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재회 >
FFA컵 결승전을 치르고 난 후, 매번 한결같았던 재혁의 일상에도 변화가 찾아왔다.
기자들의 취재 응해주거나 사진을 찍어주는 등, 평소에 경험할 수 없었던 일상 속의 변화도 분명 있었지만, 아직 학생인 그가 무엇보다 또렷하게 피부로 느낄 수 있었던 변화는 그를 알아보는 학생들과 선생님들이 많아졌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재혁의 얼굴도 모르고 있던 학생들은 재혁이 옆을 지나칠 때면 서로를 향해 수군거렸고, 평소 출석만 부르고 별다른 말들이 없던 선생님들도 재혁의 이름을 부른 다음 꼭 한 마디씩을 해주었다.
주로 경기를 잘 봤다거나, 영국으로 가게 되면 거기서도 잘 해보라는 응원의 말들이 주를 이루었다.
그런 사람들의 반응에 재혁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다고 대응했지만, 괜한 이목이 쏠려 피곤해졌다며 속으로 침을 삼켰다.
그렇게 찾아온 점심 시간.
학생들이 잘 찾지 않는 한적한 장소에 들어선 재혁은 이제야 좀 살 것 같다는 얼굴로 도시락을 들고 후미진 자리에 걸터 앉다가 먼저 온 손님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인사를 건넸다.
“케이트. 여기는 웬일이야?”
“왜? 나는 여기서 도시락 먹으면 안 돼?”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나도 그런 의미로 한 말 아니야.”
“···.”
케이트의 입을 통해 전해지는 말들이 하나같이 날이 바짝 선 것이 바로 느껴질 정도로 차가웠다.
재혁은 딱히 무어라 대꾸할 말이 없어서 습관처럼 눈썹 주변을 긁적인 뒤 맛있게 먹으라는 말을 건넨 뒤 도시락을 열었고, 재혁의 건너편에서 조용히 포크로 샐러드를 찍어 입에 넣던 케이트가 넌지시 물었다.
“그래서 영국으로 언제 가?”
살짝 목소리 끝이 떨렸으나, 재혁이 알아차릴 정도는 아니었다.
재혁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반찬들에 집중하면서 답했다.
“아마 1학기 방학이 끝나기 전에 갈 것 같은데. 팀에 합류하는 건 다음 시즌부터지만 현지에 적응하려면 한시가 아까우니까.”
“그럼 한 달도 안 남았네.”
케이트의 말에 재혁이 잠시간 생각에 잠기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시험들이 모두 끝나고 시작되는 1학기 방학은 4월 초에 시작해 4월 말에 끝이 났으니.
이제야 4월이 막 시작되었지만 실질적으로 호주에 남아 있을 시간은 케이트의 말처럼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것이다.
재혁이 아무렇지도 않게 고개를 끄덕이자 케이트는 입술을 비죽였고, 포크로 반이 썰린 방울 토마토를 쿡 찌르고 입에 우겨넣었다.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재혁이 조용히 한 마디 했다.
“그러다가 입술 다친다.”
“흥. 남이 다치든, 말든.”
“다치면 이따 발표할 때 거슬리잖아? 혹시라도 흉이 남을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야지.”
케이트를 볼 때면 함께 훈련하는 안토루, 그리고 한국에 있는 동생인 재희가 생각이 나 걱정어린 목소리로 한 마디를 해주었던 것인데, 그런 재혁의 말을 들은 케이트는 눈썹을 찌푸리더니 반 정도 남은 도시락을 챙겨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만 급하게 물건들을 챙기다보니 도시락 통 위에 올려두었던 포크가 재혁의 앞에 떨어졌고, 재혁이 포크를 주워 건네주자 케이트는 재차 심통이 난 얼굴이 되어 재혁의 손에서 포크를 빼앗듯이 움켜쥔 뒤 말했다.
“됐거든. 누가 너보고 내 걱정을 해달라고 했니?”
“누가 부탁한 건 아니지만 보고 있으면 걱정이 되니까.”
“···!”
“그러니까 괜히 다치지 말라고. 그리고 이거 가지고 가. 포크 다시 쓰려면 닦아야 하잖아?”
말을 끝내면서 케이트를 향해 재혁이 손수건을 건넸고, 한동안 아무런 말없이 재혁이 건네준 손수건을 빤히 내려보던 케이트가 재혁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넌 진짜 바보야.”
