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61화 (61/225)

< 61. 교체 선수 >

“너무 실망하지 말라구.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할 때도 있는 거지.”

필드 위에서 몸을 풀기 위해 재혁과 공을 주고 받으면서 자네가 말했고, 자네가 보낸 패스를 원터치 패스로 돌려주면서 재혁이 그에게 답했다.

“별로 실망하지 않았어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으니까요.”

“오, 그래? 하지만 선수라면 매 순간 선발을 노려야 한다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건 결국 경기장 위에서 얼마나 뛸 수 있느냐랑 관련이 있는 거니까!”

“그거 방금 하신 말씀이랑 약간 다르지 않아요?”

“그런가?”

재혁의 되물음에 자네는 평소 자주 보여주는 멍한 얼굴로 어깨를 으쓱였고, 재혁은 그런 자네를 향해 피식 실소를 흘렸다.

말로 표현이 잘 된 것 같진 않지만, 대략 자네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이해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로 선수의 가치란 결국 눈으로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거니까.’

그러기 위해선 경기장에서 뛰어야 했고, 그를 위한 경쟁은 필수적이다.

비록 오늘은 벤치에서 시작하게 될테지만···.

슬쩍 고개를 돌려 선수들이 몸을 풀고 있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는 과르디올라 감독을 눈동자에 담아두던 재혁이 다시 고개를 돌려 공을 찼다.

언제, 어느 순간에 경기에 투입 될 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으니까.

재혁은 계속해서 진지한 얼굴로 공을 리프팅하면서 경기를 준비했다.

***

맨체스터 시티와 레알 마드리드의 경기는 게임이 시작되기 전부터 많은 이야기들이 쏟아졌다.

상대가 다른 구단도 아닌 스타들의 구단이라 불리는 레알 마드리드였으니,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고, 그 당연함은 사람들이 예측하는 경기 결과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지네디 지단 감독은 경기가 시작 되기 전에 마련된 자리에서 기자들이 던지는 질문에 간단히 답하면서 미소를 보였다.

“이번 경기에서 MOM에 뽑힐 것 같은 선수를 예측해달라는 말씀은 승리 팀도 예상해달라는 질문과 같은 게 아닐까요?”

“그런 의미로 여쭌게 아니라 그저 재미로 한 번 뽑아보자는 의미였습니다. 선수들의 컨디션이 어떤지는 감독이신 지단 감독님께서 가장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집요하게 묻는 기자의 질문에 지단 감독은 난처하다는 듯 턱을 감싸고 긁적였으나, 이내 씨익 웃으면서 짧은 한 마디로 질문에 답했다.

“글쎄요. 선수단에 속한 선수들이 모두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서 말입니다. 꼭 한 선수만 꼽긴 미안하군요.”

“그래도 이번 시즌에 기대가 되는 선수 한 명 쯤은 마음 속에 품고 계시지 않으신가요? 그 정도라면 괜찮지 않겠습니까?”

흐음, 기자의 계속되는 질문에 지단 감독은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입술 주변을 매만지더니 어렵지 않게 한 선수의 이름을 입밖으로 꺼냈다.

“아무래도 호날두 선수겠죠. 최고의 자리에 올랐음에도 그 위에 아직 무엇이 더 남아 있는 지를 알려주는 선수니까 말입니다.”

지단 감독의 답을 들은 기자들은 역시라는 얼굴이 되어 한동안 고개를 주억이며 펜을 끄적이다가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리고 감독에게 재차 물었다.

“그런데 호날두 선수는 오늘 선발 명단에 포함되지 않았는데요?”

“하하. 비록 선발이 아니라 벤치에서 시작을 하게 되도 기대를 하게 되는 선수들이 이따금 있지 않습니까? 호날두 선수가 바로 제게 그런 존재이니, 그런 의미로 한 말이었습니다. 그리고···.”

슬쩍 시선을 내려 맨체스터 시티의 선발 명단을 확인한 지단 감독이 검지를 슥 흘려 교체 명단에 포함되어 있는 한 선수의 이름을 톡톡 건드리면서 말을 끝마쳤다.

“그건 맨체스터 시티 쪽에서도 마찬가지겠죠.”

***

흐린 하늘도, 머리를 적시는 이슬비도, 또 피부를 끈적이게 만드는 습도도. 축구를 보겠다고 모여든 3만 명의 관중들을 막진 못 했다.

