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60화 (60/225)

< 60. 시즌 구상 >

사락, 사락.

창문에 스며든 아침 햇살이 얼굴에 떠오르자 재혁은 덮고 있던 이불을 슬쩍 걷어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상체를 잠깐 굽혔을 뿐인데, 지난 경기에서 사용한 근육들이 비명을 지르는 게 느껴졌고, 동시에 그의 머릿속으로 몇 가지 장면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림이라.’

과르디올라 감독이 후반전에 자신을 빼면서 말했던 그림.

그 그림이 무엇이었는지, 벤치에 앉아서 경기를 지켜보던 재혁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아마 후반전에 보여준 모습이 이번 시즌의 기본적인 구상이겠지.’

3백을 활용한 전형적인 과르디올라식 축구.

좌우 측면과 함께 공간을 극적으로 사용하는 축구를 보면서 재혁은 침묵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이 아니었다.

만약 본인이 당시 선수들 사이에서 뛰었다면 그만한 그림을 보여줄 수 있을까, 라는 상상을 머릿속으로 끊임 없이 떠올려 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왜 과르디올라 감독이 자신에게 그런 말을 했는지, 혼자 고민하고 답을 내려보기 위함이었다.

당시 벤치에 앉아 있을 땐 몰랐지만, 오늘 자고 일어나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니 이젠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현재 스쿼드에 포함되어 있는 미드필더들의 뎁스를 고려하면 지금 자신의 위치는 최대 5번 째, 혹은 6번 째에 속하는 선수일 터.

‘과르디올라 감독은 그걸 말하고 싶었던 거겠지. 예상치 못 한 특이 전술로 변수를 만들어내는 ‘특이’ 선수로 남을 것인지, 아니면 경쟁을 통해 ‘진짜’ 선수가 되어 경기를 뛸 것인지···.’

실제로 어제 경기에서 최종 결과 3대1로 이긴 것을 보면 틀림이 없으리라.

과르디올라 감독의 ‘완성형’ 플랜을 위한 베스트 11에 아직 자신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다는 사실이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과르디올라 감독이 전반전에 굳이 자신을 선발에 넣었던 것은···.

똑똑.

침대에 걸터 앉아 계속해서 생각을 이어가던 재혁이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고, 누구냐고 묻자 익숙한 목소리가 그에게 답했다.

“나다.”

“메이슨 코치님.”

“역시 일어나 있었군. 평소에 늦잠이라는 걸 자본 적이 있긴 해?”

“규칙적인 루틴이 한 번 깨지기 시작하면 컨디션 조절이 힘드니까요.”

재혁의 답에 메이슨 코치는 짧게 허허, 웃더니 고개를 저었다.

또래 선수들과는 확실히 다른 멘탈이 재혁의 장점이기도 했지만, 또 그 점이 염려스러웠으니까.

메이슨 코치는 재혁이 걸터 앉아 있는 침대 맞은 편에 위치한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면서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어제 경기는 어땠어?”

아직 프리 시즌이지만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로 뛰게 된 첫 경기.

그 데뷔전의 감각이 어땠는지를 물었던 메이슨 코치의 질문에 재혁은 턱을 괴고 생각에 잠기더니 조심스럽게 답했다.

“역시 아직 모자란 점이 많더라고요.”

“모자란 점?”

예상치 못 한 대답에 메이슨 코치의 말끝이 올라갔으나, 재혁은 담담하게 말을 계속 이었다.

“기본적으로 피지컬 싸움에서 너무 떨어져요. 그동안 성장할 나이라 근육보다는 몸의 균형을 생각하면서 트레이닝을 해왔는데, 이젠 슬슬 근육 트레이닝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하지?”

“제가 평범한 풀백으로 사용되는 게 아니라는 건 이미 모두가 알고 있는 일이니까요. 아무래도 몸싸움을 버틸 수 없었으니 빠른 템포의 패스만을 사용해야 했는데, 만약 제가 몸을 키워 홀딩하는 능력까지 생긴다면 분명 보다 다양한 옵션을 팀에 제공할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된다면···.”