라는 짧은 말 한 마디를 남기고 멀어졌다.
자신이 왜 바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재혁은 동그랗게 뜬 눈을 멀뚱였고, 빠른 걸음으로 재혁에게서 멀어진 케이트는 다른 친구들이 모여 앉아 있는 테이블에 끼어들어 앉은 뒤 남겼던 도시락을 다시 풀었다.
케이트가 뒤늦게 테이블에 합류한 것에 친구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어디있다가 지금 왔어?”
“곧 점심시간이 다 끝나는데. 아직도 다 안 먹었어?”
“그냥. 생각을 좀 하느라 다른 곳에 앉아 있었어. 도시락이야 뭐, 금방 다 먹을 수 있어.”
“그래? 그럼 물 좀 떠다 줄까?”
친구의 제의에 케이트가 고맙다고 답하며 고개를 끄덕였고, 곧 컵에 담긴 물을 단번에 삼키는 케이트를 옆에서 지켜보던 친구들은 평소와 다른 케이트의 행동에 놀란 얼굴로 재차 물었다.
“케이트···, 혹시 무슨 일 있어?”
“아니. 별 일 없는데.”
“그래? 그런데 그런 것 치고는···.”
“되게 날카로워 보이는데···.”
“흥. 설마. 기분 탓이야, 기분 탓.”
친구들이 하는 말에 콧바람을 뿜으며 대꾸한 케이트는 재혁이 건네준 손수건으로 닦은 포크로 샐러드를 거칠게 찍어서 입에 넣으려다가 손을 멈짓였고, 곧 조심스레 입술 사이에 넣은 뒤 우물우물 씹기 시작했다.
그렇게 친구들은 다시 서로를 바라보며 떠들기 시작했고, 케이트는 홀로 조용히 도시락을 비워내다가 재혁의 손수건을 내려보면서 볼을 부풀렸다.
정말 이해하기 힘든, 도저히 알 수가 없는 녀석이라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다만 그렇기에 궁금했다.
과연 재혁은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고 있는 걸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던 케이트는 잠시 손을 멈추더니 작은 목소리로 읊조렸다.
“정했어.”
“응? 뭐를?”
옆에 앉아 있던 친구들이 케이트의 목소리를 듣고 물었고, 친구들을 향해 케이트는 간단히 대꾸했다.
“가고 싶은 대학이랑 배워보고 싶은 전공. 이제야 다 정했어.”
“···?”
뚱딴지같은 케이트의 말에 친구들은 여전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였으나, 케이트는 한결 편해진 얼굴로 도시락을 비운 뒤 오후 수업을 듣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
“후우.”
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을 수건으로 닦아낸 재혁이 시드니 아카데미의 실내 체육관 인조 잔디 위에 엉덩이를 붙이고 한숨을 푹 내쉬었고, 그런 재혁의 곁으로 다가온 메이슨 코치도 재혁을 따라 수건으로 얼굴을 훔쳤다.
맨체스터 시티에서 과르디올라의 부탁을 받아 시드니로 온 메이슨 코치는 재혁의 개인 훈련을 전담해주고 있었는데, 매번 진행하는 훈련이지만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만한 훈련을 소화하면서 불평 하나 없다니.’
단순히 불평만 없는 게 아니었다.
이따금 따로 개인 훈련을 할 정도로 적극적인 열과 성을 보였으니 발전하는 속도도 눈에 띌 정도였고, 전날 훈련했던 소화량의 꼭 그 이상을 그 다음 날 소화해낸 덕에 체력적인 부분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었다.
그야 말로 가르치는 재미가 있는 선수였다.
하지만 메이슨 코치는 최대한 낮은 목소리로 이럴수록 조심해야 한다는 부분을 재차 상기하면서 말했다.
“훈련에 집중하는 건 좋지만 과하게 몰입해서 몸을 다치게 하진 마. 아직 네 몸은 성장이 다 끝난게 아니라고.”
“알고 있어요. 하지만 지난 경기를 생각하면 부족한 점들만 계속 떠올라서 가만히 있기 힘든 걸요.”
“상대가 케이힐이었어. 오히려 그만큼 해낸 게 대단한 거지. 자부심을 가져도 좋아. 그리고 지금의 너라면 그때 당했던 것처럼 쉽게 당하지도 않을 거다.”
재혁의 말에 메이슨이 솔직한 감정을 담아 답했다.
