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51화 (51/225)
  • < 51. 승부수 >

    이번에 또 한 번 시도한 재혁의 중장거리 패스가 허공을 가르며 상대 진영 깊숙한 곳을 향해 날아가는 것을 보면서 캐스터와 해설자들이 입을 모았다.

    “시드니에선 계속해서 긴 패스를 주력으로 삼아 공략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최재혁 선수의 발을 떠난 공이 길게 날아 정확하게 내쉬에게 닿는군요. 분명 좋은 패스이긴 하지만···.”

    “내쉬 선수, 이번에도 고립되고 말았죠?”

    중간 과정을 생략하고 넘어온 패스인 만큼, 그 뒤를 받쳐줄 선수들의 움직임이 많이 부족한 것이 문제였다.

    차곡차곡 쌓아 올라온 패스라면 앞이 막히거나, 옆이 막혔을 때 2차적으로 행동을 취할 공간이 어느 정도 있었을 텐데. 길게 넘어온 다이렉트 패스는 상대 선수들이 진영을 잡고 있는 공간에 공을 뚝하고 떨어뜨린 것과 같은 효과였고, 과연 해설의 말처럼 맬버른 시티에선 공을 소유하고 있는 내쉬를 중심으로 빗장을 치면서 무리 없이 압박 수비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다.

    정확도 하나 만큼은 분명 인정해줄만한 패스였지만···.

    ‘몇 번을 시도해도 똑같아. 그런 단순한 플레이로는 쉽게 뚫을 수 없을 거다.’

    “쟈콥! 네가 공을 따라가!”

    센터백을 맡고 있는 이안이 파트너 수비수인 쟈콥을 향해 내쉬를 쫓을 것을 명령했다.

    상대가 왼쪽을 뚫으려 한다면 자신이 거리를 좁히고, 반대쪽인 오른쪽에서 공을 잡으면 쟈콥이 자리를 잡는 식으로 서로 호흡을 맞췄는데, 이번에 내쉬가 공을 잡은 위치가 정확하게 중앙 지근에 위치하고 있었기에 혼란이 오기 전에 재빨리 합을 맞춘 것이다.

    쟈콥도 그런 이안의 의견에 따라 서둘러 발을 움직여 내쉬의 앞을 막았고, 공을 끌면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내쉬는 자신의 앞으로 쟈콥이 붙자 미소를 떠올렸다.

    아무래도 나이가 있는 지라 아직 한창 팔팔할 나이의 수비수인 쟈콥과 정면으로 부딪친다면 분명 자신이 밀릴 터였지만.

    ‘그건 너희들도 똑같은 입장이지.’

    투웅!

    “···!”

    쟈콥이 자신에게 다가오기 무섭게 내쉬가 공을 밀어찼다.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은 평범한 패스는 방금까지 이안이 머물고 있던 공간을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고, 그 패스의 의미를 처음엔 알아차리지 못했던 이안이었으나, 내쉬의 패스의 뒤를 따라 움직이는 상대방 선수를 확인하고 이안이 뒤늦게 잇소리를 내며 멈추고 있던 발을 움직였다.

    시드니의 9번, 안토루.

    ‘그게 목적이었나!’

    최전방에서 활동하는 내쉬의 그림자가 되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안토루가 내쉬의 패스를 쫓아 전력을 다해 달려들었고, 쟈콥이 자리를 벗어난 이상 안토루를 막아야 할 사람이 본인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 이안이 입술을 깨물었다.

    내쉬가 쟈콥을 꺼려하는 것처럼, 나이가 적지 않은 이안도 안토루를 상대하는 것이 껄끄러웠는데. 내쉬는 처음부터 그 점을 노리고 판을 짰던 것이다.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이 떠올랐지만 지금 처리해야 할 일은 오직 한 가지라는 것을 기억하면서 이안이 안토루의 옆에 바짝 따라붙었다.

    ‘어떻게 해서든 일단 공을 걷어낸다!’

    ‘어떻게 해서든 일단 슈팅까지 시도한다!’

    이안이 실점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것처럼 안토루도 내쉬의 패스를 받는 순간 어떻게든 득점 찬스를 만들어내기 위해 온 신경을 쏟아 드리블에 집중했다.

