은 단순한 풀백으로 투입된 게 아니었다.

    어린 선수에게 실전 경험을 쌓아주기 위해 투입한 것도 아니었다.

    전방에 위치한 실바를 보조해줄 후방에 위치한 플레이 메이커.

    ‘잔뜩 쌓여있는 중원의 압박에서 자유로운, 측면에서 전방으로 패스를 이어줄 역할···!’

    단순히 공격과 수비, 두 가지만을 떠올리고 있을 위치에서 재혁은 운영이란 새로움을 팀에 불어넣어 주기 위해 투입되었던 것이다.

    그것을 이해하자 후반전 초반, 왜 맨체스터 시티의 패스들이 쉬지 않고 연결되었는 지를 킹은 이해할 수 있었다.

    저 88번이 후방과 전방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패스들의 윤활유 역할을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젠장.”

    재혁의 패스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맨체스터 시티의 공세를 막기 위해 킹이 다시 뒤로 물러서면서 이를 갈았다.

    그래도 지금이라도 알아차렸으니, 앞으로 비슷한 상황에 맞춰 대비할 수 있겠다고 머릿속으로 계속 생각하면서 이번 공격을 어떻게든 막아내기 위해 수비 라인에 합류하려고 뒷걸음질을 칠 때였다.

    그의 눈에 재혁이 실바에게 패스를 내준 이후에도 계속 달리고 있는 게 들어왔고, 재혁이 향하고 있는 위치를 확인하고 눈썹을 꼬았다.

    ‘중앙으로 다비드 실바의 움직임을 따라 침투한다고?!’

    저게 대체 무슨 행동인지 예상이 되질 않는다고 이를 갈고 있는 킹과 달리, 재혁은 편안한 얼굴로 실바와 눈을 마주친 후 빙글 몸을 돌렸다.

    실바의 패스가 재혁이 있는 곳을 향해 굴러간 것은 그 직후였고, 본머스의 수비수들을 포함해 킹까지 어떻게든 재혁을 향해 굴러가는 패스를 끊어 내겠다고 몸을 날렸으나···.

    “!”

    재혁은 공을 건드리지 않았다.

    실바의 패스는 처음부터 같은 방향에서 좀 더 안쪽에 위치해 있는 스털링을 노리고 있었던 것이고, 재혁은 단순히 본머스 선수들의 시선을 끌기 위한 미끼였던 것이다.

    모두가 속았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고 자신에게서 멀어지는 것을 멍하니 바라보던 재혁은 피식 실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이런 게 명품 조연이지.”

    스털링은 완벽히 자유로워진 상황에서 박스 안으로 침투하고 있었고, 그 옆을 케빈이 따라 달리는 상황.

    아마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완벽한 득점 찬스이리라.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어떤 상황이 이어질지, 머릿속으로 그려졌던 재혁은 반바지를 툭툭 털어낸 뒤 중원에서 스털링에게 패스를 뿌려준 실바를 바라보면서 또 한 번 자신만 들릴 정도로 조그마한 목소리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 혼잣말은 뒤이어 터진 관중들의 함성 소리에 의해 묻혔지만, 재혁은 또렷하게 기억하면서 가슴 속에 그 말을 담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주연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겠다고.

    케빈의 동점골을 시작으로 맨체스터 시티는 반격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고, 본머스를 2대1로 역전하는데 성공하면서 원정 경기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MOM는 모두가 예상한 두 골의 도움을 기록한 다비드 실바였지만.

    “본머스와의 경기에서 이길 수 있었던 건 최재혁 선수가 있었기 때문이죠. 제 생각대로 아주 잘 따라줬습니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경기 후 이어진 기자회견 자리에서 재혁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지 않았다.

    < 67. 명품 조연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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