“잠깐, 잠깐!”

“?”

재혁의 말이 계속 이어지는 것을 메이슨 코치가 손을 들어 막았고, 재혁은 왜 그러냐는 얼굴이 되어 고개를 갸웃였다.

메이슨 코치는 아직까지도 재혁이 자신이 무엇을 물었느지 이해하지 못 한 듯해, 얕은 한숨을 폭 내쉰 뒤 다시 물었다.

“내가 물어본 건 어디까지나 ‘어제 경기가 어땠느냐?’라는 간단한 질문이었잖아? 피드백을 바랬던 게 아니라고.”

“···!”

“경기를 분석하고, 고칠 점을 찾고, 또 발전할 방향을 고민하는 건 틀린 게 아니야.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걸 잊어선 안 돼.”

재혁과 눈을 똑바로 마주친 메이슨 코치는 굳은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재혁을 향해 생긋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네가 좋아하는 축구를 한다는 것. 내가 물은 건 그때의 기분이 어땠느냐, 라는 말이었다.”

“···.”

“그러니까 다시 한 번 물어보지. 데뷔전은 어땠어?”

슬쩍 허리를 숙이고 재혁에게 물은 메이슨 코치의 질문에 재혁은 잠시간 생각에 잠기더니 가뿐히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재밌었어요. 또 다시 선발이 되어 뛰고 싶을 정도로.”

“큭큭. 그거면 된 거야. 그래야 우리의 ‘신성’답지.”

“신성이요?”

처음 듣는 단어에 재혁이 메이슨 코치에게 되물었고, 메이슨 코치는 미소를 보이더니 손에 들고 있던 타블렛 PC를 그에게 건넸다.

건네 받은 타블렛을 키자 그의 눈에 오늘 아침에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 기사 눈에 들어왔고, 기사 헤드에 적힌 타이틀을 조용히 읽어내려갔다.

“맨체스터 시티, 신성의 등장···.”

“헤드 타이틀보다 내용이 더 재밌으니까 한 번 쭉 읽어 보라고.”

메이슨 코치의 권유에 재혁은 슬쩍 고개를 들어 코치의 눈동자를 살폈고, 알겠다는 의미로 끄덕인 후 기사 전문을 훑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어제 있었던 경기에 대해 간략하게 소개한 기사는 이후 재혁이 출장했던 전반전을 심도 깊게 다루고 있었다.

과르디올라의 특이한 전술 운용과 그것을 완벽하게 이해하고 활약했던 자신의 이야기였다.

어쩌면 과르디올라 감독은 이번에 또 한 번 전술 개혁을 일으키는 게 아닌가 하는 궁금증을 끝으로 마무리 된 기사를 쭉 읽은 재혁은 타블렛을 내려놓았고, 메이슨 코치의 얼굴을 마주보며 물었다.

“이 기사 내용은···.”

“과르디올라 감독님이 직접 읽어보고 네게 알려주라고 하신 거야. BBC의 스토닝필드 기자는 확실히 전술적으로 이해가 뛰어난, 몇 안 되는 눈썰미와 지식을 지닌 기자거든.”

“!”

“다른 어린 선수들은 데뷔전을 치렀다면 기쁘고 설레서 밤에 잠도 제대로 못 잤을 텐데, 역시 넌 이상한 놈이야. 거기서 자아 비판을 하고 있었을 줄이야.”

끌끌 혀를 차면서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메이슨 코치는 조금은 기뻐하라는 말을 끝으로 훈련장에서 보자며 방을 떠났고, 혼자 남게 된 재혁은 멍하니 코치가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다가 다시 타블렛을 내려본 다음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재혁은 휴대폰을 향해 손을 뻗었고, 잠시간 손가락을 접어가면서 시간을 계산해본 다음 전화를 걸었다.

짧았던 신호음이 이어지고, 곧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반가운 목소리가 그의 귓가를 간질였다.

[오빠! 왜 이렇게 오랜 만에 전화를 했어? 할머니, 오빠한테 전화 왔어요!]

