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50화 (50/225)
  • < 50. 아직 전반전이다 >

    ‘지금까지 녀석을 피한 게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알려줄 필요가 있겠어.’

    동료의 패스를 받으면서 동시에 재혁을 앞에 둔 케이힐이 슬쩍 상체를 숙이면서 서서히 공을 몰며 앞으로 전진하기 시작했다.

    측면을 공략하려 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팀을 위한 선택이었을 뿐.

    비록 세월이 흘렀지만 순간 가속을 이용한 폭발력은 여전히 자신이 있었기에 케이힐은 재혁을 상대로 망설임 없이 드리블을 시도한 것이다.

    최고 속력을 끝까지 유지하는 건 분명 무리가 있겠지만···.

    투웅!

    딱 한 번.

    그 한 번의 시도를 통해 원하는 공간까지 언제든 파고들 자신이 충분히 있었기에 망설이지 않고 거침없이 시도한 드리블이었고, 그의 의도대로 케이힐은 재혁을 옆에 달고서 시드니 FC의 진영 중앙을 파고 들며 그를 따라 좌우로 산개하는 동료들을 살폈다.

    일반적인 선수라면 이쯤에서 압박을 풀어내기 위해 동료와 패스를 주고 받았을테지만, 케이힐은 거기서 한 차례 더 공을 컨트롤하더니 재혁을 옆에 달고서 계속해서 드리블 돌파를 시도했다.

    욕심을 부린 판단이 아니었다.

    ‘역시 예상대로 힘이 좋진 못 해!’

    재혁이 걸어오는 몸싸움을 통한 견제를 충분히 견딜만 했기에, 공을 뺏기지 않을 자신이 있었기에 멈추지 않고 계속 드리블 돌파를 시도한 것이다.

    여태까지 보여준 플레이들을 토대로 느끼건데, 재혁이 지금까지 다른 선수들과 대등한 몸싸움을 펼칠 수 있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의 발이 남들보다 빨랐기 때문이었다.

    공이 이동할 위치를 먼저 읽고, 주요할 포지션을 상대보다 빠르게 취하면서 무게 중심을 단단히 잡아 어깨 싸움에서 밀리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니 녀석을 효과적으로 돌파하는 방법은 패스를 통한 공 돌리기, 혹은 공간을 파고드는 방식이 아닌, 바로 지금처럼 공을 끝까지 소유하면서 유리한 포지션을 지키면서 나아가는 것이었고···.

    ‘지금이다!’

    “!”

    재혁을 왼쪽 팔로 꽉 붙잡아두고 있던 케이힐이 마침내 재혁의 압박을 벗겨내면서 정면에 열린 공간을 뚫고 달렸다.

    몸싸움을 통해 너무도 쉽게 케이힐에게 돌파를 허용한 재혁은 인상을 구기면서 입술을 깨물었다.

    ‘안일했다.’

    설마 패스가 아닌 직접 드리블을 시도할 줄이야.

    자신의 몸이 조금이라도 더 성장했더라면 케이힐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도 덜 자란 근육으로 케이힐이란 선수를 막기엔 모자람이 있었던 것이다.

    ‘역시 전성기가 지났어도 클래스는 남아 있구나.’

    상대가 손을 쓰는 것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재혁은 점차 멀어지는 케이힐의 뒷모습을 노려보면서 케이힐과 엉켰던 손을 풀었고, 재혁의 압박이 느슨해진 것을 느끼면서 케이힐이 미소를 떠올렸다.

    이걸로 완전히 뚫어냈다.

    그런 의미가 담긴 미소였다.

    이제 최종 라인만 돌파하면 확실한 득점 찬스가 만들어질 것이리라.

    거기까지 생각이 막 미쳤을 때였다.

    챠르륵! 터엉!

    “?!”

    잔디 훑는 소리와 함께 쭉 뻗은 다리가 튀어나오더니 자신의 발 밑에 있던 공을 깨끗하게 걷어냈다.

    전혀 예상하지 못 했던 갑작스러운 태클에 케이힐이 놀라 눈을 부릅 뜨다가 스텝이 엉켜 바닥을 굴렀고, 땅을 짚으면서 고개를 들자 그와 함께 바닥을 구르고 있던 선수, 시드니의 8번 최재혁이 계속해서 방어에 나서기 위해 재빨리 몸을 일으키는 게 눈에 보였다.

