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 전학생, 이적생 >
“지금 전학을 오고 싶어하는 학생이 있다고요?”
맨체스터에 위치한 비드 사립학교의 이사장이 테이블 위에 준비되어 있는 서류를 확인하고 주름진 이마를 쓸었고, 그의 건너편에 앉아 있던 남성이 고개를 끄덕였다.
입고 있는 옷에 수놓인 문양이 맨체스터 시티의 그것인 것으로 보아 맨체스터 시티에 소속되어 있는 스태프로 보이는 남성은 이후 찻잔을 홀짝인 다음 말을 이었다.
“선수가 가능한 빨리 영국에 적응 하길 바라고 있거든요. 그래서 지난 주에 벌써 입국했습니다. 전학 서류와 다른 승인 서류들만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죠.”
“뭐, 학교에 다니는 거야 파트너 관계이니 불가능할 것은 없지요. 하지만 내년부터 바로 A레벨 과정을 듣고 싶다고 했다고요? 맨체스터 시티에 소속된 유스 선수가 아닌가요?”
일반적인 학생이 아닌, 운동을 하는 선수가 아닌 것을 묻는 이사장의 말에 남성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이번에 호주에서 데려온 친구죠.”
“그런데 A레벨 과정을 수료하겠다고요? 여유가 있겠어요?”
말꼬리가 기묘하게 꺾이는 이사장의 질문에 남성은 이해할 수 있다는 얼굴로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A레벨 진학 단계라면 대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학생들이 수료하는 학과정을 말한다.
따라서 공부보다 운동 쪽에 보다 집중해야 할 학생들이 듣기에는 무리가 있을 수 있는 과정이었는데, 그쪽에서 공부하고 싶다고 먼저 말했던 것이 바로 재혁인 것을 떠올리면서 남성이 이사장의 물음에 바로 답했다.
“그거야 선수 본인의 문제겠지요. 다만 선수가 직접 자기 입으로 공부를 하고 싶었다고 했으니, 그 점을 고려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
“흐음···, 불가능한 것은 아니에요. 하지만 저는 혹시라도 면학 분위기가 흐려질까봐 걱정이군요. A레벨 수업을 듣는 학생들은 유스 선수들과 달리, 진학이 그 무엇보다 중요한 학생들이거든요.”
“···.”
“사실 A레벨의 과정을 듣고 싶다고 해서 무작정 들을 수는 없다는 것을 제프리 코치님도 잘 알고 계시겠죠?”
이사장이 묻는 질문의 의미를 바로 파악한 제프리가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등 과정을 수료하기 전에 통과해야 할 GCSE 시험에 대한 말을 하려는 것이리라.
조프리 코치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인 것을 확인한 이사장이 그를 향해 계속 말했다.
“보통은 입학 시험이 따로 없지만, A레벨 수업들을 듣고 싶다고 했으니. 빠른 시일 내에 시험을 치러 점수를 확인한 다음 그 학생의 진로에 대해 이야기 하도록 하죠. 물론 시험에서 좋지 않은 성적을 거둔다고 해도 일반 수료 과정으로는 받아줄 것이니, 시험에 대해 너무 부담 갖지 말라고 전해주세요.”
“네. 그거면 됐습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시험은 언제 치르는 것이 좋을까요?”
조프리 코치가 억지를 부리지 않고 수긍한 것에 안도한 이사장은 눈앞에 놓인 서류들을 한 데 그러모아 정리하면서 조프리 코치를 향해 물었고, 조프리는 슬쩍 문자를 확인하고 이사장의 질문에 답했다.
“언제든···, 지금 당장도 괜찮다고 말을 하는데. 오늘도 괜찮습니까?”
“따로 공부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하지 않던가요?”
“그런 말은 없고, 시험을 치르게 될 교과목들만 알려달라고 하는군요.”
조프리 코치의 말을 들은 이사장은 순간 넋을 잃고 두눈을 껌뻑이더니 고개를 끄덕인 뒤 시험장을 준비하겠다고 했다.