다들 응원하는 축구 팀의 유니폼을 입거나, 좋아하는 선수의 이름이 박힌 유니폼을 입고 여름 태양처럼 뜨겁게 진행되는 경기를 지켜보면서 목소리를 높였고, 그 사이엔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섞여 있었지만 LA에서 살고 있는 한인 교포들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물론 평소 두 구단을 좋아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같은 한국인인 재혁의 모습을 한 번쯤 보고 싶어 경기장을 찾은 사람들도 꽤 있었고, 그런 사람들은 다들 자리에 앉아 아쉬운 눈길로 연신맨체스터 시티의 벤치를 살폈다.

“오늘 출전 할까?”

“글쎄···. 상황을 보면 힘들지 않을까?”

손가락을 꼼지락이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던 여성의 말에 옆에 앉아 있던 남성이 아쉽다는 얼굴로 답했다.

전반이 끝나고 벌써 후반 10분이 지난 상황.

친선 경기지만 구단들 간의 자존심도 무시할 수 없는 경기인 탓에 필드 위에 올라가 있는 양 팀의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 경기에 임하고 있었고, 그 덕에 점수 차이는 아직까지도 팽팽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전반 초반에 분위기가 좋았던 맨체스터 시티에선 케빈의 땅볼 크로스를 받은 아구에로가 밀어넣는 슈팅으로 득점에 성공했고, 레알 마드리드에선 그에 지지 않으려는 듯, 모드리치의 패스를 받은 이스코가 드리블로 수비수 한 명을 제치고 때린 기습 슈팅으로 바로 만회점을 성공시킨 것이다.

그야말로 일진일퇴의 접전.

서로 치열한 공방을 주고 받으면서 수준 높은 경기력으로 경기장의 분위기를 뜨겁게 달구고 있었지만, 그래도 재혁이 경기장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남성은 축축한 뒷목을 쓸어내면서 아쉬움이 진하게 묻은 한숨을 토해낸 다음 여자 친구에게 중얼거렸다.

“앞으로 30분 정도 남았는데, 아무래도 점수 차이가 벌어지지 않는 이상 나오긴 힘들겠지?”

“그래도 친선 경기잖아. 나올 수도 있는 거 아냐?”

“그럴 수도 있긴 한데···. 지금 레알을 상대로 맨체스터 시티 중원이 유지하는 균형도 꽤 좋아 보이니까. 차이를 만들 만한 선수의 투입을 고려한다면 최재혁 선수는 아무래도 후발 주자로 밀리지 않을까 싶은데.”

여자 친구의 말에 남자가 자신의 솔직한 감정을 담아 답했고, 여성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린 뒤 투덜거렸다.

“오늘은 친선 경기라서 출전할 확률이 높다며?”

“말 그래도 확률이라는 소리였으니까. 사실 확정은 아니었지.”

“치이···.”

“너만 아쉬운 게 아니라 나도 보고 싶거든? 맨체스터 시티에 한국인 선수가 이적 했을 때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기억하지?”

그렇게 대꾸하면서 자신이 입고 있는 유니폼을 주욱 늘린 남성.

다른 사람들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응원할 때부터 맨체스터 시티의 팬이었던 그는 다른 누구보다 최재혁의 이적을 반가워했던 인물 중 하나였으니.

사실 지금이라도 목이 터져라 재혁의 이름을 부르면서 응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재혁이 앉아 있는 곳은 벤치였고, 팬의 입장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그 뒤로 또 5분이 흘렀을 때.

“아!”

경기를 지켜보고 있던 맨체스터 시티의 팬들의 입에서 동시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모드리치가 높게 올린 레알 마드리드의 코너킥이 정확하게 라모스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정확하게 공이 떨어질 위치를 파악하고 라모스가 공을 향해 몸을 날렸고, 그의 이마에 맞은 공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골키퍼의 장갑을 피해 골망 안으로 파고 들었다.

전매특허와 같은 라모스의 강력한 헤딩 슛.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 사람들이 라모스의 이름을 연호하면서 함성을 터트린 것은 바로 그 직후였다.

“라모스! 라모스!”

“역시 세트 피스에선 라모스지!”

“좋아, 이대로 계속 가자! 맨체스터 시티를 상대로 1점 차이면 오히려 우리가 부끄러워 해야지!”

아직 후반전이 완전히 끝나기 전까진 시간이 꽤 남았으나 벌써부터 승리를 확신한 듯이 레알 마드리드의 팬들은 노래를 부르면서 응원을 시작했고, 맨체스터 시티의 팬들은 그런 레알 마드리드의 응원석을 지켜보면서 침울한 얼굴로 얼굴을 부여잡았다.