    ‘어느 틈에···?!’

    분명 완전히 뚫어냈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어떻게 태클로 자신의 드리블을 끊었단 말인가?

    도저히 자신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던 상황에 케이힐이 짜증스럽게 눈썹을 구기려다가 귓가를 파고든 주심의 휘슬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렸고, 시드니의 파울이라고 선언한 심판의 목소리를 듣고 이내 표정을 풀었다.

    “이게 파울이라고?”

    다만 시드니 FC의 선수들은 심판의 판정에 불만을 품고 득달같이 달려 들어 목소리를 높였다.

    그 중에서도 주장 완장을 차고 있는 내쉬가 심판에게 다가가 직접 항의했다.

    “방금은 공만 걷어내는 깨끗한 태클이었잖아요!”

    “내가 보기엔 공을 건드리기 전에 접촉이 있었어.”

    “그건 접촉 때문에 넘어진 게 아니라 케이힐의 다리가 풀려서 바닥을 구른 거죠!”

    “이미 휘슬은 불었고, 판정도 나왔는데. 계속 항의할 건가? 아니면 경고를 봐야 자리로 돌아갈 건가?”

    내쉬가 계속해서 따지는 것에 심판이 카드를 만지작거리며 으름장을 놓았고, 이에 내쉬는 다음부터는 제대로 봐달라고 말하면서 아쉬운 얼굴로 혀를 찬 뒤 멀어졌다. 그러면서 재혁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토닥이며 위로했다.

    “좋은 태클이었어. 이건 심판의 눈에 문제가 있는 거야.”

    “저도 운이 좋았어요. 사실 경고를 각오하고 시도했던 태클이거든요.”

    상대에게 드리블 돌파를 허용했다는 것 자체에서 이미 방금 플레이는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재혁은 운이 좋아 공만 빼낼 수 있었지만, 만약 해야 했다면 몸을 사용해 케이힐을 막을 생각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물론 클린한 태클이었던 만큼 아쉬움이 남는 판정이었지만, 그래도 드리블을 끊었다는 것에 나름 만족했고, 상대의 프리킥을 막아내기 위해 자리를 잡고 있을 때 케이힐이 그의 옆에 다가온 것을 확인하고 슬쩍 어깨를 맞댔다.

    이번에 또 기죽지않고 자신에게 몸을 기대는 재혁을 옆에 두고서 케이힐은 실소를 흘렸다.

    “몸으론 안 되는 거 방금 느끼지 않았나? 그런데 계속 하려고?”

    “그렇다고 그냥 둘 순 없잖아요.”

    “그래. 기특한 생각이긴 한데···.”

    투웅!

    짧은 대화를 주고 받던 중, 맬버른 시티에서 프리킥을 길게 찼고, 동시에 케이힐이 공간을 찾아 들어가면서 두 사람의 대화가 멈췄다.

    재혁도 그런 케이힐을 놓치지 않기 위해 그의 뒤를 빠짝 쫓았으나···.

    “아직은 멀었어.”

    터엉!

    공을 향해 뛰어오르는 케이힐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정확히 케이힐의 이마에 맞은 공의 각도가 굴절되면서 골키퍼가 없는 골대 빈구석을 향해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마침내 터진 선취점.

    그 첫 골의 주인공인 케이힐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코너 플래그로 달려가 주먹을 휘두르며 동료들과 기쁨을 나눴고, 진영으로 돌아가면서 우두커니 서있는 재혁을 바라보며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말했잖아. 골 냄새가 났다니까.”

    ***

    “전반 38분! 마침내 터진 선취점! 맬버른 시티의 케이힐이 득점을 신고하면서 앞서 나가기 시작합니다!”

    “방금 득점 상황은 전형적인 케이힐 선수의 득점 과정이었죠. 높게 떠서 날아오는 공을 놓치지 않고 헤딩! 공을 보고 자리를 이동했던 골키퍼가 뒤늦게 반대쪽으로 다이빙을 해보지만 저런 각도로 공이 꺾이면 막을 수가 없어요.”

