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62화 (62/225)

< 62. 그림 >

챠박, 챠박.

빗물에 젖은 잔디 위를 걸어 올라가면서 재혁이 숨을 삼키고 뱉기를 반복했다.

터치 라인에 가만히 서있자, 곧 그의 눈앞으로 다비드 실바가 나타났고, 긴장하지 말라며 어깨를 토닥인 뒤 사라졌다.

재혁은 그런 실바를 향해 간단히 고개를 끄덕인 다음 경기장 위에 첫 발을 내디뎠다.

관중들의 박수 소리가 들린 것은 그 직후였다.

짝짝짝!

“와아아아···!”

“최재혁···!”

“···힘내라!

‘잘 안 들려.’

장내 아나운서의 소개 이후 요란한 함성 소리와 함께 재혁의 귓가를 어지럽히는 소리들이 잔뜩 뒤섞였다.

듣기 힘들었지만, 간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목소리들이 들렸고, 몇몇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는 것에 재혁은 한동안 자리에 멍하니 서있다가 케빈이 다가와 그의 어깨를 건드린 것에 다시 한 번 정신을 차렸다.

“재혁, 왜 그래?”

“아뇨. 별 거 아니에요. 그냥···.”

“그냥?”

재혁이 뱉은 뒷말을 따라 말하면서 케빈이 되물었고, 재혁은 그런 케빈을 향해 작게 웃어보이면서 답했다.

“이제야 한 보 걸은 느낌이라서요.”

“···?”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케빈이 붉게 상기된 얼굴을 슬쩍 기울였고, 케빈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재혁이 기운을 담아 계속 말했다.

“그냥 저한테 하는 혼잣말이었어요. 신경쓰지 마세요.”

“뭐, 그래. 지금이야 혼잣말을 하든, 뭘하든 자유니까. 다만 앞으론 아니야. 네 패스를 기다리는 선수들은···.”

“케빈. 지금까지 제가 준 패스들이 받기 힘들었던 적이 있었나요?”

재혁의 갑작스런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혔던 케빈은 무어라 대꾸하지 못하고 두눈만 크게 껌뻑였고, 그런 케빈을 향해 재혁은 생긋 웃어 보였다.

“여태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겁니다. 그러니까 패스에 관해선 걱정하지 마세요. 저도 지는 경기는 하고 싶지 않거든요.”

지는 경기는 하고 싶지 않다.

재혁의 그 말을 들은 케빈은 이내 재혁을 따라 웃었다.

지금 자신이 누굴 걱정하고 있었단 말인가?

이제 겨우 17···, 곧 18살이 되는 주제에 맨체스터 시티에서 주전 경쟁을 펼칠 아이···, 아니. 선수에게 말이다.

재혁의 미소를 입술로 빙그레 반원을 그리던 케빈이 재혁의 주먹에 자신의 주먹을 맞대면서 말했다.

“그래. 한 번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나도 이대로 지긴 싫거든.”

***

“흐음.”

“맨체스터 시티에서 다비드 실바를 대신해 넣은 선수가 저 친구인가요?”

지단 감독이 교체 투입되는 재혁을 빤히 바라보면서 턱을 쓸어내릴 때, 그의 옆으로 호날두가 다가왔고, 곁눈으로 호날두의 얼굴을 살핀 지단 감독이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실바의 움직임이 평소와 달라 보이더니, 이제야 교체를 해주는군.”

“트래핑이라던가, 패스들이 둔탁해 보이긴 하더군요. 하지만 실바를 대신해서 넣은 게 저런 꼬마라니. 우습게 보인 걸까요? 아니면 맨시티는 벌써 이기기를 포기한 겁니까?”

단조로운 호날두의 목소리를 들은 지단은 피식 실소를 흘리더니 호날두를 돌아보며 그에게 되물었다.

“이기기를 포기했다고? 다른 누구도 아니고 과르디올라 감독이?”

“실리적인 축구를 하시는 분이잖아요. 감독으로서 존경하긴 하지만, 그만큼 프리 시즌의 의미를 그 누구보다 확실하게 사용하실 분이죠.”

“틀린 말은 아니야. 하지만 한 가지가 완벽히 어긋났군.”

“?”

눈동자에 물음표가 떠오른 호날두를 향해 지단 감독이 말을 이었다.

“과르디올라 감독은 경기를 포기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어.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지. 오히려 저 선수를 투입하면서 그 어떤 때보다 확실히 보여주고 있는 거야.”

“뭘요?”

“이번 경기에서 기필코 이기겠다는 의지를 말야.”

“···?”

지단 감독의 말을 여전히 이해할 수 없어 호날두가 미간을 모았고, 그런 선수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지단 감독이 말을 끝마쳤다.

“한 번 어떤 ‘그림’이 그려지는지 지켜보자고. 사실 나도 저 꼬마가 그리려는 그림이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거든.”

