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돌아온 미드필더-49화 (49/225)
  • < 49. 각자의 역할 >

    시드니 FC와 맬버른 시티 FC에서 선발로 뛰게 될 선수들이 경기장으로 입장하기에 앞서 복도에 줄을 맞춰 섰다.

    다들 하나같이 집중력을 흐뜨리지 않기 위해 눈을 감고 마음을 다잡거나, 기도를 하고 있었는데, 재혁은 그들과 달리 슬쩍 고개를 들어 상대편 선수들 중 한 남자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며 두 눈을 빛냈다.

    맬버른 시티에서 등번호 17번을 달고 있는 남자.

    ‘저 사람이 팀 케이힐.’

    에버튼에서 한 때 발롱도르 후보에 이름을 올릴 정도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으며 활동해온 살아있는 호주의 전설이며, 특유의 단단한 피지컬을 앞세운 플레이 스타일로 자신만의 길을 걸어온 미드필더였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서 보다 공격적으로 플레이를 하기 시작하면서 미드필더보다는 쉐도우 스트라이커에 근접한 2선, 혹은 최전방인 1선까지 올라가 뛰는 선수가 되었지만, 그만큼 골 냄새를 맡는 득점력 하나 만큼은 여전하다는 소리였으니, 절대 방심해서는 안 될 존재였다.

    다만 재혁의 관심은 단순히 오늘 상대하게 될 케이힐이라는 선수에서 끝나는 게 아니었다.

    앞서 말했듯, 이미 EPL에서 성공을 거둔 경험이 있는 팀 케이힐이다.

    비록 지금은 머지않아 은퇴를 고민하고 있는 노장이지만, 그때의 경험이 축적된 선수를 상대로 과연 자신이 어디까지 플레이할 수 있을지, 재혁은 그 부분에 대해 궁금해 하고 있었고···.

    “네가 상대해야 할 사람을 잘 알고 있군.”

    “루아드 감독님.”

    “우리가 결승까지 너를 사용해 올라왔다면, 맬버른에선 케이힐을 이용해 올라온 거니까. 오늘 결승이 두 사람의 맞대결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사람들도 꼭 틀린 건 아니지.”

    슬그머니 재혁과 어깨를 맞추고 선 루아드 감독이 살짝 굳은 얼굴로 계속해서 재혁에게 말했다.

    “오늘 네 위치를 기본적으로 3선, 혹은 최대 수비라인까지 내려와서 맞추라고 했던 걸 잊지마.”

    루아드 감독이 결승전을 위해 준비한 전술은 4-1-3-2.

    측면은 양쪽의 풀백들에게 맡기고 중앙에서 상대 팀과 끊임없이 힘싸움을 겨루기 위해 준비한 전술이었다.

    그 중에서도 포백라인의 바로 앞을 지키는 1의 위치에서 뛰게 될 재혁을 향해 루아드 감독은 계속해서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뛰는 자리가 우리 팀이 빌드업을 시작해야 할 위치이면서 동시에 상대의 공격을 반드시 막아야 하는 위치야. 그 중요성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괜찮겠지?”

    “그러니까 공을 뺏지기 않게 수비를 해야 하면서 동시에 공격에도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는 말씀이시죠?”

    “그렇게 말하니 내가 굉장한 부담을 네게 얹고 있는 것 같군.”

    재혁의 답을 들으며 루아드 감독이 머쓱하게 웃었지만 표정에 거짓은 없었다.

    그는 진심으로 재혁이라면 두 역할을 무리 없이 소화해줄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이번 시즌 그 누구보다 기대 이상의 활약을 보여준 선수가 바로 재혁이었으니까.

    그런 루아드 감독을 마주하고 있는 재혁은 잠시간 침묵하더니 곧 어깨를 으쓱이며 답했다.

    “부담이 되진 않아요. 그래도 분신술을 써서 2명이 되라는 것처럼 허황된 요구를 하신 게 아니잖아요?”

    “누가 그런 바보 같은 요구를···.”

    “컵 대회랑 2군 경기 일정이 겹쳤을 때 코헨 감독님이 그러시던데요.”

    “···.”

    “그러니까 다른 거 없이 일단 제 역할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말씀이신 거죠?”

    역할에 충실하라.

    그 말인즉 케이힐과 중원에서 끊임없이 싸우라는 의미였고, 재혁이 자신이 한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아 루아드 감독은 재혁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뒤 먼저 복도를 빠져나가며 한 마디를 남겼다.

    “필드 밖에선 내가 감독이지만 필드 위에서 선수들을 통제할 감독은 너야. 때에 맞춰 네 생각대로 플레이 해.”

    뚜벅, 뚜벅.

    구둣발 소리를 내며 멀어지는 루아드 감독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던 재혁이 입가에 작은 미소를 띠며 웃었고, 루아드 감독이 자리를 떠나자 안토루가 슬쩍 재혁의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감독님이 뭐라고 하셨어?”

    “특별한 말씀은 없었어요. 이미 라커룸에서 다 나눴던 대화들이었죠.”

