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52화 (52/225)
  • < 52. 두 사람 >

    최재혁 쉬프트라는 단어는 독일과의 경기가 끝나고 인터뷰에서 임종철 감독이 처음 사용했던 단어였고, 그 날 이후 재혁을 중심으로 짜인 포메이션이 등장할 때면 다들 임종철 감독의 말을 빌어 최재혁 쉬프트라는 단어를 사용해 진영을 설명했다.

    재혁의 이름이 들어간 진영 설명이 어쩌면 과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으나, 사실 그럴 수 밖에 없었다.

    실제로 시드니 FC에서 그동안 필요한 순간에 3백으로 진영을 바꾸면서 득을 보았던 장면들이 꽤 많았기 때문이었다.

    부족했던 중원에 힘을 싣고, 재혁을 향하는 견제가 조금이라도 옅어진다면 재혁은 반드시 순도 높은 플레이로 보답을 해왔으니. 중계석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은 기대를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이번엔 과연 어떤 활약을 보여줄지, 후반전이 벌써부터 기다려지는군요.”

    “말씀하시는 순간 맬버른 시티에서 공을 굴리면서 후반전을 시작했습니다!”

    “초반부터 강하게 압박을 들어가는 시드니 FC. 허리에 한 명이 추가된 만큼, 힘싸움에 망설임이 없죠?”

    “지금 허리 싸움에서 진다는 말은 전술적으로 패배했다는 의미이니, 절대로 질 수 없는 싸움인 거죠.”

    최전방의 내쉬부터 미드필더에 위치한 다른 선수들까지.

    시드니 FC의 선수들 중 어느 한 명도 발을 쉬게 하는 선수가 없었던 탓에 초반부터 템포가 빠르게 쌓아 올라가기 시작했는데, 경기 상황을 계속 중계하던 해설자가 고개를 갸웃였다.

    어째서인지 현재 시드니 FC에서 전개 중인 최재혁 쉬프트는 지금까지 보여주었던 모습과는 아주 약간 다른 형태를 띄고 있기 때문이었고, 그 차이가 무엇인지 바로 알아본 페트릴로 해설이 필드 위의 선수들의 위치를 살펴보며 말했다.

    “그런데 지금 시드니에서는 최전방에 공격수로 여전히 두 명을 두고 있군요?”

    “톱에 두 명이요?”

    “네. 안토루 선수의 자리가 쉐도우라고는 하지만 그동안 최재혁 쉬프트가 시작되면 최전방에는 꼭 한 선수를 놓는 것을 제외하곤 모든 선수들이 중원에 모여들었던 것 같은데, 오늘은 어째서인지 여전히 두 명의 공격수를 고수하고 있는 모습이 전과 다른데요?”

    “그러고 보니···.”

    압박에 가담할 땐 최대 3-6-1로 진영이 변화하던 것을 생각해보면 안토루의 위치는 지금보다 조금 더 밑에 위치하고 있어야 옳았는데, 루아드 감독은 수비만 3백으로 변환했을 뿐, 공격수들의 숫자는 여전히 2명을 유지하고 있었고, 그 점이 시사하는 바를 키노보 해설이 고개를 주억이며 읊조리면서 세 사람은 이어지는 경기에 집중했다.

    “루아드 감독의 생각이 무엇인지는 아직까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시드니 FC에선 마지막 순간까지 물러 설 생각이 없다는 겁니다. 이번 결승전은 꽤 재밌게 끝이 날 것 같군요.”

    ***

    ‘결국 고민 끝에 나온 전술이 아직 20살도 되지 않은 꼬마한테 팀 전원이 의지하는 거라니.’

    맬버른 시티의 중원에서 동료 선수들과 공을 주고 받던 케이힐이 어이가 없었는지 고개를 작게 저으면서 몸을 움직였다.

    시드니 FC에서 취한 모든 행동들은 예상 범주 내였다.

    그동안 시드니 FC는 매번 궁지에 몰릴 때면 저 어린 선수를 중심으로 진영을 새로 꾸렸으니까.