“그림이요? 저 친구는 원래 풀백이 아니었습니까? 변형 3백을 위해 풀백이었던 친구를 미드필더로 사용하는 줄 알았는데, 그림을 그릴 수 있어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의 경기를 영상으로 잠깐 지켜본 적이 있었던 호날두가 지단 감독에게 물었고, 지단은 그런 호날두를 향해 고개를 가로 저으며 대꾸했다.

“오히려 반대야. 미드필더인데 풀백으로 기용을 했던 거지.”

“!”

“그러니까 더 궁금해지지 않나? 저 친구가 뿌리는 물감의 색이 어떤 색일지.”

다른 누구도 아닌 지네디 지단.

그 남자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턱끝을 매만지면서 남긴 말에 호날두는 조용히 침을 삼킨 뒤 시선을 필드 위로 옮겼다.

눈동자에는 지단이 그런 것처럼, 아주 옅은 호기심이 떠올라 있었다.

***

오타멘디와 스톤스, 그리고 그 앞에 프레난지뉴를 놓는 수비진을 구축한 진영.

거기서 실바가 위치하고 있던 자리는 중앙에서 왼쪽에 치우친 미드필더였다.

당연히 실바를 대신해 들어간 재혁의 위치도 실바와 같았고, 역할도 비슷했다.

한 가지 사실, 재혁은 실바가 아니라는 점만 빼고 말한다면 말이다.

‘우습게 보이고 있군.’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이 자신을 지켜보는 시선을 경기장에 들어오는 순간부터 느낄 수 있엇던 재혁의 입술이 살짝 비틀렸다.

실바를 대신해 들어왔다고?

처음보는데? 뭐하는 녀석이냐? 라는 얼굴이 기본이었고, 한 차례 얼굴만 살핀 뒤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돌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당연한 일이리라.

천문학적인 몸값과 주급을 자랑하는 저들에게 자신은 이제막 걸음마를 시작한 햇병아리에 불과해 보일 테니까.

하지만 재혁이 경기를 뛰는 이유는 상대 선수들 때문이 아니다.

잔디를 가볍게 몇 차례 즈려 밟은 재혁은 주위를 둘러보면서 같은 유니폼을 입고 있는 선수들을 살폈다.

케빈 데 브루위너, 스털링, 자네, 그리고 아구에로.

자신과 함께 중원과 공격을 책임질 선수들은 레알 마드리드의 선수들과 확연히 다른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을 향한 믿음.

같이 훈련을 하고, 경기를 뛰면서 쌓은 신뢰를 바탕으로 생긴 믿음이었고, 재혁이 필드 위에 올라왔을 때에도 굳건한 신뢰를 보여주고 있는 동료들을 보면서 재혁은 마음을 다잡을 수 있었다.

아마 지금 많은 사람들이 맨체스터 시티에서 경기를 포기한 것처럼 보일 수 있겠지만···.

‘오히려 내가 들어왔기 때문에 변화가 생길 것이다. 그런 생각을 오늘 경기 이후 품게 만들어 주겠어.’

생각을 정리한 재혁이 호흡을 고르며 공을 찾아 고개를 옮겼고, 레알 마드리드의 드로잉으로 재개된 경기는 관객의 환호를 받으며 다시 생기를 찾아가기 시작했다.

먼저 측면, 이후 중앙. 그 뒤로도 여러 차례 패스를 주고 받으면서 공간을 노리려는 레알 마드리드 선수들은 지속적으로 모드리치에게 공을 배급해주면서 그가 만들어낼 기회를 기다렸다.

측면을 뚫어 위협적인 크로스를 올리는 상황도, 혹은 중앙에 밀집되어 있는 수비수 사이를 뚫어내는 패스를 만들어내는 것도, 결국 중원을 전체적으로 관리하고, 통솔하고 있는 모드리치의 영향력을 기반으로 생기는 것이었으니까.

레알은 이기고 있는 경기에서 무리하지 않았고, 무난하게 운영하면서 자신들이 현재 맨체스터 시티보다 ‘강하다’라고 판단이 드는 중원 싸움에 계속해서 힘을 실어주었다.

그런 레알의 의도를 중원에서 모드리치를 상대하고 있는 재혁이 누구보다 확실히 알 수 있었고, 그 어떤 때보다 적극적으로 몸싸움에 임하면서 공의 소유권을 뺏어 오기 위해 노력했다.

다만, 모드리치가 느끼기에 그런 재혁의 노력은 우스워 보일 뿐이었다.

‘몸은 유연한 것 같기는 한데, 힘을 지탱해줄 근육은 많이 모자란 것 같군.’

공을 발밑에 두고 왼쪽으로, 때로는 오른쪽으로 이동하면서 재혁의 압박을 가뿐하게 풀어내려는 모드리치는 드리블을 계속하면서 재혁에 대한 솔직한 감상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속도가 제법 괜찮고, 몸도 유연하니 균형도 좋은 편이었지만, 기본적으로 둘 사이에 존재하는 차이점을 극복할 정도는 아니었던 것이다.