    일단 가속이 붙은 상태에서는 이안보다 자신의 달리기가 더 빨랐으니, 안토루는 속력을 유지하기 위해 첫 터치를 길게 가져갔고, 크게 두세 걸음을 걸어 재차 가까워진 공의 두 번째 터치를 시도하기 전에 아주 잠깐 생각에 잠겼다.

    ‘지금까지 내 평소 드리블이 어땠지?’

    공을 가슴으로 트래핑 하면 빠르게 슈팅을 시도 하려는 습관과 왼발로 공을 잡으면 꼭 한 번 드리블을 멈추려던 습관.

    자신은 몰랐지만 재혁이 알려준 본인의 습관에 대해 떠올리게 된 안토루는 평소 드리블을 칠 때 자신이 어떤 방식을 고수해왔는지를 떠올리면서 눈동자를 빛냈고, 곧 공이 바로 한 걸음 앞으로 다가온 것을 확인하면서···.

    사락!

    “!”

    두 번째 터치는 공을 밀고 가는 드리블이 아닌, 발바닥을 사용해 공을 몸 안쪽으로 당기는 드래깅을 시도했고···.

    ‘이, 이런!’

    안토루의 뒤를 바짝 쫓으면서 안토루가 공을 치고 달리는 드리블을 시도 할 것이라 예상했던 이안은 갑작스런 안토루의 방향 전환에 역동작이 걸려 중심을 잃고 바닥에 미끄러지게 되면서 두눈을 부릅떴다.

    오늘을 위해 안토루가 무의식 중에 시도하는 플레이 습관들을 분석해왔거늘.

    그 분석을 믿고 있다가 도리어 당하게 된 것이다.

    머리론 미끄러지는 발바닥에 힘을 주어 자리에 멈춰선 안토루의 앞을 막아서고 싶었지만, 현실 속의 이안은 운동 에너지를 거스를 수 없어 잔디 위를 구르게 되었고, 그 말인즉.

    ‘기회다!’

    안토루에게 패널티 아크에서 슈팅을 시도할 완벽한 찬스가 왔다는 소리.

    이안의 압박에서 완전히 벗어난 안토루는 공을 여유있게 오른발로 안으로 당긴 뒤, 오른쪽으로 방향을 잡아 살며시 밀어놓고 그대로 왼발을 뻗어 공의 바로 옆에 디딤발을 디디면서 오른발 인프론트로 슈팅을 때려 먼쪽 포스트를 노리고 감아찼다.

    일련의 과정들은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부드러운 연결 동작으로 이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이럴 목적으로 공을 트래핑했다는 듯이 말이다.

    안토루를 제외하곤 누구도 예상하지 못 했던 슈팅이었기에 골키퍼 마저도 안쪽으로 크게 몸이 기운 상황.

    만약 저대로 공만 골대 안으로 들어간다면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을 슈팅은 확실한 득점으로 이어질 테지만···.

    터엉!

    “아!”

    아쉽게도 골망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 골대를 때리면서 골라인 바깥으로 나가고 말았고, 동시에 전반전의 끝을 알리는 주심의 휘슬이 울려 퍼졌다.

    공이 라인 밖에서 구르는 것을 확인한 맬버른 시티 선수들은 안도의 한숨을, 시드니 FC의 선수들은 모두 아쉬움에 주먹을 움켜쥐고 혀를 찼는데, 중계석에 앉아서 안토루의 슈팅 장면을 지켜보던 세 명도 정말 아까웠다며 좋은 슈팅을 시도했던 안토루를 칭찬하면서 후반전에는 보다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길 기대한다는 말로 전반전 중계를 끝마쳤다.

    다만 안토루 본인은 슛이 빗나간 것이 못내 아쉬웠는지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양손으로 머리를 거칠게 뒤집으면서 고함을 내질렀다.

    “이런 멍청이! 방금 그건 확실하게 결정지어야 했는데!”

    “글쎄요. 방금 슈팅은 정말 운이 없었던 거죠. 아마 살짝만 더 깎였어도 골포스트를 때리고 골대 안쪽으로 들어갔을 걸요?”

    “하아, 재혁아.”

    자신의 뒤로 다가와 라커룸으로 돌아가자며 턱짓을 보이고 있는 재혁의 얼굴을 본 안토루는 면목이 없다는 듯이 양손으로 뺨을 쓸어내린 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네가 넘겨준 패스가 몇 갠데, 그 중에서 단 하나도 제대로 살리질 못 했다.”