    맬버른 시티에서도 그 점을 경기 전부터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고, 따라서 그때에 맞춰 바로 반응 할 수 있도록 대비책을 세워두고 있었다.

    케이힐이 후방에 위치한 선수에게 공을 내어주면서 양쪽 측면이 확실히 벌어지고 있는 지를 확인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가 공을 소유하고 있을 땐 최대한 넓게! 수비에 들어갈 땐 좁게! 절대 잊으면 안 돼!”

    상대가 중원에 모여드는 점을 이용해 공격을 할 땐 경기장을 넓게 써 자신들이 사용할 공간을 확보하고, 수비에 나설 땐 상대가 사용하는 공간에 침투해 들어가 상대 팀이 마음대로 활동하지 못하도록 운신에 제한을 두게 한다.

    가장 기본적인, 하지만 그 무엇보다 확실한 방법을 내세운 맬버른 시티의 전술은 나름 효과적으로 먹혀들었다.

    일단 공격을 하는 동안 공을 빼앗기지 않고 계속해서 패스를 돌리며 점유율을 취할 수 있다는 점에서 케이힐은 동료들의 움직임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열심히 패스의 한 축이 되어 경기를 진행했는데···.

    ‘뭐지?’

    패스를 주고받는 횟수가 늘어갈수록 은연 중 떠오르는 의아함에 케이힐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그의 마음을 간질이고 있는 무언가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입술을 비틀었다.

    지금까지 공을 빼앗기지 않는 것까지는 분명 만족스러웠지만···.

    ‘공이 센터 서클을 넘지 못하고 있잖아?’

    공을 빼앗기지 않고 소유하고 있는지 2분은 족히 넘은 것 같은데, 아직까지도 맬버른 시티의 패스들은 중원과 후방 사이를 맴돌고만 있었던 것이다.

    공격을 하려면 앞으로 전진해야 했고, 전진을 하려면 공이 뒤에 머물러선 안 된다.

    그런 기본적인 부분에서 문제가 일어나고 있는 점을 깨달은 케이힐은 뒤늦게 왜 이런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지를 확인하기 위해 필드를 살피다가 지속적으로 공을 몰아내는 플레이를 펼치고 있는 한 선수를 발견하고 눈썹을 꼬았다.

    ‘이번에도 또 너냐, 시드니의 8번?’

    쉬지 않고 중원을 뛰어다니면서 공이 라인을 넘지 못하도록 애쓰고 있는 시드니의 8번, 최재혁.

    물론 선수 한 명이 팀 전원을 막아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나, 시드니 FC가 저 8번을 중심으로 진영을 새로 꾸린 만큼, 저녀석이 필드를 활발하게 뛰어다닐수록 상대가 보다 유기적으로 대응하는게 가능하다는 소리였고, 그게 실제로 효과적인 수비로 이어지자 케이힐이 찌푸리고 있던 얼굴을 펴고 서서히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케이힐이 향한 곳은 재혁이 위치하고 있는 곳 바로 앞.

    슬쩍 곁눈질로 재혁의 위치를 살핀 케이힐이 작게 웃으면서 중얼거렸다.

    “꼬마야. 꽤 힘내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수비만 해서 되겠어? 비기려면 점수를 따야지.”

    “단어 선택이 틀리셨는데요.”

    “뭐?”

    케이힐의 짓궂은 말에도 재혁은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그에게 답했다.

    “제 목적은 비기는 게 아니라 이기는 거거든요.”

    “···!”

    “그리고 말씀하신 걸 그대로 되돌려 드리자면, 계속 공만 돌려서야 마지막까지 지킬 수 있으시겠어요? 1점 짜리 리드는 얼마든지 뒤집힐 수 있는 거라고요.”

    씨익.

    작지만 또렷한 재혁의 미소를 확인한 케이힐의 두눈이 부릅 커졌다가 이내 차츰 작아지더니 곧 얇아졌다.

    아무래도 확실히 알려줘야 할 것만 같았다.