    “그런 것 치고는 꽤 진지해 보이던데.”

    “진지한 대화이긴 했죠.”

    안토루가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재혁이 씨익 웃는 얼굴로 말했다.

    “저는 제 선수들을 지게 할 생각이 없거든요.”

    ***

    3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스타디움의 반 이상을 채운 관객들이 경기장 위로 선수들이 등장하자 뜨거운 박수로 그들을 환영했다. 과연 결승전이라는 단어에 어울릴 법한 환대였다.

    다만, 그 환호성의 대부분이 시드니 FC가 아닌 맬버튼 시티 FC와 팀 케이힐을 향하고 있었다는 게 주장인 내쉬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맬버튼 시티 FC의 우승을 기원한다는 거대한 현수막을 확인한 내쉬가 미간을 잔뜩 구기면서 투덜거렸다.

    “케이힐이랑 나랑 동갑인데. 진짜 사람들도 너무하네.”

    “그럼 주장도 EPL에서 뛰고 오지 그랬어요?”

    “시끄러 임마. 내 심장은 언제나 항상 시드니에 있다고 이미 몇 번이나 말했잖아?”

    “크흠, 그건 어디까지나 실력이···.”

    “팀 동료한테 살인 태클 맞고 부상으로 실려나간 선수 본 적 있냐? 아니, 직접 경험하게 해줄까?”

    얼굴로는 서로 웃으면서 사진까지 찍고 있었지만,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한 농담을 나누고 있는 선수들을 보면서 재혁이 쓴웃음을 흘렸다.

    오랫 동안 함께 한 것은 아니었지만, 주장인 내쉬가 저런 식으로 쉬지 않고 입을 떠드는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바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슬쩍 내쉬의 옆에 선 재혁이 흘러가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주장. 긴장했어요?”

    “긴장은 무슨! 내가 살면서 이 정도 규모의 경기를 얼마나 많이 경험해 봤는데! 너희야 말로···!”

    ‘긴장한 거 맞네.’

    내쉬의 과민한 반응을 보면서 바로 확신이 선 재혁은 고개를 작게 저으면서 실웃음을 흘리더니 큼큼 목을 가다듬은 뒤 말했다.

    “하긴, 이번에는 꼭 한 번 우승 메달을 목에 걸어 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셨던 주장이 결승 무대에서 떨고 계실리가 없죠.”

    “나한테도 맨날 관중들이 2만 명 이상은 차야 공찰 맛이 난다고 하시던 분인데. 설마 떨고 계시겠어?”

    “···.”

    “분명 다른 선수들의 긴장을 풀어주시려고 애써···.”

    짜악!

    재혁과 안토루가 서로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고 있을 때, 내쉬가 두눈을 질끈 감더니 양손으로 자신의 뺨을 큰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쳤고, 수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순간 집중시켰던 내쉬가 호흡을 고른 뒤 둥글게 모여 있는 동료들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덕분에 정신이 좀 들었다. 그래, 주장이면서 내가 모범이 되어야 했는데. 미안하다.”

    “주장···.”

    “시즌 마지막 경기다. 그리고 재혁이와 함께 뛸 마지막 경기이기도 하겠지. 그런 경기를 컵 대회 결승전이라는 곳에서 치르게 되었으니 어떻게 보면 우리도 축복받은 팀이야.”

    선수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어 눈동자를 마주치는 것을 피하지 않고 뜨거운 눈빛으로 답하며 내쉬가 계속 말을 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여기서 우리는 악역이다. 맬버른에서 케이힐이 있는 팀을 상대로 싸우게 됐으니 말이지. 그렇지만 다들 지고 싶지 않잖아? 마지막까지 최선을, 그리고 결국 우승 컵을 들면서 저들이 바라던 악마가 되어 주자!”

    내쉬의 말에 선수들이 공감했는지 곧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큰 목소리로 답했고, 그런 동료들을 보면서 내쉬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그렇게 이제 진영을 찾아 이동하려고 했는데···, 멀어지려는 내쉬에게 다가간 안토루가 슬쩍 귓속말을 속삭였다.

    “그런데 주장. 양 볼따구가 손바닥 모양으로 빨간게, 정말 말씀하신 것처럼 악마같네요.”

    “···!”

    “기왕이면 뿔도 달지 그래요? 팔에 찬 완장을 머리띠 처럼 쓰면 아마 머리카락이 삐죽하게 서서 진짜 뿔처럼···.”

    “안토루!”

    냅다 달려가 안토루의 엉덩이를 한 차례 걷어 올려준 내쉬는 안토루에게 마지막까지 집중하라며 목소리를 높인 뒤 심판들에게 향했고, 자리에 주저 앉아 엉덩이를 쓸어내리고 있는 안토루를 보면서 재혁이 미소를 보이다가 감정을 다잡았다.

    선수들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한 장난은 여기까지다.

    자리를 잡고 상대편 진영을 향해 고개를 돌린 재혁은 맞은 편에서 경기를 준비하고 있는 케이힐을 노려보다가 주심의 휘슬에 맞춰 몸을 움직였다.