    “에이. 그런 식으로 생각하시면 안 되죠. 상대 수비수들도 바보가 아니잖아요?”

    모든 패스가 다 어시스트로 이어진다면 축구보다 농구에 더 가까울 거라면서 재혁이 웃었지만, 안토루는 여전히 진지한 얼굴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에 재혁을 따라 웃을 수 없었다.

    안토루의 반응이 생각보다 어두운 것을 확인하면서 재혁이 잠깐 당황한 얼굴로 뺨을 긁적이다가 안토루에게 말했다.

    “마지막에 슈팅을 시도하기 전에 보여줬던 동작은 따로 생각을 하고 시도한 움직임이었죠?”

    “그거? 그렇지. 네가 말했잖아. 나는 항상 같은 동작들을 습관처럼 반복해왔다고. 그래서 이번엔 평소에 하지 않을 것 같았던 시도를 해봤던거야. 물론 결과는···, 아야!”

    퍼억! 안토루가 고개를 숙이면서 말을 이어가다가 갑자기 재혁이 어깨를 때린 것에 비명을 지르면서 한쪽 손으로 맞은 부위를 감쌌고, 갑자기 왜 때리냐고 재혁에게 소리치다가 재혁이 진지한 얼굴로 자신을 마주보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입을 다물었다.

    재혁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안토루의 두눈을 지긋이 바라보다가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다물고 있던 입술을 뗐다.

    “공격을 하는 사람이 그렇게 간이 작아서야 되겠어요?”

    “가, 간이 작아?”

    “공격에서 아무리 실수를 해도 경기에서 지진 않아요. 뭐, 팀을 힘들게 만들긴 하겠지만, 실점이 발생하는 곳은 공격이 아닌 수비니까요. 실제로 오늘 실점도 제가 부족해서 먹은 거죠.”

    “···그게 무슨 소리야?”

    안토루는 재혁이 하는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없어 미간을 모은 얼굴로 되물었고, 재혁은 그런 안토루를 향해 계속해서 말했다.

    “10번의 실수를 해도 한 번의 성공으로 인정 받는게 공격수예요. 그런데 전반전 동안 얼마나 시도를 해봤다고 벌써 풀이 죽어 있으면 어떡해요?”

    “···!”

    “축구가 끝나려면 아직도 45분이 더 남았어요. 남은 45분 동안 계속해서 시도하세요. 그리고 실패하세요. 하지만 멈추진 말아요. 멈추는 순간은 주심이 경기 종료 휘슬을 불어서 더 이상 시도할 수 없을 때에 멈추는 겁니다. 그 전까진 백 번이고 천 번이고 계속해서 시도하는 거에요. 어차피 기록되는 건 성공한 횟수들 뿐이니까 말이죠. 두려워 할 이유가 전혀 없다고요.”

    그렇게 자기 할 말을 끝마친 재혁은 라커룸으로 향하는 복도 안으로 이동하면서 안토루의 시야에서 멀어졌고, 멍하니 자리에 서서 멀어지는 재혁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안토루가 뒤늦게 재혁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나도 영국으로 갈거다!”

    아주 짧은 한 마디였으나, 오늘 안토루가 한 말들 중 가장 자신감이 넘치는 한 마디였기에 재혁은 잠시 발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고, 재혁이 아직까지도 몸을 전부 돌린 게 아닌, 상체만 살짝 돌리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안토루가 재차 소리쳤다.

    “같은 팀이 될지, 아니면 상대 팀이 될지는 모르지만. 나도 너를 따라서 영국으로 갈거다.”

    앙 다문 입술과 뜨겁게 불타는 두눈이 평소의 안토루와는 거리가 있었지만, 적어도 이제야 ‘운동 선수’다워졌다는 부분에서 동의할 수 있었던 재혁은 작게 미소를 보이더니 안토루에게 짧게 답을 한 뒤 라커룸으로 들어갔다.

    “꿈을 꾸는 것까진 제가 간섭할 수 없죠.”

    “꿈 아니거든! 곧 현실이 될 거야. 네가 패스를 하고, 내가 골을 넣는···, 아주 멋진 현실이 말이지!”

    “그거 상대 팀이 된다면 불가능한 상황 아니에요?”

    “후후. 내가 재혁이 네가 시도하는 패스를 뺏어서 골을 넣는다면···.”