    꿈의 무대를 ‘경험’ 해본 자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자의 차이를 말이다.

    재혁을 뒤에 두고서 케이힐이 공을 소유하고 있는 동료를 향해 슬쩍 손을 들어올렸고, 그 행동의 의미를 바로 파악한 맬버른 시티의 선수는 발밑에서 굴리고 있던 공을 재빨리 케이힐에게 보내주었다.

    ‘하긴, 겨우 한 번으론 부족할 수 있어. 어디까지나 선배가 후배에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면서···.’

    네 자존심을 철저하게 짓밟아주마.

    어디 한 번 수준의 한계를 느껴봐라.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공을 발밑에 두고 있던 케이힐은 재혁을 정면에 두고 슬슬 움직이다가 곧 공을 길게 치고 달리면서 드리블을 시작했고, 케이힐의 움직임을 쫓아가면서 재혁이 재빨리 손을 뻗었다.

    어떻게든 드리블을 방해해볼 생각으로 뻗은 손인 것 같지만, 케이힐은 재혁의 얇은 팔뚝을 슬쩍 살핀 뒤 실소를 흘렸다.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상대가 분명 드리블을 방해하려고 팔을 뻗었음에도 어떠한 힘도 느껴지지 않은 탓이었다.

    ‘손을 제대로 쓰려면 아직 멀었다!’

    수비든, 공격이든. 손을 사용하는 몸싸움은 기술적인 부분이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근력이 부족하면 역으로 당할 위험이 큰 몸싸움 방법이었고, 재혁의 오른팔이 자신의 가슴에 닿는 것을 확인하기 무섭게 케이힐도 자신의 왼팔을 쭉 뻗어 재혁의 가슴에 걸치고 힘을 주었다.

    이제 곧 머지 않아 재혁은 자신의 팔힘에 쓸려서 바닥을 뒹구르겠지.

    오늘의 경험을 토대로 넌 좀 더 발전할 수 있을 거다, 케이힐은 그렇게 생각하며 왼팔에 꾸욱 힘을 주어누르다가···.

    “···?!”

    왼팔을 통해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어 놀란 얼굴로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재혁이 시도하고 있는 행동을 확인하고 뒤늦게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보니 녀석은 애초에 몸싸움을 할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부터 내 균형을 무너뜨리려고···!’

    팔에 아주 짧게 신경이 쏠리는 그 순간을 노리고 슬쩍 몸을 뺐다가 재빨리 발을 놀려 드리블로 치고 나가는 공을 뺏을 생각을 하다니.

    하지만 이것 또한 늦지 않게 파악한 상황.

    몸싸움에서 밀리는 것까지 생각하고 나름 잔머리를 굴린 건 인정해줄만 했으나, 이렇게 눈에 빤히 보이는 태클에 두 번 당해줄 자신이 아니었다.

    케이힐은 재혁의 상체가 앞으로 깊게 쏠리는 모습을 확인하기 무섭게 재빨리 앞으로 나아가고 있던 공을 밟아 뒤로 넘겼다.

    이걸로 이제 끝이다.

    상대는 공이 빠진 곳을 향해 헛태클을 하면서 넘어질 테고, 자신은 안전하게 뒤로 넘긴 공을 가지고 상대가 넘어지면서 열리게 될 공간을 뚫고 나가면 되리라.

    ‘후후. 비싸지만 미래에 뼈와 살이 될 수업료를 치렀다고 생각하렴. 나름 즐거웠···, 어?!’

    공을 뒤로 넘기면서 재혁의 움직임을 끝까지 살피고 있던 케이힐의 두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이상했다.

    분명 녀석은 잔디 위를 구르면서 넘어져야 했는데···.

    ‘어째서 아직도 내 앞에 있는 거지?!’

    “이런 말도 안 되는···!”

    투웅!

    크게 앞으로 기울었던 재혁의 몸은 마치 스프링처럼 탄력을 받아 한 차례 튕기더니 그대로 케이힐의 뒤편으로 구르고 있는 공을 향해 이동했고, 곧 무리없이 발을 뻗어 공을 뺏어낸 뒤 재빨리 가속을 해 드리블을 치기 시작한 것이다.