[으잉? 재혁이여? 아이구 재혁아. 전화 좀 자주 하고 그래야. 할미는 네 목소리 들으려고···.]

“훈련이 바쁘다보니 어쩔 수가 없더라고요. 그보다 이사는 잘 하셨어요?”

[그 누구냐, 차범수인가 하는 양반이 도와줘가지고···.]

“다행이네요. 차범수 아저씨한테는 또 한 번 감사하다고 연락을 드려야겠어요.”

한국에 있는 동생 재희와 할머니.

간만에 듣는 가족의 목소리에 재혁은 휴대폰을 쥐고 있는 손을 고쳤고, 지금까지 누구한테도 보여준 적이 없는 환한 얼굴로 두 사람과 대화를 나누었다.

***

본 시즌이 아닌 선수들의 몸상태를 체크하는 의미가 강한 프리 시즌.

자율적인 스케쥴 조정으로 구단간의 경기가 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는 만큼, 흔치 않은 빅매치들이 연이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LA 공항으로 트레이닝 복을 맞춰 입은 선수들이 우르르 등장했고, 동시에 기다리고 있던 기자들의 카메라가 불을 뿜었다.

그런 플래쉬 세례가 익숙하다는 듯, 선수들은 모자와 함께 쓴 선글라스를 건드리면서 정해진 길을 따라 이동했는데, 선수단의 가장 뒤쪽에서 느릿하게 걸어나오는 선수를 발견한 기자들이 이번엔 목소리까지 높여가면서 선수의 이름을 불렀다.

“호날두 선수!”

“이쪽을 한 번만 봐주세요!”

“이적 파동 이후 잔류를 결정하셨는데, 프리 시즌에 합류하신 심경이 어떠신지 물어봐도 괜찮겠습니까?”

“이번 시즌 목표는···!”

하나같이 큰 목소리로 자신의 질문에 대답해주길 기다리고 있었으나, 호날두는 그런 기자들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복도를 따라 계속 이동했다.

그렇게 점차 출구에 가까워졌을 때, 기자들의 질문이 점차 프리 시즌과 관련된 것들로 바뀌기 시작했고.

“며칠 뒤 치르게 될 맨체스터 시티와의 경기는 어떻게 생각하고 계십니까?”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번에 보여준 새로움이 이번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어떤 결과를 낳을까요?”

“전술적인 변화, 즉 세대 교체에 가까워졌다는 이야기가···.”

세대 교체?

한 기자의 목소리에 호날두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고, 지금까지 무겁게 닫혀 있던 입술이 떨어지면서 한 마디를 남겼다.

“경기 이야기는 경기가 끝나고 하는 게 좋은 것 같습니다만, 아마 몇몇 분들이 생각하시는 것 같은 단순한 이벤트성 경기로 끝나진 않을 겁니다. 프로 선수라면 필드 위에 서는 순간부터 자신을 증명해야 하니까요. 프리 시즌이라고 별개가 아니죠.”

***

톡, 톡, 톡.

손에 쥔 볼펜으로 책상을 반복적으로 두드리던 과르디올라 감독이 이번에는 입술을 매만지며 고민에 빠지더니 팔짱을 끼고 의자에 몸을 누였다.

그렇게 상체를 앞뒤로 작게 흔들던 과르디올라 감독은 이마를 긁적이더니 그의 눈앞에 적혀 있는 선수들의 이름을 빤히 내려보다가 휴대폰을 손에 쥐었다.

짧은 통화가 이어졌고, 곧 세 사람이 그의 사무실로 들어왔다.

현재 과르디올라의 밑에서 코칭 스태프로 일하고 있는 브라이언, 토렌토, 그리고 미켈 아르테타였다.

맨체스터 출신으로 오랜 기간 일해온 브라이언, 과르디올라와 바르셀로나 때부터 함께한 토렌토, 그리고 아스날에서 합류한 미켈은 과르디올라 감독의 맞은 편에 앉았고, 네 사람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갔다.