    “너희 둘. 뭐하다가 이렇게 늦게 왔어? 하프 타임이 벌써 반 이상 지났다고.”

    재혁과 안토루가 시끌시끌하게 떠들며 라커룸으로 들어오는 것을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루아드 감독이 쯧쯧, 혀를 차면서 둘을 반겼고, 그런 감독을 향해 안토루는 예의 밝은 미소를 보이면서 답했다.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좀 늦었네요.”

    “미래?”

    “오늘 결승전에서 승리하고 난 뒤 찾아올 미래요. 계획은 원래 미리미리 짜둬야 하는 거잖아요?”

    능글맞은 목소리로 재혁의 어깨에 자신의 팔을 두르고 말하고 있는 안토루를 빤히 바라보던 루아드 감독은 이내 실소를 터트리더니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큭큭. 좋아, 좋아. 다행히 후반전에는 기죽은 강아지마냥 꼬리를 숨기고 있진 않겠군.”

    “누가 꼬리를 숨겨요?”

    “아니면 눈만 가린 고양이라던가.”

    “비교를 하려면 사자나 호랑이 정도로 해주세요. 고양이나 강아지가 뭡니까?”

    “그건 네가 어떻게 하냐에 달렸지. 아니, 정확하게는···.”

    루아드 감독의 이해 못할 말에 안토루가 인상을 구기며 고개를 갸웃였고, 감독은 여전한 얼굴로 실소를 흘리면서 재혁과 안토루, 두 사람에게 후반전부터는 달라질 전술판을 보여주며 말했다.

    “과연 사자가 될지 아니면 강아지가 될지는 재혁과 안토루, 너희 둘의 호흡에 달려 있는 거야.”

    “이건···.”

    재혁이 전술판을 확인하고 눈동자를 모으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루아드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반전 동안 데이터는 충분히 쌓았지? 후반전엔 진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

    하프 타임이 마침내 끝이 나고 선수들이 차례로 필드 위로 올라오기 시작하면서 중계 석에 위치한 카메라도 다시 돌기 시작했다.

    스콧 캐스터는 전반전 하이라이트를 해설자들과 함께 확인하면서 자신의 솔직한 감상을 풀어놓았다.

    “시드니 FC에서 변화를 주지 않는다면 이번 경기는 힘들 수 있겠군요.”

    “맬버른 시티가 전반전을 주도 했으니, 루아드 감독도 분명 변화를 줄 생각을 하고 있을 겁니다.”

    “그래도 마냥 불안하기만 한 것은 또 아니죠. 전반전이 끝나기 직전에 보여주었던 안토루 선수의 슈팅은 충분히 위협적이었으니까요. 그만한 플레이가 계속해서 나온다면 맬버른 시티도 장담할 수 없는 후반전이 될 겁니다.”

    “그렇긴 하지만 결국 핵심 선수가 살아나야 경기에도 변화가 찾아오는 거니까요.”

    핵심 선수.

    그 말이 의미하는 선수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차린 세 사람은 마치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더니 계속 말했다.

    “분명 좋은 활약을 보여주곤 있지만, 단순히 좋은 활약만으론 이길 수 없어요. 최재혁 선수 만의 ‘특별함’이 필요한 순간입니다.”

    “필요할 때면 마법 같은 순간들을 만들어내던 선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후반전을 기대해보겠습니다.”

    “말씀하시는 순간 마침내 선수들이 모두 필드 위에서 준비를 끝낸 것으로 보이죠? 후반전은 맬버른 시티의 선축으로 시작될 예정인데···, 어?”

    “시드니 FC가 포메이션을 바꿨군요.”

    4백을 3백으로 바꾸고, 3명의 미드필더 중 가장 후방을 맡고 있던 재혁이 약간 더 위쪽으로 이동한 포메이션.

    다들 낯설지만 한 번쯤은 본 적이 있는 시드니 FC의 포메이션을 살펴보면서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는데, 중계석 가운데에 앉아서 물로 입술을 축인 페트릴로 해설이 사못 기대가 어린 목소리로 셋을 대표해 말했다.

    “한국의 임종철 감독이 독일과의 경기에서 한 차례 보여준 적이 있는 ‘최재혁 쉬프트.’ 시드니 FC가 후반전을 맞아 맬버른 시티를 상대로 승부수를 띄웠군요.”

    < 51. 승부수 > 끝

    ⓒ 권주호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