    일련의 과정을 뒤늦게 확인하고 멀어지려는 재혁의 뒤를 쫓기 시작한 케이힐이 잇소리를 내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설마 태클을 하려는 것처럼 상체를 기울였던 것까지도 페인팅일 줄이야.’

    손을 뻗는 1차 페인팅, 그리고 상체를 숙이는 2차 페인팅.

    그 모든 과정들이 자신이 공을 뒤로 빼내는 것을 강제하기 위한 행동들이었다니.

    결과적으로 자신에게서 공을 빼앗았으니 나름 제 몫을 한 페인팅들이었지만, 아직 어렸다.

    ‘공을 뺏었으면 바로 돌릴 것이지, 거기서 드리블을 치냐?’

    공을 성공적으로 뺏었다는 성취감에 젖어 판단력이 흐려진 것이리라.

    케이힐은 이대로 재혁의 뒤를 쫓아 이동한 뒤 태클로 플레이를 끊어낼 생각을 했다.

    성공적인 태클이라면 무난하게 턴오버, 못 해도 흐름을 끊을 수 있는 효과적인 수비 방법이었으니까.

    그렇게 아직 멀리 가지 못 한 재혁의 뒤를 바짝 쫓은 케이힐은 틈을 노리다가 그대로 몸을 날렸고, 오른발끝이 정확하게 공이 있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하고 비릿하게 웃다가···.

    “!”

    갑자기 튀어나온 재혁의 발이 그보다 한 템포 더 빠르게 공을 치고 달린 뒤 멀어지는 것을 보면서 대체 어떻게 저럴 수 있는지 믿기 힘들다는 얼굴이 되었다.

    아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대체 저 한 발 빠른 움직임은 정체가 뭐란 말인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범주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한 가지 만큼은 확실했다.

    ‘···완전히 당했다.’

    이번엔 자신이 재혁에게 당했다는 사실이 말이다.

    촤르륵!

    생각이 끝나기 무섭게 케이힐이 잔디 위를 거칠게 굴렀고, 자신의 뒤를 쫓아 움직이던 케이힐의 압박을 떨쳐낸 재혁은 곧장 정면을 살피며 두눈을 빛냈다.

    남들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케이힐도 결국 재혁에게 있어선 그저 제쳐야 할 선수들 중 1명에 불과했으니, 오래 생각해줄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이제 앞에 남은 선수들의 숫자는 6명.

    지금 시도하는 역습이 공을 뺏은 뒤 바로 시도하는 역습인 것을 고려하면 상대의 수비 벽이 꽤 단단했다는 것이 바로 느껴지는 숫자였지만···.

    ‘굳이 저 선수들을 전부 거치고 갈 필요는 없는 거지.’

    뻐엉!

    “ ⁈”

    “거기서 롱패스를?”

    모두가 숏패스를 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갑자기 롱패스를 시도한 재혁.

    덕분에 중심을 앞쪽에 쏟아내면서 압박 수비를 취하려던 맬버른 시티의 선수들을 포함해 재혁의 패스를 기다리며 신경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었던 시드니 FC의 선수들까지 모두가 당황했으나, 한 선수, 안토루는 마치 예상했다는 듯이 재혁이 보내준 공을 쫓아 이동하면서 표정을 굳혔다.

    ‘이번에는 절대로 놓치지 않는다.’

    정확한 타이밍에 라인을 깨고 돌파하면서 오프사이드도 무효화 시킨 상황.

    이미 한 점을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어렵게 찾아온 기회다.

    벌써 한 차례 재혁이 만들어준 찬스를 날렸던 적이 있었으니. 괜한 부담과 긴장감에 안토루는 뻣뻣하게 굳어오는 다리에 애써 힘을 불어넣으면서 공을 쫓아 달렸고, 가슴을 향해 떨어진 공을 가뿐하게 트래핑 하면서 바닥을 향해 서서히 떨어지는 공을 끝까지 노려보면서 오른발을 적당한 타이밍에 휘두르기 위해 슬쩍 들어올렸다.