    “이번 득점으로 FFA 컵의 최고령 득점자를 또 한 번 갱신하게 된 케이힐입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골 냄새를 맡는 감각 하나 만큼은 그 누구도 따라가기 힘들군요.”

    케이힐의 헤딩이 골로 인정되기 무섭게 캐스터와 해설자들은 각자 한 마디를 거들면서 리플레이를 지켜보았다.

    필요한 순간에 한 방을 터트려주는 선수답게, 단 한 번 찾아온 기회를 놓치지 않고 득점으로 연결하는 모습을 보며 다들 하나같이 탄성을 흘리며 감탄한 것이다.

    EPL에서 활약할 시절에도 제공력 하나만큼은 누구와 견주어도 밀리지 않을 케이힐이었고, 그런 케이힐을 상대하다가 실점의 빌미를 제공한 재혁을 보면서 사람들은 아쉬운 마음을 숨기지 않았다.

    “상성이 나빴어요. 두 선수가 키는 비슷하지만 그동안 쌓은 경험치와 신체 능력의 차이는 분명 존재하거든요. 태클까진 좋았지만, 실점의 빌미가 되었다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죠.”

    “차라리 전문적으로 수비를 하는 선수를 케이힐에게 붙여줬으면 어땠을까, 라는 아쉬움이 남습니다.”

    “분명 최재혁 선수가 좋은 선수임은 맞지만, 아직 수비의 조율과 공격을 위한 빌드업을 동시에 소화하기엔 무리가 있어 보이니까 말이죠. 한 선수에게 몰린 부담을 어떻게든 덜어주는 게 맞아요.”

    스콧 캐스터가 안타까워하자 페트릴로 해설이 그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키노보 해설도 동의한다는 듯 시드니 FC의 선발 로스터를 확인하면서 말을 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루아드 감독이 준비한 전반전의 전술은 아무래도 실패했다는 것이···, 응?”

    선발 로스터와 함께 각 선수별 데이터가 정리되어 있는 전자 스크린을 확인하던 키노보 해설이 무언가를 발견하고 눈썹을 모았고, 그런 키노보 해설을 향해 캐스터와 페트릴로 해설이 물었다.

    “왜 그러시죠, 키노보 해설?”

    “지금에서야 확인한건데 말입니다.”

    톡, 톡.

    전자펜을 이용해 스크린을 건드리자 곧 세 명이 공유하는 화면에 키노보 해설이 보고 있던 화면이 떠올랐고, 재혁이 지금까지 패스를 한 방향과 성공률이 떠올라 있는 데이터를 두 사람에게 설명하면서 말을 이었다.

    “오늘 최재혁 선수, 단 한 번도 뒤로 패스를 한 적이 없군요.”

    “뒤로 패스를 한 적이 없다고요?”

    “보시면 오늘 시도한 패스들은 모두 전방을 향하고 있어요. 물론 측면으로 벌어진 패스들도 있습니다만, 기본적으로 뒤로 향한 패스는 단 하나도 없군요.”

    “그거 위험한 거 아닌가요?”

    스콧 캐스터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물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마이크 위에 꺼내놓았다.

    “팀이 불안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무리하게 전방으로 공을 연결하고 있다는 소리가 아닌가요? 필요하다면 뒤로 공을 돌려 호흡을 가다듬는 것도 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흠, 글쎄요.”

    캐스터의 질문에 키노보 해설은 다음 장면을 스크린 위에 떠올리면서 말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시도한 패스들이 단 한 번도 뺏기지 않고 동료를 찾아갔다면···, 말이 약간 달라지지 않을까요?”

    “시도한 패스들을 한 번도 뺏기지 않았다고요?”

    예상치 못 한 말에 스콧 캐스터의 목소리가 높아졌고, 그런 캐스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면서 키노보 해설이 설명을 계속 했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지금까지 최재혁 선수는 총 28번의 패스를 시도해 모두 성공시키고 있습니다.”

    “···!”

    “좌우, 측면, 이따금 박스로 직접 향하는 롱패스까지. 골고루 섞인 패스들이 단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군요.”