다만 과연 시험에서 어떤 점수를 얻게 될 지, 꼭 두고 보겠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한 쪽 볼을 부풀렸다.
그렇게 시험장과 함께 시험 시간이 정해졌고, 점심 때 즈음에 시작되었던 재혁의 입학 시험은 3시가 되기 전에 끝이 났다.
주어진 시간을 정확히 반 만 사용한 재혁의 A레벨 진학 확정은 바로 그 다음 날에 정해졌고, 재혁의 시험 점수를 확인한 이사장은 순간 꿀먹은 벙어리가 되더니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두눈을 껌뻑이다가 헛웃음을 흘렸다.
과학을 제외한 전과목 9점. 그나마 과학도 바로 아랫 점수인 8점을 기록한 것이다.
백분율로 따지면 상위 1%에 속하는 점수를 기록한 재혁의 성적표를 이사장은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내려보다가 이내 천천히 내려놓았다.
그동안 그가 믿어오던 상식과 개념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
‘쩝. 평소에 과학 공부 좀 해둘 걸. 알고 있던 건데, 설마 그 문제들을 틀릴 줄은 몰랐네.’
맨체스터 시티의 유소년 기숙사.
그곳에서 자신에게 배정 받은 방 침대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서 성적표를 확인하던 재혁이 입맛을 다시면서 아쉬움을 숨기지 않았다.
그래도 호주에서 나름 꾸준히 공부를 하고 온 것에 자신이 있었는데.
뻔한 문제들을 틀린 것을 보면 역시 공부는 해도 해도 부족하다는 말이 맞는 말이었다.
그 생각을 하니 항상 그의 공부를 도와주었던 케이트가 떠오른 재혁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아마 틀린 문제들을 케이트가 봤다면 분명 한소리 했겠지.’
평소에도 오답을 내밀면 ‘그거 내가 알려줬던 거잖아!’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던 케이트였는데. 이미 한 번 공부했던 문제를 틀린 것을 보았다면 분명 입으로 불을 뿜었을 것이다.
확실히 케이트가 있었기에 지금까지 공부를 하는데 막힘이 없었던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면서 재혁은 오답 노트를 펼쳤다. 맞춘 문제를 보고 기뻐하는 것보단 틀린 점을 찾아 고치는 것이 미래에 더욱 도움이 되는 행동이었으니까.
마치 지금까지 그가 공부해온 축구처럼 말이다.
잘했던 플레이보다 실수를 한 플레이에서 보다 많은 것을 배웠으니. 지금 이 순간도 배움을 위한 단계였다.
그렇게 한동안 틀린 문제들을 확인하면서 왜 틀렸는지를 고민하던 재혁이 마침내 책을 덮었고, 시간을 확인한 뒤 슬슬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교 공부는 이쯤하면 됐으니 이제 본업에 집중할 때였다.
일상복은 트레이닝복으로, 운동화는 축구화로 갈아 신고 연습용 필드 위에 서자 재혁이 오기를 먼저 도착해 기다리고 있던 메이슨 코치가 재혁을 향해 소리쳤다.
“소문으로 들었다. A레벨에 합격했다면서?”
“벌써 그런 소문이 돌아요?”
“아무래도 흔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축구로 무슨 일을 했다는 것보다 프로를 지망하는 유소년 선수가 A레벨 학과정을 듣는 다는 게 아무래도 더 특이하잖아? 대학을 갈 것도 아닌데 말이지.”
메이슨 코치는 슬슬 훈련 도구들을 꺼내 놓으면서 대화를 이어갔고, 재혁은 그런 코치의 말에 ‘그런가요?’라며 대꾸하면서 신발끈을 동여맸다.
코치는 당연하지라고 답하고 한동안 두눈을 껌뻑이고 있다가 뒤늦게 재혁에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설마 바로 대학을 가려는 건 아니지? 너 이제 팀이랑 계약 했어.”