    그리고 발등에 힘을 주어 그대로 슈팅을 때리려던 순간, 재혁이 그에게 해주었던 말을 떠올렸고.

    사악!

    “헛!”

    논스톱 슈팅으로 이어지려던 것을 발에서 힘을 빼 트래핑으로 바꿔내면서 몸으로 슈팅을 막아보려던 수비수를 자연스럽게 벗겨냈다.

    예측 플레이에 이번에 또 도리어 자신이 당했다, 라는 얼굴로 바닥을 구르면서 멀어지는 수비수를 확인한 안토루가 침착한 얼굴로 호흡을 골랐다.

    이럴 때일수록 호흡이 중요하다던 재혁의 말에 충실히 따른 모습이었다.

    그리고···.

    ‘슈팅에 망설임을 담지 말라고 했다!’

    파앙!

    방해물인 수비수가 사라지면서 찾아온 골키퍼와의 1대1.

    이미 한 번 실수를 했던 전적이 있었음에도 안토루는 슈팅을 때리는 데 망설임이 없었고, 발등에 정확히 맞은 공은 이후 바람 소리를 내더니 빠른 속도로 골키퍼 장갑을 피해 골대 구석에 박히면서 기어코 동점골을 터트리는데 성공했다.

    골망이 출렁이기 전까지 조용하던 경기장은···.

    “와아아아!”

    “드디어 동점이다!”

    안토루가 기쁨에 겨운 함성을 내지르며 필드 위를 뛰는 것을 신호로 뜨겁게 달아올랐고, 시드니 FC의 선수들도 그런 안토루를 향해 달려들면서 득점에 성공한 동료를 축하해주었다.

    하지만 다른 누구보다 재혁의 반응이 궁금했던 안토루는 곧장 재혁을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런 안토르를 향해 재혁은 생긋 웃으면서 말했다.

    “아직 경기 안 끝난 거 알고 있죠?”

    “너는 가끔 너무 냉정하다니까.”

    이럴 때 칭찬 한 마디 해주면 덧나냐? 라고 웃으면서 대꾸하던 안토루는 재혁이 어깨를 으쓱이는 모습을 보곤 실실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네가 주는 패스는 믿을 수 있어. 그래, 경기가 끝날 때까지 한 번 죽어라 뛰어 보자.”

    ***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의 시드니 FC 서포터들이 모여 있는 자리 앞에서 세레모니를 치렀던 선수들이 하나둘 진영으로 돌아오면서 경기가 재개될 준비가 끝났다.

    맬버른 시티의 선수들은 기다리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 심판이 호각을 불기 무섭게 공을 굴렸고, 그런 상대 선수들의 눈빛을 읽은 재혁은 필드 위를 가벼운 발놀림으로 뛰면서 생각했다.

    ‘불이 붙었군.’

    전반전, 그리고 후반전 초중반까지도 리드하고 있던 맬버른 시티였기에 후반전이 끝나기까지 대략 20여분 남은 상황에서 당한 실점이 달갑진 않을 것이다.

    빠르게 공을 돌리면서 공격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모습이 반드시 이번 경기에서 이기겠다는 의지가 형상화 되는 것처럼 보였고, 그런 맬버른 시티 선수들의 움직임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재혁도 서서히 두 눈동자에 불길을 담았다.

    저들이 지고 싶지 않아하는 것처럼, 재혁도 이번 경기에서 반드시 이기고 싶었으니까 말이다.

    승부욕이라면 어느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것이라 자부할 수 있었던 재혁이 다시 공을 잡은 것은 후반 40분에 이르러서였다.

    조급한 마음에 맬버른 시티에서 안일한 패스를 시도했고, 시드니 FC의 수비수는 주인을 잃은 공을 잡기 무섭게 중원에 있는 재혁을 향해 공을 넘겨준 것이다.