    ***

    과연 결승전이라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경기는 박빙이었다.

    한 쪽에서 공격을 시도하면 반대 쪽에선 어떻게든 막아내고, 턴오버가 발생하면 재빨리 역습을 시도해 상대 팀의 골문을 노리길 서로 반복했다.

    다만 그 빈도에서 점차 차이가 나기 시작했고, 전반 30분이 지났을 때 기세를 타게 된 것은 맬버른 시티 쪽이었다.

    필요하다면 3선까지, 그리고 원한다면 최전방까지 달리기를 반복하고 있는 케이힐의 공격 전개에 시드니 FC의 중원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동안 나이를 고려해 적당히 체력을 안배했지만, 오늘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다는 듯, 케이힐은 초반부터 필드 전역을 무섭게 누비며 회춘 모드가 무엇인지 사람들에게 확실히 각인 시키고 있었다.

    지금도 케이힐이 센터서클 근처까지 내려와 패스를 받아 측면으로 공을 한 차례 뿌려준 후, 곧장 전방으로 공간을 찾아 달려가면서 시드니 FC의 미드필더 한 명을 벗겨냈고, 상대 진영에 공략할 틈이 생겨난 것에 미소를 지었다.

    ‘이대로 측면에서 공만 올라오면 돼!’

    시드니 FC가 비록 중원을 두껍게 쌓았지만 측면에서 공이 하늘을 통해 넘어온다면 그 두꺼운 벽을 비껴낼 수 있다.

    케이힐은 그 점을 계속 유의하면서 시드니 FC를 공략하려 했고, 지금도 효과적으로 작용해 성공적으로 크로스가 올라오는 것을 눈에 담으면서 공을 향해 몸을 뛰었다.

    아니, 뛰려 했다.

    “?!”

    투웅!

    그보다 먼저 몸을 날려 공을 걷어내는 선수만 없었다면 말이다.

    순간 눈앞에 그림자가 드리워지더니 자신을 향해 날아오던 공은 목표를 잃고 사이드라인 바깥으로 나갔고, 케이힐은 점프를 뛰기 위해 잔뜩 긴장시켰던 근육을 풀면서 공을 걷어낸 선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간을 모았다.

    ‘시드니의 8번, 최재혁.’

    오늘 경기에서 맬버른 시티가 매섭게 상대를 몰아치고 있지만 득점을 내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저녀석 때문인 것을 기억하면서 케이힐이 입술을 비틀었다.

    아직 몸이 전부 성장한 것은 아닌지 근육량이 많진 않았지만, 기민한 움직임을 통해 필요한 순간마다 등장해 영리하게 공을 끊어내고 있는 최재혁.

    덕분에 정작 공격을 전개해도 득점 기회를 만들 만한 찬스를 별로 살릴 수가 없었던 케이힐이 답답함을 느끼며 숨을 깊게 마셨다가 뱉은 뒤···.

    “후우, 좋아.”

    머릿속을 정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생각을 조금 바꿔야 할 필요가 있는 듯 했다.

    ‘지금까지는 상대가 원하는 중원 힘싸움을 피해왔지만···, 이런 식이라면 더 이상 피해줄 수 없지.’

    “···!”

    상대 팀이 드로잉을 준비하는 동안 진영을 재정리하고 다시 한 번 수비에 나서려던 재혁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상대를 확인하고 잠시간 놀란 얼굴이 되더니 이내 작게 웃으면서 상대의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맞대면서 물었다.

    “이제 내려가는 건 포기하신 건가요?”

    “글쎄.”

    전반전 내내 정면에서 싸우기를 피하고, 공간을 공략하려던 케이힐이 정면에서 싸움을 걸어온 것에 대해 재혁이 질문을 던졌고, 그런 재혁의 얼굴을 힐끗 살피고 다시 공을 향해 시선을 옮기면서 케이힐이 답했다.

    “왠지 이쪽에서 골 냄새가 나서 말이야.”

    “어, 그래요?”

    자신이 한 말에 그저 콧등을 긁적이며 되묻고 있는 재혁을 보면서 케이힐이 피식 실소를 흘렸는데···.

    “제가 풍기는 골 냄새를 잘못 맡으신 게 아니고요?”

    “···!”

    “이번 시즌 제가 득점 제조기 소리를 듣고 있잖아요? 케이힐 선수도 한 번쯤은 들어보셨죠?”

    하하, 작게 웃으면서 지지않고 맞받아친 재혁의 한 마디에 순간 케이힐의 얼굴이 굳었다가 서서히 일그러졌다. 그러면서 재혁을 따라 웃었다.

    과연 네 미소가 얼마나 이어질지 두고 보자면서 말이다.

    그렇게 서로 짧은 신경전이 벌이던 동안 공이 맬버른 시티 선수의 손을 떠나면서 멈췄던 경기가 재개되었고.

    “이쪽으로 넘겨!”

    동료가 공을 받기 무섭게 케이힐이 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 49. 각자의 역할 > 끝

    ⓒ 권주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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