클럽이 꾸준히 성장하고 나름 준수한 성적을 거둔 것은 사실이지만, 빅 클럽이라 불리는 구단들을 상대로는 매번 2% 아쉬운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이번 친선전도 결국 그런 경기들 중 하나가 되어 끝이 날까 걱정이 든 탓이었다.

한국인 남성 또한 비슷한 경기들을 너무 자주 보아왔기에 경기가 끝난 것도 아닌데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비명을 지르면서 울상을 지었다.

“하아. 친선 경기에서라도 제발 좀 레알을 잡아 봤으면 좋겠는데···.”

“어, 오빠.”

“유럽 대회에서도 이름 좀 있는 구단만 만나면 광탈에···, 이젠 슬슬 우승 컵을 들 때가 되기도 했잖아? 아니. 하다 못해 친선 경기에서라도···. 이제 과르디올라 감독도 있고···.”

“오빠!”

“엉?”

자괴감 섞인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머리를 쥐어 뜯고 있는 남성의 옆구리를 여자 친구가 깊숙히 찔렀고, 따끔한 감각에 몸을 움찔거린 남성이 왜 부르냐고 여자 친구를 향해 물었다가 여자 친구가 검지를 쭉 뻗어 한 곳을 가리키며 말하는 것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저거, 최재혁 선수 아니야?”

“뭐라고?”

“최재혁 선수 맞지? 최재혁 선수가 나와서 몸을 풀고 있는데?”

여자 친구의 말에 남성이 황급히 눈을 모았고, 재혁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얼굴을 활짝 폈다.

***

“감독님. 정말 재혁이를 투입하실 생각이십니까?”

터치 라인에 서서 경기장을 지켜보고 있는 과르디올라 감독의 옆으로 미켈 코치가 다가왔고, 과르디올라 감독은 여전히 경기장을 향해 시선을 두면서 그에게 답했다.

“안 될 이유라도 있나?”

“비록 실점을 하긴 했지만, 기회를 완전히 잃은 건 아닙니다. 세트 피스 상황에서 나온 실점을 제외하면 충분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혹시 지금 내가 경기를 포기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과르디올라 감독이 물었고, 미켈 코치는 감독의 질문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재혁이 스트레칭을 해주고 있는 모습을 확인하면서 답했다.

“선수에게 경험을 쌓게 해주려고 준비를 시킨 게 아닙니까?”

“설마.”

미켈 코치의 질문에 감독이 쓰게 웃었다.

“나는 진지하게 생각하고 준비한거야. 그리고 프리 시즌이니까 가능한 일이기도 한 거고.”

감독이 진지하다고 했으니,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던 미켈은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면서 선수들을 살폈다.

“그러면 교체로 우측 풀백에 있는 대니를···.”

“아니.”

재혁을 대신해 경기장에서 빠져나올 선수를 확인하려고 미켈 코치가 확인하기 위해 물은 것에 과르디올라 감독은 가뿐히 고개를 저었고, 경기장 중원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 경기에서 재혁은 미드필더로 들어갈거야.”

“···예?”

“그리고 나올 선수는 다비드 실바고. 계속 지켜보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근육에 약간 무리가 온 것 같더군. 계속 참고 뛰고 있는 것 같으니, 경기장에서 빠져나오면 상태를 좀 알아봐.”

과르디올라 감독의 말에 미켈 코치가 뒤늦게 실바의 상태를 살폈다.

과연 과르디올라 감독의 말처럼 실바의 컨트롤이 평소에 비해 미세하게 투박했던 것이다.

경기 내내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실수들도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확실히 몸에 이상이 있었던 것이리라.

미켈 코치는 서둘러 의무팀을 찾았고, 과르디올라 감독은 팔짱을 낀 채로 여전히 경기장을 지켜보다가 슬쩍 사이드 라인 밖을 달리고 있는 재혁을 살폈다.

“그럼 어떻게 되려나. 후후.”

작은 미소, 그리고 기대감.

과르디올라 감독을 포함해 많은 사람들의 눈동자가···.

[21. 다비드 실바 OUT <-> 88. 최재혁 IN]

실바와 손을 마주친 뒤 필드 위로 올라가는 재혁의 등뒤에 몰렸다.

< 61. 교체 선수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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