    재혁이 공을 받는 순간 주위 공기가 싸늘하게 식는 것을 모두가 느끼고 침을 삼켰는데, 재혁과 지금까지 계속 중원에서 싸움을 벌여왔던 케이힐은 도리어 열을 뿜어내며 재혁에게 바짝 따라붙었다.

    이번엔 결코 쉽게 안 뚫린다.

    그런 의지가 담긴 얼굴로 자신을 노려보며 다가오는 케이힐을 차가운 눈빛으로 노려보던 재혁은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분명 존경할만한 실력을 지닌 선수지만···.

    ‘이젠 쉬는 게 편할 겁니다.’

    투욱, 투웅!

    “으윽!”

    간결한 두 번의 볼 터치.

    첫 번째 터치로 상대의 눈을 속이고, 두 번째 터치로 상대를 뚫고 지나가는 재혁의 드리블에 케이힐은 이번에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하고 뻣뻣하게 몸이 굳었던 것이다.

    젊은 선수들이 보기에도 한 템포 빠르다고 느끼는 재혁의 드리블을 눈으로 간신히 쫓는게 전부였던 케이힐은 뒤늦게 재혁이 지나친 방향을 쫓아 달렸고···.

    삐이익!

    결국 손을 써서 막는 수 밖에 없었기에 파울을 범해 재혁의 플레이를 중간에 막았다.

    심판의 가슴 주머니에서 노란색 카드가 빠져나와 경고를 주는 것은 정해진 수순이었고, 케이힐도 경고를 예상했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면서 뒷걸음 질을 치며 벽을 쌓는 곳에 합류했다.

    그렇게 심판이 프리킥을 찰 위치와 벽과의 거리까지 정리해줬을 때, 공을 앞에 두고 선 재혁이 멍하니 생각에 잠겼고, 초점을 잃은 눈동자로 골대를 바라보고 있는 재혁을 걱정스러운 눈길로 지켜보던 내쉬가 그에게 물었다.

    “어이, 꼬마. 괜찮냐? 설마 그거 좀 넘어졌다고 혼이 나간 건 아니지?”

    “설마요.”

    내쉬의 말에 가볍게 웃어 보인 재혁은 슬쩍 고개를 털어내고 케이힐, 골키퍼, 그리고 골대의 위치를 다시 한 번 살펴본 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케이힐 선수의 직감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말예요.”

    “케이힐의 직감···?”

    그건 또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냐고 물으려던 내쉬가 그래서 프리킥은 네가 찰거냐? 라고 물었고, 재혁은 그런 내쉬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이건 자신이 찰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래야만···.

    ‘골냄새를 맡았다는 케이힐 선수의 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증명해줄 수 있으니까 말이지!’

    뻐엉!

    가벼운 거리 조절, 그리고 도움 닫기 이후 정확한 디딤발과 오른발의 스윙은 잔디 위에 놓여 있는 공의 왼쪽 아랫 부분을 강하게 때렸고, 인프론트에 감긴 공은 빠르게 돌면서 케이힐이 섞여있는 벽을 넘어 골대 왼쪽 구석을 향해 날아갔다.

    모두가 공이 날아가는 궤적을 살피며 설마, 라는 생각을 품고 있을 때.

    “들어갔다.”

    재혁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작게 읊조린 뒤 씨익 웃었다.

    그 다음 순간에 경기장을 뒤집을 정도로 커다란 함성 소리가 터진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

    찰칵, 찰칵!

    경기가 끝나고 설치된 미디어 존.

    그 위에 선 케이힐은 땀이 뚝뚝 흐르는 얼굴을 연신 수건으로 닦아내면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했다.

    대부분의 질문들은 오늘 치렀던 결승전이라는 주제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았다.

    “우승이 아니라 준우승이라는 결과가 아쉽겠습니다, 케이힐 선수.”

    “모두가 그렇게 느끼겠죠. 다만 준우승이라는 결과 또한 또한 노력의 결실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아쉬움보다는 뿌듯함을 더 크게 느낍니다.”

    “선취 득점을 터트릴 때까지만 해도 경기에서 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나요?”