    “설마 그런···. 데이터가 잘못 된 게 아닙니까?”

    “실시간으로 저장되는 데이터지만 오차율은 소수점대 미만입니다. 데이터가 틀렸기를 기대하는 것보다는···.”

    잠시간 말꼬리를 늘리며 슬쩍 경기장으로 시선을 옮긴 키노보 해설이 작은 목소리로 되뇌었다.

    “이 점이 과연 경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지를 기대하는 편이 더 좋겠죠?”

    ***

    퉷.

    케이힐이 득점에 성공하는 순간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던 안토루가 짜증스럽게 머리를 벅벅 긁더니 잔디에 침을 뱉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한 차례 고함을 내지르더니 자신의 뺨을 툭툭 쳤다.

    그런 안토루를 옆에서 지켜보던 내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왜 그래? 이제 겨우 한 점을 뺏겼을 뿐이야.”

    “네, 맞아요. 이제 겨우 한 점을 뺏겼을 뿐이죠.”

    내쉬의 말에 수긍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 안토루였지만 얼굴 표정은 여전히 불만이 가득해 보였고, 곧 한숨을 푹 내쉬면서 내쉬를 향해 말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대체 뭘하고 있는 걸까요?”

    “그게 무슨 소리야?”

    “재혁이가 보내준 패스들을 죄다 날려먹었잖아요. 특히 박스로 바로 날아왔던 패스는 트래핑만 제대로 했어도···. 아오!”

    “!”

    “이래선 면목이 없어요.”

    “···무슨 면목?”

    평소와 다르게 투쟁심을 잔뜩 불태우고 있는 안토루를 향해 내쉬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고, 안토루는 내쉬의 두눈을 똑바로 마주보면서 단어들에 힘을 주어 답했다.

    “재혁이를 쫓아 영국으로 갈 면목이요.”

    “영국?! 너도 영국으로 이적하냐? 언제 그런 제의를 받았어?”

    갑작스레 이적에 관해 이야기를 꺼낸 안토루의 말을 듣고 내쉬가 놀라 되묻자, 안토루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뇨. 그런 제의 받은 적 없는데요.”

    “아, 깜짝이야! 이게 사람 놀래키고 있어! 난 또 너까지 영국으로 가는 줄···.”

    “제가 언제 재혁이랑 같이 간다고 했습니까? 뒤를 쫓는다고 했지.”

    “!”

    “그런데 이제 떠나버릴 재혁이가 주는 패스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있으니, 이래서야 재혁이를 쫓아 영국으로 가겠다고 어디가서 말도 못 해요.”

    그 뒤로 또 한 번 한숨을 길게 내쉰 안토루가 머리를 벅벅 긁었고, 그런 안토루를 빤히 바라보던 내쉬가 피식 실소를 흘리더니 ‘그러다가 머리 빠진다’라고 농담조로 한 마디를 던졌다.

    내쉬의 농담에 자기는 풍성해서 괜찮다고 답을 하던 안토루는 혀를 차면서 센터 서클을 향해 걸어갔고, 안토루의 옆을 따라 걷던 내쉬가 안토루의 곁에 다가가더니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치며 속삭였다.

    “적어도 나한테는 이야기 했잖아. 영국으로 가겠다고 말이지.”

    “···?”

    “난 이제 1, 2년이 지나면 은퇴를 해야겠지만, 너는 달라.”

    실점으로 멈춘 경기를 재개하기 위해 센터 서클 안에 나란히 선 내쉬가 안토루의 얼굴을 마주보면서 웃었다.

    “벌써 포기하지 마라. 아직 후반전은 시작도 안 했다.”

    “!”

    “축구는 후반전에 추가 시간까지 끝나야 비로소 끝이 나는 경기라고.”

    내쉬의 한 마디에 안정을 찾을 수 있었던 안토루가 표정을 고쳤고,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감정을 다잡았다. 조급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진정되고 비로소 경기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얼굴이 된 것이다.

    “오.”

    그런 안토루의 변화를 누구보다 먼저 알아차린 재혁이 살며시 미소를 떠올리더니 발밑에서 놀리고 있던 공을 길게 차 넘겼다.

    < 50. 아직 전반전이다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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