케이힐이 비록 톱 리그를 떠난지 시간이 꽤 흐른 선수였지만 지금까지 커리어와 함께 쌓아온 경험치, 그리고 선수 본인이 지니고 있는 타고난 재능은 분명 평범한 것이 아니었다.
그만한 선수를 상대로 대등하게, 몇몇 상황에선 더 뛰어난 활약을 펼쳤으니, 메이슨은 재혁이 실망하기보다는 자신감을 가지길 기대했으나 재혁은 그런 메이슨의 말에 고개를 간단히 저었다.
“제 목표가 호주에서 끝이 난다면 분명 코치님의 말씀처럼 생각할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게 아니잖아요?”
“···!”
“EPL에서 지금 활약하는 선수들은 케이힐 선수보다 훨씬 대단하겠죠?”
수건을 어깨에 걸치고 고개를 들어 묻는 재혁의 눈동자를 똑바로 마주한 메이슨 코치는 잠시간 침을 삼켰다.
여기서 무어라 답을 해주어야 할까?
재혁이 자신감을 잃지 않도록 안심할 수 있는 말을 해주어야 할까, 아니면 솔직한 대답을 해주어야 할까?
재혁의 눈동자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고 있는 불꽃을 가만히 지켜보던 메이슨 코치는 마음을 정하고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지금의 케이힐과 비교를 하자면 분명 한두 단계 높은 선수들이 즐비한 곳이지. 그 중 특별한 선수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거고.”
“그러니까 가만히 쉬고 있을 수 없어요. 남은 시간 동안 최대한 끌어 올려야죠. 시즌 내내 벤치에만 앉아 있을 생각은 저도 없어요.”
메이슨 코치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키던 재혁은 순간 다리가 풀려 기우뚱 기울어졌고, 메이슨 코치가 얼른 손을 뻗어 쓰러지려는 재혁을 받쳐주면서 말했다.
“그렇다고 무리해서는 안 돼. 훈련을 하다가 몸이 망가져 버리면 오히려 손해인 쪽은 너야. 그리고 나도 과르디올라 감독을 볼 면목이 없어질 테고 말이지. 내가 애써 호주까지 온 보람을 수포로 만들진 마라.”
“그치만 경기에서 뛰려면···.”
“조급해 하지 말라니까. 아직도 모르겠냐? 내가 진행하는 훈련 세션의 커리큘럼들은 모두 과르디올라 감독이 지시한 것들이야. 너도 분명 과르디올라 감독이 생각하는 다음 시즌의 구상에 포함되어 있는 거라고.”
“!”
“그러니까 정해진 훈련만 확실히 소화하면 돼. 그 이상 무리하려고 하지 마라.”
‘그리고···, 너 또한 평범한 선수가 아니라 특별한 선수들 중 하나니까.’
뒷말은 뱉지 않고 속으로 삼킨 메이슨 코치는 이후 오늘 훈련은 여기까지라는 말을 남기고 훈련장을 벗어나려고 했고, 멀어지는 메이슨 코치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재혁이 뒤늦게 무언가를 떠올리고 코치를 불렀다.
“그런데 코치님. 영국으로 가기 전에 한국에 잠깐 들릴 시간을 만들 수 있을까요?”
“불가능한 건 아닌데, 한국에는 왜? 며칠이나 필요한데?”
영국으로 같이 돌아가기로 했기에 일정을 확인할 목적으로 메이슨 코치가 휴대폰을 꺼내 달력을 살피며 물었고, 재혁은 그런 코치를 향해 씨익 웃으면서 답했다.
“만나야 할 사람들도 있고, 받은 것도 있으니. 꼭 한 번은 들려야 해서요.”
“그러도록 하지. 흐음, 그런데 네 에이전트는···.”
“그 부분도 미리 이야기 해두었어요.”
메이슨 코치가 묻는 것에 재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답했다.
“한국에서 모두 만날 겁니다.”
***
인천 국제 공항.
이른 시간부터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이 모두 카메라를 손에 쥐고 입국게이트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샅샅이 살폈다.
방학이 가까워지는 만큼 적지 않은 사람들이 공항을 오가고 있었지만 기자들은 자리를 지키면서 그들이 원하는 인물이 등장하기를 계속 기다렸고, 마침내 한 청년, 재혁이 문을 열고 밖으로 빠져나오자 다들 손에 쥐고 있던 카메라를 꺼내 플래쉬를 터트리기 시작했다.
< 53. 재회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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