“가긴 갈거에요. 그런데 그건 제가 프로 선수 생활을 은퇴를 한 이후의 일이죠. 공부를 하는 건 어디까지나 머리가 굳기 전까지 꾸준히 하고 싶어서 그런 거에요.”
“머리가 굳기 전까진 계속 공부를···?”
잠시 다행이네, 라고 안도하던 코치는 이후 이게 정말 17살 짜리가 하는 말인가, 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고, 이후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오늘 소화할 훈련 세션에 대해 재혁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지금 두 사람이 이곳에 모인 이유는 잡담을 하기 위해서가 아닌, 훈련을 위해서였으니까.
재혁도 더 이상 따로 나눌 이야기가 없었기에 호흡과 구령을 붙이는 것 외에는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훈련에 집중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이어진 훈련에 재혁이 굵은 땀방울을 비처럼 쏟아내다가 이제 마지막이라는 메이슨 코치의 외침에 맞춰 공을 차낸 뒤 훈련장 바닥 위로 쓰러졌다. 영국에 도착하고 나서부터 메이슨 코치의 훈련 강도는 날이 갈수록 강해졌는데, 오늘은 그 정점을 찍은 탓이었다.
평소라면 혼자 했을 스트레칭도 메이슨 코치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끝을 낸 재혁이 뻣뻣하게 굳었던 정강이 근육을 슬슬 풀면서 코치에게 물었다.
“그런데 전 여기서도 계속 혼자서 훈련을 해야 하나요?”
“한창 시즌이 막바지잖아. 유소년 팀도, 퍼스트 팀도, 온전히 정신을 집중해야 하니 네가 끼어들긴 힘들지. 따로 감독님이 부르지 않는 이상 말이야.”
“흐음···.”
결국 구단에서 재혁을 사용할 수 있는 시간은 7월 이후.
사실 그 전까진 잉여 자원이나 마찬가지라는 메이슨 코치의 말에 재혁은 무어라 반박할 수 없었다.
같이 훈련을 해도 사용할 수 없을 선수이고, 괜히 부상이라도 당한다면 그땐 더 골치가 아파질 수 있다는 말은 틀림이 없었으니까 말이다.
결국 7월이 오기까진 호주에서 그랬던 것처럼 한동안 홀로 훈련을 해야겠구나···, 라는 생각에 잠겨 기숙사로 돌아와 씻고 침대에서 잠에 들었던 재혁은 다음 날 아침, 이른 시간에 날아온 문자를 확인하고 눈을 비볐다.
문자를 보낸 사람은 다른 사람도 아닌 과르디올라 감독이었고···.
[오전 9시 반부터 있을 퍼스트 팀 훈련에 참가시킬 생각이니까. 늦지 말고 에티하드 훈련장에 도착하도록.]
퍼스트 팀 훈련에 재혁을 소집하겠다는 것이 그 내용이었다.
***
훈련장에 선수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친한 선수들은 서로 악수를 나누거나 대화를 주고 받으면서 훈련을 소화할 준비를 했는데,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가볍지 않았다.
아니, 분위기가 가벼울 수가 없었다.
시즌이 거의 막바지에 이른 상황에서 현재 맨체스터 시티가 기록하고 있는 리그 순위가 4위였고, 챔피언스 리그는 모나코에 의해 16강에서 탈락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팀의 핵이라 평가받던 다비드 실바가 부상으로 이탈했고, 이틀 뒤에 진행될 리그 경기의 상대가 다른 곳도 아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였으니.
케빈 데 브루위너가 착잡한 얼굴로 공을 차면서 말했다.
“다른 경기는 몰라도 더비 전에서 지면 그 날은 정말 집에 가는 것도 힘들더라.”
“길이 막혀서요?”
“아니. 뭔가 그냥 하루가 전부 망가졌다는 느낌이 들잖아. 괜히 집에 가도 공허하고···. 그런데 어차피 넌 구단에서 집까지 버스로 태워주잖아? 길이 막히는게 무슨 상관이야?”