    “선취 득점이라.”

    기자의 질문에 잠시간 생각에 잠겼던 케이힐은 피식 실소를 흘리면서 답을 이었다.

    “솔직한 말로 득점을 터트린 그 순간 경기에서 이겼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자만했던 거죠.”

    “그렇다면 조금만 더 신중했더라면 경기에서 이길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건 또 아마 힘들지 않았을까요? 사실 자만했다, 라는 말도 시드니의 8번, 최재혁 선수를 가볍게 생각했던 탓에 떠오른 감정이었거든요. 하지만 직접 부딪쳐보니 확실히 알 수 있겠네요.”

    붉어진 뺨과 함께 콧등을 긁적이며 뜸을 들이고 있는 케이힐을 기자들은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눌러 사진으로 찍었고, 쉬지 않고 터지는 플래쉬를 똑바로 마주보면서 케이힐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 친구는 머지않아 아시아 최고, 아니. 세계 최정상급 선수가 될 겁니다. 호주에서 최재혁 선수가 한 시즌을 뛰었다는 것은 분명 우리 A리그의 자랑거리가 되어줄 겁니다.”

    ***

    “경기장에서 보여줬던 행동에 비하면 인터뷰는 깔끔하네?”

    라커룸으로 향하는 복도에 기대어 서 있던 내쉬가 터벅이는 걸음걸이로 내려오는 케이힐을 맞이하며 물었고, 케이힐은 그런 내쉬를 향해 예의 실소를 흘려보이며 답했다.

    “축구가 전쟁이라곤 하지만, 이미 끝난 전쟁을 구질구질하게 끌고가는 건 또 내 성격이랑 안 맞거든. 그래도 동업자 아니냐? 지켜줄 건 지켜줘야지.”

    “말이라도 못 하면.”

    내쉬가 케이힐의 답을 들으며 그를 따라 웃었고, 곧 같이 발걸음을 맞춰 이동하기 시작한 두 사람이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래서 네가 보기엔 어때? EPL에서 충분히 성공할 것 같냐?”

    “립서비스 빼고?”

    “담백하게 말해봐. 사실 다른 누구보다 네 생각이 제일 궁금하거든.”

    내쉬의 질문에 케이힐은 아주 잠깐 턱을 쓸어내리더니 고민할 것도 없다는 듯이 곧장 친구의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단순히 성공이라는 말로는 부족할 거야. 그 꼬마는 특별해. 상대해본 내가 이렇게 느끼는데, 같은 팀에서 경기를 뛴 너는 크게 느낀 바가 없냐?”

    “누구처럼 난 EPL에서 뛰어보질 못 했거든. 그래서 내 감각에 대한 확신이 부족했지.”

    “확신? 뭐에 대한 확신? 최재혁이 성공한 선수가 될 거라는 확신 말인가? 그건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종류의···.”

    “아니.”

    케이힐이 고개를 갸웃이며 묻는 것에 내쉬는 이가 보일 정도로 환히 웃으면서 말했다.

    “재혁이 말고 EPL로 가게 될 또 다른 선수가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대한 확신. 그런데 네 말을 들어보니 내 감을 조금은 믿어봐도 될 것 같군.”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됐다. 얼른 씻고 집으로 가라.”

    “야!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어 놓고 그냥 가면 어떡해?”

    등뒤에서 케이힐이 계속해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내쉬는 반응하지 않고 그저 웃으면서 자리를 떠났다.

    다른 사람들이 본다면 바보 같은 웃음이라고 말할 모습이었지만, 내쉬는 개의치 않았다.

    왜냐면 어느 누구라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미소가 그려지는 상상이었으니까 말이다.

    ‘일단 재혁이가 먼저 가고 안토루가 머지않아 그 뒤를 따르겠군. 은퇴를 해도 축구를 보는 재미는 여전할 것 같구만.’

    재혁과 안토루.

    말년에 얻게 된 인연들이 과연 어떤 식으로 성장할지를 기대하면서 내쉬는 경기장을 떠났다.

    < 52. 두 사람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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