자신이 컨트롤 하는 공을 향해 다시 한 번 몸을 들이 밀면서 발을 내뻗는 재혁의 견제를 왼쪽 팔을 쭉 뻗는 것으로 가볍게 물리친 모드리치는 파트너인 이스코에게 패스를 건네 준 뒤, 균형을 위태롭게 유지하면서 넘어지지 않으려는 재혁의 모습을 눈에 담으면서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다치지 않을 정도로만 뛰라구. 어디까지나 좋은 경험이 될 경기니까 말야.”

진심으로 어린 선수를 걱정하는 목소리로 말을 한 모드리치였으나, 그런 상대의 말을 들은 재혁은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며 반바지를 툭툭 털어내면서 답했다.

“글쎄요.”

“···글쎄요?”

심드렁한 목소리로 재혁이 되뇐 것을 앵무새처럼 따라 말한 모드리치의 눈썹이 꼬였고, 그런 모드리치를 향해 재혁은 어깨를 으쓱이며 당당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굳이 배울 점을 찾자면, 이기는 경기에서 배울 수 있는 경험이 아무래도 더 많지 않겠어요?”

“!”

“지는 걸 반복해서 얻을 수 있는 경험보다는, 이기는 경기를 계속해서 이기는 습관을 기르는 게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예요. 조언은 감사합니다.”

거기까지 말을 한 재혁은 다시 수비에 들어가기 위해 멈췄던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고, 멀어지는 재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모드리치가 쓰게 웃었다.

분명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우리를 상대로 저런 말을 하다니. 아직 어려서 패기와 만용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것 같군.’

모드리치의 자존심에 어긋난 선을 한 줄 그을 만한 한 마디였음은 충분했고, 방금까지 적당히 상대해주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모드리치의 눈동자가 열의로 재차 불타올랐다.

진지하게 경기에 임하겠다고 마음을 먹으니 곧장 행동에서부터 티가 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압도적이었지만, 레알 마드리드에서 맨체스터 시티의 중원을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보다 단단하게 옥죄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점을 경기를 지켜보고 있는 캐스터와 해설자가 언급하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갑자기 경기장의 분위기가 바뀌어버렸습니다! 지금까진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친선 경기였는데, 서서히 달아오르기 시작하더니 이젠 챔피언스 리그의 본선 경기라고 생각해도 될 정도로 뜨거워졌어요!”

“그 중에서도 모드리치 선수의 활약이 눈에 띄게 커졌죠? 홀로 중원을 지배하려는 듯한 모습입니다!”

“지배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지 않나요? 존재감이 엄청나요. 왜 지단 이후 최고의 플레이메이커를 언급할 때 모드리치 선수의 이름이 가장 먼저 오르는지, 오늘을 통해 증명하려는 것 같습니다!”

수비면 수비, 공격이면 공격.

평소에도 팔방미인이라 불리던 모드리치는 오늘 경기에서도 자신이 왜 그런 별명을 갖게 되었는지를 완벽하게 증명하고 있었고, 그런 만큼 상대적으로 재혁의 존재감은 서서히 옅어져만 갔다. 아니, 잊는 것을 넘어 서서히 연민까지 품기 시작했다.

재혁은 어쩔 수 없는, 아직은 어린 선수였으니까.

아무래도 성장도 다 끝나지 않은 선수가 숨을 몰아쉬면서 바닥을 구르는 모습은 지켜보기 안쓰러운 종류의 모습이었으니.

다들 차라리 과르디올라 감독이 다시 재혁을 벤치로 불러줬으면, 이라는 생각을 품으면서 두 손을 모았고, 캐스터가 비슷한 발언을 마이크에 흘렸을 때.

모드리치는 다시 한 번 재혁을 완벽히 제쳐낸 뒤 앞으로 열린 공간을 점해가면서 드리블을 계속 했고, 오늘따라 자주 마주치는 페르난지뉴를 앞에 두고 모드리치가 두눈을 빛냈다.

‘보였다.’

측면에서 중앙으로 침투해 들어가는 이스코의 움직임.

수비벽이 패스가 향할 길을 무난하게 막아내고 있었지만, 모드리치는 아웃 프론트 패스만 성공적으로 통한다면 충분히 수비벽 뒤쪽을 향해 달리는 이스코의 발앞에 패스를 성공시킬 자신이 있었고, 그런 자신감은 곧장 행동으로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페르난지뉴, 그리고 오타멘디의 위치를 확인한 모드리치가 이제 공을 향해 발을 뻗으려고 할 때···.

투웅!

“?!”

기습적으로 옆에서 날아온 슬라이딩 태클이 모드리치의 발앞에 놓여 있던 공을 걷어냈고, 길게 넘어지면서 그의 앞을 쓸고 지나갔다.

대체 누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모드리치가 바닥에서 몸을 일으키는 선수를 향해 시선을 옮겼고.

“드디어 보였다.”

흙먼지와 함께 구겨진 맨체스터 시티의 88번을 등에 업고서 재혁이 웃는 얼굴로 몸을 일으킨 뒤 모드리치와 눈을 마주쳤다.

< 62. 그림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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