“길이 막히면 버스에서 너무 오래 자서 밤에 잠을 잘 못 자겠더라고요.”
“아, 그래?”
“잠을 못 자면 피곤하고, 그럼 입맛이 떨어지고. 배고픈건 질색인데. 오늘 점심은 뭐가 나오려나?”
“···.”
패스 파트너인 자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케빈은 잠시간 멍한 얼굴이 되더니 조깅으로 몸을 풀고 오겠다고 말했고, 자네는 잘 다녀오라고 답한 뒤 다른 파트너를 찾기 위해 자리를 떠났다.
멀어지는 자네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케빈은 천천히 달리는 속도를 올리면서 오늘따라 훈련장에 없는 실바가 괜히 더 그리웠다.
자네는 필드 위에서 호흡을 맞출 땐 분명 번득이는 재능이 뛰어난 친구였지만, 이따금 튀어나오는 엉뚱함 때문에 묘하게 엉키는 듯한 느낌이 들어 몸을 같이 풀기에 적합한 파트너는 아닌 탓이었다.
‘많이 다친 건 아니니까 그 다음 주까지는 돌아오겠지?’
그렇게 대략 10분 정도 필드를 뛰던 케빈이 시간을 확인하고 슬슬 호흡을 골랐다.
곧 감독님이 오실 시간이고, 그가 필드 위로 올라오면 바로 본격적인 훈련이 시작 될 것이다.
필드에서 모든 것을 보여주길 바라는 것처럼 훈련도 봐주는 것이 없는 과르디올라 감독.
과연 오늘은 어떤 훈련이 기다리고 있을지, 케빈이 슬슬 발을 멈추고 상체 근육을 풀어주고 있었는데.
“응?”
처음보는 얼굴의 선수가 유니폼을 입고 훈련장으로 들어오는 것을 발견하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훈련장에 유니폼을 입고 올 사람이라면 분명 맨체스터 시티의 선수가 확실했는데, 그동안 보지 못했던 얼굴인 것을 보면···.
‘유소년 선수인가?’
확실히 아직 완성되지 않은 체구가 성인이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기에 유소년 선수가 장소를 잘못 찾아온 것이라 확신한 케빈은 느릿한 발걸음으로 유소년 선수에게 다가가 말을 붙이려다가 그보다 먼저 목소리를 낸 인물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입을 멈췄다.
“늦지않고 왔군, 재혁. 그런데 훈련 시간에 정확하게 도착하는 것보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미리 몸을 풀고 있었어야지. 프로 선수에게 있어서 스트레칭은 누가 대신해주는 게 아니라 본인이 직접 해야 하는 거라고.”
“알고 있어요. 그래서 30분 전부터 조깅을 뛰다가 지금 온 거에요.”
“하하. 그랬던 거였나? 내가 성급했군.”
과르디올라 감독이 재혁의 말에 짧게 웃은 뒤 그럼 필드로 들어가자고 말을 하다가 케빈이 자리에 서있는 것을 발견했고, 케빈에게도 좋은 아침이라며 인사를 건넸다.
다만 케빈은 과르디올라 감독과 재혁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감독님. 이 친구는 누군가요?”
“이름은 들어봤을 텐데? 이번에 우리가 영입한 선수지.”
“이번에 영입한 선수요···?”
아직 시즌이 끝나려면 꽤 남았는데 벌써 영입이라니, 라고 머릿속으로 떠올리던 케빈은 대략 한 달 전에 터졌던 기사를 떠올리고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러면 이 친구가···.”
“안녕하세요.”
곧게 뻗은 검지로 이마를 톡톡 건드리고 있는 케빈을 향해 재혁이 먼저 인사를 건넸고, 곧 손을 쭉 뻗으면서 말했다.
“예비 이적생, 최재혁입니다.”
< 55. 전학생, 이적생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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