“구상된 선발 명단은 총 세 가지인데. 스태프들의 의견을 한 번 들어보고 싶군요.”

“기본적인 진영 구성은 비슷하군요.”

“하지만 세 가지 모두 장단점이 뚜렷해요. 단순히 선수 구성만 다른 게 아니라, 전체적인 색깔에 영향을 주고 있으니 말이죠.”

“가장 단단해 보이는 구성은 첫 번째 선발 명단 같습니다. 좌우 측면의 분배도 고르고, 두 명의 실바를 가장 적절히 사용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세 사람이 나누는 대화를 자리에 앉아 조용히 듣고 있던 과르디올라 감독은 연신 고개를 주억이면서 펜을 계속 움직였다.

토렌토 코치는 지금 스태프 사단 내에서 누구보다 자신의 전술론을 잘 이해하고 있는 코치였고, 그가 자신을 대신해 이야기를 꺼내면 다른 두 사람이 그에 대응하거나 살을 입힐 수 있는 이야기를 꺼내놓으니. 과르디올라 감독은 이따금 생각이 복잡할 때면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참고하기 위해 토론 자리를 열었던 것이다.

그렇게 세 사람의 대화가 끝없이 이어졌고, 대략적으로 두 가지 결론이 나왔다.

하나는 이곳에 있는 네 사람의 베스트 11의 명단이 비슷하다는 것과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는 어디까지나 프리 시즌 중에 치르게 되는 친선 경기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무책임한 경기를 치를 수는 없지만, 부담없이 시도할 수 있는 경기 또한 프리 시즌 중에 치를 수 있는 경기들이니. 베스트 멤버를 가동해 레알에 맞서보는 것도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문제가 생긴다면 최대한 빨리 대응할 수 있으니. 차라리 이번 경기가 좋은 기회가 되어주겠죠.”

“물론 레알 마드리드 측에서 어떤 선수 구성으로 나올지는 예상할 수 없겠지만 말입니다.”

토론의 결론이 난 듯 하자, 세 코치는 모두 입을 닫았고, 과르디올라 감독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셋을 향해 고맙다고 말하면서 앉고 있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면 레알과의 경기에선 베스트 멤버를 가동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내일부턴 그에 맞춘 훈련을 진행할 예정이니, 따로 공지해드리겠습니다.”

과르디올라의 말에 세 사람이 알겠다고 답하면서 사무실을 빠져나갔고, 혼자 남게 된 과르디올라 감독은 다시 자리에 앉아서 마무리 작업에 들어갔다.

내일 훈련 스케쥴과 함께 다음 날 뛰게 될 선발 명단 결정이 그것이었다.

그렇게 골키퍼부터 시작해서 11명의 선수들의 이름을 전술지 위에 모두 적은 과르디올라 감독은 한동안 침묵을 유지하다가 쭉 손을 뻗어 새로운 전술지를 한 장 꺼냈다.

생각을 해보면 코치들의 말처럼 패배에 대한 부담이 가장 적은 친선 경기가 아니던가?

“기회가 된다면 이런 식의 구성도 한 번 써보고 싶은데 말이야···.”

사각, 사각.

아무 것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의 전술지에 선수들의 이름을 하나둘 적어놓던 과르디올라 감독은 또 다른 11명의 선수들의 이름을 눈으로 읽어보면서 턱을 쓸었다.

재혁이 풀백이 아닌, 미드필더에 이름을 올린 전술지를 말이다.

한동안 빤히 전술지를 내려보던 과르디올라 감독은 곧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을 되뇌인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 기회라는 건 원래 만드는 거니까.”

철컥.

불이 꺼진 사무실의 문이 잠겼고, 아무도 남지 않은 사무실 안에선 전술지들만이 서로 겹쳐진 면을 팔랑이며 바람 소리를 흘렸다.

그렇게 마침내 찾아온 레알 마드리드와의 친선전이 펼쳐질 아침에는 보슬비가 내려 잔디를 촉촉이 적셨다.

< 60. 시즌 구상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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